(제 7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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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하거리가 빤하게 바라다보이는 산기슭이였다. 여름해가 저물자면 아직 50리는 갈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숙영을 조직하라는 사령관동지의 말씀이시였다. 차광수는 여태 기연가미연가 하여 어정쩡해있던 자신을 꾸짖으며 속으로 혀를 찼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사령관동지의 뜻은 통화를 떠날 때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전에 소사하에서 이번 원정계획을 세우실 때부터 흥륭산기슭을 끼고 도실 생각이시였을것이다. 통화에서 곧장 북상하여 류하까지 그리고 류하에서 직각으로 꺾어져 몽강으로 이렇게 돌아서 량강구까지 간다는 행군로정이 발표되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해석한것은 이번 행군이 갓 탄생한 반일인민유격대의 위력을 시위하고 광범한 인민들속에 혁명의 씨앗을 뿌리며 그런 과정에 유격대자체도 단련강화시킨다는 당초의 행군목적으로 비추어보아 당연하다는 정도였지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았었다. 바로 류하라는 지명이 찍힌것 역시 조선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고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곳이라 그 일대로 행군한다면 의례 들려야 할 곳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령관동지의 말씀을 들었을 때부터 차광수는 그런 일반적인 해석우에 최창걸의 이름과 그가 사는 고산자마을이 류하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던것이다.

사령관동지께서 평소에 말씀은 없으시지만 최창걸의 소식을 몹시 궁금해하신다는것도 넉넉히 짐작할수 있는 일이였다. 그러니 행군도중에 미리 손을 썼더라면 지금쯤 곧장 부대를 류하쪽으로 행군시킬수도 있었을것이였다. 차광수는 자기의 소극적인 태도를 생각할 때 그이를 뵙기가 거북하였다. 그러나 벌써 몇달째 소식이 끊어진 고산자마을로 아무런 사전료해도 없이 사령관동지를 모실수는 도저히 없었다. 그는 벌써부터 초조감을 느끼며 해가늠을 해보았다. 그리고는 통화에 떨어져 며칠동안 일을 보고 방금 도착한 전광식을 불러 뒤일을 부탁하고 대렬 맨뒤에 위치한 사령부로 달려갔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마침 전령병들과 함께 부대가 멎어서있는 산기슭으로 올라오시는 길이였다.

《어떻소? 숙영할만 한데가 있을것 같습니까?》

차광수가 달려가서 경례를 하자 사령관동지께서 먼저 물으시였다.

《주민구성은 좋은것 같습니다. 〈자위단〉 몇명이 있을뿐이고 적정도 별로 없습니다. 도로변이 돼서 한 10리 산쪽으로 들어갔으면 좋을것 같아서 전광식동무에게 사람을 보내라고 말했습니다.》

《잘했소. 나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럼 숙영준비가 끝날 때까지 시간이 있는셈이군.…》

그이께서는 해가늠을 한번 해보시더니 차광수의 얼굴을 살펴보시였다. 차광수는 그이의 심중을 인차 짐작할수 있었다.

《사령관동지, 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최창걸동무한테 좀 다녀왔으면 합니다.》

《동무가?…》

사령관동지께서는 별로 놀라지 않고 되물으시더니 뒤짐을 지고 잠시 생각하시였다.

차동무가 혼자 가보겠다는 말이지요?…》

차광수는 범상하게 하시는 그이의 말씀에서 다시한번 자기의 생각이 미치지 못함을 깨달았다. 그이께서는 그것을 지극히 당연한 일로 보고계시는것이다. 하기는 어느 모로 보나 사령관동지께서 부대를 이끌고 이 방면으로 나오신 이상 꼭 들리시게 될 곳인것만은 사실이였다.

길회선철도부설반대투쟁이 있은 후 도시와 농촌의 광범한 군중속에서 정치활동을 강화하게 되였을 때 최창걸은 사령관동지의 뜻을 받들고 자청해서 류하로 떠나갔었다. 그가 수행하고있을 사업의 성격으로 보나 길림시기부터 사령관동지를 모셔온 정의로 보나 그이께서 잊으실수 없는 동무였다. 자기 역시 혁명에 갓 눈뜨기 시작했을 때부터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싸워온 잊을수 없는 정다운 사이였다. 부대에는 최창걸과 친한 동무들이 그밖에도 한둘이 아니였다. 그런것만큼 류하방향으로 행군로정을 잡았을 때 인차 사령관동지의 뜻을 헤아리고 지금쯤 고산자의 소식을 가지고 보고를 드려야 옳았을것이다. 차광수가 고개를 떨구고 이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 그이께서 웅글은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그렇게 합시다. 그럼 누구를 데리고 가서 최창걸동무를 먼저 만나보시오. 그 동무 사업하는데 도움이 되게 부대의 행동계획을 세우는것이 좋습니다. 혹시 알겠소, 편벽한 곳인데 큰 부대가 갑자기 들이닥치면 놀라는 사람들이 있을수도 있지.…》

차광수는 급히 길을 떠났다. 길림시기 최창걸이와 가까왔던 진일만이와 전령병 한사람을 데리고 처음부터 걸음을 다그쳤다.

진일만은 최창걸이와 단짝이 되여 돌아가던 사이라 벌써부터 흥분되여있었다. 최창걸이도 진일만이만 못지 않게 책을 끼고 다녔고 이야기하는데 멋을 부릴줄 알았으며 열정적이라는 측면에서는 진일만보다 한술 더 떴다. 그러다보니 제일 친하면서도 론쟁을 제일 많이 하였다.

《지금도 오가자회의때 그 친구가 막 울던 생각이 납니다.》

진일만은 차광수가 하도 걸음을 다그치는 바람에 한두걸음 떨어졌다가는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면 분주히 따라잡으며 다짜고짜로 들이대군 하였다.

《그때 운것이 어디 창걸동무뿐이요?》

차광수는 마음이 급하여 다소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참모장동무, 최창걸동무한테서 소식이 끊어진지 반년이 넘지요?》

《아마 그렇게 된것 같소. 박응천동무가 련락을 갔다가 체포된것이 지난해말이니까…》

《사령관동지께서 무척 궁금해하시는것 같아요. 한번은 내가 사령부경비를 서는데 밤이 늦도록 주무시지 않고 생각에 잠겨계시다가 밖으로 나오시더니 나더러 최창걸동무네 집안형편을 물으십디다.》

《그게 어느때 이야기요?》

차광수는 우뚝 멈추어서서 물었다. 진일만은 차광수가 놀라는 까닭이 잘 리해되지 않아 멀뚱멀뚱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박응천동무가 희생된 후이니 금년 봄이던것 같아요. 소사하에 있을 때 일이니까요.》

《왜 그런 소리를 이제 와서 하오?》

차광수는 좀 맞갖지 않은 표정으로 한마디 하고는 다시 걸음을 다우쳤다.

《그야…》

전일만은 무엇인가 변명하려고 하였으나 벌써 차광수가 저만치 멀어져버렸기때문에 입을 다물고 부지런히 따라갔다.

차광수네 일행이 고산자마을의 뒤산에 도착한것은 해질무렵이였다.

산기슭에 외따로 떨어져있는 농가에 들려 알아보니 한 10리 더 가서 한개 소대가량의 왜놈군대와 경찰이 있을뿐 부락에는 아무도 없다는것이였다. 싸리꽃이 만발한 산등에 오르니 민틋한 구릉을 량쪽에 끼고 삼태기같이 패여든 골안에 300여호 남짓한 동네가 오붓하게 자리잡고있었다.

《음- 저게 그 미루나무로구만.…》

차광수는 왼편구릉 한끝에 푸르청청 높이 솟아있는 한그루 미루나무를 발견하고 오늘 처음으로 맑은 소리를 지르며 그리로 달렸다.

진동무, 저기로 갑시다. 저 미루나무아래 옹달샘이 있을거요.》

최창걸은 자기 마을 고산자를 무척도 사랑하여 동무들앞에서 마을의 구석구석을 마치 한폭의 그림처럼 펼쳐보이군 하였었다.

때때로 연자방아라든가 오솔길이라든가 하는따위, 남이 듣기에 자랑거리가 되기 힘들것 같은것조차 아름다운 자연풍치로 윤색해내놓군 하였다.

그가 삼엄한 경계를 뚫고 자진하여 이곳을 맡아나선것은 이 마을과 이 마을사람들을 그렇게 사랑한때문인지도 몰랐다.

미루나무는 아닌게아니라 최창걸이가 자랑할만큼 우람차고 아름답고 어딘가 운명적인것을 상징해주는듯 장엄한 기상도 느껴졌다. 한여름의 해빛을 받아 한껏 두터워진 수많은 잎사귀가 노을빛을 받아 칠색으로 번쩍거렸다. 머리속에 어렴풋이 그려져있을뿐 한번도 본적 없는 그 미루나무의 터실터실한 밑둥을 그러안고 동네를 한번 내려다본 차광수와 진일만은 마음이 한껏 부풀어올랐다.

그들은 아이들처럼 달려내렸다. 오솔길 량옆에 피여있는 들꽃을 움켜훑으며 먼지발 이는 황토비탈을 한참 달려가니 억새가 무성한 벼랑굽이에 정적이 푹 가라앉은것만 같은 옹달샘이 바글바글 샘솟아서는 소리없이 흘러내리고있었다.

두사람은 우뚝 멈추어섰다.

《야- 물이 맑은데…》

뒤따라온 전령병도 번지르르한 이마의 땀을 훔치며 환성을 질렀다. 깎이여진 벼랑턱에서 잔디뿌리가 두어오리 뻗어나와서 파란 잎이 물우에 솟아있었다. 마침 물우에 떨어진 미루나무잎사귀가 조그마한 소용돌이에 말려들어서 뱅글뱅글 맴을 돌다가 물줄기를 따라 억새밭사이로 헤염쳐 흘러갔다. 누가 가져다놓았는지 이런 토산기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두개의 베개통만 한 디딤돌우에 서서 차례로 물을 마셨다. 군모채양을 뒤로 돌려쓰고 코잔등을 적시며 물을 마시고나서는 모두 하늘을 향해 시원하게 웃었다.

동구앞은 한적하였다. 멀리 들에서 들어오는 사람이 한둘 보이였다. 차광수는 일부러 걸음발을 늦추며 몇집 지나쳤다. 그러다가 마침 한집 앞에 이르니 바깥마당에서 더벅머리총각이 꼴지게를 부리우고있었다.

《말씀 좀 물읍시다.》

차광수는 어딘가 뚝뚝해보이는 청년의 기색을 살피며 우정 꺼리낌없는 큰소리로 불렀다.

《웬 사람들이요?》

청년은 낯선 옷차림을 한 세사람을 의아쩍게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뜨직하게 물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요.》

차광수는 길가에서 신분을 밝힌다는것이 이쩐지 신통찮게 생각되여 슬쩍 흘려버리고 뒤를 잇대였다.

《이 동네에 최필수씨라는분이 살지요?》

최필수란 최창걸의 아버지였다. 청년은 점점 더 의아스러운 낯색을 지었다.

최필수씨요? 있지요. 그런데 어디서 옵니까?》

《바로 찾아오기는 왔구만.》

차광수는 마음이 놓이여 이마전에 땀을 훔치며 진일만을 돌아보았다.

《그게 어느 집입니까?》

진일만이 성급하게 물었다.

《바로 이 집입니다. 그런데…》

《네?》

차광수와 진일만은 동시에 되물었다. 그리고는 두사람 다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럼 최창걸동무 있습니까? 이 집 아들 말입니다.》

진일만의 조급한 물음에 청년은 멍하니 두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매우 침울해보이였다. 차광수는 어쩐지 가슴이 옥죄여들었다.

《우리는 최창걸동무와 친한 동무들인데…》

차광수는 청년의 낯색을 주의깊게 살피며 아까부터 그가 묻던것을 자신없는 어조로 대답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이미 그런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듯이 외면하였다. 그리고는 풀기없는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형님은 없어요.》

《형님?! 아니, 그럼 동무가 창걸동무의 동생이란 말이요? 그래 형님이 어디 갔소? 내가 형님과 같이 일하던 사람이요. 어디 갔소?》

차광수는 가슴을 누르는 불길한 예감을 밀어내기라도 하듯 고개를 숙인 청년의 어깨를 잡아흔들었다.

《다 짐작했어요. 동지들은 유격대지요? 유격대가 이쪽으로 나왔다는 소식을 우리도 들었어요. 하지만… 형님은… 없어요.》

청년은 차광수에게 어깨를 잡힌채 물기어린 눈으로 차광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어떻게 된거요? 동무, 좀 똑똑히 이야기하오.》

진일만이가 참을수 없다는듯이 옆에 쐐기를 쳤다.

《형은 죽었어요.》

《뭐?》

차광수는 청년의 어깨에서 맥없이 손을 떨구었다.

최창걸이가 죽다니…그렇게 젊고 싱싱하고 생활에 대한 의욕으로 끓어넘치던 혁명적랑만가 최창걸이가 죽다니…

《아니, 그게 정말이요? 똑똑히 말하라고 하지 않소.》

진일만이가 청년의 멱살이라도 움켜쥘듯이 바투 다가들며 다우쳤다.

차광수는 석양을 받아 우듬지를 번쩍거리며 저녁바람에 흔들리는 언덕우의 미루나무를 바라보며 중얼중얼 외우는 청년의 말을 꿈속에서처럼 들었다.

《…올해 2월 스무날에… 그렇게 됐어요. 그날 어뜩새벽에 고산자공청지부에서 보낸 련락원이 왔더군요. 전날 저녁에 국민부 우파분자들이 고산자공청지부회의를 지도하는 형님을 체포해가지고 끌어갔다더군요. 그래서 조직에선 밤중에 련락을 띄웠고요. 아버지와 저는 련락원과 함께 고산자로 떠났어요. 눈이 무섭게 많이 내리던 날이였어요…》

최창걸의 동생은 말을 마무리짓지도 못한채 차광수에게 잡힌 어깨를 무섭게 떨며 흐느꼈다. 차광수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있었다. 한참 울고난 청년은 팔소매로 눈물을 닦고나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는 벌써 형님이… 국민부놈들의 손에 죽은 뒤였어요. 그놈들은 우리 형님을 학살하고는 공산당밀정이기때문에 처단했다고 말했답니다. 아버지와 전 형님의 시체를 소발구에 싣고 밤새 걸었어요. 그날부터 어머닌 몸져 누웠어요.》

에익- 개놈들.》

진일만이 당장 목갑총을 꺼내들고 누구를 쏘기라도 할듯 펄펄 뛰였다. 차광수는 그를 제지시키고는 머리를 푹 떨군채 스적스적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그저 발길이 닿는 곳으로 갔다. 가다가 서보니 어느새 언덕을 올라 미루나무밑이 아닌가. 푸른 잎을 한들거리는 미루나무를 보느라니 그의 가슴속에 꽉 차들었던 슬픔이 단번에 폭발하는것이였다. 차광수는 무릎을 툭 꿇은채 나무밑둥을 와락 부둥켜안으며 부르짖었다.

《아- 창걸이, 너 어쩌면 그리도 무정하게 간단 말이요. 이제 사령관동지께 어떻게 이 가슴터지는 소식을 전하겠소. 난 못하오. 정말 못하오. 동무도 알지 않소, 그이가 어떤 때 제일 슬퍼하고 괴로워하는가를… 김혁이 요절했을 때 터져오는 가슴을 부둥켜안고 그토록 몸부림치던 그 모습을 다 보고 다 느낀 동무가 어찌면 또다시 그런 슬픔을 그이께 가져다줄수가 있단 말이요. 창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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