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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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세봉은 전날처럼 참대문발이 내리드리운 맏웃방 문턱에 기대앉아 심각한 생각에 잠겨있었다. 어제저녁 환영연회에서 한 자기의 추사를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민망도 스럽고 다른 편으로는 일이 더 란잡스레 번지기 전에 바로잡았다는 자격지심과 자화자찬이 마음속에서 서로 물고 뜯으며 란투를 벌리고있는 판세였다.
허나 시간이 흐를수록 자화자찬의 형세가 쇠약해졌다.
지금도 자기의 연설이 끝났을 때 초대석 앞줄에 앉아있던 마을 늙은이들의 아연해진 인상들이 언뜻언뜻 나타나 그는 나서 처음으로 자기의 얼굴거죽이 무겁게 축 처지는감을 느끼고있었다.
그는 애써 유격대를 보지 않으려 했으나 그들이 모두 자기를 외면하고있던 모습만은 아직도 생생했다.
자기의 사병들도 표정은 각이했으나 못마땅하다는 빛갈만은 약속이나 한듯이 공통으로 얼굴에 바르고 자기의 사령을 쳐다보았다.
그는 연설을 끝낸 그 순간부터 자기의 처사에 대해 후회하였다.
허나 지금 생각해보면 연설을 하려고 일어난 그 순간부터 자기가 잘못하였다는것이 확실했다. 하면서도 한쪽으로는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그럴수밖에 없었다고 애써
량세봉은 혹 젊고 혈기왕성한 반일인민유격대의 모습에 가위가 눌리워 시기심이라도 품지 않았나
사실 반일인민유격대는 군사를 거느리고있는 군장이라면 누구나 탐내고 부러워할만한 군대였다. 얼마나 끌끌하고 청신한지 비온 뒤 아지를 뻗치는 대나무숲을 보는듯싶었다. 독립군은 언제한번 그런 모양을 가져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사소한 시기심이라도 품어본적은 없었고 또 품을수도 없는 그였다.
량세봉은 독립군에 대하여 생각해볼 때마다 눈앞에 한갈래의 길도 없는 험준산악이 가로막힌것 같은 생각이 불쑥불쑥 들군 하여 가슴이 아팠었다. 그는 민족주의의 기치밑에 벌리는 독립성업이 서산으로 떨어지는 저녁해처럼 기울어졌다는것을 모르는바는 아니였다. 지금은 류린석이 《왜멸복국》을 웨치며 충주성으로 파도쳐가던 19세기 말엽도 아니고 봉오골과 청산리에서 섬멸한 왜놈의 수를 천진한 마음으로 과장해가며
그러다보니 이즈음에는 백성들의 피땀이 묻은 군자금을 축내면서 독립군이 하는 일이란 왜놈을 치는 싸움이 아니라 친다고 소리만 요란스레 떠드는짓이였다. 왜놈들은 범의 열이라도 처먹었는지 날이 갈수록 포악해지는데 독립군은 가을절기의 풀대처럼 점점 무맥해지고 나약해지니 야단은 정말 큰 야단이였다.
그래가지고서야 어찌 세계 5대군사강국중의 하나라고 으시대는 왜놈들을 타승하고 나라를 찾을고. 그렇다고 대업을 이루고자 륙혈포를 차고 나선 사내대장부가 희망이 안 보인다 하여 망국노가 된 백성을 등지고 제살구멍만 찾을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막막한 생각에 잠겨 침통한 나날을 보내고있을 때 위풍당당한 반일인민유격대를 보니 배달민족의 일원으로서의 긍지가 넘치였다.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량세봉자신도 그런 모양새는 싫었지만 주위의 대다수 사람들이 반일인민유격대를 찬양만 하는지라 그들을 진정시키려는 의도에서 황참모를 꾹 눌러놓지 못하고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형편이였다. 두개의 자기가 피투성이싸움을 거듭하고있다. 하나는 무조건적으로 유격대와 통일행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하나는 그와 정반대로 주장하고있다.
그때 문득
그러면서도 불원천리 이곳까지 오신
문득 이 순간 황참모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찾아와 유격대의 동향을 알려주군 했었다.
처음에는 이쪽에서 어떤 결심이 내려지겠는지 잘 알수 없어 애매한 태도를 취하면서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을수 없다.》 또는 《유격대는 우리를 먹으러 왔다.》는 등으로 침질을 하다가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다고 본 지금에 와서 그는 단호하게 자기 주장을 들고나왔다. 그는 엄치환이 벌써 한개 중대를 선동해서 반변을 일으키고있다는 정보를 쥐였다고 하면서 만약 이런 사태를 묵인하면서 유격대와 교섭을 추진시킨다면 자기도 부대를 갈라가지고 떨어져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황참모는 그밖에도 자기가 말은 하지 않지만 이대로 그냥 나간다면 재미없는 일이 생길수 있다는 암시를 하였다. 그러나 량세봉에게 확고한것은 유격대를 결코 적대시할수 없다는 립장이였다. 시간이 얼마간 흘렀을 때 량세봉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어제저녁에 내가 한 말을 가슴에 담아두지 않기를 바라오. 이의의 뜻이 있어 그런것은 아니니 그저 겉늙은 졸장부의 망녕이라고만 생각해주오.》
《량선생이 늙다니, 웬 말씀입니까. 량선생은 늙지도 않으셨고 또 어제 망녕이 든것도 아니였습니다. 그저 한마디 말씀드리고싶은것은 몇몇의 파벌쟁이들과 공산주의자를 동일시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떠드는 말이 곧 공산주의사상도 아니라는것입니다. 전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가 말하는 공산주의사상은 애국애족에 기초한 리념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착취와 압박을 종국적으로 청산하는 공산주의자가 될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혁명의 길에 나서면서 공산주의자이건 민족주의자이건 종교인이건 모두 조선을 위하여, 다름아닌 일제에게 짓밟혀 신음하는 우리 민족을 위하여 싸워야 하며 그런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든 아무때나 손을 잡을수 있다는 확신을 굳히였습니다.》
량세봉은 아무말없이 묵묵히 앉아있었다.
그는 말을 잠간 중단하고 쓸쓸한 시선으로 문밖을 내다보다가 다시 계속하였다.
《기탄없이 말해두네만 아직 나는 모르는것이 많소. 앞으로 적절한 기회가 생기면 이번에는 내가 자진해서
《량선생의 의사대로 하십시오. 제가 이곳에 찾아온 목적이 당장에 그 어떤 언약을 받기 위한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념원은 피바다에 잠긴 우리 나라를 구원하는데 있어서 그 어떤 편견이나 오해로 하여 그것이 지체되지 말아야 한다는 그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량선생께서 잘 아시겠지만 우리들이 한시간을 지체하고 한걸음을 주저한다면 그동안에 우리 인민들은 헤아릴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되는것입니다. 앞으로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자기가 할것을 다했다고 봅니다. 우리는 량선생의 통솔밑에 독립군이 더 늘고 강해져서 일제침략자를 우리 조국강토에서 내모는데 큰 힘이 되여주기를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시간이 얼마간 흐른 뒤에 량세봉은
남만청총대회에 참가했던 청년들이 알아보았던것이다.
《
《옳소!》
엄치환이 두팔을 쳐들며 웨쳐댔다,
《
장내에 일제히 환호성이 일었다.
모두다 만세를 불렀다. 만세를 부르고나서는 박수를 쳤다.
장내가 진정될무렵에 독고령감이 집행부를 향해 올라갔다. 방 한복판과 집행부쪽에 걸어놓은 석유등은 흰 두루마기를 입은 독고령감을 뚜렷이 드러내보이였다. 그는 강낭밭둔덕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
독고령감은
《제가 먼저 찾아가 인사를 올려야 할걸 그랬습니다.》
독고령감의 뒤를 따라 피상수 어머니가 올라왔다. 평안도식으로 귀를 잡아 수건을 쓴 어머니를 최칠성이가 부축하였다.
피상수 어머니는
《어머니! 상수는 곧 일어서게 될겁니다. 일어나서 왜놈들을 복수할것입니다. 그래서 왜놈들이 없는 세상에 어머님을 모시고 옛말을 하며 살게 될것입니다.》
팔소매로 몇번인가 눈물을 훔치고나서 어머니는 입을 떼였다.
《은혜가 무슨 은혜겠습니까? 우리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뿐인데요.》
단추를 고쳐 다시던 어머님의 손과 매우 비슷한 손이
《어머니!》
《저와 함께 상수를 보러 가십시다.》
환송모임이 끝난 뒤였다.
《상처는 어떻게 처치했습니까?》
《버드나무껍질을 대고 처맸습니다. 절골이 되긴 했지만 골편이 생긴것 같진 않습니다.》
《잘했습니다. 부위가 지금 한창이군. 그런데 발목을 좀 높여주어야겠습니다.》
이틀만에 의식을 회복한 피상수는 눈을 뜨고 올려다보기는 했지만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애야, 너를 살려준
어머니는 아들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네? !》 피상수는 머리를 들고 일어나려고 한다.
《가만 누워있으시오. 움직이면 안됩니다.》
머리를 짚어보고계시던
피상수는 열이 올라 초들초들 마른 입술을 놀려 간신히 불렀다. 가슴이 높이 오르내렸다.
《무엇을 좀 자셨습니까?》
피상수는 무엇부터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몰라 입술만 떨고있었다.
《글쎄 피투성이가 된 옷을 이렇게 알뜰히 손질해왔습니다.》
《이제 곧 나올것입니다. 어서 나아서 저 옷을 다시 입고 또 싸워야 합니다.》
《있구말구요. 가만 누워서 치료를 잘하십시오. 곧 나을것입니다.》
피상수는
지휘부로 돌아오신
환인, 흥경, 청원쪽에도 사람이 갔었고 그곳에서 또 오기도 하였다. 압록강지구에 유격대를 내올데 대한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였다. 몽강에 있는 구국군들과도 련계가 잘 이루어졌다. 광범한 지역에서 정치사업을 벌린 결과 어데서나 유격대를 알게 되였다.
다음에는 류하에 가야 하였다. 류하는 카륜회의를 전후해서 전국에 정치공작원을 파견할 때 그곳에 집을 두고있던 최창걸이 자청해서 가있는 곳이였다. 한동안은 일이 잘된다고 련락이 왔었는데 안도로 나오면서 소식을 모르게 되시였다. 차광수와 함께 마당을 거니시던
《우리를 무장해제시키려고 한단 말이지.》
《최참모는 어떻습니까?》
차광수는 줄당콩넝쿨이 기여올라간 싸리바자를 등지고 서서 나직이 말하였다.
《매우 적극적입니다. 손을 잡는다 어쩐다 하지 말고 아예 하나로 합치는것이 어떤가고 합니다.》
《그건 지나친것 같습니다.》
《량세봉은 변함이 없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그는 앞으로 우리를 찾아오겠다고 했습니다.》
《차동무! 민족주의운동은 바야흐로 림종을 겪고있습니다. 급격히 세개의 갈래로 흩어져나가는중입니다. …》
의미심중한 말씀에 차광수는 귀를 기울였지만
어느새 밤이 들고 마당 한켠에 있는 각담에서 풀벌레가 유난히 울었다. 약간 차지 못한 열사흘달이 구름속을 급히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