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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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동천의 장의식이 있은 며칠후 어느날이였다.
해질녘이 되여 군중이 모이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자 리광이와 박기남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마을뒤로 올라갔다. 그들은 어깨를 맞대고 걸으면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마을뒤 밤나무가 몇그루 서있는 잔디언덕에 수백명 군중이 모이게 되였다.
반제동맹책임자 현기택이 멍석을 내다펴고 오는 사람들을 차례로 앉히였다. 부녀회책임자 곱단이는 낭자를 틀고 비녀를 꽂았는데 얼굴이 활짝 붉어져서 올라오는 아낙네들을 안내하였다.
《회장아주머니, 혁명군중이 이렇게 많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
현기택은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상고머리를 돌려 회의장을 둘러보았다. 아닌게아니라 한 300명은 실히 되였다.
《개울이 모여서 큰 강이 된셈이지요.》
적절한 비유를 써버린 곱단이의 뒤모습을 바라보면서 현기택은 수염이 꺼먼 입술을 들어 만족하게 웃었다.
《아무데나 섞어앉으세요. 이런데 와서까지 남녀유별이다 뭐다 하는 봉건을 그냥 하겠나요.》
곱단이는 한군데 몰킨 아낙네들을 끌어다가 자리에 고르롭게 앉혔다. 처녀들도 많이 오고 허리가 굽은 늙은이들도 지팽이를 짚고 올라왔다. 리광이와 박기남은 길목에 서서 로인들을 맞아들였다. 마을의 좌상인 강로인이 나타났다.
허연 수염이 가슴우에까지 드리웠다. 여든둘이지만 아직 건장하여 채머리를 흔들기는 하였으나 언덕을 거침없이 올라왔다.
《공산주의를 어떻게 하는가 구경을 왔소.》
리광이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하자 강로인은 게슴츠레한 눈을 쪼프리며 웃었다.
《할아버지, 오늘은 역적놈을 재판합니다.》
《오, 그렇다는 말을 우리 애한테 들었소만. 어느 놈이 역적인고?》
《아들놈이 저 룡정거리에서 긴 칼을 차고 왜놈의 개질을 하는 최덕만이 있잖습니까?》
《오, 그래 그런놈은 3대를 멸하얍지. 망나니를 불러다 릉지처참을 해야 하느니. 그놈이 글쎄 다 먹게 된 밀밭에 불을 질렀다지. 에익, 고현놈! 그놈이 빚값으로 우리 집 문고리에 뻘건 딱지를 붙였던 놈이요. 그래 내 한명에 그놈 망하는 꼴을 보구야 숨진다 했지. 헌데 젊은이, 이런걸 혁명이라구 그러나?》
《네, 말씀이 옳습니다. 혁명입니다.》
《난 우리 아이가 혁명, 혁명허면서 밤낮 돌아만 다니기에 이전에 의병들 허듯이 그렇게 하는줄 알았지.》
《총메고 왜놈들 하구 싸웁니다.》
《옳거니, 옳거니. 섬오랑캐 왜놈들이야 죄다 없애얍지. 자네 〈시일야방성대곡〉이란 말 들었겠지? 나두 그때 주먹으로 땅을 치며 대곡을 했어. 이젠 다 늙어 저승에 오락가락허지만…》
강로인은 리광이 끄는대로 군중들이 모인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번에는 곱단이가 동천의 어머니를 안내하였다. 동천의 어머니는 아래우 흰옷을 입고 흰수건을 머리에 썼다. 이제 마흔여섯인데 퍽 겉늙은 편이였다. 아들을 잃어서 그런지 눈굽에 눈물이 괴여 벌겋게 짓물었다. 동천의 어머니는 곱단이가 끄는대로 멍석을 깔아놓은 맨앞에 가앉았다. 동천의 동생 광천이가 어머니와 함께 앉았다. 올해 열다섯살 잡힌다는 광천이는 며칠사이에 어른처럼 의젓해졌다. 그는 어제 리광을 찾아와 원쑤를 갚겠다면서 유격대에 받아달라고 억지를 썼다. 자리를 잡은 후에 동천의 어머니가 왔다는것을 알게 된 리광은 곧 찾아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였다. 동천의 어머니는 리광이 위로의 말을 하는대로 듣고만있을뿐 별다른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말대답을 하거나 손을 들어 귀밑머리를 이따금씩 쓸어넘기는것이였다.
회의가 시작될무렵에 적위대원 두명이 최덕만이와 그의 아들 안경쟁이 최일호를 끌고 군중앞에 내다앉혔다.
최덕만은 올해 쉰네살인데 몸이 좋고 키가 알맞춤하였다. 며칠동안 저희가 살던 집 고방간에 갇혀있어서 눈이 쑥 들어가고 회색세루바지가 온통 먼지투성이 되였다. 항상 반반하게 밀고다니던 수염은 잔뜩 자라서 턱이 꺼멓게 되였고 대머리져서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은 보기 흉하게 헝쿨어져있었다. 배가 고파 무엇을 먹는것인지, 누구를 입속으로 욕질을 하는것인지 입이 계속 흐물흐물하였다. 최덕만의 둘째 아들 최일호는 남양에서 큰 포목상을 벌려놓고있었는데 자기 형의 지시를 받고 여기서 아버지를 빼내기 위해 나타났던것이다. 모든 책략은 형이 꾸미고 그는 그것을 집행하였다. 그가 동천이를 향해 발사한 총도 떠나는 날 형이 내준것이였다. 군중앞에 이르자 최덕만은 아니꼬운 낯을 짓고 퍽 돌아앉았다.
《군중을 향해 마주앉아!》
적위대원이 총가목으로 등을 툭 건드렸다.
최덕만은 꾸물거리다가 하는수없이 돌아앉았다.
《건방지게 놀지 말고 어서 무릎을 꿇어!》
적위대원이 이번에는 발로 그놈의 정갱이를 내찼다.
붉은 실이 인 최덕만의 눈이 맞갖잖게 올려다보자 그 청년은 또 한번 발길질을 해서 기세를 꺾어놓고야말았다.
《세상이 달라진줄 아직 모르겠느냐?》
회의가 시작되였다.
박기남이 나서서 최덕만을 군중심판에 붙인다고 선언하였다. 뒤이어 리광이 최덕만의 죄행에 대한 간단한 보고를 하였다. 최덕만은 함흥에 본집을 두고 10년전에 순 돈벌이를 위해 이곳에 나타난 놈으로서 얼마 안되는 땅을 사서 소작을 주고는 경찰과 교제해서 강다짐으로 농민들의 땅을 앗아내였다. 차차 포만해지기 시작한 그놈은 아들이 경찰서에 있는것에 등을 대고 인민들앞에 악랄하고 가혹한짓을 하였으며 이곳 혁명조직을 밀고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십정보의 토지를 가지고 악착하게 소작인들을 착취하였다. 앙양되는 군중들의 혁명기세에 극도의 적개심을 품게 된 이놈은 아들과 함께 달아나면서 다 익은 밀밭에 석유를 치고 불을 달았다.
근처에 있는 우물에다는 나무등걸을 처넣어 드레박을 넣지 못하게까지 하였다. 이렇게 해놓고 불을 끄러 모이는 틈을 타서 감쪽같이 빠져나가려고 하였다.
리광은 이런 정도로 죄행을 말하고나서 군중들의 토론에 붙이였다.
그는 이미 예정하던대로 왕청지구유격대가 활동을 개시했다는것을 선포하는것과 동시에 이 지구를 유격대가 장악하고 일제가 세웠던 반동적인 질서를 전부 청산하며 이제부터 인민자신이 모든것을 결정할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최덕만을 인민들이 심판하게 된다고 첨부하였다.
박기남이와 리광이 그리고 조직책임자들인 현기택이, 박춘경이, 곱단이들이 산등성이쪽 집행부에 앉았다.
한 10분동안 장내는 아무런 기척도 없다가 한 청년이 손을 들고 일어났다. 박기남이 일어서서 이름을 묻자 그는 황가촌에 사는 한성남이라고 하였다. 스물대여섯살난 몸이 다부지고 눈이 큰 그 청년은 자기가 최덕만의 머슴이라고 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저도 여러분들앞에서 재판받아야 할 나쁜 놈입니다. 저놈들이 도망을 치는데 이사짐을 실은 달구지를 제가 끌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군중들이 떠들어대며 여기저기서 주먹을 들고 일어났다. 오래 토론할것 없이 끌어내다가 돌탕을 쳐죽이자고도 했고 팔다리를 묶어서 설매가 빠진 그 우물에 거꾸로 처넣자고도 하였다. 사지를 찢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목을 매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회의는 질서를 잡을수 없게 되였다.
리광은 자유롭게 토론을 시키면서 군중들을 계급적으로 각성시키며 반일기세를 높이는 방향으로 회의를 끌어나갔다. 군중들이 한창 떠들고있을 때 장내를 헤가르고 강로인이 걸어나왔다. 머리가 흔들흔들하여 가슴에 드리운 수염이 꼬리를 저었다. 최덕만이앞에 이른 강로인은 한쪽발을 들고 건덩건덩 몸을 흔들었다. 땅우에 짚신짝이 떨어지자 그것을 집어들고 최덕만을 향해 다가갔다. 짚신짝은 몹시 흔들리면서 머리우까지 올라갔다가 천천히 최덕만의 희멀쑥한 얼굴에 내려졌다. 다음에는 빗나갔고 그다음것이 고개를 돌리는것과 일치되여 그놈의 코등에 가 맞았다. 《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최덕만은 고개를 들었다가 무릎새에 틀어박았다.
《아프냐? 이놈! 아프기야 뭘 그다지 아프겠니. 허나 난 좀 쳐야겠다. 앙갚음을 해야겠다.》
강로인은 입술을 사려물고 그놈의 곱슬곱슬한 머리를 움켜쥐였다. 앞으로 당겼다가 모로 제끼자 그놈은 땅에 나자빠졌다. 강로인은 흙묻은 발로 그놈의 굵은 목을 꽉꽉 내리밟았다.
한참 그러다가 강로인도 맥이 없어 땅에 주저앉고말았다.
강로인은 앉은자리에서 군중을 향해 웨치기 시작하였다.
《내 아들을 저놈이 잡아다 죽였소. 저놈은 왜놈과 같은 놈이요. 우리 조선이 저런 놈때문에 망했소. 저런 놈이 왜놈의 끄나불이 돼서 나라를 팔았소. 왜놈은 왜놈이려니와 저건 조선사람가죽을 쓰고난 망둥이요. 저놈을 쳐죽여라, 저놈을!》
시간이 갈수록 군중들의 기세는 높아만 갔다. 토론자들은 최덕만이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억압과 굴욕과 학대를 규탄하였다.
《하! 세월이 달라졌구만!》
담배대를 물고있던 늙은이들이 눈앞에서 벌어지고있는 현실을 보고 감탄을 하였다.
《혁명만이 자유와 권리를 가져온단 말이 이런걸 두고 하는 말이지.》
청년들이 주먹을 쥐고 들먹거렸다.
《억눌려 사느니 죽는 한이 있어도 싸워볼판이다.》
《혁명 만세구나!》
몇시간동안 토론도 하고 규탄도 하고 분노를 터뜨리기도 하였다. 결말은 매우 간단하였다. 리광이 일어나 짧게 한마디 하였다.
《여러분! 우리 반일인민유격대는 우리 강토에서 일제의 마지막 한놈을 없애치울 때까지 싸울것입니다. 오늘은 일제의 끄나불 최덕만이와 그 아들놈을 심판하지만 앞날에 우리는 일제를 놓고 심판을 내릴것입니다.
리광은 자리를 비키며 손을 쭉 펴서 유격대원들이 정렬해선쪽을 가리키였다.
군중들속에서 박수가 터졌다.
다시 자리에 돌아온 리광은 하던 연설을 계속하였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보시는것처럼 혁명의 편에 서서 싸워야 우리는 자유를 찾을수 있고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수도 있는것입니다. 모두다 반일인민유격대를 도와 나라를 찾는 싸움에 나섭시다.
군중들속에서 환호성이 일었다. 리광은 이미 준비했던 연설의 순차를 잊어버리고 생각나는대로 말을 번져나갔다. 말재주가 별로 없었던 그는 혹간씩 필요이상 반복하기도 하고 더듬기도 하였지만 심장에서 우러나오는것을 그대로 내뿜었다. 군모를 움켜잡은 그는 손바닥으로 땀을 훔쳐가며 목청껏 고함을 쳤다.
군중심판 마지막순서는 박기남이 담당하였다. 빛나는 눈으로 사람들을 한번 둘러본 그는 가슴을 쑥 내밀고 대담하게 한마디 던졌다.
《일제의 주구이며 악질지주인 최덕만과 그의 아들 최일호를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하는데 찬성하시는분들은 손을 드십시오.》
일제히 주먹을 쳐들었다.
《좋습니다. 손을 내리시오. 반대하는 사람 있습니까?》
한사람도 없었다.
《그러면 여러분의 의사대로 이놈들을 사형에 처하기로 결정짓습니다.》
장내가 또 한번 술렁거렸다. 그때 동천의 어머니가 일어섰다.
박기남은 군중들을 향해 조용하라고 소리쳤다.
장내는 물뿌린듯 고요해졌다. 동천의 어머니는 귀밑머리를 쓸어넘기고나서 잠시동안 고개를 숙인채 무엇인가 생각하다가 이윽해서야 고개를 들었다.
동천이 어머니는 두손을 가슴에 붙이고 나직이 말하였다.
《동네 여러분네들, 한마디 할말이 있습니다. 올해 스무살잡힌 내 아들 동천이는 왜놈들 총에 맞아 저기 저 언덕에 묻혔습니다. 그 애 아버지도 부대를 일구다가 왜놈들한테 잡혀가 매를 맞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동천이는 저 최덕만이네 머슴을 살았지요. 그건 여러분이 다 보아 알것입니다. 눈이 오고 바람이 부는데 토스레홑잠뱅이 하나를 입고 오돌오돌 떨면서 산에 가 나무를 해왔습니다. 그걸 보고도 난 〈애야, 어떻게 하든 부지런히 일해서 주인의 눈밖에 나지 말아라. 네가 잘못하면 우리 네식구는 다 굶어죽는다.〉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지나고보니 세상은 그런것이 아니였더군요. 동천이가 죽기 전날입니다. 그애가 창을 벼려메고 집에 들렸댔습니다. 그때 저 구미호같은 놈이 찾아왔습니다. 동천이는 저런 놈을 다 잡아없애치워야 좋은 세상이 온다고 했습니다. 유격대어른, 소원입니다.
어머니는 무슨 말인가 더 하려다가 숨이 차서 그만 앉아버렸다.
어머니의 말이 어떻게나 사람들의 심금을 틀어쥐였는지 장내에서는 한참동안 높은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다가 폭발하듯이 《옳소.》하는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어머니의 소원대로 해줍시다.》
그것은 주먹을 불끈 쳐든 야장쟁이 학춘이의 거쉰 목소리였다.
군중들이 모두 그렇게 하자고 고함을 질렀다. 박기남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장내에 선언을 하였다. 동천의 어머니는 옆에 앉았던 둘째아들 광천의 등을 떠밀어 내보내였다. 베적삼소매가 팔굽까지 달려올라간 광천이는 짚신발로 성큼성큼 리광이앞으로 나갔다. 광천의 손에는 형이 쓰던 날창이 들려있었다.
적위대원들이 최덕만이를 일으켜세웠다.
리광이가 보총을 가져다 광천의 창과 바꿔주었다. 그 총은 동천이가 숨지면서 한번도 쏴보지 못해 원통하다던 그것이였다.
그들이 등성이너머로 사라진 얼마후에 두방의 총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