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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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명은 그렇게 할수 있다고 쾌히 승낙하였다. 그런 후에 그들은 장소와 조건들을 마련하는데 착수하였었다.
《여기 좀 볼일이 있어서 오늘 왔다가 이 정옥동무를 만났습니다.》
목이 가늘고 어깨가 올라간 백광명은 음울한 눈으로 상대편의 기분을 읽으려 하였다.
박기남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짐을 지고 방안을 왔다갔다하였다.
《백선생님은 어느 학교를 나왔습니까?》
《네, 뭐별로… 문과계통에 좀…》
《아하, 문학가이시군요. 인테리가 혁명을 한다? 그렇게 되였군요. 그래 집에서는 무엇을 합니까?》
《네…》
대답은 하였지만 명쾌하게 설명하기가 가빠졌다. 공연히 얼굴이 확 달아오르면서 입귀가 바르르 떨렸다.
《우리 부친께서는 땅이 좀 있고 과수원이 있는데 지금은 자그마한 공장을 하나 경영하고있습니다. 늘 병으로 누워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이때 박기남의 뇌리를 강하게 친것은 부르죠아인테리라는 그 계급적규정이였다.
그는 갑자기 가슴이 무죽해지는것을 느끼면서 말을 이어대였다.
《그런데 무엇때문에 생사를 판가름하는 이 마당에서 우리 편으로 오려는것입니까?》
그는 《우리 편》이라는 대목에 힘을 주었다.
《그것은 저의 신념에서 온것입니다.》
백광명은 고개를 번쩍 들면서 결연한 태도를 보이였다.
《혁명이 백선생에게 무엇을 줄수 있는지 생각해본적이 있습니까?》
《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혁명은 저에게 희생을 요구할수도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망국지운에 처한 우리 조국을 해방시키는데서 제가 다소나마 도움이 될수 있다면 저는 기꺼이…》
《아, 그렇습니까?!》
박기남은 붉은 기발앞으로 나서며 손을 들어올리였다. 그에게 이런 동작이란 드문것인데 그것은 결심이 지어졌다는것을 의미하였다. 그것을 본 정옥은 이마에 내리드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면서 방긋이 웃었다.
백광명의 도수 높은 안경알이 번뜩 빛을 내였다. 그러나 이들은 박기남이 정반대의 결심이 지어지고있다는것을 알지 못했다.
《정옥동무! 우리 이렇게 하지 않겠소? 우리는 지금 유격대를 내오고 일정한 지역을 확보하는것이 초미의 문제로 되고있소. 이를 위해서 지금 우리는 피를 흘리고있소. 그런데 동무가 제기한 아이들의 학교문제 그것도 역시 중요하기는 하오. 그런데…》
금시 정옥의 눈에 눈물이 가랑가랑하더니 고개를 숙이고앉아 입술을 깨물며 고름끈을 꼬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우리 형편이 지금 어떤가? 우리는 에, 우리는 말이요, 이제 뒤산에 올라가 한 유격대원의 시체를 묻어야겠소. 알겠소? 이 한가지 사실만 알수 있다면 모든것이 리해될거요. 찾아와 고맙소. 그런데…》
박기남이 말하고싶은것은 정황이 긴장하다거나 정옥의 제의가 부당하다는 그것이 아니라 부르죠아인테리를 무엇때문에 혁명의 깨끗한 품속에 끌어들이겠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때도 그딴에는 심각히 새겨둔 이른바 20년대초의 피어린 교훈을 상기하는것이였다. 그렇지만 그는 서툴게 단방치기로 거절하거나 딱 잘라매지 않고 매우 유하고 기분좋게 물리칠 생각을 하였다.
《백선생! 그렇게 하십시다. 까놓고말하면 선생이 우리 어린것들의 교양을 담당하느냐 마느냐 그런 문제가 아니라 방금 말씀하신대로 한 부르죠아인테리를 우리가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그런 문제와 관련되는 것이기때문에 우리에게 좀 생각할 여유를 주십시오.》
《아, 그렇습니까?》
《우리 맑스주의자들은 자기들의 립장을 선언하는데 주저한적이 없고 또 자기들의 당성을 언제나 공개적으로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립장의 명확성과 행동의 철저성을 주는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립장은 철두철미 프로레타리아적이며 시초도 종말도 그렇게 모든것이 귀결될것입니다. 나는 이제도 산등에서 우리 파견원동지와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지금 혁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 위치로!〉하고 구령을 치고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이 골짜기에만도 하루에 몇집씩 이사를 오기도 하고 또 떠나기도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사를 간다, 몇사람이 달구지에 짐을 싣고 떠났다, 혹은 왔다, 이렇게 되는것이 아닙니다. 대동란이라는 시대의 거대한 채판은 사정없이 흔들리면서 조선이라는것을 선별하고있다고 보아야 하는것입니다. 채불을 빠져나가는가, 걸리는가를 보고있습니다. 만약 여기서 빠져나갈것이 걸려있다든지 걸려있어야 할것이 채불을 뚫고 내려간다면 그것은 심한 외곡이며 비정상이며 불합리한것입니다.》
백광명은 담배를 피우다가 개껴서 기침을 하였다. 눈물이 글썽해진 얼굴을 돌려 동굴동굴 덩이가 져서 떠있는 담배연기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때 소사하에서
하지만 그의 신념은 좀처럼 후퇴할것을 바라지 않았다.
백광명은 다시한번 안경을 손끝으로 밀어올리고나서 얼굴이 붉어진 박기남을 향해 결연하게 한마디 던지였다.
《미안합니다만 한가지 묻겠습니다.
《네.》
박기남은 이때 얼굴이 대번에 자주빛으로 변하였다. 내키는대로 한다면 《너는 밀정이다!》하고 크게 고함을 지르며 권총을 뽑아들것이였지만 초인간적인 인내력을 가지고 용케 그 순간을 참아넘기였다. 흥분할줄도 알았지만 자기를 자제할줄도 아는 박기남은 숨을 헐떡거리며 방안을 왔다갔다하였다. 그러다가 심한 은유적방법으로 저편을 떠밀치려들었다.
《백선생! 매우 미안합니다만 다시 만납시다. 오늘은 딱한 사정이 있어서 오래 말씀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바쁘시지 않으면 며칠 있다가 반혁명분자에 대한 군중심판이 있는데 그 구경이나 하고 가시지요. 반혁명을 청산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뵙겠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 저를 불러주십시오.》
백광명은 귀바퀴를 감고 돌아간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넘기고나서 서너걸음 뒤걸음질해 밖으로 나갔다. 박기남은 자기가 무례한
마당에서 정옥이가 박기남의 앞에 막아서서 고개를 숙이고 오돌찬 목소리로 말하였다.
《전 어떤 일이 있어도 아이들에게 글을 배워주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소. 동무의 성의를 다 받아들이겠소.》
정옥은 그 한마디 말로 지금까지 해온 박기남의 일체를 반대하였지만 박기남은 그런 기미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서 가보우. 혁명은 동무가 생각하고있는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고 순탄하지 않다는걸 이제 알게 될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