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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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심각한 생각에 잠겨 천천히 산마루를 향해 걸었다.

생활의 파도는 높이 솟구쳐올랐다가는 내리꼰지군 하면서 사납게 기슭으로 밀려들었다. 리광이와 박기남이 동굴속에 마주앉아 서툴게 그려진 략도우에 커다란 원을 그려놓으면서 그것을 하나의 해방지구로 만들어야겠다고 한 이 왕청지구에 뜻하지 않은 사건이 끊임없이 교차되여나갔다.

숨이 진 동천이가 들것에 누워 마을 한복판으로 들어오는가 하면 새 마을 아래견으로는 이사군들이 매일 물밀듯이 흘러들었다. 혁명군중들은 밤이나 낮이나 가리지 않고 길로, 산으로 혹은 숲으로, 근거지로 찾아들어왔다.

매일같이 사람들이 불었다. 그런가 하면 또 반대쪽으로 달아나는 놈들도 있었다. 그것들은 대개 일제의 앞잡이인 악질지주이거나 경찰이나 적통치기관에 복무하는 악질관리들의 가족들이였다.

《준엄한 생활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진통이 없이야 어떻게 고고성을 들을수 있겠습니까. 리광동무! 나는 이런것을 생각해봤습니다. 혁명은 우리 조선사람앞에 이렇게 명령하고있지요. 〈각자는 자기 위치로!〉, 이렇게 말입니다. 각자는 자기 계급, 자기 처지가 지시하는대로 서둘러서 혁명의 파도를 타고 흐르고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혁명의 편으로 오고있으며 극히 적은 부분은 반혁명의 편으로 가고있습니다. 〈인생의 기로〉라고 말해도 좋을것입니다. 리광동무 생각엔 어떻습니까?》

원래 과묵한 리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수 없게 고개만 끄덕이였다. 하긴 말을 할만 한 계제도 못되였다. 동천의 묘지를 정하기 위해 그들은 산에 올랐다가 우연히 마을을 내려다보며 말하게 되였던것이다.

감성생활에서는 그도 박기남이만 못지 않게 풍부하고 다양한 세계를 가지고있었으나 그것을 좀체로 입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는 주의깊게 앞을 내다보거나 혹은 땅바닥을 내려다보면서 이 땅에 미쳐오는 대변화를 예리하게 감각하였다. 혁명과 반혁명이 한 지점을 계선으로 끝을 맞대고있는 그 첨단에 자기들이 서있는것이다. 여기서 상반되는 두 힘이 충돌을 일으키고있으며 두 리념이 혈전을 벌리고있다.

사령관동지께서 말씀하신 강화도 정전도 없는 결전이 바야흐로 시작되였고 그 처절한 장면이 눈앞에 벌어지기 시작한것이다.

《아! 내 총! 이걸 한번 쏴보지도 못하고…》하던 동천이의 마지막말이 이 처절한 싸움의 일단을 반영하면서 아직 귀에 쟁쟁 울리였다.

박기남은 정색해진 리광의 얼굴을 쳐다보며 불쑥 왕청같은 말을 꺼내였다.

《난 요새 꼼뮨과 쏘베트를 연구해볼 생각을 하고있습니다.》

쏘베트를요?》

《그렇습니다. 낡은 제도를 청산한 다음에는 그를 대신하는것이 있어야 하니까요.》

뜻밖이라는듯이 리광은 옆에 붙어선 박기남을 한번 흘깃 돌아보고는 싸리꽃을 한줄 흩어 앞으로 획획 내뿌리며 걸어갔다.

박기남은 장황히 그 까닭을 설명할수 없는것이 못내 안타까왔다. 단순하게 던진것 같은 그 한마디 말은 깊은 뿌리를 가지고있었다. 그는 이른바 20년대초 조선의 공산주의운동을 기회가 있을적마다 비판하였다. 조선혁명이 부르죠아혁명이기때문에 부르죠아들이 령도권을 가져야 한다는것과 혁명적기분에 들뜬 류행식맑스주의자들 즉 소부르죠아인테리들에게 큰 문을 열어주어 대렬을 오가잡탕을 만들었던것을 극도의 협오감을 가지고 대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의 견해는 항상 그들과 반대편에 있다는 립장을 취하였다. 그는 최근에 정권형태로서의 쏘베트에 대하여 커다란 매혹을 가지고 대하였고 동시에 혁명대렬내에 그 저주할 인테리들이 끼여들가봐 항상 전전긍긍하였다.

《사회주의-쏘베트.》

그는 다시 입속으로 한번 외워보았지만 그것을 이 자리에서 구태여 설명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리광은 이때 걸음을 멈추고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그의 뇌리를 치고 한가닥 처절한 감정이 일어났다, 리동천의 희생은 순전히 자기의 과오에서 온것이라는 뼈저린 자책이 또 머리를 든것이다. 김일성동지께서 이미 소영자령에서 전투조직에 대한 훌륭한 시범을 보여주시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확한 정찰자료와 조잡한 행동으로써 종당에는 귀중한 전우를 잃게까지 만든것이였다. 하지만 이미 그것은 돌이킬수 없는 과거로 되였다.

리광은 얼빠진 사람마냥 멍청히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다가 아래다리를 휘청휘청 꼬아디디면서 다시 걸음을 내뗐다. 그는 리동천이 숨을 거둔 때부터 아주 딴사람처럼 달라져갔다. 말이 더 적어져서 침울하다 할 정도로 과묵해졌고 항상 발끝을 내려다보면서 걸음을 걸었다. 그의 가슴속에 강하게 자리잡은것은 매사에 용의주도한 타산과 계획이 있어야 하며 치밀한 조직사업이 안받침되여야 한다는 굳은 신념이였다.

하지만 박기남은 그와 반대방향으로 번져나갔다. 리동천의 희생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가슴을 치며 서러워하였지만 다른 일에 대해서는 더 대범하고 거칠어졌다. 그의 입에서는 더 자주 《독재》다, 《타격》이다 하는 말이 나왔고 항상 지나칠 정도로 문제를 세우고 과도하게 정열을 내뿜군 하는것이였다. 박기남은 방금 화제에 오른 문제를 리광에게 어느 정도 납득시켜볼가 하다가 그만두고 딴 문제로 돌려버렸다.

《군중집회는 언제쯤 하겠습니까?》

《며칠내로 인차 합시다.》

《오래 끌것 없이 전부 해치우는것이 어떻습니까?》

《보복을?》

《공산주의자들에게도 복수심이 그 누구만 못지 않게 있다는걸 보여줄 필요가 있지요.》

《누구에게 보여준다는거요?》

《력사앞에 말이지요.》

박동무, 침착해야 하겠소.》

중대부에 이르자 곧 박기남은 방안으로 들어가고 리광은 보초순회를 떠났다.

박기남은 리광의 말에 질려서 약간 우울해졌다. 까밝히지는 않았지만 《너는 좌경적이다.》하고 비웃는듯 한 그의 내심이 강하게 울려왔던것이다. 리광이 별로 긴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박기남은 공연히 속이 황황해났다.

중낮이 되였을가 한 때에 낯설은 손님이 찾아왔다. 은테안경을 끼고 색날은 백세루 홑섶양복을 입은 30안팎의 청년과 기껏해야 열예닐곱 났을가말가한 단발머리처녀였다. 그들은 리광동지를 찾아왔다고 하였으나 마침 그는 황가촌으로 순찰을 나간 때여서 박기남이 만나게 되였다. 은테안경의 청년은 여기서 약 50리 상거한 사립학교의 교원 백광명이라 했고 단발머리처녀는 큰골의 김정옥이라고 하였다. 박기남이와 마주앉은 그들은 방안에 드리운 붉은기와 조선지도를 바라보면서 한동안 어리둥절해있는듯 하더니 말을 떼였다.

《저는 아동단생활에서 곤난한것이 있어서 몇가지 제기하러 찾아왔습니다.》

《어서 말씀하시오.》

이미 짐작했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박기남은 여유있게 응하였다.

《저는 지금 큰골 〈토벌〉때 부모를 잃은 고아 열네명을 데리고있습니다. 그 애들에게 공부를 시켰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에 오신 백광명선생이창촌에서 학교선생을 하고계시기에 모셔왔습니다.》

《그래서 요구조건은 뭐요?》

박기남은 리광이가 이 집을 학교로 썼으면 좋겠다던것을 피뜩 생각하며 웃여보이였다.

《요구조건은…》

정옥은 혀끝으로 입술을 한번 감빨고나서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백선생님은 사립학교에 39명의 학생이 있다고 합니다. 그곳도 〈토벌〉이 있을것이니까 이곳에 옮겨와서…》

《오! 그러니까 백선생을 여기 모셔다 그 사립학교와 합치자는거요?》

《그렇습니다.》

《그렇다? 그건 좀 간단하지 않은 문젠데.》

구레나룻이 한벌 자라오른 턱을 썩썩 문지르면서 그는 눈을 가늘게 떠서 약간 능청스러운 낯을 지었다.

정옥인 그렇고, 백선생님은 왜서 여기로 오자고 하십니까?》

손가락으로 흘러내린 은테안경을 밀어올리고나서 백광명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네, 별로 리유란것은 없습니다.》

그는 경위를 간단히 설명하였다.

정옥이 백광명이 있는 학교에 처음 찾아간것은 벌써 한달이 넘었다. 큰골 《토벌》이 있은 후에 고모네 집을 찾아간 동생 첫째를 통해 그곳에 학교가 생겼다는것을 알았다. 그후 정옥은 어린아이들에게 공부를 시킬 생각이 있어서 첫째와 함께 백광명을 찾아가 만났던것이다. 정옥은 자기네한테 부모잃은 아이들이 10여명 있는데 수고스럽더라도 백광명선생이 그 애들까지 한데 합쳐서 배워줄수 없겠는가를 의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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