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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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추 산으로 올라갈가 하다가 우정 마을로 들어갔다. 딱히 볼일은 없지만 한바퀴 돌아볼 작정인것이다. 저녁해빛을 받아 번쩍번쩍 빛나는 창끝을 이따금씩 쳐다보면서 걸었다. 기계방아간을 지나자 물동이를 끼고 나오는 동천이네 옆집 아주머니를 만났다.
《성남이 아주머니, 요새 안녕하십니까?》
그는 별로 무겁지도 않은 창을 훌쩍 추슬러올리며 인사를 하였다.
《이게 광천이 형이 아니세요?》
약간 물색이 날아진 연두색적삼을 입은 30전의 아낙네가 걸음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왜 놀라시우, 아주머니.》
동천은 싱긋 웃었다.
《참 몰라보겠어요. 우리 성남이가 광천이 형이 유격대가 됐다기에 난 무슨 소린가 했지요. 그렇게 군복을 해입고 척 나서니 정말…》
《아주머니두 부녀회에 들었겠지요?》
《들기는 했지만 우리같은거야 뭐.》
《공연한 소릴 합니다. 녀성들도 다 이젠 남자와 평등이 될터인데요.》
《다들 그렇게 말은 합니다만 그래두 녀자야 녀자지요 뭐.》
《하, 이 아주머니가 밤중이군.》
리동천은 남녀평등에 대한 지식을 장황히 펼쳐놓았다.
그러는 사이에 저녁물 길러 나오는 아낙네들이 두셋 지나가면서 동천을 쳐다보았다.
《아주머니두 이제 그 쪽진 머리를 뚝 잘라버리구 군복 입구 총을 메고 싸워야 해요.》
《에그, 망칙해라. 머리태를 자르다니?》
《하하, 이거 야단났군.》
성남이 아주머니가 지나가자 다음에는 기계방아간 뒤길로 달구지 한채가 삐걱삐걱 굴러왔다. 달구지에는 농짝, 솔, 석유상자, 가마니 등속 이사짐이 잔뜩 실리고 한옆에는 아이들이 셋이나 앉아있었다. 한 40살 됨직한 남정이 소달구지를 몰고 그옆에 아이를 업은 중년녀인이 보따리를 이고 따라섰다.
동천이 언덕우에 올라서서 길을 비키는데 얼마뒤에 그와 비슷한 이사군이 또 한패 밀려왔다. 소달구지를 몰고오던 사나이가 동천을 보자 무슨 말인지 할듯할듯 하다 그만두었다.
《어디서들 오십니까?》
동천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와- 와.》
사나이는 고삐를 당겨 달구지를 세우더니 머리수건을 벗으며 대답하였다.
《저 신성동에서 옵니다.》
《다 솔가해오시는가보군요?》
《네. 하두 왜놈의 단련이 심해서 거기선 못살겠습니다.》
《보아하니 농사군같은데 농사짓던건 다 집어던지고 오시는가요?》
《그런걸 가리게 됐습니까? 목숨이 왔다갔다하는데요. 왜놈들이 하루건너 나타나 총을 쏘고 불을 지릅니다.》
《여기 오면 무사한가요?》
동천은 번연히 알면서 짐짓 물었다.
《듣자니까 여긴 유격대가 있어서 왜놈들이 제맘대루 행패를 못한다면서요?》
《하긴 그렇긴 합니다.》
소달구지를 보내놓고나서 그는 뒤를 시적시적 따라걸었다.
며칠사이에 이사군이 부쩍 늘었다. 벌써 유격구가 생긴다는 소문이 쫙 퍼져 살길이 열린다는 바람에 오는 사람도 있고 《토벌》을 피해오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사방에서 모여든다. 가솔을 다 데리고 오는 사람도 있고 혼자서 자리를 본다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또 한쪽에서는 여기 있던 몇몇 사람들이 자취를 감추기도 했다.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한다.
지난봄까지만 해도 적적하던 마을이 혁명의 소용돌이속에서 뒤설레이고있는것이 완연하였다. 리동천은 동네 복판으로 꿰지르고 나가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말을 걸었다. 산에 오른지 보름만인데 몇해가 된것처럼 소식이 궁금하였다.
그가 다 썩은 수수대바자를 두른 자기 집 마당에 들어섰을 때 부엌문앞에서 키질을 하고 앉았던 어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모습이 아주 달라진 아들을 보자 어머니는 키를 놓고 걸어나왔다.
《어머니, 안녕하셨어요?》
《오냐, 무얼 했기에 이렇게 열흘도 넘었는데, 에구.》
어머니는 몇해만에 만나는것처럼 눈물이 글썽해지기까지 한다.
《보면 아시지 않아요? 군대가 어떻게 제맘대루 오구가구하나요?》
그는 창을 벗어서 앞으로 돌려짚으며 좌우를 둘러보았다. 마당 한켠에는 처음 보는 지게가 놓였고 토방우에는 낯설은 신짝이 여러 컬레 널려있었다.
《오늘 외삼촌네가 오셨다.》
《네?!》
그때 외삼촌과 외숙모가 문을 열고 달려나왔다.
리동천이 먼저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였다. 키가 자그마하고 얼굴이 대체로 네모진 외삼촌은 매우 소탈하였다. 그는 갑자기 이사짐을 떠메고 오게 된 까닭을 설명하였다. 소작을 얻어 땅을 부치는 한편 산에서 나무를 해다 다섯식구의 목숨을 이어가던 외삼촌네는 여기서 40리밖에서 살았다. 한 열흘전에 이마에 노란 별을 붙인 왜놈군대가 밀려들더니 천막을 치고 살림을 폈다는것이다. 경찰놈들이 뒤덮여 사람들을 있는대로 끌어내였다. 농민들은 농사를 전페하고 그놈들의 땔나무를 해오고 짐을 져날라야 하였다. 쩍하면 발길질을 하고 목을 베겠다고 칼을 빼들고 을렀다. 군대놈들은 공산당을 다 없애버린다면서 며칠씩 어데 갔다가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돌아오군 하였다. 그런 다음에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닭이며 돼지며 양이며 닥치는대로 탕탕 쏴댔다. 외삼촌은 요행 목숨이 붙어서 밤중에 산으로 빠져나왔다고 하였다.
《잘하였습니다. 이젠 혁명의 편으로 와야 살지 별수 없습니다.》
리동천은 세상물정을 다 안다는듯이 의젓하게 한마디 하였다.
삼촌은 수염이 꺼멓게 난 턱을 문지르면서 바쁜통에 이르니 그래도 혁명밖에 의지할데가 없더라고 하였다.
《잘 오셨습니다. 이제 좋은 세상이 옵니다. 여기 눌러계셔서 혁명을 하면 됩니다. 우린 지금 큰일을 벌리고있으니까요. 이제 유격대를 많이 만들어 왜놈군대를 내치자는겁니다. 그 마을에 들였던 그런 놈들도 총으로 냅다갈겨 천당에 보내야 하거던요. 우리 우에 누가 계시는지 삼촌 아십니까?
《듣다뿐이냐. 내가 여기 온것두
《하긴 그곳에두 머지않아 큰 소문이 갈겁니다.》
《나뿐아니라 이제 온통 다 여기로 몰려올거다.》
《올 사람은 빨리 오고 갈 사람은 빨리 가야 결판이 나요. 이게 다 혁명의 물결이거던요.》
《그래
《삼촌두 온참, 그런건 함부로 묻는게 아니야요. 밀정의 귀에 들어가면 좋지 않거던요. 하긴 나도 잘 모릅니다만…》
리동천은 정중해져서 말하기를 거절하였다.
그가 알기에는
《그래 군사랑 총이랑 넉넉히 마련돼있겠지?》
《넉넉한게 뭡니까? 시작인걸요.》
《시작이라?》
리동천은 금방 벼린 창끝을 쳐다보며 약간 시무룩해졌다.
그것을 재빨리 눈치챈 삼촌은 적당히 둘러대였다.
《뭐나 다 시작이 절반이니라. 단술에 배부른 법 있느냐. 어쨌든 착실히 해보아라. 어련히 다
키질을 계속하며 아들의 말을 듣고있던 어머니는 잠간 사이가 생겼을 때 난처한 얼굴을 아들쪽으로 돌렸다.
《애야, 그런데 야단났다. 넌 혁명, 혁명하면서 며칠내루 세상이 뒤집힐것처럼 말하지만 최령감은 점점 더 기승을 부리누나. 매일 와서 빚 갚으라고 다궂는다. 널 찾아가 목을 매 끌고라도 오라는거다.》
《그놈의 령감태기가 아직 속이 살았습니까?》
《속이 산다는게 뭐냐? 당장 변을 낼것처럼 을러멘다.》
《내 그래서 오늘 들렸습니다. 이길로 찾아가 버릇을 떼놓고 가겠습니다.》
《범이 제소릴 하면 온다더니 저기 온다.》
어머니가 눈짓을 하고 별일없었던것처럼 키를 들어 추석추석 까부린다.
사립문쪽에서 최덕만의 요란스러운 기침소리가 애헴애헴 났다.
《아니, 이 집에선 도대체 어쩌자는건가? 엉?》
매미날개같은 모시바지저고리를 입은 최덕만이 부들부채를 들어 손짓을 하였다.
《뭘 그러시오, 령감!》
리동천은 뻑 돌아서며 크게 대답하였다.
《얘야, 큰소릴랑 치지 말고…》
어머니는 키를 돌려놓고 치마를 걷어안으며 걸어나간다.
《어머니, 가만계셔요, 내가 다 처리할테니까.》
《처리가 무슨 처리냐? 빚진 죄인이라구 사정을 해야지.》
《어머니는 참 한심두 하시네. 이쪽으로 들어서세요, 내가 다 감당할터이니까.》
리동천은 문턱에다 창을 눕혀놓고 마당끝으로 털썩털썩 걸어나갔다.
《오! 마침 동천이 너두 와있었구나. 어디 너 좀 말해봐라. 농사지으라고 수수말이나 대주니까 김은 한고랑도 매지 않고 어데루 싸다니는거냐? 게다가 숱한것들이 모여들어 파먹기만 하구. 그래 조밭에서 범이 새끼치게 됐는데두 그저 이렇게 흥흥하고있으면 가을에 가서 어쩔셈이냐?》
《아니, 왜 이렇게 떡떡거리시우?》
동천이는 최덕만을 막아서며 다리를 벌려디디였다. 그때야 최덕만은 눈이 퉁방울처럼 커져서 이전과 달라진 동천을 보게 되였다. 작년까지 동천은 최덕만네 머슴이였고 서너달전만 해도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예예 하면서 소금짝을 물속으로 끌래도 끌 순진한 청년이였다. 최덕만은 가슴을 쑥 내밀고 해볼테면 해보라는 기세로 나오는 동천이의 아래우를 훑어보았다. 굵다란 솜무명에다 가래물을 들여서 군복을 지어입었다. 다리에다는 푸르무레한 각반을 치고 또 그와 같은 색갈로 모자를 해썼다.
《그래 내가 잔소리하지 않게 됐는가 생각해봐라. 농사 망치면 너희 굶고 나 녹고 좋은게 뭐냐, 이 불같은 세월에…》
이마가 벗어지고 턱이 앞으로 삐여져나온 최덕만은 화가 동해서 얼굴이 시뻘겋게 되였다.
《여보 령감, 세월이 좀 달라졌다는걸 알기나 하고 이래라저래라 하고있소?》
《세월이 달라졌다?》
최덕만이도 그런 눈치를 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믿을래야 믿을수 없었다.
《그래 이 리동천이가 어제날처럼 령감네 머슴인줄 아오? 령감이 뭐게 이래라저래라 호통이야요? 남이야 김을 매든 잠을 자든 무슨 상관이요?》
리동천은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군복저고리단추 두개를 터놓았다.
《머슴은 관뒀지만 최덕만의 땅을 부치는 소작인이지. 하늘이 무너지면 졌지 이거야 달라질수 있나?》
《하늘이 무너져도 달라질수 없다? 령감은 혁명이 뭔지 좀 들어봤소?》
《혁명이 어때? 아무리 공산당이래두
《어허, 잘한다. 누가 누구를 살려줬다는거요? 내가 뼈가 휘게 령감네 농사를 지어줬구 나무까지 해다 불을 때주었소. 령감이 밭 한고랑 매봤소, 나무 한단 해왔소?》
《내가 왜 그걸 해? 나야 땅임자구 돈이 있는데두…》
《여보 령감, 혁명은 그따위 회계장을 다 쓸어버린단 말요. 령감네 땅을 다 내놓소. 그리구 우리가 벌어놓은 재산을 이제 다 앗아내겠소.》
《앗아낸다? 야 이것 봐라, 이런 불한당이 세상에 어디서 났느냐. 내 아들이 엎디면 코닿을데서 아직 눈이 시퍼렇게 살아있다. 룡정거리 최경부를 몰라? 최경부, 네 이놈! 법도 무섭지 않느냐? 법! 법!》
《누구보구 이놈, 저놈이야? 령감이 독재를 좀 먹어봐야 알 모양이다. 네놈들은 헌신짝같은 법이 있지만 우린 독재가 있다.》
《독재? 독재라는것이 뭐 말라죽은거냐, 이놈!》
얼굴이 홍감처럼 된 리동천은 획 돌아서서 문턱에 세웠던 날창을 집어들었다.
《얘야!》 동천의 어머니가 아들의 앞을 막아섰다.
《어머니, 비키세요. 저건 반동입니다. 저런것들이 다 왜놈들과 한배속이 돼서 우리 조선사람들을 못살게 굽니다. 령감, 왜 도망가오? 독재를 대접할테니까 좀 오우.》
케가 틀려진것을 알자 최덕만은 갖신을 철떡거리며 부리나게 집뒤로 사라지고말았다.
《얘야, 너 어쩌자고 그 령감과 그렇게 맞서느냐? 그놈과 틀려서 견디는 사람이 없는데…》
동천이 어머니는 당장 달려갈것 같은 아들의 손을 잡고 울상을 짓는다.
《어머니, 내 이제두 말했지만 세상이 달라졌어요. 우린 너무나 저런 놈들한테 굽신거리며 살았거던요. 이젠 우리 세상이 왔는데 뭣때문에 그렇게 하고 살겠어요. 이 아근은 다 우리 혁명근거지로 되여요. 어떤놈도 얼씬 못하지요. 우리들이 맘대루 하는 세상을 만드는거예요.》
《글쎄 그럴 땐 그래두 그놈 말 못 들었니? 그놈 아들이 생사람을 잡아다 죽이기도 한다는걸 너두 알잖니?》
《이제 두고보세요. 우리가 왜놈들한테 붙은 그놈 아들을 잡아다 재판하지 않나… 경부가 맥을 추나요? 혁명은 그따윌 검불처럼 쓸어버려요. 어머니도 이젠 기를 좀 펴세요. 아들이 한다하는 유격대가 됐는데 뽐을 좀 내도 괜찮아요.》
리동천은 토방에 걸터앉아 담배를 뻑뻑 빨며 분을 참지 못해 어깨를 들먹들먹한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면서 삼촌과 이야기를 하다가 시간이 된것을 알자 저녁을 해먹고 가라는것도 그만두고 급히 산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