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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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걸은 밥상을 받고 밥보께를 열었다. 김이 문문 나고 구수한 냄새가 풍기는 조밥이 한그릇 무둑하였다. 숟가락으로 꾹꾹 눌러 모를 재워 한술 큼직이 뜨고 나물국을 마시였다. 얼마만에 먹는 밥인지 알수 없다.
그는 게걸스럽게 몇술 퍼먹고나서 목이 메여 랭수를 들이켰다.
물을 마시다말고 물사발을 든채로 잠간 그는 생각하였다.
밥사발에 가닿았던 숟가락이 부르르 떨렸다. 세걸은 물사발을 들어 꿀꺽꿀꺽 소리가 나게 랭수를 또 마셨다. 하지만 가슴은 열리지 않고 그냥 뿌듯하였다. 이윽해서 목구멍으로 뜨거운것이 올리밀었다. 그는 숟가락을 놓고 가슴을 슬슬 쓸면서 상을 물리였다.
《왜 밥을 남기나?》
부엌에서 그릇을 가시고있던 숙모의 말소리가 사이문으로 넘어왔다.
《많이 먹었습니다.》
《밥은 절반도 축이 안갔는데…》
《막 목이 메여 넘어가지 않는군요. 어제까지는 너무 배가 고파 그런 생각을 못했었는데 글쎄 어떻게 이 은혜를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네 말이 옳네. 자네 삼촌도 무엇인가 은혜갚을 일이 없을가 해서 식전새벽 나가긴 했네만… 이런 때 머리칼을 잘라 신이라도 삼아드리면 얼마나 좋겠나.》
《난 은혜를 갚기 위해 떠나야겠습니다.》
《어데루?》
《유격대에 들어가야겠습니다.》
그때 웃방에 들어있는 유격대원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세걸은 사이문을 밀어제꼈다. 마침 기용이가 배낭을 꾸리고있었다.
《저, 기용동무!》
동무라는 말이 나가지 않아 한참 갑자르다가 겨우 번지였다. 첫날 《선생》이라고 불렀다가 단단히 놀림을 당했던것이다.
《어째 그러오?》
세걸이가 어색하게 웃기만 하자 차기용이가 두눈을 그루박고 다그쳤다.
《저를 유격대에 넣어주지 않고 그냥 갈 차비군요?》
《세걸동문 그냥 그런 말을 하누만. 내가 뭐기에 유격대에 넣어주고말고 하겠소?》
웃고있는 차기용의 얼굴이 어둠속에 뚜렷이 드러났다.
《기용동무 맘도 이젠 다 알았으니까 그만둘라면 그만둬두 좋습니다. 난 어쨌든 따라가고야말테니까요. 내가 걸음을 못 걸을줄 압니까? 유격대만침은 갑니다. 백리 가면 백리를 가고 천리 가면 천리를 가지요. 1년도 좋고 3년도 좋아요.》
세걸의 기세에 눌린 차기용이는 한동안 생각을 톺다가 동무들과 의논하고 그를 불러내였다.
《세걸동무!》
차기용이는 아래방 문밖에 가서 가느다랗게 불렀다. 방문이 왈카닥 열리며 세걸이가 불쑥 문턱을 넘어섰다. 그 바람에 흠칫 놀란 차기용은 잠간 숨을 돌리고나서 나직이 말하였다.
《나와 같이 가기요.》
《네?! 정말입니까?》
좀 덤비는 축인 세걸은 신도 신지 않고 마당으로 뛰여내려왔다.
그들은 중대부가 자리잡은 안골집으로 나란히 걸어들어갔다. 중대부에서 부대가 출발하기에 앞서 세명의 통신원을 먼저 떠나보내고있었다. 차광수가 종을 달아맨 다락이 서있는 둔덕까지 그들을 바래웠다.
마을사람들이 유격대를 배웅하기 위해 어른, 아이 할것없이 모두 떨쳐나섰다. 어제 마을사람들에 의해 선거된 반제동맹책임자도 나오고 부녀회장아주머니도 나왔다.
출발한지 30분이나 되건만 부대는 동구밖도 벗어나지 못하였다.
유격대원 한명에 서너사람씩이나 달렸다. 할아버지들, 아주머니를, 아이들이 손을 잡고 그냥 무슨 당부인가를 하면서 따라온다.
할머니들은 손을 잡고 놓지 않았고 아이들은 옷자락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았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세걸은 새로 입대하는 자기 동무들과 함께 마을사람들과 오래 작별을 하였다. 그는 무엇을 넣었는지 잔뜩 부풀은 배낭을 털썩거리면서 마을을 한바퀴 돌았다.
아직 군복도 총도 차례지지 않아 목재판에서 입던 로동복을 그대로 입었다. 그는 숙모에게 마지막으로 다시한번 절을 하고 마을사람들을 들어가라고 하였다. 언덕에 나서자 처녀들이 손을 흔들었다. 세걸은 모자를 벗어 휘휘 둘렀다.
《갔다오겠소. 왜놈들을 다 내쫓고 찾아오겠소. 잘있소.》
그는 눈물이 글썽해서 고개를 돌리였다.
마을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보고 뒤늦게 떠나신
《영희야, 잘있거라!》
《나 같이 갈래!》
《같이 갈래? 이담에 와서 같이 가자. 오늘은 이만하고…》
방금까지 장난감을 들고 웃고있던 영희의 얼굴이 금시 흐려졌다.
《이제 또 온다.》
《인차 오나?》
《오냐, 곧 온다.》
영희는 좋아서 방글방글 웃는다.
《영희야, 노래 한번 불러볼가?》
혁명군은 왔고나
우리 마을에 왔고나
…
제법 목청을 내서 불렀다.
《잘 부르는구나.》
저만치 멀어진 영희가 손을 흔들며 또 웃는다. 그와 함께 언덕우에 들것에 들리워나온 영희 아버지도 무어라고 웨치면서 손을 흔들었다.
천상데기를 떠난 유격대는 옥바위골로 향하였다. 옥바위골에 가서 이 지구의 정치공작을 위해 사처로 또 동무들이 떠나갈것이다. 새날의 줄을 찾기 위해 무송으로도 떠나고 누군가는 홍두산쪽으로도 내려가야 할것이며 그리고 통화방면으로 통하는 로령으로도 가야 할것이다. 대렬 맨뒤에 따라선 차광수는 다음지점에서 펼치게 될 거창한 사업을 머리속에 그리면서 걸음을 다그쳤다.
광활한 대지에 새봄이 찾아왔다.
1920년대에
차광수는 그 하나하나의 이랑들을 더듬으면서 아득히 뻗어내린 골짜기를 바라보았다. 발밑에 펼쳐진 골짜기에서 뭉실뭉실한 구름떼들이 서서히 흘러가고있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만병초잎을 쭉 훑어 머리우에 확 뿌려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