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회)
3
(7)
관동군이 간데마다 씨글거리고 비적들도 무시로 나타날수 있다. 단련이 되지 못한 유격대원들이 그 멀고 험난한 로정을 어떻게 이겨내겠는지 걱정이 된다.
유격대를 처음 만나는 군중들은 또 어떠할것인가? 독립군과 통일전선을 이룩하는것도 헐치 않은데 중국인 반일구국군과도 손을 잡아야 한다. 지난 4월에 우사령부대를 찾아갔을 때 큰 위험을 무릅써야 했던것처럼 그런 고비를 얼마나 겪어야 할지 예견하기 어렵다. 그동안에 각 지구에 유격대를 일시에 내오는것도 필경 아픈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될것이다.
그런데다가 집사정이 말할수 없이 딱하게 된것이다.
어머님의 병세가 차차 나빠진다는것을
흥륭촌은 여기서 멀지 않았고 발재툰도 방금 저 산너머에 있다.
흥륭촌의 추녀가 낮은 그 집 웃방에서는 글을 많이 썼고 청소년들의 교양자료의 선동문 그리고 정세자료도 많이 만들었다. 그곳을 중심으로 유격대결성을 위한 준비도 이루어졌었다.
말안장을 깔고앉아 몇밤씩 새운 곳도 그곳이다. 많은 동무들이 찾아왔고 또 헤여져갔다. 화전, 그다음에는 길림, 그후는 카륜, 그것을 지나서는 이 송강지구가 큰 디딤돌로 되였다.
고개 하나를 또 넘으셨다. 푸르허로 뻗어넘어간 신작로를 가로질러 가느다란 실개천을 따라 들어가시였다. 석양이 곱게 비낀 산기슭이 올려다보이였다. 검푸른 참나무숲을 바탕으로 띠염띠염 풀밭이 드러나있는것이 유독 눈에 띄웠다. 풀숲에는 새빨간 들나리꽃이 고운 무늬를 돋치였다. 강기슭으로는 버들이 뭉글뭉글하니 덩굴을 이루어 멀리까지 잇달려나갔고 혹간씩 물푸레가 고개를 들고있었다. 토기점골이 들여다보이는 버덩에는 갈풀이 자라서 늠실거리고있다. 실개천은 끊길듯말듯 하면서 그냥 골짜기로 숨어들어갔다. 물은 끝없이 맑아 개바닥이 알른알른하게 들여다보인다.
마을로 들어가는 외나무다리를 건느니 낯익은 귀틀집 세채가 벌써 눈앞에 보이시였다.
마당은 비였다. 벽에는 중태가 하나 걸리고 부엌문쪽에는 산골에서 흔히 볼수 있는 나무드무가 놓여있고 약간 기울어진 구새굴뚝에서는 실타래같은 연기가 솟아오르고있다.
어머님께서는 지금 어떠하신지?
동생들이라도 내다보았으면 좋으련만 전혀 인기척이 없다.
어머님께서는 뙤창에 비친 저녁노을이 차차 보라빛으로 물들어갈무렵에 단추구멍을 마저 트시였다. 단추까지 달고나니 일단 그것으로 옷이 다된셈이였다. 어머님께서는 옷을 뒤번지면서 하나하나 실밥을 뜯어나가시였다. 자작자작 발걸음소리가 나자 부엌문이 벌컥 열리였다. 이어 문설주에 초롱 부딪치는 소리가 나더니 다시 발걸음소리가 멀어져갔다. 막내가 온 모양이다. 밖에 나가 놀거나 어데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도 끼때가 되면 꼭 돌아와서 불을 지피고 물을 긷는다. 어머님께서는 곰곰히 바느질자리를 더듬어보며 생각에 잠기시였다. 혁명사업때문에 바깥에 나가 사는 형들을 대신하여 집일을 보느라고 시키지도 않는 일을 제발로 나서서 애쓰는것을 보면 기특하기도 하였지만 은근히 가슴이 아프기도 하시였다. 마당앞에서 또 발자국소리가 났다. 앞집에서 누가 뒤마을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다.
얼마후 동구쪽에서 다른 발자국소리가 다시 어슴푸레하니 들려왔다. 무심히 귀를 기울이고계시던 어머님께서는 급히 방문을 열어제끼시였다.
《어머니!》
《글쎄 내 아무래도 발자국소리가 귀에 익다 했지.》
어머님께서는 옷가지를 개여 발치에 밀어놓고 문설주를 잡고 몸을 일으키시였다. 그때 벌써
어떻게 아시는지 어머님께서는 재밤중에도 늘 이렇게 문을 열고 맞아주군 하시였다. 다른 때는 대개 마당까지 나오시였지만 오늘은 토방에 나서서 인사를 받으시였다.
인사를 끝내신
시렁 한끝의 《솔》표석유상자 제낄문에다는 이전에 없던 쇠고리를 달고 자물쇠를 걸었다. 그것 역시 철주의 솜씨일것이다. 앞문 구석쪽에는 빼람은 없고 웃판대기만 있는 책상이 놓였는데 백로지를 펴고 몇권의 책을 포개놓았다. 단출한 세간들이지만 모두 제자리에 놓인 그 모든것이 어느 하나도 어머님의 손이 가지 않은것이 없다.
《어머님! 그새 몸이 어떻습니까?》
《괜찮다. 요즘은 퍽 기력이 나아지는것 같다. …》
어머님께서는 웃으시면서 머리에 동였다가 벗어놓은 수건을 얼른 배개밑에 밀어넣으시였다.
항상 웃음이 깃들고 부드럽고
머리숱이 성글어진 관자노리에는 벌써 흰것이 희뜩희뜩 박혔다.
《내 얼굴이 좀 상한것 같니? 간밤에 일이 있어 잠을 좀 설쳤더니 그렇나보다. 별일 없겠지. 한데 너는 얼굴이 불깃불깃한게 신색이 매우 좋구나.》
《어머님! 저는 이렇게 튼튼합니다. 그런데 어머님은 병이 더하신가부지요?》
《너는 그저 만나기만 하면 그 소리로구나. 내 병이라는거야 늘 그런걸 가지구 뭘 그러느냐? 병이라면 병이고 아니라면 또 그만인걸 가지고, 사람이 살다가 앓기두 하구 그런거지. 어떻게 노상 병을 모르고 사는 수가 있겠니. 간밤에 걸음을 걸었더니 몸이 고단해서 방금 좀 누웠댔다.》
《아이두 어떻게나 극성스러운지 그냥 볼수가 없구나. 련락갔다가 재밤중이 되여도 꼭 집에 돌아온단다. 나 혼자 두고는 어데 가나 잠이 오지 않는다는거지. 이제 방금 또 물을 길러 지게를 지고 나갔다.》
《그 애도 이젠 다 컸습니다.》
《나이나 제대루 먹구 그랬으면 마음성이라도 나으련만… 좀 앉아있거라.》
그대로 앉아있다가는 아무래도 몸져누워있다는 기미를 알아채이게 될것만 같아 어머님께서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시였다. 오금이 우적우적 울리였다. 가까스로 한발을 옮겨놓으시는데 부엌문이 덜컥하더니 인기척이 났다.
《얘, 형이 왔다.》
《나도 우물길에서 보고 소리를 치려다 그만두었어요.》
제모습처럼 또렷한 목소리가 울리더니 뒤미처 물초롱이 문턱에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철써덕하고 물쏟치는 소리가 났다.
《형 오셨어요?》
어머님께서 새문을 열어젖히시자 맨머리바람인 동생이 물지게를 진채로 고개를 숙인다. 팔굽까지 말려올라간 홑적삼앞자락이 화락하니 젖었다.
《잘있었느냐? 그런데 이거 너무 무겁구나, 물지겔 힘에 맞게 고름하니 져야지.…》
《물은 많지 않은데 멜빵이 늦취진것 같아요.》
《멜빵도 늦춰졌구나. 작은형이 지던걸 그대로 지니 그렇지.》
다른 때는 철이 다 든것 같다가도 이런 때는 형편없는 응석받이로 되는 동생이였다. 동생은 팔을 부들부들 떨면서 더 힘주어 허리를 그러안고 머리를 형의 가슴에 박고 문대인다.
한참 그런 후에야 고개를 들어 형을 말끄러미 쳐다보며 《형!》하고 또 한번 불러본다. 어머님께서는 정에 사무친 두형제의 모습을 보자 그만 눈물이 글썽해져 고개를 바깥쪽으로 돌리시였다.
《얘, 요즘 어머님 병은 좀 어떤것 같으냐?》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대답도 하시던
《어머닌 아주 좋아지셨대요.》
《좋아지셨다구?》
《네!》
《요새도 자주 부녀회사업때문에 먼길을 다니시느냐?》
《아니예요. 사람들이 찾아오군 해요. 오늘두 두사람이나 왔다갔는걸요.》
《그래?》
땅거미가 지자 서느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둬서너잎씩 벌어진 강냉이포기가 한들한들한다. 창포밭에서 개구리가 울어대였다.
몇마디 더 묻는 동안에 동생은 끝내 실토를 하고야말았다.
눈물이 가랑가랑해진 동생은 어머님께서 엄하게 단속하셨다는것까지 알려드리였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형! 왕청으로 가는 길에 창마을이라고 있다는데 거기 사립학교 선생님 아셔요?》
동생은 침묵을 오래 끄는것이 괴로왔던지 불쑥 딴 이야기를 꺼내였다.
《왕청으로 가는 도중에 창마을이라면 여기서 200리도 더 되겠는데, 그래 누구냐?》
《백광명인지 하는 선생님을 모르세요?》
《글쎄, 만나보면 알겠는지, 어째 그러느냐?》
《철주형님과 잘 아는 사이라나요. 여기 친척집이 있다는데 올적마다 형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어요. 오늘 또 만났어요. 어제 왔다나요.》
《그래? 무슨 일이라던?》
《뭐, 의논할게 있다고 해요.》
《얘야!》 어머님께서 부르시였다.
《형 세면물 내가거라.》
《네!》 동생은 세면물과 수건을 내다놓고 물었다.
《형, 이제 곧 떠나지 않지요?》
《왜 그러느냐?》
《나 저 뒤마을에 련락갔다 올 일이 있어 그래요.》
항상 기약없는 형의 걸음이라는것을 잘 알고있는 동생은 형님이 밤에라도 떠나지 않을가 걱정이 되였던것이다.
《어서 갔다오너라.》
《그럼 내가 좀 늦더래도 꼭 기다리셔야 해요.》
《저것 보지, 형한테 버릇없이.…》
동생이 눈을 반짝거리며 단단히 대답을 받아내려는데 어머님께서 가볍게 나무라시였다. 동생은 싱끗 웃어보이더니 뒤길로 달려나갔다. 방안으로 들어오신
이윽해서 풋나물 데치는 향긋한 냄새가 문틈으로 새여들어왔다.
밤늦어서 철주동생이 돌아왔다. 막내동생처럼 그도 형님을 와락 부둥켜안았다. 이제는 키도 흠썩 커서 어른처럼 보였다. 허나 부둥켜안으니 뼈대는 아직 굵지 못하다는것이 알렸다.
무척 오랜만에 네식구가 한상에 마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