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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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동지께서 집쪽으로 들어가는 갈림길에 이르시였을무렵 토기점골집에서는 젊고 수수한 녀인이 부엌문을 가볍게 밀고 밖으로 나왔다.

《조심하라구.》

강반석어머님의 나지막한 말씀이시였다.

《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녀인은 총총히 산모퉁이길로 사라졌다.

그는 오늘 회의에서 토의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두만강줄기를 따라 남양까지 수백리길을 걸어야 하였다. 녀인이 오솔길을 빠져 고개를 넘어선 다음에야 어머님께서는 방안으로 들어오시였다.

잠시 숨을 돌리시고 구석에 놓인 바느질그릇을 당겨 일감을 집어드시였다. 무릎에 놓인 바느질감은 풀색군복저고리였다. 단추구멍을 세개째 틀고계시였다. 오늘로 단추까지 달고 끝내야 할것이나 좀체로 일자리가 나지 않아 안타까우시였다. 츠름츠름 옷 한벌이 보름이나 걸린셈이다. 몇뜸 뜨시다가 손을 멈추고 뙤창을 내다보시였다. 저녁해빛이 구름노전우에 명주필처럼 엇가로 내리질렀다. 사위는 깜박 조을듯 한 정적이 깃들어있다.

《무사히 가기나 하겠는지…》

어머님께서는 조용히 혼자소리를 하시였다.

날이 갈수록 적들의 경계가 심해져서 쪽지 한장을 전하재도 큰 위험을 무릅써야 하였다. 지난 초봄까지만 하여도 이런 일에는 남을 시키지 않고 직접 다녀왔지만 이제는 전혀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며칠밤을 새우며 회의를 한 후에는 더 괴로와하시였다.

어머님께서는 현기증이 나서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아래목에 누우시였다. 몇해전부터 시름시름 앓던것이 차차 고질이 되여 잡수신것이 전혀 내리지 않고 자주 속이 치밀어오르군 하시였다.

한평생 가난에 시달린때문이며 걱정을 놓으실 짬이 없기때문이다. 삯바느질을 하고 삯빨래를 하시였다. 그러면서도 어머님께서는 언제한번 살림걱정을 입밖에 내비치지 않았고 집안식구들에게도 그런 기미를 보이려 하지 않으시였다.

언제나 고통을 가슴에 깊이 감추어 삭이고 웃으며 지내시였다.

어머님께서는 결코 고통에 시달리고만 계시지 않으시였다. 오히려 그것을 맞받아 줄기찬 투쟁을 벌려나가시였다.

눈보라치는 령을 넘고 밤길도 수없이 걸으시였다. 락엽이 날리고 가을비가 스산한 들길을 걸으면서 이 나라 녀성들의 운명을 걱정하시였으며 한사람의 부녀회원을 일깨우기 위하여 며칠씩 걸어 찾아가시였다. 어머님의 그 조용한 발걸음소리, 웃음소리가 온 백산지구 어데라 없이 미치고 온 안도땅에 퍼져갔다.

사나운 파도가 어머님의 가슴을 몇번이고 덮치였지만 어머님께서는 모진 고통속에서도 꿋꿋이 머리를 들고 일어서시였다.

봉화산기슭, 기름기 도는 살맹이잎이 메등을 덮었는데 문득 마당에 나서신 김형직선생님께서 《내 곧 돌아오겠소.》하며 쇠고랑을 차신 두손을 들어보이고 한길로 걸어나가실 때 강반석어머님의 심장은 뚝 멎는듯 하였다.

다시한번 포평에서 온몸에 동상을 입고 누우신 김형직선생님을 대하셨을 때 어머님께서는 눈물이 아니라 피가 방울져 떨어지는것만 같았다. 그후 몇해 안 있어 선생님께서는 한을 품은채 이 세상을 떠나가셨다. 오라버님 강진석선생님께서도 감옥으로 잡혀가시고 뒤이어 시동생분 김형권동지께서 또 체포되시였다.

눈물로 헤아리기에는 너무나 아름찬 고통들이였다. 그러나 어머님께서는 락심하지 않으셨고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으셨다.

그 기상은 마치 바다기슭에 선 바위마냥 아무리 산더미같은 시련의 파도가 들씌워져도, 아무리 모진 바람이 불어닥쳐도 끄떡하지 않고 서계시였다.

잠시 쉬고나신 어머님께서는 다시 바느질감을 집어드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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