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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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뉘엿뉘엿 져갈무렵 군수관 박흥덕은 자못 흐뭇한 마음으로 골목길을 걸어가고있었다. 입대와 동시에 중대의 군수를 보아야 한다는 임무를 받았을 때 그는 그 많은 인원을 어떻게 먹이고 입힐것인가를 걱정하면서 그날밤 한잠도 자지 못하였다. 그러나 요즈음 같아서는 꽤 해낼것 같은
오늘 일만 해도 그렇다. 어제
모자는 좀 작을사 하였지만 이마귀가 좀 벗어져올라간 시원해보이는 얼굴에 잘 어울리여 어딘가 친근미를 느끼게 하였다. 사실 그의 덩실한 코마루며 항상 웃음을 띠고있는 좀 작은 편인 눈 그리고 꾹 다물려있는 입을 뜯어보면 성이 났을 때조차 인정이 흐르는 얼굴이였다. 그가 뒤마을어구에 들어서니 3소대동무들이 주인집 터밭 강냉이김을 매주노라고 고랑을 하나씩 타고앉아 떠들석하게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그들은 누구를 돕기 위해서라기보다 얼마전까지 농사를 짓던 청년들이라 어디서나 일감을 보고는 그대로 배기지 못하였다.
《이것 보우, 탄광쟁이!》
그는 마당에서 장작을 패고있는 키가 크고 얼굴이 검실검실한 동무에게 고개를 돌려대고 말을 걸었다.
《어제밤 그 아주머니 말이 믿어지는가?》
말없이 직성스럽게 장작만 패고있던 차기용은 한달전까지 탄광에서 막장군으로 일하던 동무였다. 그는 디뚝거리는 모태를 고쳐놓을 생각으로 허리를 폈다.
《가을뻐꾸기소리 같은건데 그걸 가지구 믿구말구 할게 되오?》
《하지만 그런 얘길 꾸며댈순 없잖는가?》
박흥덕은 옆에서 슬쩍 한마디 꺼내며 손바닥만 한 신문지장에 되초 한줌을 놓고 두르르 말아물었다.
행주치마를 걸친 주인집어머니가 장작을 안으러 나왔다.
《힘드시겠는데 그만하시오다.》
차기용은 힐끔 박흥덕을 돌아보더니 대답할 재미도 없다는듯이 도끼를 번쩍 들어올려 힝하고 내리쳤다.
굵다란 나무통이 단매에 쩍 갈라져나간다.
어머니는 속이 하얀 봇나무장작을 한아름 안고 일어섰다.
《어머니! 장작 팰것이 있으면 다 내놓으시오. 저 동문 본시 동발군이랍니다. 하하하.》
박흥덕이 제풀에 웃는데 어머니는 얼굴에 온통 주름을 지으며 대견해서 고개를 끄덕이였다.
《에그, 도끼질도 어쩌문 그리도 시원시원히 하는지 모르겠당이.》
《그런데 어머니, 어제밤 학교운동장에서 과따대던 애기어머니 있잖습니까. 그 아주머니가 대포쟁이는 아니지요?》
박흥덕은 속이 근질거려 참지 못하고 또 그 소리를 꺼냈다.
《저 범바위골아주마이 그러오다?》
《그러기 말이오다. 그 아주마이가 여느때사 얼마나 똑똑하기다. 하지만서두…》
어머니는 장작을 부엌에 들이고 다시 돌아나왔다.
《녀자가 암만 똑똑해두 남자 반을 못 따라간다는기 그래두구 하는 소리지비. 그 아주마이가 어제 정신이 좀 나갔기다 그런 소리를 했지. 그러채이문 그런 소릴 할 사람이 앙이오다.
어머니도 매우 불만스럽다는듯이 혀를 끌끌 차며 장작을 다시 안고 부엌문턱을 넘어선다.
《그렇겠지요.》
박흥덕은 대중없이 한마디 하고는 기분좋게 담배를 뻑뻑 빨았다. 이제 한둘의 동의를 더 얻게 되면 오늘아침에 일어난 그 론쟁의 상대들을 꼼짝 못하게 할수 있을것이였다.
《그래 탄광쟁이는 그 말이 믿어지는가?》
《…》
차기용은 장작을 마당 한옆에 내다가 우물방틀처럼 수걱수걱 가리며 들은체도 안하였다.
《허참, 기가 막혀서… 우리
박흥덕은 담배연기를 풀썩풀썩 내뿜으며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그제야 차기용이 허리를 일으키더니 찬찬히 박흥덕을 바라보았다.
《머슴으로 말하면 프로레타리아인데 왜 그걸 나쁘다고 보는가? 더구나 박동무는 10년이상이나 머슴을 산 사람이 아닌가?》
《내가 머슴을 나쁘다고 했나? 그 아주머니 정신이 돌았다고 했지.》
《그 아주머니는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잖소.》
차기용은 조용한 어조로 그러나 확신성있게 잘라서 말했다.
《그러니 믿자 그건가?》
《믿고 안 믿고가 문제가 아니라 그런 소리는 함부로 들고다닐것이 못돼.》
차기용은 성이라도 난듯이 부러진 앞이가 드러났던 입을 꾹 다물고 다시 장작을 가리기 시작하였다. 박흥덕은 얼굴이 벌개졌다. 그러나 록록히 숙어들 그가 아니였다.
《역시 탄군은 탄군이다, 고지식한걸 보니. 하지만 동무 말은 도무지 새겨낼수가 없어. 이것도 아니래 저것도 아니래, 그러니 대관절 어느것인가? 그래 바로 저번때 학습에서 배운 그 모순이라는거야.》
《모순은 무슨 모순, 그 아주머니가 사람을 잘못 봤겠지 뭘 그러나?》
차기용은 같지도 않다는듯이 한마디 툭 던지고는 돌아서서 이미 쌓아놓은 장작가리를 주인다운 눈매로 살펴보고 새 자리를 잡아 또 가리여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