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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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강구에서 15리 산으로 올라가면 작은데기라는 곳이 나진다.

잡관목이 엉킨 언덕밑에 자그마한 귀틀집이 한채 들어앉아있었다. 어느때 누구에 의해서 생겨났는지는 딱히 알수 없으나 짐작컨대 감자부대를 일구던 농막이거나 사냥막으로밖에 쓰일수 없는 엉성한 이 집은 오늘 귀한 손님들을 많이 맞아들이게 되였다.

몸집이 크고 동작이 매우 침착한 이 집주인이며 비밀통신처 책임자인 박흥덕은 수수한 농민차림을 한채로 총을 안고 바위틈에 숨어서 보초를 섰다. 집뒤에는 다래덩굴이 구름처럼 엉키였고 앞에는 말잔등같이 휘여넘어간 재등에 방금 싹이 돋아난 감자밭이 누워있었다. 그보다 좀 삐여진 왼쪽봉우리는 유난히 오똑 솟아있었는데 그곳에 올라만 가면 사방을 한눈으론 내려다볼수 있었다.

박흥덕은 어제오늘사이에 십여명 동지들을 맞아들이였다. 딱히 누가 귀뜀해준것은 아니였지만 그의 짐작에 각 지구 정치공작원들임에 틀림없었다. 소사하에서 열리게 되는 회의에 참가하러 오는 사람들이였는데 예비집결장소인 여기 비밀통신처에 모여 기다리다가 사령관동지께서 도착하시면 내려가야 하였다.

회의와 관련한 일을 주관하는 사람은 김일성동지의 친근한 전우로서 유격대 참모장으로 활동하고있다는 안경쟁이면서 몸동작이 매우 민첩한 차광수였다. 며칠전에 도착한 차광수는 박흥덕이와 함께 방안에 물매질을 했고 오는 사람들이 대게 될 암호를 알려주었으며 보초를 어떻게 서야 한다는 자세한 지시를 주었다.

박흥덕은 겨우내 혼자서 이곳 비밀통신처 공작을 맡아보았다. 그가 혁명투쟁에 참가한것은 벌써 3년째 잡힌다.

김일성동지께서 직접 파견하신 돈화에 있는 한 공청원의 영향으로 지하공작을 하게 되였는데 처음에는 통신련락을 하는 정도였지만 얼마 안 가서 곧 독자적으로 사업하게 되였다.

지난해 12월 명월구회의에서 김일성동지께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할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신 때로부터 그의 혁명사업은 한계단 높은 수준으로 뛰여올랐다. 《일제를 치기 위해 모두가 총을 들라!》 한마디로 요약되는 이 방침은 그를 무한히 격동시켰으며 매사에서 몇배의 정열을 쏟아붓게 하였다. 다만 그를 항상 괴롭힌것은 이전에 배운것이 너무나 적었던탓으로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그것뿐이였다. 원래 말하기를 좋아하는 성미인 그는 며칠동안에 온 한겨울동안 밀렸던 클클증을 다 털어버리려들었다.

하루밤, 하루낮을 차광수와 이야기를 하고나니 가슴이 시원하게 열리고 여간 신명이 나지 않았다.

차광수의 말에 의하면 사령관동지께서 벌써 어제 도착하셔야 할 예정인데 어떤 사정에 의해 늦어지는 모양이라고 걱정하였다.

봄볕이 호듯호듯 내리쬐는 바위벽을 등지고 앉은 박흥덕은 이제나저제나 하며 산기슭 오솔길을 지켜보고있었다.

지금 귀틀집에는 굉장한 동무들이 모여있었다. 나이는 태반이 스물안팎인데 이름은 벌써 세상에 뜨르르했다. 거개의 동무들이 《ㅌ.ㄷ》시절부터 길림과 카륜, 오가자 등지에서 김일성동지를 모시고 함께 싸워온 청년공산주의자들이였다. 맑스나 레닌의 명제를 옹근 한책씩 뜬금으로 외워대는 진일만이라는 굉장한 리론가가 있다는 말을 박흥덕은 벌써 돈화에 있을 때 듣고 맑스같은 텁석부리령감을 머리속에 그려왔는데 정작 만나고보니 그 역시 기껏 스무나문살 났을가말가하는 청년이였다. 그런가하면 전부터 한두번 통신처를 들려간 일이 있는 송덕형이나 한흥권이도 있다. 거기에 최진동이며 리광이 같이 오랜 경험을 가진 로련한 지하공작원들도 모여들었다. 여기에 차광수와 또 이제 사령관동지를 모시고 올 전광식이까지 회계에 넣고보면 이건 실로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집단이다. 하기는 왜 그렇지 않겠는가? 사령관동지께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실 때도 이들을 핵심으로 삼으시였다. 앞으로 사령관동지께서 크나큰 구상을 펴나가시는데도 역시 이들이 모두 한몫씩 맡아나서게 될것이다.

바람소리 스산한 화전땅의 일대에서부터 함성이 우렁차던 길림거리를 지나 걸음마다 사선을 넘어야 하는 남북만주 설한풍 휩쓰는 광야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동안 일편단심 김일성동지를 모시고 싸워온 그들이였다.

그중에서 좀 다른것은 리혁이와 박기남인데 이들은 둘 다 서른이 가까왔고 오래동안 감옥살이를 하다가 나왔으며 또 둘 다 《간도공산당사건》적부터 신문에 들썩하게 이름이 난 사람들이다.

박기남은 3년간 서대문감옥에 갇혔다가 지난 겨울에 만기출옥하였다. 리론도 있고 웅변도 있었던 그는 감옥생활을 하는동안 얼마간 기가 꺾인듯 하였으나 아직 정열이 대단하였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경찰의 미행을 솜씨있게 떼버리고 옹근 3개월동안 병치료를 하면서 은밀히 조직의 줄을 찾았다. 간도에 널린 이전조직들은 몇차례의 사건을 겪은 후에 모두 헤실바실해졌고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달라졌다. 일부는 영영 자취를 감추었고 일부는 투쟁을 포기하였으며 일부는 일제앞에 투항변절하였다.

빈방에 누워서 몸의 부종을 내리기 위해 미나리를 달인물을 하루에도 몇사발씩 들이키면서 그는 타락한자들, 변절자들에게 지독한 욕설을 퍼부었다. 《사이비공산주의자들》, 《행세식맑스주의자들》, 《가짜들》, 《유다들》 하고 악담을 하였다.

하던중 문득 그에게 한가닥 서광이 비껴왔다. 그는 이미부터 알고있던 친구를 통해서 김일성동지께서 직접 파견하신 왕청지구공작원 리광을 만나게 되였다. 리광은 그를 친절히 대해주었고 고무해주었다.

그후 그가 본 사람들은 모두 맑고 깨끗하고 투지에 충만된 동무들이였다. 《서울파》다, 《상해파》다, 《이르꾸쯔크파》다 또 무슨 《파》다 하는 일체의 과거의 오염에서 벗어난 생신한 새 세대들이였다. 그리하여 새것에 마음이 끌린 그는 몸도 채 추서기전에 다시 투쟁선상에 나서게 되였던것이다.

박흥덕은 총을 가슴에 안고 빤하게 내려다뵈는 귀틀집마당을 기웃해 보았다. 그런 사람들이 서로 헤여져있다가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얼마나 굉장한 말들이 오고가겠는가. 아무리 귀를 기울여봐야 말소리가 들릴리 없었지만 박흥덕은 연신 그쪽으로 얼굴을 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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