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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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마루에 오르자 앞이 활짝 열려졌다. 보기 좋게 구릉이 져서 물결쳐나간 산발들이 아득히 비껴갔다. 산과 들에는 봄기운이 짙었다. 이깔나무숲은 연두색으로 물들고 골짜기에서는 물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소, 해지기 전에 가둑령을 넘어낼것 같습니까?》
《아직 30리를 가야 가둑령어구에 들어서게 됩니다.》
《아직 30리나 남았다?… 그럼 서둘러야겠습니다.》
《한흥권동무한테 리혁동무도 이번에 같이 오라고 련락을 했습니까?》
《네! 련락을 했습니다.》
《그러면 한동무가 좀 늦어질수도 있겠구만?》
《떠나면서 기일전에 꼭 도착하겠다고 했습니다.》
《하긴 한동문 한번도 기일을 어긴적이 없었으니까.》
저만치 앞에서는 전령병이 걸어갔다. 호위를 담당한 전광식은
지난달 25일, 그러니까 한 스무날전에 안도에서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되였다.
혁명정세는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고있었다. 일제의 전대미문의 야수적인 《토벌》이 두만강일대를 휩쓸고있었다.
불구름이 피여오르는 벌판과 골짜기와 산을 넘어다니시는 동안 하루밤도 잠들지 못하고 사색에 잠겨 새우시군 한
길림시절부터
귀로에 오르신
《큰골 리광동무한테 통신이 가닿았을가요?》
묵묵히 령을 내리시던
《닿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순조롭게만 갔다면 어제쯤…》
《돌아보던중 거기가 제일 걱정됩니다. 놈들의 소위 간도림시파견대 주력이 왕청, 연길방면으로 밀릴것이 예견됩니다.》
전광식은
《그 동무는 어떻게 하나 타개하여나갈겁니다.》
골짜기를 빠지자 개활지대가 나타났다. 산굽이를 하나 돌아서니 꽤 넓은 강이 가로놓여있었다.
《저게 무슨 사람들입니까?》
강가에는 사람들이 하얗게 널려있었다. 산굽이를 돌아설 때부터 전광식이도 그것을 보기는 하였으나 나루를 건느려는 사람들이겠거니 짐작하고 심상하게 보아넘겼던것이다.
강가에 내려오신
《〈토벌〉을 당한 사람들이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토벌〉을 당했다?… 음, 불바다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구만.》
이미 그러루한 일들이 생기리라는 짐작은 하셨던것이지만 정작 그것이 현실로 안겨오자
강변에는 수십명의 피난민들이 널려있었다. 대부분 로인들, 아낙네들, 어린이들이였다. 때마침 해가 자글자글 내리쬐여 길가던 사람들이 쉬기에 알맞춤하였다. 부상당한 환자들은 양지쪽에 앉아 상처를 풀어보고있었으며 아낙네들과 아이들은 바가지로 강물을 퍼다가 먹을것을 끓이고있었다. 여기저기 걸어놓은 돌가마들에서는 푸르스름한 연기가 피여올랐다. 점심때치고는 너무 늦고 저녁이라면 너무 이르다. 전광식이 나타나서 이것저것 물으며 돌아갈 때에는 웬 사람이냐는듯 한 표정으로 몇사람이 심상치 않게 눈치를 살피였지만 그것이 일단 지나가자 곧 그들은 무관심해지고말았다.
처음에 눈에 뛴것은 서너살난 어린애 셋이 풀밭을 기여다니면서 꽃을 뜯고있는것이였다. 얼굴이 포동포동한 사내애가 민들레꽃을 향해 손을 뻗치는데 그의 팔소매는 불에 타서 구멍이 두개나 뚫어져있었다. 그와 반대쪽으로 앙금앙금 앉은걸음을 하고있는 단발머리계집애는 왼쪽팔을 싸맸고 고무신은 한짝만 신고있었다. 그옆에 엉뎅이를 땅에 붙이고 앉은 사내애는 머리가 온통 불에 그슬렸다.
걸음을 멈추고 아이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계시던
《넌 뭘 깎고있느냐?》
《고무총 만듭니다.》
사내애는 삐여져나온 이마를 들고 야무지게 대답하였다.
《고무총을 만든다? 거참 좋은걸 만드는구나. 그래 그걸룬 뭘하지?》
《왜놈 쏘겠습니다.》
《왜놈을 쏜다? 어디 좀 볼가?》
《이걸루 왜놈을 잡는단 말이지?》
《네, 그놈들은 우리 아버지, 엄마를…》
말을 채 맺지 못한 사내애의 도두룩한 입술이 갑자기 가늘게 떨리였다.
《네 말이 옳다. 잘 만들어서 원쑤놈을 쏴라. 그런데 이 앤 누구지?》
《얜 금숙입니다. 얘도 아버지, 엄마 다 죽었습니다.》
《이 앤?》
예닐곱살난 사내애가 우두커니 옆에 와 섰다.
《그 애도 없습니다.》
《네 이름은 뭐지?》
《내 이름은 첫쨉니다. 누나야, 나 첫째란 이름 말구 또 있다구 했지?》
처녀는 고개를 들고 바느질하던 손을 잠간 멈추더니 첫째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고개를 천천히 떨구었다. 터진 혼솔을 다 꿰메고 실을 물어끊자 금숙이는 냉큼 일어나 첫째가 앉은쪽으로 달려내려갔다.
《첫째의 누나가 이 애들을 다 돌보고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아동단원입니까?》
《우리 누난 아동단 소대장입니다.》
첫째가 살눈섭이 긴 눈을 크게 뜨고 자랑스럽게 말하며 누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렇댔구만. 그래 동무네 마을은 어딘데 언제 〈토벌〉을 당하였습니까?》
《네, 왕청 큰골입니다.…》
《큰골이란 말이지?!》
《예, 그저께 〈토벌〉 맞고…》
눈물이 가랑가랑해진 정옥은 말끝을 채 맺지 못하고 또 고개를 숙여버렸다.
《음, 그렇댔군.…》
그리고
금년 열여섯 잡힌 얼굴이 동그랗고 살눈섭이 긴 정옥은 소녀티를 겨우 벗으나마나한 처녀였다. 정옥은 말을 하다가는 이따금씩 울음이 북받쳐서 입술을 깨물고 한참씩 어깨를 들먹거리군 하였다.
청년들이 마당에서 총살당하던 이야기며 어린것들이 불에 타던 처절한 광경을 그가 목격한대로 짤막짤막한 몇마디 말로 표현하였다. 정옥의 이야기를 한참 듣고계시던
손등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정옥이가 한참 이야기를 계속하고있는데 저만치 잔디밭에 앉아서 대통으로 담배를 태우고있던 중년사나이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큰골에서 농사를 하던 서국보였다.
정옥이가 마을의 참상을 다 이야기하지 못하고 끝낸 얼굴을 싸쥐고 흐느끼게 되였을 때 서국보는 가슴을 움켜쥐고 정옥이를 대신해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피여오르는 울분을 어디에 터뜨리지 못하여 모대기던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