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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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이 빠진것처럼 멍청하니 서있던 첫째는 문득 이러고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겐가 알려야 하며 불러와야 할것 같았다. 그는 사방을 한번 살펴본 다음 도랑을 끼고 뒤마을쪽으로 빠져나갔다.

금숙이네 집앞에도 왜놈들에게 잡힌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첫째는 흠칫하고 멈추어서서 휘둥그래진 눈으로 모여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속에 누나 정옥이가 끼여있었던것이다. 그는 엉겁결에 누나를 부르며 뛰쳐나가려다 말고 담장모퉁이에 붙었다.

그때 덜미를 잡히였다. 몸뚱이가 허궁 들리더니 마당에 태를 치며 딩굴리였다.

《요것이 도망을 쳐?》

길다란 덧이가 드러난 놈이 육중한 구두발로 머리며 가슴이며 다리를 마구 차굴리였다. 얼굴이 새까맣게 질린 첫째는 배를 그러잡고 대굴대굴 굴었다. 이윽해서 정신을 차려보니 왜놈들이 마당에 놓인 달구지우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미친듯이 총탄을 퍼부었다. 마을에서 끌려나온 사람들이 밭뚝에 줄을 지어섰다가는 총소리와 함께 쓰러지군 하였다. 밭뚝너머 웅뎅이에는 벌써 시체가 무드기 쌓이였다. 드디여 누나가 옆집 금숙이의 손목을 잡고 밭뚝에 나섰다. 그때 누나는 첫째를 피뜩 본것 같았지만 우정 모르는척 하는것 같았다.

《누나야!》

첫째는 고함을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데도 누나는 첫째를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아무 대답이 없이 먼산만 바라보며 꿋꿋이 서있었다. 기관총에 붙어선 땅딸보왜놈이 시꺼먼 얼굴을 번뜩이며 방아쇠를 당기였다. 총소리가 울리는것과 함께 누나는 금숙이를 안고 뒤로 털썩 넘어졌다. 구멍이 팡하니 뚫린 기관총대에서 불이 훅훅 내불리자 밭뚝에 섰던 사람들이 일시에 뒤로 굴러떨어졌다.

《누나야! 누나야!》

고함을 지른 그 순간 첫째는 앞으로 꼬구라졌다. 누가 뒤에서 밀친것 같기도 하고 총소리가 울린것으로 보아 자기도 죽은것 같기도 하였다. 얼마후에 첫째는 땅바닥에 엎드린채 두런두런 울리는 왜놈들의 말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첫째는 그대로 눈을 딱 감고 누워있다가 한참후에 눈을 슬며시 뜨고 앞을 내다보았다.

저만치에 번들거리는 장화가 보이고 장화뒤에 닿을락말락하니 드리운 긴칼이 보이였다. 학교마당에서 본 그놈이 분명하였다.

첫째는 눈을 감고 모로 자빠진채 죽은것처럼 숨을 죽이고있었다. 긴칼 찬 그놈이 뭐라뭐라 하더니 발자취소리가 아득히 사라져버리였다. 대여섯놈이 마당에 쓰러진 사람들을 하나하나 총창끝으로 제껴가며 죽었나 살았나 살펴보는것이였다. 그러다가 아직 숨이 붙어있는것이 나지면 가슴에다 대고 총을 또 쏘거나 총창으로 내리찌르군 하였다. 첫째의 허리에는 누군가의 손이 올려놓이고 머리켠에는 창순이 아버지의 발이 닿아있었다. 금숙이 어머니도 옆에 쓰러져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창순이 아버지가 아까 자기를 발로 차 메친것 같기도 하고 금숙이 어머니가 안고 넘어진것 같기도 하였다. 얼마후에 첫째는 다시 눈을 살며시 떠보았다. 이제 대여섯사람을 제끼면 창순이네 아버지 차례가 되고 그다음에 자기 차례가 될것이였다. 두놈이 번갈아 찌르고 끌어내고 한참 하다가 한놈이 말하였다.

《이봐, 이러다간 오늘 밤새 해도 못다하겠어. 대강 발로 툭툭 차보면 알게 안야?》

《하긴 이미 천당에 간지 오란건데…》

《대강 하고 갈가?》

《그러다가 아라끼한테 걸려.》

《대체 아라끼중좌는 반일인민유격대라는것을 보기나 하고 그러는가? 어쨌든 한대 피우고보세! 젠장.》

놈들은 절구통을 깔고앉아 담배를 피우며 지껄이고있었는데 하나는 땅딸보고 다른 하나는 안경쟁이였다.

《정보를 받고 아는거겠지. 말하는걸루 봐서는 어쨌든 대일본제국주의 운명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야.》

《공산주의자들의 무장부대라면서?》

《그야 더 말할거 없지. 하지만 이번에 대일본제국에 감히 선전포고를 한 반일인민유격대는 종전과 달리 특수한 존재라는거야.》

《중좌의 입에서는 밤낮 특수, 특수지. 당신네 이번 출동은 특수한 작전이다, 특수한 조선인을 전멸하는거다, 갔다오면 특수대우한다, 이런 식이지.》

《하긴 조선의 반일인민유격대가 우리와 대전하면 일본의 대륙진출에 지장이 있을걸.》

지장정도면야 이렇게 말라리아환자처럼 열을 내지야 않겠지…》

《반일인민유격대라! 이름부터가 아주 재미적어.》

《요 얼마전에 상해에서 시라가와대장이 폭탄에 얻어맞은 사건 알지? 그것도 조선사람이라면서? 록록치 않은 민족이거든. 하나하나가 다 겁을 먹게 한다니까.》

《그만하게, 그런건 유격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중좌나리는 벌써 한고뿌 쭉 했을거야.》

《좋은 습관이지.》

《또 해볼가?》

놈들은 구두발로 담배불을 꺼버리고 찔꺽 침을 뱉었다.

맨 처음 창순이 아버지가 안경쟁이한테 주르르 끌려나갔다.

저쯤 사라졌던 구두발이 뚜꺽뚜꺽 다시 다가오고 이마로 바람이 훅 스치자 첫째는 숨을 죽인채 까딱않고 누워있었다.

《요 밤알같은것이 정말 공산당이였을가?》

《그런걸 이제 가려서 무슨 소용인가.》

구두발이 엉뎅이에 두번 호되게 부딪치더니 억센 손이 발목을 휙 잡아채갔다. 첫째의 몸뚱이가 허궁 들려 저쯤 가서 땅에 툭 떨어졌다. 코등이 깨지는것 같았지만 참았다. 다음에 질질 끌려온 금숙이 어머니의 다리가 첫째의 허리에 털썩 올려놓이였다.

얼마후에 해가 지고 마당은 조용해졌다. 주막집쪽에서 자동차가 부르릉거리고 골목마다에서 말달구지를 끌어내는 소리가 소란스럽게 들리였다. 그와 함께 왜놈들은 무어라고 왝왝 소리를 지르며 한곳으로 몰려갔다.

첫째는 제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수 없었다. 총에 맞으면 이렇게 되는것인지, 이러다가 이제 숨을 못쉬게 되여 죽고마는지 알지 못하였다. 그는 사위가 고요해졌을 때 배에 깔린 손가락을 조금씩 놀려보았다. 아무 일도 없게 되자 다음에는 발가락을 놀려보았다. 그것도 별일 없다. 그다음에는 머리를 약간 들어보았고 잠시후에는 몸을 반쯤 일으키고 좌우를 둘러보았다.

왜놈들은 보이지 않는다. 첫째는 재빨리 일어나 밭뚝을 기여내려갔다. 누나가 어데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시체들속에는 보이지 않았다. 첫째는 개울을 건너 마을사람들이 모여있는 산으로 넋없이 올리달았다. 그때 난데없이 왼편등성이에서 《첫째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달리면서 고개를 돌려보니 그것은 누나였다. 누나는 나무줄기를 훑어잡으면서 구울듯이 달려내려왔다.

《누나야-》

오누이는 골짜기 초입에서 부둥켜안았다.

《첫째야, 네가 살았구나!》

누나는 정신없이 첫째의 등을 쓸면서 몇번이고 중얼거렸다. 첫째는 누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여태 참아오던 울음을 터쳐버렸다. 그는 흐느끼면서 끅-끅- 목메인 소리로 부르짖었다.

《누나야, 철남이가 죽었어. 철남이 어머니도 죽었어. 그놈들이 불에 태워죽였어.》

《…나도 봤다.》

뜻밖에도 누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는데 첫째의 등을 어루만지던 손이 한자리에 멎어서 움직이지 못하였다. 한참 울고난 첫째는 너무나 조용한 누나가 이상하여 고개를 쳐들었다. 누나는 원한이 맺힌 눈길로 왜놈들이 사라진 길쪽을 쏘아보고있었다.

첫째는 그 눈길에 저도 모르게 신경이 팽팽해졌다.

《누나.》 하고 가슴을 잡아흔든 다음 첫째는 응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난 누나가 총에 맞은줄 알았어.》

《팔을 좀 다쳤지만 싸매서 일없어. 난 네가 죽은줄 알고 막 울었다.…》

누나는 여느때와 같이 싹싹한 투로 이렇게 말하면서 흙이 게발린 얼굴이며 피가 묻은 손등을 닦아주고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는 마을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손목을 끌고갔다. 맞은편 산우에 해가 뉘엿뉘엿 져간다. 불타버린 마을우에 푸른 연기가 자욱하고 매캐한 그을음내가 풍겨온다. 성안으로 향하는 길우에 철수하는 왜놈들의 긴 행렬이 바라보이였다.

부르릉거리는 자동차들, 수레를 끄는 말들, 짐을 잔뜩 걸머진 병졸들이 헌 걸레짝모양 한길에 넌질넌질 늘어섰다. 여기저기서 꿱꿱 짐승의 울부짖음같은 고함소리가 울렸다. 병졸들은 조선사람들의 농짝에서 뒤져낸 옷가지와 천필들 그리고 값가는것들을 나누어가지느라고 눈을 희번덕거리고있다. 그들은 상관이 웨치는 고함소리도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왜놈들에게 특유한 근시안과 버덩이들을 드러내놓으며 웃고 지껄여대며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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