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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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식은 물통을 옆에 척 놓으며 도리질을 했다.
《안되오. 이 물을 꿔주었다가 언제 받겠소? 전자수산기와 같다고 알려진 부군단장동무한테도 빈틈이 있구만! 허허…》
《제명산밑에 내려가서 몇배로 갚겠습니다.》
코웃음을 쳤다.
《몇배가 아니라 몇백배로 갚은들 물이 흔한 산밑에서야 뭣에 필요가 있소? 아직 갈길이 먼데 어쩐다?》
《동지애두 없습니까?》
《지금 내가 동무들한테 배워주어야 할 동지애는 물을 주지 않는거요. 한번 진통을 겪어봐야 병사들을 위해줄수 있는 방도가 생각날거란 말이요. 이제 보니 둘다 전투준빈 락제요.》
그들은 장대식이 밥을 짓는동안 불이나 때주는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밥이 다 되자 너럭바위우에 밥통을 가져다놓고 뚜껑을 열었다. 흰김이 물씬 피여오르며 구수한 밥냄새가 산정에 퍼져갔다.
《허허… 아주 잘됐구만. 밥까지 나 혼자 먹으면 후날 세상에 둘도 없는 구두쇠라고 두고두고 비난할테지. 자, 나무저가락을 한조씩 만들어가지고 이리 가까이 오시오. 왜들 망두석처럼 앉아있소. 어서 오라니까, 굶어가지고서야 허기증이 나서 나머지 거리를 어떻게 가내겠소?》
류경두의 눈길은 장대식의 밥통이 아니라 물통에 멎어있었다. 더는 갈증을 못참겠던지 말라드는 입술을 혀로 적시며 간청하듯 말했다.
《밥은 축내지 않겠는데 그저 물만 한모금 마시게 해주십시오.》
그제서야 장대식은 둥그런 얼굴에 유한 웃음을 담으며 물통을 류경두에게 내밀었다.
《자, 받소. 평상시에는 제일 흔한게 물같지만 전투시 산악에서는 물이 제일 귀중하오. 물이 없이야 생명활동을 유지할수 없지 않소.》
류경두는 생각깊은 눈길로 물통을 바라보며 슬그머니 손에 받아들었다. 한모금만 마시고 제꺽 입을 뗀다.
《어서 더 마시오.》
《못 마시겠습니다.》
《왜?》
《구실을 못한 자책때문입니다.》
《나도 같소.》
물통은 김천길에게 넘어갔다. 그 역시 한모금 마시고는 마개를 꾹 막았다. 가야 할 길을 생각했던것이다. 장대식은 조용히 웃었다.
《부군단장동무, 지금까지 오면서 무엇을 생각했소?》
《우선 서로 돕고 이끄는 동지애가 없이는 이 제명산을 정해진 시간내에 통과할수 없다는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요. 둘째는?》
《음료수가 여느때 행군훈련의 배로 요구되는것만큼 사전에 그 보장대책을 철저히 세워야 한다는것입니다.》
《옳소. 모든 지휘관들이 행군훈련에 앞서 그걸 놓치지 않게 해야 하오. 세번째는 뭐요?》
《훈련초기에는 갑자기 과중한 육체적부담을 받기때문에 통과시간을 좀 늦추었다가 계획적으로 당겨야 한다는 판단이 절로 생깁니다.》
장대식은 오른손주먹으로 왼손바닥을 철썩 갈겼다.
《말하자면 행군훈련을 비롯한 모든 훈련을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전투성의 원칙에 드팀없이 서되 철저히 과학화해야 한다는거요. 이번엔 부부장동무의 느낌을 들어봅시다.》
《올챙이적 생각은 못하고 개구리된 생각만 했다는 자책이 제일 가슴을 칩니다. 나의 병사시절경험에 비추어보면 새벽 2시경에 졸음과 허기증이 제일 견디기 어렵게 덤벼들었습니다. 그런 땐 그 어떤 별식보다도 닦은 강냉이 한줌이 제일 좋더군요.》
《그러니 극단적인 허기증이 올수 있는 병사들을 예견해서 그에 따르는 대책도 미리 세워야 한다는거겠소?》
《그렇습니다.》
목적을 달성한 기쁨으로 하여 장대식의 둥그런 얼굴에는 흐뭇한 웃음이 한껏 어렸다.
《전투행동은 가장 어려운 조건속에서 진행되오. 훈련목표를 높이 정할수록 나부터가 병사들을 위하는 심정이 더욱 뜨거워야겠는데 뼈심을 들여가며 바친 마음도 없이 요구성만 높였으니 탈수환자들이 왜 나타나지 않겠소?
산밑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라왔다. 기세좋게 하늘을 찌르며 솟아오른 제명산의 나무들이 쏴- 하고 가지를 흔들며 설레인다. 침묵… 침묵속에 서로의 감정이 합쳐지는듯 했다.
며칠이 지나서부터 제명산으로는 흐름도 맥박도 새로와진 행군대오가 사품쳐오르게 될것이다.
쏴- 또다시 불어올라오는 시원한 바람이 나무숲을 흔든다.
장대식은 벅찬 환희를 느끼며 류경두를 돌아보았다.
《부군단장동무! 내가 너무 땅크처럼 내밀어서 미안하오.》
《아닙니다. 결함은 훈련을 담당한 저에게 더 많습니다. 앉은자리에서 제명산이 험하다는 타산만 했지 오늘처럼 병사들을 위하여 먼저 몸을 내댈 생각을 못했으니까요.》
《교훈은 뭔가? 병사들을 친어머니심정으로 사랑하는 지휘관의 참된 풍모부터 갖추기전에는 만사를 그르친다는거요.》
《나역시 그런 교훈을 찾았습니다.》
김천길이 장대식의 말에 긍정했다.
《자, 그럼 또 가보기요.》
세사람이 길을 떠나기 위해 바위잔등우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릉선옆 다래덩굴속에서 무슨 인기척소리가 났다.
《저 덩굴안에 누가 있는것 같습니다.》
김천길이 귀를 도사렸다.
《그러니 우리 말고도 이 산릉선우에 올라온 사람이 또 있는게 아니요?》
장대식이 역시 귀를 강구며 다래덩굴이 뒤엉킨쪽을 바라보았다.
《산짐승이 아닐가요?》
장대식이 도리질을 하며 다래덩굴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맹수일수도 있습니다.》
김천길이 막아나섰다.
《맹수는 무슨 놈의 맹수.》
김천길이를 앞서 다래덩굴앞에 이른 장대식은 그속을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다. 강창운이가 잎떨어진 다래덩굴속에 쭈그리고앉아있는것을 발견했던것이다. 도대체 저기에 앉아 뭘하는걸가? 자세히 살펴보니 군용물통주둥이를 다래덩굴줄기에 대고있었다.
여기로 떠나오기 전, 장대식은 굳어진 생활관습 그대로 강창운을 찾아가서 자기의 행동계획을 이야기했다.
《정말 좋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럼 떠나겠소.》
《나도 함께 가보고싶은데… 하여튼 먼저 떠나십시오.》
이렇게 말하던 군단정치위원이 어느새 뒤를 따라선것이다.
《정치위원동무!》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쳐불렀다.
그제서야 강창운은 뒤를 돌아보더니 다래덩굴줄기에 대고있던 물통을 들고일어섰다. 그러더니 무슨 굉장한 보물이라도 자랑하듯이 물통을 공중높이 쳐들고 흔들어댔다. 물통안에서 출렁거리는 물소리가 들렸다.
《군단장동지! 이 소릴 듣습니까?》
(엉?)
뒤따라온 류경두와 김천길이 거의 동시에 강창운이 손에 들고 흔드는 물통을 바라보았다.
《정치위원동지, 그거야 물통안에서 물이 출렁거리는 소리가 아닙니까?》
김천길이 의아스러운 눈길로 강창운을 마주보았다.
《어느 책에선가 보니 다래나무에 수분이 류달리 많다고 하길래…》
장대식은 가슴이 후더워졌다. 48련대가 제명산을 처음으로 통과하던날 탈수를 만나 쓰러진 병사를 무릎우에 올려놓고 물이 없는가고 안타까이 찾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몇방울의 물이 얼마나 소중했던가. 물이 떨어진 야전조건에서 수분을 보충할수 있는 방도의 하나를 지금 정치위원동무가 찾았다.
장대식은 강창운의 앞으로 다가가 물통을 손에 받아쥐고 흔들었다.
물소리, 물소리… 다래나무물소리…
《병사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깨우쳐주는 소중한 물소리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모금씩 맛보기요. 그러되 그 값은 병사들앞에서 톡톡히 치르어야겠소.》
장대식의 말에 류경두와 김천길도 생각이 깊어졌던지 물통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