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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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토끼풀까지 주고났을 때 남편이 집뜨락에 들어섰다.
《늦으셨군요. 저녁식사는 못하셨겠지요?》
《했소. 들어가기요.》
방에 들어와 군복을 벗는 남편의 눈가에는 왜서인지 물기가 언뜩이고있었다. 장대식이와 함께 수십년세월 생활하여오면서 남편의 표정에 예민해진 박선영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군복을 받아 옷걸이에 걸면서 나직이 물었다.
《우에 올라갔다 무슨 일이 있은게 아니예요?》
장대식은 뜻밖에도 손수건을 꺼내여 눈가로 가져가며 쏘파에 가앉았다.
《있었소.》
박선영은 가슴이 떨려옴을 느끼며 남편을 조심스레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데요? 혹시?…》
왜서인지 더 말을 잇기가 두려웠다.
장대식은 자리를 고쳐앉으며 두눈이 올롱해진 안해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여보! 난 오늘
그것도 아침 겸 점심으로 드시며 나라없던 그 세월에 내가 겪은 아픔을 헤아려주실 때 그리고 제대로 집행하지 못한 훈련을 두고 그 원인을 하나하나 안타까이 깨우쳐주실 때 나는 그만 목이 콱 메여올랐소.
어머니도 주지 못했던 사랑을
장대식은 어느덧 옛시절의 추억속에 잠겨들었다.
…어머니를 잃은 속에 맞는 그해의 설날 아침에는 함박눈이 소리없이 내렸다. 어머니가 한겨울에 악착하고 린색하기로 소문난 지주네 집에 끌려가 빨래를 해주느라 산후탈에 걸렸는데 약한첩 제대로 못쓰고 시름시름 앓다가 한해전에 세상을 떠났던것이다. 어머니없이 맞는 설이다보니 밥상우에는 강보리밥밖에 오른것이 없었다. 아버지는 산에 옹노를 놓아 메토끼 한마리를 잡았다. 그것을 꼴망태에 넣어가지고 남보다도 먼저 서둘러 집을 나섰다. 설을 맞으며 세배를 하지 않으면 심보가 고약한 지주놈이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가며 땅을 떼든가 제일 나쁜 땅을 주니 할수 없었던것이다.
나어린 장대식이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나섰다. 아버지가 날씨도 춥고 눈도 오는데 집에 있으라고 했으나 듣지 않았다. 아버지가 힘들게 잡은 토끼를 지주에게 거저 준다는것이 어쩐지 아쉽게 생각되였던것이다.
높은 울타리를 친 지주네집은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퇴마루가 보이고 그 퇴마루우의 미닫이를 열면 방안이 휑하니 들여다보인다. 마름이 아버지가 찾아왔다는것을 알리자 미닫이가 드르릉 열렸다.
아침밥을 먹으려던참이였는지 밥상우에 통닭구이, 지짐, 찰떡, 돼지고기편육 등 갖가지 기름진 음식이 차려져있는것이 들여다보였다. 아버지는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나서 꼴망태에 넣어가지고온 메토끼를 옆에 서있는 마름에게 넘겨주었다.
이때 아버지를 난감하게 하는 일이 생겼다. 곁에 서있던 철부지 대식이가 《아버지! 나 저런 찰떡 해달라…》 하며 손가락으로 지주네 밥상을 가리켰던것이다. 바빠맞은 아버지가 아들의 손을 내리웠으나 눈꼬리가 잔뜩 까부라붙은 지주가 그것을 보지 못했을리 만무했다. 청천벽력같은 고함이 터졌다.
《이놈아! 설날 아침에 재수없이 애새끼는 왜 꽁지에 달고왔어. 썩 사라져라-》
지주의 집을 황급히 나선 아버지는 애어린 아들의 볼기를 갈겼다.
《이녀석아, 왜 따라와가지고 설날 아침부터 구박을 받는거냐. 가난이 소아들보다도 못하다는걸 모르느냐?》
대식은 설음에 겨워 울었다. 화김에 아들을 때린 아버지는 설날 아침 자식의 소원 하나 풀어주지 못한 아픔으로 하여 가슴을 텅텅 두드렸다. 그러더니 어린 자식들을 집에 내팽개치듯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셋째누나가 엉엉 슬피우는 동생을 달래다못해 손을 잡아끌었다.
《대식아, 우리 맛있는거 얻으러 가자.》
그 말에 귀가 솔깃해서 셋째누나의 뒤를 따라나섰다.
회백색하늘에서는 반갑지도 않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내렸다. 옆집 강아지들이 엄지와 함께 눈속을 딩굴며 재미나게 놀고있었다. 강아지도 엄마가 있는데 난 왜 엄마가 없나. 아이의 설음중의 설음은 엄마없는 설음이다. 동생이 발이 시리다고 칭얼대자 누나가 등에 업었다. 어머니가 살았을 때 배워준 노래로 어린 동생의 서글퍼진 마음을 달래였다.
《칙칙폭폭 기차는?》
《빨라요.》
《빠른것은?》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요.》
《높은것은?》
《…》
《누나,
동생보다 네살 우인 누나가 그것을 알리 없었다.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들은것이 생각나서 그대로 말해주었다.
누나는 높지 않은 고개를 하나 넘었는데도 계속 가기만 했다.
《누나! 어디로 자꾸 가나?》
《이제 고개 하나만 더 넘으면 돼.》
설날에 동냥다니는게 창피해서 딴 동네로 찾아가는 누나의 마음을 알수 없는 그였다. 점심무렵 두번째 고개마루에 올라선 누나는 눈송이 날리는 산기슭에 촘촘히 모여앉은 초가마을을 가리켰다.
《넌 저쪽으로 가거라. 누난 이쪽으로 가볼테다.》
누나는 먹을것을 달라고 할 때에는 어떻게 말해라,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집에는 가지 말라, 그런 집은 아직 밥을 채 짓지 못해서 허탕을 친다. 먹을걸 주면 꼭 인사를 하라고 말해주었다. 셋째누나와 함께 동냥한 음식을 들고 집에 오니 남의 집 민며느리로 팔려가 살고있는 맏누이가 와있었다.
《너희들 어디 갔댔니?》
맏누나가 손과 발이 꽁꽁 언 남동생을 품에 안으며 물었다.
《밥빌러 갔댔어.》
맏누나는 셋째누나를 쏘아보며 욕을 했다.
《설날 아침부터 동생을 데리고 남의 집처마밑으로 동냥을 다녀!》
《그럼 어쩌나, 대식이가 자꾸 떡을 달라고 우는데…》
그 말을 들은 맏누나가 울자 둘째, 셋째누나도 울고 장대식이도 덩달아 울었다.
《왜들 그러느냐?》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종일 어디엔가 나가있던 아버지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들어와 소릴쳤다.
《아버지, 설인사 받으세요.》
맏딸이 눈물을 거두고 아버지앞에 절을 했다.
《오! 너 왔구나. 자, 받아라.》
아버지는 참지에 싼 찰떡 몇짝을 아이들앞에 불쑥 내놓고는 아래목에 누워 드렁드렁 코를 골았다. 그 찰떡 몇짝을 위해 부자집에 찾아가 남들이 쉬는 설날에 종일 험한 일을 하고온 아버지였다.…
탁자우의 전화기가 신호종을 울렸다. 이밤에 웬 전화일가? 혹시 전연에서 정황이라도 발생한게 아닐가?
장대식은 얼핏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새벽 1시였다. 바싹 긴장되는 감을 느끼며 송수화기를 들었다.
뜻밖에도
《군단장동무! 지금 뭘하고있소?》
《뭐 특별히 하는게 없습니다.》
《비판을 받고 내려간 동무가 잠을 자지 못할것 같아서 전화를 걸었소.》
장대식은 갑자기 목에서 무엇인가 울컥 치밀어올랐다. 두눈을 슴벅이며 불덩이같은것을 가까스로 넘기고야 물먹은 음성으로 겨우 말씀드렸다.
그 총대를 강화하는 지름길이 병사들을 어떻게 사랑하는가 하는데 달려있다는것을 귀밑머리가 희슥해져서야 깨달았으니 그 자책이 너무 커서…》
《군단장동무, 난 동무를 믿소. 적들이 준동할수록 우린 병사들속으로 더 깊이 들어갑시다.》
《부인에게 나의 인사를 전해주시오.》
《자, 그럼 편히 쉬오. 이만합시다.》
장대식은 송수화기를 든채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오래도록 서있었다. 옆에 나란히 선 박선영의 량볼에서도 수은같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있었다.
행복속에 깊어가는 밤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