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 회
18
(1)
검푸른 하늘과 맞닿은 산릉선을 따라 발가우리한 노을이 붓으로 그은것처럼 가늘게 비끼기 시작했다. 하늘 한가득 널려 깜박깜박 졸던 별들이 하나, 둘 가뭇없이 사라지고 새별만이 유난히 반짝거린다. 아침노을은 점차 색조가 짙어가며 넓은 하늘공간에 황홀한 금빛세계를 펼쳐놓았다.
제명산너머의 골바닥에 이른 장대식은 손목시계를 자주 들여다보았다. 이제 얼마 안있어 첨병중대로 선발된 대덕산중대의 첫 행군대오가 제명산을 넘어 저 가파로운 비탈길을 타고내려올것이다. 과연 제시간에 제명산을 통과해낼가? 그는 점차 만만치 않은 모습을 드러내는 제명산마루를 불안한 마음으로 올려다보았다.
장대식이 서있는데서 얼마간 떨어진 곳에는 군단병원에서 나온 군의, 간호원들이 위생차에 앉아 대기하고있었다. 제명산 전구간에 지휘통신선을 늘인 통신병들이 지금은 그의 옆에서 감도시험을 하고있었다.
종합훈련장을 떠난 그날부터 한주일가까이 낮과 밤이 따로없는 시간을 산지에서 보낸 장대식의 몸은 물먹은 솜처럼 나른했다. 그는 군단장이면서 동시에 48련대의 강평원이기도 했던것이다. 정황을 받은 련대장의 임무료해, 정황판단, 결심채택, 명령하달에 따르는 모든 전투공정의 어느 하나도 시야에서 놓치지 않고 주시해야 했다. 불의적인 정황은 또 얼마나 많이 주었던가. 련대가 공격에로 넘어갔을 때는 여기저기 왔다갔다하면서 련대장은 물론 대대장, 중대장들의 전투임무 수립상태를 료해해보고 부족점을 일깨워주었다.
증강한 보병련대의 전술연습은 엄격한 요구속에 순조롭게 진행되여갔다. 이제 제명산을 제시간에 통과하여 총참모부의 전반적인 타격훈련계획에 따라 다른 방향에서 기동하여오는 부대들과 협동하여 결전진입만 성과적으로 하면 된다.
날이 환히 밝았다. 갑자기 야외탁우에 설치되여있는 전화기의 종이 다급히 울렸다. 장대식은 얼른 다가가 송수화기를 들었다. 제명산너머에 있는 류경두의 다급한 목소리가 귀청이 터질듯 크게 울렸다.
《군단장동지, 새로운 정황이 생겼습니다. 제명산에 올라 뾰족고지를 넘던 한 병사가 쓰러졌습니다. 눈이 잘 보이지 않고 어지러움, 머리아픔으로 하여 비칠거리다가 쓰러졌다는것으로 보아 심한 탈수로부터 오는 증세같습니다. 그런 병사들이 한둘이 아니랍니다.》
장대식은 송수화기를 꽉 그러쥐였다. 사람의 몸에서 수분은 몸무게의 60%를 차지한다. 탈수가 20%계선에 이르게 되는 경우 생명이 위험하게 된다. 가슴이 섬찍해졌다. 지금 련대 전체는 물을 제대로 보충받지 못한 상태에서 행군하고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적인 생명활동을 담보해주는 물을 제때에 보충받지 못한다면 이제 또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쓰러질지 알수 없었다.
《어떤 대책을 세웠소?》
《군인가족들을 동원하여 먹는물을 날라오게 했는데 언제 도착하겠는가 하는것도 문제입니다.》
《알겠소.》
장대식은 송수화기를 놓기 바쁘게 대기상태에 있는 군의, 간호원들에게 제명산으로 빨리 올라가 탈수환자에 대한 긴급치료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도저히 앞일을 예측할수 없는 시간이 한초한초 흘러갔다.
속이 타다못해 가슴에 재가 한가득 들어차는것 같았다. 마침내 장대식은 험하디험한 제명산릉선의 20번째 뾰족고지우로 숨가삐 뛰여올라갔다. 아닌게아니라 대오의 맨앞에서 행군하던 대덕산중대가 제명산의 19번째 릉선고지밑에 이르러 휴식하고있는것이 내려다보였다. 휴식이라기보다 여기저기 널려 배낭에 기대고 반쯤 누워있는것이 거의나 늘어진 상태로 느껴졌다.
(첨병중대가 저 모양을 하고있으니 야단이 아닌가.)
눈에서 불이 일었다. 장대식은 앞뒤를 둘러보았다. 지금 자기가 서있는 20번째 뾰족고지는 19번째 고지보다 더 높았다. 18번째, 17번째… 줄지어 늘어서있는 산릉선의 뾰족고지들… 지도상으로 볼 때와는 뭔가 다르다는 감각이 느껴졌지만 언제 깊이 생각해볼새없이 허겁지겁 대덕산중대가 휴식하는 장소로 달려갔다. 돌부리를 걷어차는 바람에 발가락이 문드러지는듯 아팠으나 언제 그걸 돌볼 경황도 없었다.
얼굴이 온통 땀에 젖어가지고 헐떡거리면서 다가온 그앞으로 중대장이 거쿨진 몸을 약간 비청거리며 마주 걸어왔다.
《탈수환자가 나타났다는것이 사실이요?》
《예, 다른 중대에서 몇명 나타나 군의, 간호원들이 긴급후송했습니다. 우리 중대에서는 리성병사가 담가에 실려갔습니다.》
《리성이가? 왜?》
중대장은 수분부족으로 입술이 타들어가는지 연방 혀를 감빨며 설명했다.
《17번째 벼랑길을 톺아오를 때 물동이만한 돌이 갑자기 굴러내렸습니다. 위급한 순간 그 돌을 가슴으로 막아나섰습니다.》
《많이 다쳤소?》
《갈비뼈가 부러지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듯 찌르르해왔다. 리성이의 담찬 얼굴이 얼핏 떠오른다. 어떻게 하면 일당백병사로 빨리 될수 있는가고 속삭이던 그 애된 목소리가 금시 들리는듯싶다. 얼마나 기특한 병사인가. 하지만… 언제 그에 대한 감상적인 생각에 잠겨있을새가 없었다. 이제 또 탈수로 인한 환자들이 생기지 않겠는지 가늠할수가 없다. 걱정스런 마음으로 뒤쪽을 바라보았다. 가스정황을 받고 방독면을 쓰고 전진하는 1대대 2중대병사들의 모습이 내려다보인다. 그런가하면 2대대쪽에서는 《적》 매복구역을 통과하는지 가탄발사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강평원들은 훈련계획에 있는대로 각이한 전투정황을 련속 조성하고있었다. 훈련계획을 세울 때 자기가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였던것이다.
《중대를 빨리 뽑으시오.》
장대식은 중대장에게 이렇게 명령하고나서 약간 둔덕진 곳에 있는 바위우에 올라가 량손을 허리에 짚은채 릉선을 따라 전진하는 행군대오를 바라보았다.
대덕산중대는 곧 출발했지만 기진한 병사들의 행군속도는 장대식이 기대했던것만큼 빠르지 못했다.
속이 달아오른 장대식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 정도의 행군속도로는 결전진입계선까지 제시간에 도착해내지 못할것 같았다. 어쩌면 좋은가. 시간은 전투의 생명이다. 만약 결전진입시간이 늦어지면
그 경우 우리의 훈련성과를 기대하고계시던
내가 무엇을 타산 못했을가? 지나친 욕심을 부리다나니 주관에 사로잡혔던것은 아닌지? 부군단장동무랑 그렇게도 우려했는데…
시간은 거침없이 흘렀다.
지금 주도성중장은 결전진입계선에서 한초한초 가슴을 조이며 48련대를 기다릴것이다.
맥이 빠질대로 빠진 저 병사들을 어떻게 불러일으켜야 하는가?
장대식이 이러지도저러지도 못하고있을 때였다.
19번째 고지릉선밑에서 누군가 확성기를 입에 대고 시를 읊는 소리가 들려왔다.
…
총대를 혁명의 전위에 내세워주신
심장의 박동으로 받아안고 전진하는
일당백고향의 병사들이여!
걸음을 다그치자
그대의 발걸음 떠지면
뒤따르는 련대의 걸음이
따라서는 전군의 걸음이
그만큼 떠지거니
백두에서 시작된 우리의 행군길
남해까지 이어가야 하거늘
그대의 발걸음 고향이 지켜본다
조국이 지켜본다
군단선전선동부장 김송풍의 목소리였다. 결정적인 대목에 와서 김송풍이 화선선동의 북소리를 힘있게 울리고있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