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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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은 더 긴말을 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쯤하면 광훈이가 아버지에 대한 표상도 그리고 자기가 군사복무를 더 하고싶어하는 마음도 어느정도는 리해하리라고 믿었기때문이였다. 그는 자기의 말에 대한 광훈이의 반응상태를 은근히 기다렸다. 왜서인지 광훈이는 한동안 묵묵히 앉아있기만 했다.

(왜 그럴가?)

한편 연금이의 이야기를 다 들은 김광훈의 머리속에는 연구소문제를 놓고 군단장을 만났던 그날에 받아안은 충격이 다시금 새삼스럽게 되살아났다.

그날 장대식이한테 들은바 그대로 연금이가 과연 훌륭한 처녀로구나 하는 느낌이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하다면 나는 군단장동지한테 비판을 받은 그날 대덕산에 영원히 뿌리를 내릴 결심이 확고해져서 연금이를 만났던가. 결코 그런것은 아니였다. 아직은 서로가 그런 지향의 공통점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나 나는 일생과 관련된 일인만큼 그리고 남자인만큼 주동적인 위치에 서서 모든 문제를 끌고나가야 한다.

일생문제가 아닌가.

마침내 그는 연금을 마주보았다.

《연금동무! 나는 동무의 그 훌륭한 생각을 막고싶은 생각이 전혀없소. 그러나 나로서도 바삐 가야 할 길이 있기에 동무가 제대될 날을 손꼽아기다려온것만은 사실이요. 물론 아직은 두고보아야 할 일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동무의 기대와는 달리 내가 대덕산을 떠날수도 있기때문에 하는 말이요.》

(대덕산을 떠나다니?)

김연금은 뜻밖인듯 고개를 획 돌렸다. 의아한 눈길로 광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소.》하고난 광훈은 아버지문제로부터 시작되여 연구소와 자기를 둘러싸고 복잡하게 벌어졌던 일을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사실그대로 다이야기해주었다. 이날에야 비로소 김광훈의 인간됨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게 된 김연금은 낯색을 흐리며 고개를 외로 꺾었다. 갑자기 생각이 착잡해지며 눈물이 솟구쳤던것이다.

그리도 마음속깊이 의지하며 래일의 대덕산거목이라고 생각했던 광훈이가 마음속 뿌리가 들린 상태라고 생각하자 그의 주장이 아무리 타당하다고 할지언정 자기의 지향을 거기에 따라세우고싶지는 않았다. 인생의 참다운 목표도 없이 일부 녀성들처럼 좋은 대상이 나서면 시집이나 잘 가면 그만이라는 견해가 연금이에게 있었다면 사실 그의 운명은 이미전에 다르게 그어졌을것이다. 하나 그는 마음도 시선도 분산시키지 않고 오직 광훈이만을 믿어왔었다.

그런데… 꼭 그에게서 배반당한것만 같았다. 처녀는 자기와 지향이 달라보이는 김광훈이와 장차 운명을 함께 하기가 어려우리라는 위구심이 스며드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한가지 묻고싶은것이 있습니다. 솔직히 대답해주겠습니까?》

마침내 연금은 꼭 다물고있던 입을 열었다.

《얼마든지…》

《아버님과 어머님의 생각이 서로 다른데 어느 의사를 따를 결심입니까?》

《물론 나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것이 옳다는것은 알고있소. 그러나 지금상태에서 어머니의 의사를 무시할수도 없소.》

《어쩌면… 전 지금 광훈동지의 그 망설이는 생각이 아니라 명백한 결심을 알고싶습니다.》

《만약 내가 어머니의 의사를 따른다면 그땐 어떻게 하겠소?》

《그 대답을 이 자리에서 꼭 들어야 하겠습니까?》

《그렇소.》

김광훈은 련이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대답을 독촉하였다.

그러나 연금은 머리를 떨군채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허, 이거 답답하구만. 말을 해야 할게 아니요.》

그제서야 연금은 꼭 다물고있던 입을 열었다.

《전 아직까지 광훈동지가 그 누구보다도 대덕산을 사랑하는줄로만 알고있었는데…》

연금이의 말을 들은 광훈이의 얼굴에 어딘가 모르게 몹시 불쾌해하는듯한 기분이 짙게 떠돌았다. 그의 자존심을 심히 자극한게 분명했다.

아닐세라 그는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연금동무, 이 자리에서 명백히 알것은 동무의 선택에 나의 의사를 복종시킬수 없다는거요. 혹시 나를 오해할수도 있을것 같아서 말해두는데… 사실 나도 대덕산을 떠나갈 생각을 이미전부터 가지고있은것은 아니였소. 아까도 말했지만 자식된 도리를 다해야 할 정황에 갑자기 부딪치다나니… 만약 동무가 이 심정을 리해하여주지 못한다면 나는 둘째치고라도 앞으로 우리 어머니가 동물 어떻게 생각할것 같소? 더이상 깊이 들어가지 맙시다. 난 그저 내 생각을 말했을뿐이요.

그만합시다. 지금 나한테는 더 긴말을 할 시간적여유가 없소. 래일 종합훈련장으로 나가자면 그 준비도 해야 하오. 말하는 도중에 자주 시계를 보았는데 너그럽게 리해해주시오. 미안하오.》

그리고는 바삐 대대지휘부쪽으로 뛰여갔다.

광훈이로부터 전혀 예견치 못했던 정신적타격을 받고 중대로 돌아온 연금은 군관침실로 들어가 어깨를 떨며 한동안 흐느꼈다. 하지만 운다고 해서 리해되고 해결될 일이 아니였다.

이튿날 중대에 비상소집구령이 울렸다. 녀성기관총중대도 48련대에서 진행하는 증강한 보병련대의 전술연습에 배속되였던것이다. 명랑한 생활로 들끓던 병영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늘 함께 생활하던 중대병사들과 갈라진 연금은 마음이 적적해서 견딜수 없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던 끝에 종합훈련장에 나가 중대병사들도 만나보고 그 기회에 광훈이와 리해를 두터이하리라 결심했다. 그런데 광훈이와 만나보지도 못한것이다.…

연금이의 이야기를 다 듣고난 김순희는 숨을 가늘게 내쉬며 앞으로 어떻게 하겠는가고 물었다.

《군단정치부에 가서 복대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려고 해요.》

《그럼 그 대대장동무와는?…》

《…》

연금은 대답을 못했다.

《할수 없지요뭐. 난 광훈동지와 헤여지면 헤여졌지 아버지의 뜻은 절대로 어길수 없어요.》 하는 말이 혀끝까지 묻어올라왔지만 꼴깍 삼키고말았다.

지금이라도 김광훈의 생각이 연구소쪽에서 돌아섰으면 얼마나 좋을가 하는 생각이 가슴속에서 끓고있었던것이다. 지금껏 옥생각을 품고있었지만 정말 그것을 입밖에 내자니 저어되였다.

사랑이란 무슨 물건처럼 쉽사리 몸에서 떼던질수 있는 그런것이 아닌 모양이였다.

하지만 복대문제만은 더욱 굳어졌다.

설사 사랑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어도 아버지의 뜻, 자기의 결심을 어길수도 굽힐수도 없는 그였다.

연금이의 결심을 안듯 김순희는 한동안 신중한 생각에 잠겨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 명성이 아버지(남편)가 들어오면 해결책을 함께 의논해보자요. 명성이 아버지도 연금동무와 비슷한 경로를 걸었으니까요. 어떤 측면에서는 오히려 연금동무보다 더 풍부한 경험자예요.》

《경험자라니요?》

연금이의 두눈이 올롱해졌다.

《연금동문 지금 복대를 희망한다면 명성이 아버진 최전연으로 탄원했으니까요. 글쎄 수도가까이에 있는 부대에 배치된 우리 명성이 아버지의 가슴속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최전연의 대덕산이 바위처럼 든든히 들어앉을줄이야 어찌 알았겠어요. 수도에서 나서자란 나로서는 정말 이겨내기 힘든 정신적고충이였어요. 평양에서 살다가 남편을 따라 최전연으로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 그래서 어떻게든 남편의 마음을 돌려세워보려고 울어도 보고 아버지에게 부탁도 하면서 애써보았지만 내 힘으로써는 도저히 어쩔수 없었어요. 오죽 고집이 셌으면 한때 탄원소대장하면 대덕산군단지휘부 군관들속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까지 되였겠어요. 그 소문이 나다못해 마지막엔 장군님께까지…》

김순희는 이렇게 서두를 떼놓고나서 아득히 흘러간 처녀시절 모란봉에서 총각으로부터 사진을 받던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웃음도 있고 사랑도 있고 눈물도 있고 안타까움도 있던 복잡다단한 생활사들을 다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했다.

《난 연금동무의 복대는 지지해주고싶어요. 그렇다고 그 대대장동무와 갈라지는건 절대로 찬성할수가 없군요. 내 생각엔 그 총각대대장이 이제라도 생각을 돌릴수 있게 연금동무가 도와주는것이 좋을것 같애요.》

연금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자신없어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동무도 참… 어쩌면 그런 모진 생각을…》

순희는 민망한 눈길로 연금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연금은 모두숨을 호 내쉬였다.

자기도 모르게 두주먹을 꼭 움켜쥐며 마음을 더욱 가다듬었다.

(그래… 나도 박창걸련대장동지처럼 살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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