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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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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밤, 우리 나라 외무성의 로씨야담당 국장과 함께 교외의 솔숲 푸른곳에 위치한 숙소의 응접실에 마주앉아있는 드미뜨리 찌모페예비치 야조브의 기분상태는 매우 좋았다. 만경대학생소년궁전에서 진행하는 학생소년들의 공연을 관람하고 방금 숙소로 들어섰던것이다.

그는 응접실맞은켠 벽쪽에 놓여있는 텔레비죤화면에 얼핏 눈길을 보냈다. 텔레비죤에서는 기록영화가 방영되고있었다. 그가 입은 군복의 어깨우에는 원수별이 묵직이 얹혀있었다. 흰머리칼이 성글고 여러개의 주름살이 깊게 패인 이마, 군용지도의 조밀한 등고선들마냥 잔주름살이 얼기설기 얽힌 얼굴에는 그가 걸어온 파란많은 인생고초길이 그대로 슴배여있는듯싶었다.

조선인민군의 어느 한 부대를 방문하신 김정일동지께서 병사들과 한가정인양 오붓이 모여앉아 기념사진을 찍으시는 친근한 영상이 텔레비죤화면에 정중히 모셔졌다. 이것을 본 야조브는 자기도 모르게 숨결이 빨라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야조브는 외무성국장에게 고개를 돌리며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국장동지! 너무 무리한 요구인지는 모르겠는데 병사들과 함께 계시는 김정일동지의 영상을 텔레비죤화면으로 뵙게 되니 그이에 대한 그리움이 이제는 끌수 없는 불처럼 타오릅니다. 얼마전에도 제기했지만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에 그이의 가르치심을 꼭 받고싶습니다. 절박한 문제가 있어서 그럽니다.》

인상이 매우 유하고 침착한 국장은 너부죽한 얼굴에 웃음을 담았다.

《원수동지의 그 마음을…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도 귀국을 서두릅니까?》

자기를 각근히 돌봐줄데 대한 김정일동지의 지시를 집행하기 위해 국장이 애를 쓰고있다는것을 잘 아는 로장의 어글어글한 두눈에 물기가 핑 돌았다.

《조선에 와서 별로 하는 일도 없이 한갖 식객으로 있기도 그렇고…

더구나 김정일동지께서 덕만을 계속 베풀어주시니 옹색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로씨야로 빨리 돌아가겠다는겁니까?》

야조브는 덤덤히 앉아있었다. 정녕 떠나고싶지 않은 조선이였다.

그는 조선에서의 체류기일이 예상외로 늦어지고 이 나라 사람들과의 정이 자꾸 두터워질수록 마음은 바늘방석우에 앉은것 같았다. 그렇다고 하여 어제 안해와 국제전화를 통해 만났을 때 이제 곧 조선을 떠나겠으니 마음놓으라고 한 말까지 국장에게 터놓고싶지 않았다.

야조브에게서 끝끝내 귀국을 서두르는 목적과 관련된 시원스러운 대답을 듣지 못한 국장은 더 묻지 않고 응접실을 나섰다. 모스크바주재 우리 나라 대사관을 통하여 그 내막을 알아보리라 타산한것이다.

(얼마나 친절한 사람들인가.)

야조브는 곧 침실에 들어갔다. 군복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고 전등도 끄지 않은채 넓고 푹신한 침대우에 누웠다. 두손을 깍지껴 팔베개를 하고 물끄러미 천정을 올려다보니 안해의 병색어린 모습이 자꾸 얼른거렸다.

(여보! 나는 지금 김정일동지의 극진한 관심속에 매일 꿈같은 행복을 누리고있소. 그럴수록 당신의 건강상태가 더 속에 걸리는구만. 조금만 기다리오. 이제 김정일동지를 만나뵙고는 인차 돌아가겠소.)

후- 야조브는 긴숨을 내쉬였다. 홀로 이렇게 누워있으니 왜서인지 지나온 인생길이 불쑥불쑥 머리를 쳐드는것을 어찌할수 없다. 추억의 비행기에 몸을 싣자 인생의 전구간이 만리창공에서 굽어보듯 한눈에 안겨온다. 하루는 저녁에 평가하고 인생은 말년에 평가한다는 말이 있다. 과연 나의 한생은 어떻게 흘러왔던가?

…17살 애젊은 나이에 중위의 령장을 달고 제2차세계대전의 열전속에 뛰여든 그는 소대장으로부터 군관구사령관에 이르기까지 붉은군대의 거의 모든 등급의 지휘관을 다 해본데 기초하여 전투훈련국부국장, 간부총국제1국장, 간부총국장을 거쳐 이전 쏘련군의 13대 국방상까지 한 군사가였다. 어느 한때는 사회주의꾸바며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다른 나라 혁명을 위해 땀도 흘렸고 국방상이 되여서는 세계정계, 사회계, 군부층의 영향력있는 인물들과 교제하면서 쏘련을 위해 한 일도 적지 않았다. 꾸바의 피델 까스뜨로, 중국의 강택민, 체스꼬슬로벤스꼬(당시)의 후싸끄, 미국의 닉슨과 부쉬와도 배심있게 마주앉아 쏘련이라는 대국의 대표로서 군사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를 무게있게 다루어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다. 이러했던 그가 인생말년에 이르러 국방상에서 해임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구한 감방생활까지 하지 않으면 안되는 비참한 운명에 놓이게 된것은 고르바쵸브가 들고나온 《새로운 사고방식》밑에 깔려있는 속심과 그가 실시한 《개혁》, 《개편》의 돌개바람이 오늘과 같은 사회주의붕괴를 가져올수 있다는것을 미리 내다보지 못한것과도 크게 관계되여있었다. 야조브가 국방상을 할 당시 그곁에서 총무국장으로 사업한 레오니드 이와쇼브가 어느 책에 쓴것처럼 야조브를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로 이끌어간것은 고르바쵸브에 대한 환멸이였다. 고르바쵸브와 그가 이끄는 정부는 현실적으로 국가의 많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사회주의의 운명이 마지막숨을 톺아쉰다는것을 느끼고 뒤늦게나마 8월사변을 단행했지만 군대가 제구실을 못하다나니 사회주의를 지키려던 목적은 실패하고 그는 감방에 갇혀 별의별 고초를 다 겪어야 했다. 감옥문을 나서니 세상은 뒤바뀌였고 국방성에서는 1994년 2월 14일 그에게 군대에서 해임시킨다는 명령서를 떨구었다. 이렇게 되여 그는 일반군사복무년한 52년 1개월에 특혜군사복무년한을 합치면 59년 5개월이나 되는 긴 군복무년한을 가지고있었지만 하루아침에 꼭지 떨어진 호박신세가 되고말았다.

야조브는 오랜 기간 쏘련에서 존재하여오던 사회주의가 기구하게 끝난것을 생각하면 억이 막혔다. 사회주의의 붕괴는 그의 가정생활에도 련속적인 타격을 가했다. 그의 아들 이고리가 원인모를 병으로 앓다 급작스레 심장의 고동을 멈추었다. 뒤따라 이고리의 안해이고 야조브의 기쁨이였던 며느리 알렉쎄예브나가 남편의 죽음을 두고 고민하다 심장병으로 급사하였다. 아들과 며느리까지 보낸 날엔 정녕 앞이 내다보이지 않았다. 오랜 세월 장수해오던 야조브의 어머니도 이무렵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잃어버린 사회주의와 군대에 대한 슬픔과 좌절, 허무감속에 모대겼다. 무엇이든 손에 일거리를 잡지 않고서는 하루도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 모대김끝에 하루는 클라우제위츠가 저술한 《전쟁론》을 뒤적이며 자기도 사회주의붕괴를 놓고 뭔가 교훈적인 책을 써서 세상에 남길것이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왜 세계적으로 제일 강하다고 자처하던 붉은군대, 무장장비에서도 제1위를 자랑하던 초대국인 쏘련이 미제와의 대결에서 그렇게 많이 생산한 대륙간탄도미싸일 한발 쏴보지 못하고 그것을 제손으로 해체하다가 붕괴되고말았는가? 사회주의가 진정 종말을 고했는가?

이런 의문점을 시원스레 풀지 못하며 한숨속에 날을 보내던 어느날이였다. 지난해 있은 차사고로 오래동안 고생하여온 안해가 병원에 갔다오더니 종이 한장을 불쑥 내밀었다.

《여보, 몸상태가 이상해서 유능하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아보았는데 이걸 써주더군요, 남편에게 보이라면서…》

안해의 갸름한 얼굴에는 여느때에 느낄수 없었던 수심이 조용히 감돌고있었다. 야조브는 안해가 내미는 진단서의 병명을 읽어본 순간 눈앞이 아뜩해졌다. 예브게니예브나는 세해전부터 심장병을 앓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발탄과 같은 병이였어도 그런대로 치료하며 지금까지 별일없이 지내왔다. 그런데 진단결과를 보니 안해가 수술을 받지 않으면 불치의 병으로 넘어갈수 있는 징조가 있다는것이였다. 안해의 병명은 곧 암시초였다. 실험검사의 수치들이 그것을 립증해주고있었다. 다행히도 라틴어를 모르는 안해는 그것을 낌새채지 못한것 같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 병은 제가 책임지겠으니…》

그러던 안해가 별안간 《아-》하며 왼쪽가슴을 손으로 마구 두드리기 시작했다. 야조브가 어쩔새없이 두손으로 가슴을 모아잡고 상체를 비틀었다. 심장발작이 일어난것이다.

야조브는 얼른 일어나 심장병에 특효가 있다는 도이췰란드제알약 한알을 통에서 꺼내기 바쁘게 안해의 입에 넣어주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서야 안해는 가슴을 감쌌던 손을 내리웠다. 야조브는 측은한 눈길로 안해의 봉긋한 앞가슴을 바라보았다. 그 가슴안에 어제는 불발탄이 있었다면 오늘부터는 시한탄이 함께 들어가앉아 한초한초 생명을 위협하는것 같았다.

안해의 병을 고칠수 있는 방도를 모색하던 그의 뇌리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간부총국장을 할 때 어느 군관구병원에 있던 수술에 매우 능한 박사를 크레믈리병원으로 등용한 일이였다. 지난해 차사고로 예브게니예브나가 심한 부상을 입었을 때였다. 야조브가 안해를 데리고 병원에 나타나자 박사는 최대의 성의를 다했다. 물론 그때는 야조브가 국방상직에서 해임되지 않았을 때여서 그랬을테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한나라의 국방상까지 한 나를 모르는체야 안하겠지… 그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야조브가 병원에 나타나자 박사는 친절한 웃음속에 응접실로 안내한 후 조심스레 물었다.

《건강상태가 나빠져서 왔습니까?》

《실은 나보다도 안해때문에 당신을 믿고 찾아왔소.》

야조브는 인차 낯색이 달라져가는 박사의 눈동자를 놓치지 않았다.

《심한 병이 아니라면야…》

야조브는 대답대신 외투주머니에 넣고온 진단서를 꺼내여 박사앞에 내밀었다.

그것을 읽어본 박사는 몹시 난처해하며 덤덤히 서있었다. 야조브는 기다리다못해 성급히 물었다.

《혹시 수술비때문에 그러는건 아니요?》

정통을 찔리웠는지 아니면 또 다른 리유때문인지 박사는 슬그머니 두눈을 내리깔았다.

《입원비, 재진단비, 수술비도 막대하지만 수술후 그 결과도 그래 고려해야 할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여서 그럽니다.》

웬간한 병같으면 적당히 굼땔수도 있으련만 여러모로 신경까지 써야 할 치료대상이니 이 피탈, 저 피탈했다.

(내가 괜히 찾아왔군.)

그가 외면하려는 립장이라는것을 느끼자 야조브의 괴벽스런 성미가 울끈 살아올랐다.

《당신은 달라졌구만.》

《어쩌겠습니까. 나에게도 소화능력이 제한되여있는데…》

(아! 사회주의가 살아있다면 이 야조브를 이렇게까지 랭대했겠는가. 하긴 이제야…)

현실과 자기를 너무도 몰랐다는 때늦은 인식, 걷잡기 어렵게 솟구쳐오르는 손상당한 자존심, 심히 파괴된 인간의 의리와 도덕에 대한 뼈아픈 진통으로 하여 입술을 짓씹으며 박사를 한참 바라보던 야조브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알겠소. 아마도 내가 달라진 시대와 현실에 너무도 눈이 어두웠는가 보오.》

응접실을 나서는 야조브의 뒤를 박사가 가재걸음으로 따라섰다.

《미안합니다.》

(미안? 하긴 미안할것도 없지.)

흥분, 서글픔, 무맥함… 순서를 잡을수 없는 착잡한 심리의 엇갈림속에 집문앞에 이른 그는 차마 안해가 기다리고있는 방으로 들어갈수 없었다. 끝내 문손잡이를 잡지 못하고 뒤로 돌아서서 집정원을 초점없이 둘러보았다. 잎떨어진 앙상한 정원수들이 추위에 떨며 서있었다. 휘이익- 맵짠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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