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 회)
제 2 편
제 4 장
2
송수화기를 들자
《내 지금 동무를 만나려고 되돌아가는 길인데 아무래도 오늘 밤은 자강도에서 자야 할가보오. 방이나 한칸 준비해놓소.》
《만나서 보기요.》
짧은 통화가 끝나자 연형묵의 머리속에는 도내 공장, 기업소들과 벌려놓은 여러가지 사업들이 술래잡기를 하며 돌아갔다. 시간을 얼마나 쪼개쓰는분이신가를 잘 알고있기에 되돌아오신다는 밤길의 의미가 헐하게 짚여오지 않았다.
(무엇때문일가? 오늘 놓친것이 없었던가?)
종내 의문을 풀지 못한채 그는 숙소부터 정해야겠다는 생각에 덤벼치며 방을 나섰다. 어찌 다과댔던지 차가 생마처럼 들뛰였다.
다행히도 숙소로 정할만 한 곳이 인차 머리속에 떠올랐다. 앞뒤로 산을 에우고 가재가 들여다보이는 맑은 내물이 뜨락을 감돌아흐르며 밤마다 돌돌돌 자장가를 불러주는 안침한 농민휴양소였다.
요즘은 휴양생들을 받지 않아 비여있기도 하거니와 역에서도 가깝고 특전을 질색하시는
올가을에 전기난방을 할지말지하다가 명년으로 넘긴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뭐니뭐니해도 뜨끈한 구들장을 지고 자야 피곤이 풀리고 몸도 거뜬해지는 법이다.
더구나
역에 도착한 연형묵은 희붐한 전등빛이 흘러나오는 대기실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동안 밀린 숙제를 받아내자고 되돌아왔더니 성의를 보여 무마시키려고 하누만. 그래도 공부를 영 안하지야 않았겠지?》
연형묵은 아무래도
《대학을 나온지 오래다보니 머리가 영 굳어진것 같습니다.》
《허허, 그런 말은 마시오. 나도 1960년대 대학졸업생이요. 그때라고 뭐 콤퓨터의 〈콤〉자라도 배워준줄 아오?》
《나는 일생 교육을 주장하오. 만약 내가 옛 시대 대학졸업생의 수준으로 남아있다면 어떻게 되겠소? 뒤에다가 기계보좌관, 화학보좌관, 또 무슨 보좌관 이렇게 주런이 데리고 다니겠소? 배움에는 끝이 없소. 나는 지금도 배우는
숙소에 도착하신
간단한 식사가 끝나자
《희천공작기계는 잘 나가오?》
《예,
《희천이 어머니공장구실을 해야겠는데…》
연형묵은 련하기계의 안내를 받아가며 현대화로 나아가는 자령기계를 희천사람들이 몹시 부러워한다고 말씀드렸다.
《리정이… 하도 듣는 이름이여서 말이요. 어떤 때는 내가 정말 그를 몇번 만나보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까지 드오. 그런데 이상하지 않소. 가까이 보고싶은 사람과는 어쩔수없이 더 멀어져야만 하는 일들이 자꾸 생기거던.》
《그러면 불러서라도 만나실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인위는 만들고싶지 않소. 날 따라다니기보다는 일을 따라다니는게 얼마나 좋소. 그래서 어기고 그래서 멀어지고… 그러느라면 언제인가는 저절로 만나게 되겠지.》
《여기 이 화면을 보오.》
콤퓨터화면에 처음 보는 멋쟁이건물이 3차원화상으로 빙글빙글 돌아가고있었다. 내부도를 보니 5층짜리 건물이였다.
《김책공업종합대학 전자도서관이요. 어떻소?》
《멋쟁이입니다.》 흥미가 동한 연형묵이 목을 빼들었다.
4층과 5층사이 정면유리벽에 마크가 새겨져있었다.
《이것 말이요?》 마크가 확대되였다. 《전자도서관을 상징하는 마크인데 보다싶이 월계수우에 CD원판과 책을 형상해넣었소.》
《이런걸 우리 도에도 하나 차려놓았으면 좋겠습니다.》
《왜 자강도만 차려놓겠소. 앞으로는 모든 도들에 이런 전자도서관을 꾸려놓자는거요. 그때는 원격대학생도 나올수 있소.》
《원격대학생!》
듣기만 해도 희한한듯 연형묵은 입이 벙글써해졌다.
《내가 강의안을 너무 쉽게 준비한것 같다?》
그러자 연형묵은 꿇어앉았던 무릎을 쉬우며 《사실은 제가 선생님을 한분 청해다가 개별수업을 받았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내 어쩐지 다르다 했지. 어떤 선생이요?》
《녀선생입니다.
《내가 그런다는 말을 어데서 들었소?》
《송봉동무가 눈을 감기 이틀전에 전화를 걸어왔댔습니다. 우리가 어제날의 밭은 지식을 가지고서는
연형묵과 박송봉은 일찌기 부모를 잃고 낯설은 이국에서 헤매다가
《이거 등이 시린데 모포라도 한장씩 걸칠가?》
연형묵은 구들이 싸늘하게 식었음을 깨달았다. 제때에 군불을 땐다는것이 시간가는줄 모르고 앉아있었던것이다.
그가 막 일어서려는데
《됐소. 인차 날도 밝겠는데 시원히 세면이나 하기요.》
《그럼 물이라도 덥혀오겠습니다.》
《한발자국만 가면 내인데 물을 덥혀오다니, 밖에 나가기요.》
밖은 아직도 까막세상이였다. 검보라빛하늘에서는 먼 별들이 깜빡거리고 수묵화처럼 까뭇한 산발들이 허공에 걸려있어 륜곽이나 겨우 가려볼수 있었다. 제사 길잡이처럼 나섰으나 연형묵은 다녀보지 않던 길이라 발이 설어서 자꾸 무엇에 걸채이군 하였다.
그래도 내가에 들어서니 희버둥한 얼음이 깔려있어 눈이 퍽 시원했다. 아직 여물지 못한 얼음장밑에서는 드살찬 산골물이 지절지절 게정부리듯 흘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형묵은 앞질러 얼음판우에 들어서며 한발을 쾅쾅 굴러보았다.
《괜한 수고를 말고 날 따라오시오.》
세면수건을 어깨에 걸치신
《인가가 멀지 않은 모양이요.》
아닌게아니라 침울한 저기압골에 실려 어데선가 새벽불을 지피는 솔가리불내가 씁쓸히 풍겨왔다. 이를데 없는 산골정서였다.
살얼음을 다 꺼놓으신
《그런데 강의를 계속 받을것 같지 못합니다.》
《어째서 말이요?》
《선생이 시집을 가고파 합니다.》
《응?! 처녀선생이요?》
《아닙니다. 나이는 쉰고개를 썩 벗어났는데…》
《그렇소? 무슨 사연이 있는게로구만.》
《제가 편지를 한장 가지고있는데 보아주시겠습니까?》
연형묵이 드린것은 약간 검스레한 종이에다가 먹으로 박아쓴 한장짜리 편지였다. 편지의 마감에 《조카 만섭이가 올립니다.》라고 쓴 문구가 첫 눈에 뜨이시였다.
《그 청년의 고모인즉 제가 말씀드린 녀선생입니다. 김인순이라고 희천공업대학에서 교편을 잡고있는데… 송봉동무의 부고가 신문에 난 얼마후에 그 편지를 들고 저에게 찾아왔댔습니다.》
글이 큼직큼직해서 어수룩한 불밑에서도 읽으실수 있었다.
《…
운명을 앞둔 박송봉이 로년혼사를 성사시키기 위해 뛰여다녔다는 놀라운 사실은 마침내
읽기를 그만하신
《그런 일이 있었댔구만.…》
《송봉동무가 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어온것도 사실은 그 선생의 혼사문제를 의논하자고 해서였습니다. 그런걸 왜 그리 몰풍스럽게 잘랐겠습니까. 사람바른 자강도에서 인물을 낚아갈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그랬댔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그 선생을 만나봐야 할것 같소.》
《아닙니다,
《아니요, 동무의 일만이 아니요. 이것은 혁명의 길에 고귀한 생을 바치고간 동지를 위하여 나와 동무가, 이 편지를 쓴 청년이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한유준설계가와 녀선생모두가 지녀야 할 의리이기도 하오. 차를 보내기요. 아침식사를 렬차에서 하겠소.》
어느덧 동이 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