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한 달빛이 창호지를 뚫고 새여들어왔다.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앉아 꼼짝하지 않았다. 가슴이 두근거리였다. 방금 꿈을 꾼것이였다. 그는 꿈속에서 옛말에 나오는 사나이의 이상한 목소리를 들었다. 소년은 조심히 밖으로 나왔다. 달빛이 자오록이 서린 골안에서는 숲의 설레임소리만이 아슴푸레 들려왔다. 신비한 속삭임마냥… 숲에 깃든 하많은 사연을 읊조리듯…


1


대학들에서 여름방학에 들어간 이맘때면 평양의 인민대학습당은 독자들로 차고넘치기마련이다.

이른아침이다. 서둘러 학습당을 찾아온 독자들은 접수구앞에 질서있게 늘어서서 조용히 책을 보거나 함께 온 동무들과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며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있었다. 다른 독자들의 사색에 방해가 되지 않게 정숙을 지키는것은 이곳에 오는 사람들사이에 말없이 맺어진 약속이고 도덕이였다.

바로 이들, 접수차례를 기다리는 독자들속에 몸매가 오달지고 이목구비 어디를 뜯어봐도 만만치 않은 영악쟁이라는 인상을 주는 묘령의 대학생처녀가 끼여있었다. 같이 온 동무가 없는 모양 혼자서 학습장을 들여다보고있는데 거기에는 인체해부도가 그려져있었다.

처녀의 이름은 리현심, 의학대학 2학년생이다.

현심은 올해 여름방학은 하동군 큰리에 있는 집에 내려가지 않을 계획이였다. 그는 방학 전기간 학습당에 들어가 살면서 방학숙제는 물론이고 외과학과 관련되는 참고서들을 통독할 작정을 했다. 작년 여름방학때에는 집에 내려갔다가 어쩔수없이 중학교동창생들을 만나는 바람에 좀 놀기도 하고 또 큰리지구 산림책임감독원인 아버지를 도와 산판일도 하다나니 공부를 많이 못하여 학과실력판정에서 겨우 3등을 했다.

중학교때부터 이악쟁이로 소문났던 현심은 무슨 일에서나 맨 앞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면 자존심이 상해서 참지 못하는 성미였다.

현심은 방학이 시작된지 사흘째 되는 오늘도 학습계획을 잔뜩 세워가지고 아침밥을 먹자바람으로 대학기숙사를 나섰다. 그런데 인민대학습당 접수홀은 먼저 온 독자들로 차있어 할수없이 줄을 서서 순번을 기다리는것이였다.

학습장을 들여다보고있는 현심의 귀에는 언제부터인가 조심스럽게 엮어대는 녀자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현심의 뒤에서 두 대학생처녀가 나란히 서서 따라오고있었는데 그들중 한 처녀가 열심히 소곤거리는것이였다.

현심은 자기도 모르게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였다. 고요한 산촌의 가을하늘을 생각케 하는 맑고 랑랑한 목소리였다.

현심의 관심을 끄는것은 얄미울 정도로 아름다운 그 목소리때문만이 아니였다. 처녀가 산림부문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때문이였다. 아버지가 산림감독원이여서 현심은 숲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을 보면 가까운 동무를 만난것만큼이나 반가운것이였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좀 달랐다. 뒤에서 속살거리는것을 들어보면 어쩐지 현심이 잘 아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같은 느낌이 드는것이였다.

그런데다가 그게 결코 사람들에 대한 좋은 소리같지는 않았다.

현심은 은연중 인체해부학내용은 거의나 들여다보지 않으면서 그 이름모를 처녀의 이야기에 바짝 신경을 도사리였다.

까닭이 묘연한 불안과 아직은 맹목적이라고 할수 있는 반발심같은것이 현심의 심중에서 싹트고있을 때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처녀의 입에서 뜻밖에도 리명산이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현심은 갑자기 머리속이 온통 뒤죽박죽이 되고말았다. 뒤에서 따라오는 처녀가 지금껏 비난과 경멸의 대상자로 입에 올려온 산림감독원이 다름아닌 우리 아버지였단 말인가? 처녀의 말속에 동정의 대상자로 등장하는 산림경영소 지배인이란 사람도 다른 그 누구가 아닌 최영우큰아버지란 소리가 아닌가! 어마나, 세상에!

현심의 아버지 리명산은 큰리지구의 2 000정보 산림을 개조하는데 성공하여 신문에도 크게 나고 온 나라가 다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최영우지배인은 아버지의 오랜 친구로서 2 000정보의 산림을 개조할 때 크게 도와주었을뿐만아니라 현심이네 집안일을 위해서도 마음을 많이 써준 고마운 사람이다.

어깨너머의 처녀는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리현심이란 자존심이 강한 악바리처녀의 약을 일부러 올려주기라도 하려는듯 신경을 자극하는 말을 태연스레 엮어나갔다. 그것은 생활의 《백과사전》을 터득하기에는 아직 이른 풋내기처녀를 놀래워보려고 꾸며대는 엄청난 인생극의 요약인듯도 했다.

그 인생극의 주인공들이 바로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아버지와 그리고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최영우지배인이라고 생각하니 현심은 기가 막혔다.

얄망스러운 처녀의 말에 의하면 현심의 아버지 리명산은 말이 거칠고 인정머리가 없어 큰리의 많은 주민들이 좋아하지 않으며 얼마전에는 어느 탄광의 생산에 지장을 준것때문에 군당에 불리워가서 책벌을 받고 나왔는데 아주 오래전에 시내에서 살며 큰 간부를 하던 최영우도 바로 현심의 아버지때문에 강직되여 하동군산림경영소 지배인으로 내려갔다는것이였다.

현심은 학습장에 굳이 눈길을 보냈으나 글은 한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앙증스레 깨물었다. 아버지가 온 큰리사람들의 미움깨를 산다는 말도 처음 듣는것이고 애당초 믿을수 없는 소리인데 책벌까지 받았다니 이게 뭐야? 한달전 일이 있다면서 시내에 들어왔다가 나를 만났을 때까지만 하여도 아버지의 기분상태는 정상이댔잖아. 이 며칠사이에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는거야? 최영우큰아버지가 높은 간부를 하다가 우리 아버지때문에 떨어져내려가 산림경영소일을 한다는건 또 무슨 허망창한 소리고… 비록 오래전 일이라 할지라도 그런 일이 있었다면 어떻게 우리 두 집이 그렇게 친척이상으로 가깝게 지낼수 있단 말인가. 지금도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쌍 최영우큰아버지와 홍숙희큰엄마에 대하여 좋은 말만을 하지 않아. 최영우큰아버지도 큰리에 내려가면 우리 집부터 들리잖아.

현심은 지금 뒤에서 따라오는 처녀가 형편없는 거짓말을 하는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장 뾰죽한 말마디들을 골라 아프게 쏴주고싶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마음은 불안했다. 그 처녀가 거짓말을 꾸며대는것이라면 우리 아버지 이름은 도대체 어떻게 알수 있단 말인가 하는데 생각이 미친것이였다.

현심은 대관절 어떻게 생긴 처녀가 그런 소리를 하는가 해서 살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약이 오를 지경으로 목소리가 고운 처녀는 생긴것 또한 어디에 나서도 짝지지 않을만큼 아름다왔다. 날씬한 큰 키에 얼굴이며 목은 눈이 부실 정도로 살색이 하얗다. 정결의 극치를 이룬듯 한 맑고 시원해보이는 커다란 눈이며 부드럽게 선을 이룬 코며, 입이며가 꼭 유명한 조각가가 품을 들여 다듬어놓은것 같았다.

그 처녀가 자기보다 더 곱게 생겼다는것을 자인하지 않을수 없는것으로 하여 현심은 그가 더욱 얄미워졌다. 무슨 말이든지 내쏘아서 처녀에게 앙갚음이라도 하고싶었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그런 말마디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여느때에는 윤활유를 친듯 잘도 돌아가던 혀가 굳어져버리였다. 현심은 더욱 약이 올랐다.

현심은 자기 차례가 되여 접수를 하자 열람실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뒤에 서서 따라오던 두 처녀를 지켜보았다. 살색이 하얗고 곱게 생긴 처녀와 그의 말동무가 되여주던 작달막한 대학생처녀는 접수를 하고나서 곧장 열람실을 향해 총총히 걸어들어갔다.

현심은 살색 하얀 처녀를 붙들고 동문 도대체 누구예요? 어째서 남의 뒤소리를 하는거예요? 동무가 한 그 모든 말들이 근거있는 말들이예요? 책임질수 있는가 말이예요? 하고 맵짜게 들이대고싶은것을 애써 참으며 두 처녀의 뒤를 슬금슬금 따라갔다. 같은 열람실에 들어가 두 처녀에게서 조금 떨어진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자기로서도 왜 그랬는지 알수 없는 행동이였다.

그는 사서한테 가서 필요한 책을 빌려다놓고 생각없이 벌컥벌컥 몇장 번지다가 그만두었다. 펼쳐진 책장우에는 조금전에 접수홀에서 학습장을 펼쳐들고 보던 인체해부도가 원색으로 찍혀있었다.

그는 마치 인간의 복잡한 세계를 파헤쳐보기나 하려는듯 무수한 선들과 점으로 표기해놓은 원색해부도를 집요하게 들여다보았는데 그것 또한 생각없는 행동에 불과한것이였다. 눈앞의 그림 또한 인간세계를 도해한 그 어떤 불가사의한 그림이나 설명문도 아니요, 인체구조를 기계적으로 옮겨놓고 이름을 써넣은데 불과한것이였다. 천가지 만가지로 복잡한 인간의 세계를 한장의 그림으로 옮겨놓을수는 없는것이였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나 도무지 사고를 집중할수가 없었다. 얄미울 정도로 곱게 생긴 처녀가 아버지에 대하여 늘어놓던 험담이 귀전에서 사라질줄 몰랐다. 그 처녀에 대한 반감이 체한것처럼 속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한나절을 앉아있었지만 공부는 되지 않았다.

점심때가 되여오자 앞에 앉아 의좋게 공부하던 두 처녀가 책들을 거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심은 대출했던 참고서들을 부랴부랴 반환하고 두 처녀를 은밀히 따라섰다.

두 처녀는 학습당을 나서자 1백화점쪽으로 향하며 문양이 고운 양산을 제꺽 펼쳐들었다. 양산이 없는 현심은 어쩔수없이 쏟아져내리는 불볕을 고스란히 받으며 처녀들을 따라가야 했다. 잠간사이에 옷은 땀에 젖어버렸다. 앞에서 양산 하나를 의좋게 쓰고 나란히 걸어가던 두 처녀가 현심이 들으라는듯 무슨 소리 뒤끝에 깔깔 웃어댔다. 마치도 뒤따르는 추적자에게 《얘, 어서 실컷 땀을 흘리며 따라와 봐.》하고 일부러 놀려대는듯 했다.

(흥, 대학생들이라는게 뭐야. 양산이나 쓰고 다니면 다야?) 실은 그 처녀들이 양산 하나를 우연히 가지고있던것일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쓰는것이 대학생답지 않으며 대단히 혁명성이 없는 행동인듯 현심은 속으로 앙큼하게 종알거리였다.

아마도 오늘은 리현심에게 있어서 일이 꼬이거나 좋지 않은 일들만 겹치는 공교롭고 운수나쁜 날인가보다. 현심의 앞에는 뜻하지 않던 방해군이 나타났다. 그 방해군이란 반백의 머리에 허우대가 크면서도 보기 좋게 몸이 나서 풍채가 름름해보이는 로인이였다.

대단히 점잖고 너그러워보이는 로인은 1백화점앞도로의 지하건늠길에서 신선이 솟아나듯 나왔는데 마침 가까이 지나가던 두 처녀중 살색 하얀 처녀가 《작은할아버지!》하고 반색의 소리를 질렀다. 처녀는 바람같이 달려가 《작은할아버지》의 팔에 매달렸다. 처녀는 함께 가던 자기 동무에게 《잘 가!》하는 말을 남기고는 《작은할아버지》를 따라 뻐스정류소쪽으로 가버렸다.

일은 참 맹랑하게 되였다. 처녀를 만나 기어코 《회계》를 해보려고 했던 일인데 반갑지 않게 나타난 로인때문에 닭쫓던 강아지신세가 되여 버린것이였다.

현심은 살색 하얀 처녀와 헤여져 혼자 걸어가는 키가 작달막한 대학생처녀를 급히 따라갔다.

《동무, 나 좀 보자요!》

현심이 소리쳤다.

걸어가던 처녀가 그 소리에 멈춰서며 돌아보았다. 현심을 보자 의아해했다. 처녀의 눈언저리에는 연한 주근깨들이 박혀있었다.

《나를 보고 그래요?》

《뭘 좀 물어보자요. 이자 함께 오다가 헤여진 동무 있잖아요, 그가 누구예요?》

주근깨처녀는 눈앞에 서있는 처녀가 같은 대학생이지만 나이는 자기 보다 한두살쯤 아래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던지 생글생글 소리없이 웃으며 친절하게 물었다.

《류정혜언니보구 그래요?》

《이름이 류정혜예요?》

《정혜언닌 집이 하동읍에 있는데 교원대학을 졸업했어요. 얼마전에 졸업식을 했거던요. 우린 기숙사 한호실에 있었는데 그 언닌 졸업식을 한 다음 작은할아버지네 집으로 옮겨앉았어요. 아직 배치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그렇군요. 그럼 그 언니와 함께 간 그 할아버진 여기 시내에서 사시는게지요? 큰 간부같아보이는 그 할아버지말이예요.》

《큰 간부같아보인다구요?》

주근깨처녀는 재미있다고 생긋이 웃었다.

《그 할아버진 진짜 큰 간부였어요. 류성림이란분이예요. 정혜언니의 작은할아버진 얼마전까지 시당에서 일하다가 년로보장을 받고 집에 들어왔어요. 전쟁로병이예요. 정혜언니를 얼마나 고와하는지 몰라요.》

주근깨처녀는 참새처럼 부지런히 재잘거리다가 류정혜에 대하여 별스레 꼬치꼬치 캐묻는다고 이상하게 생각했던지 두눈이 올롱해서 현심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동문 왜 정혜언니에 대하여 그렇게 알고싶어해요?》

《뭐 특별한 일때문에 그러는건 아니예요. 어디서 꼭 본것 같아서… 그럴수도 있잖아요.》

현심은 가까스로 떠오르는 거짓말로 바쁜 대목을 넘기였다. 그리고는 처녀가 자기의 위장포를 들치고 속을 빤히 들여다보기라도 하는것 같아 조금 바빠했다. 하지만 현심에게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어른들한테서나 어울리는것이라고 할수 있는 자기를 은페시킬줄 아는 능갈치는 기질이 있었다. 현심은 이따금 어른들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그 놀라운 기질을 발동하기로 했다. 그는 영민한 두눈을 한번 깜박이는 사이에 그런 생각을 하고나서 무엇에나 흥미를 가지는 철부지소녀처럼 해죽이 웃었다.

《우리 집은 하동읍에서 그닥 멀지 않은 큰리라는 곳에 있거던요. 아마 하동읍에 나가는 기회에 그 언니를 한번 보았을수도 있어요. 그런데다가 그 언니는 고와서 인차 눈에 띄우거던요.》

그럴듯한 위장포였지만 거기에는 자기의 속내를 드러내보일수 있는 위험도 어지간히 내포되여있었다.

아닌게아니라 주근깨처녀는 큰리라는 소리에 신경을 쓰는것 같았다.

아침에 류정혜한테서 큰리의 산림감독원에 대한 좋지 않은 말을 들은것이 생각나면서 그 무슨 예감같은거라도 떠올라 그러는지 모를 일이였다.

현심은 류정혜에 대해서 물어보고싶은것이 더 있었으나 주근깨처녀가 《거기 큰리에 리명산이란 산림감독원이 있지요? 동문 그 사람을 알아요? 그 사람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라던데 맞아요?》하고 물어볼것만 같아 적당한 인사말을 남기고 황황히 자리를 떴다.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