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 회)

제 2 편

제 3 장

9

 

온덕수가 렬차로 평양에 도착한것은 일요일 아침이였다.

봄하늘은 수틀에 메운듯 팽팽했다. 시내 곳곳에 태양절을 맞으며 불장식기구들을 설치하고있었다. 우듬지가 푹 퍼진 느티나무들에는 구슬알같은 장식등들이 한벌 덮였는데 밤이면 그것들이 여러가지 빛을 내면서 반짝거리는것이 마치 《불모자》를 씌운듯 하고 키가 쭉 빠진 은행나무들에는 아래도리가 시릴세라 이글이글한 《불바지》를 해입히고있었다. 온덕수는 배가 훌쭉한 려행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충성의 다리를 넘고있었다. 부탁받은대로 리정의 집부터 찾아가는 길이였다. 일요일이여서 채이숙은 집에 있었다.

장을 보러 갔댔는지 봄남새를 넣은 저자구럭이 전실에 놓여있고 채이숙은 그때까지도 외출복차림이였다.

《그새 무고하셨소?》

온덕수가 무랍없는 인사를 건넸다. 채이숙은 그러지 않아도 전화련락을 받고 기다렸다고 하면서 화실로 쓰는 방으로 들어갔다.

조금 열려진 문사이로 온덕수의 말이 넘어갔다.

《지성이는 어데 갔소?》

《말도 마세요. 저희네 동무들을 휘동해가지고 통일거리영화관의 무게를 달아본다고 나갔어요. 빼물고 제 아버지라니까요.》

《뭐, 영화관무게를 달궈본다구?》

어린 녀석의 궁냥이 하도 어벌차서 온덕수는 웃음을 터뜨렸다.

채이숙이 들고나온것은 크기가 가로 세로 둬뽐가량 되는 액틀을 두른 그림이였다. 포장지를 감아서 그림은 보이지 않았다.

《이걸 누구한테 전달하라오?》

《아이, 이건 지배인동지네 집에 보내는거예요.》

《우리 집에?》

《꼭 집에 가서 펼쳐보세요.》

《허허, 무슨 감투끈인지 모르겠군.》

여하튼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리정의 집을 나선 온덕수는 종내 호기심을 누르지 못해 살진 《황소》가 배를 척 늘어붙이고 새김질을 하고있는 공원가녁에서 포장지를 펼치고야말았다.

그림이 나지는 순간 그는 놀랐다. 두눈을 크게 뜬 정림이가 콤퓨터에 마주앉아 3차원구조설계를 빚고있었던것이다. 한쪽구석에 날자가 표기되여있었는데 바로 정림이의 생일날이였다. 온덕수는 그림을 풀판우에 뉘여놓고 아기적 정림이가 세상 모르고 잠들어있을 때 새벽밥을 퍼먹고 공장에 나가다가 이름 못할 정에 끌려 다시금 들여다보던 때처럼 바라보고 또 보았다. 밝은 두눈은 어쩌면 이리 잘 어울릴가! 쓸어보니 도들도들한 유화감이 손끝에 느껴졌다.

어떤 전률같은것이 손끝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갔다.

(그래, 이렇게 두눈을 크게 뜰 때가 되였어. 말이야 바른대로 정림이가 이 아버지보다 세상을 보는 눈이야 더 밝았지. 나야말로 눈뜬 소경이였어. 우리 아들이 어째서? 뭐가 남만 못해서?)

온덕수는 그림속의 정림이를 바라보며 벙글 웃었다.

문득 들려볼데가 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부랴부랴 그림을 다시 포장하여 옆구리에 끼고 소공원을 떠났다. 서평양행궤도전차를 타고가다가 황금벌지하철도역앞에서 내렸다. 경흥거리를 따라가다가 류경동쪽으로 꺾어들자 록색외장재를 바른 고층살림집이 나졌다. 어딘가 거만해보이는 그 집은 온덕수가 나타날줄 알았다는듯이 내려다보는것 같았다.

승강기를 타고 18층까지 올라갔다.

1호집 부름종을 눌렀다. 문이 열렸다.

흰 면샤쯔에 곤색편직조끼를 받쳐입은 사나이가 나타났다.

아, 《유리로 빚은》 검사!…

그 역시 온덕수를 알아본듯 했다.

《아, 봉화기계공장의… 어서 돌어오십시오.》

미닫이문을 건너 응접실처럼 쓰는 넓다란 전실이 있었다. 공간이 시원하게 트이기도 했거니와 남향을 했는지 해빛이 잘 들었다.

《외투를 벗지 않겠습니까?》

《아니, 괜찮습니다. 인차 가야 할텐데요.》

온덕수는 본능처럼 외투앞섶에 손을 가져갔다. 가슴가까이 딴딴하게 잡히는것이 있었다. 장군님께서 주신 그 안경이였다.

《에, 제가 왜 왔는가 하면…》

무표정했던 검사의 얼굴에 미소가 비끼는것을 온덕수는 보았다.

팔걸이의자에서 상체를 가볍게 떨군 검사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중단시키더니 탁자밑에서 얄팍한 잡지를 한권 꺼내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반질반질한 탁자우로 쭉 밀어보냈다.

《외국문잡집니다. 15페지를 보십시오.》

중문으로 되여있어 어렵지 않게 읽을수 있었다. 봉화기계공장을 소개한 기사와 함께 문제의 그 사진이 실려있었다. 종이가 좋아서인지 모여앉은 낯익은 사람들의 얼굴이 또렷하게 안겨왔다.

《예.… 나는 바로 이때문에 찾아왔습니다.》

일단 말을 떼니 무겁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것 같았다.

그때까지도 검사의 얼굴이 무표정한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쨌든 온덕수는 지나간 일에 대하여 설명했다.

《나도 어째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혹시는 검사동무가 아니, 이 집이 두려웠던게지요. 우리 정림이와 같은 경우에 사람들은 흔히 위축감이나 소회감에 사로잡힐수 있다고 하는데 그 애는 정반대로 지나친 존재감을 가지고있지요. 자기는 한사코 남만 못하지 않은 존재라고 확신하는데 부모된 눈에는 그렇게 보일리 없지요. 혹시 이런것을 생각해본적이 있습니까? 자기 자식에게 뭔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그래서 늘 주의하고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보살펴야 한다는 부모로서의 걱정거리를 감수해봤는가 말입니다.

그것이 끝내는 일을 쳤지요.》

온덕수는 자기 말속에 솔직한 심정을 담으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이러루한 고백을 받아내는것을 직업으로 하는 검사가 얼마만 한 감동을 받았는지 알수 없었다.

《용무가 그뿐입니까?》하고 검사가 물었다.

《또 있습니다. 한가지 부탁할것이…》

《부탁이요?》

《예.》 온덕수는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한마디로 댁에서도 우리 집에 가주었으면 해서요. 왜냐면 나는 내 아들을 잘 알고있지요. 그는 아마 내 말을 믿지 않을겁니다.》

그러자 검사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지배인동무는 한발 늦었습니다. 우리 집사람은 오늘 아침에 딸애와 함께 그곳 봉화기계공장으로 떠났습니다.》

《어데로 갔다구요?》

《지배인동무의 집에 사죄를 하자고 갔습니다.》

《사죄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효은이가 그새 휴가를 받고 집에 와있었습니다. 아무리 딸이라도 부모에게 하기 힘든 말이 있지 않습니까. 며칠동안이나 갑자르다가 어제 저녁에야 속을 터놓았지요. 저도 그렇고 집사람도 딸애의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지배인동무는 모든게 다 자기 잘못이라고 하는데 이랬든저랬든 집의 아들을 욕보이고 상처를 입힌거야 우리가 아닙니까. 저도 이번 일에 대해서 사죄를 합니다.》

눈굽이 찡해왔다. 층높은 집과 직위만으로 사람들을 리해하고 자신을 대비해온 지난날이 온덕수는 참으로 부끄러웠다.

《이렇게 된바에 우리도 따라가는게 어떻습니까?》

《아니, 그러지 마십시오. 그러지 않아도 난 정말 기쁩니다.》

《기쁨은 같이 나눌수록 커진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마주보며 웃었다. 온덕수가 슬그머니 돌아앉아 손수건을 꺼내들 때 검사는 옆방으로 건너가 길떠날 차비를 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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