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6 회)

제 2 편

제 3 장

8

 

이튿날 저녁 리정이 북천기계공장에 도착했다.

배낭 하나를 등에 지고 감발에 행전까지 둘러친 차림으로 나타난 그는 어쩌면 이전에 보아오던 리정이 아닌것 같았다.

닷새후에는 다시 작성된 공장현대화안이 공개당총회에서 채택되였다. 첫단계 과업으로서 2가공직장의 재래식공작기계들을 모두 정리하고 CNC구역과 유연생산세포를 꾸리기로 했다.

그날 저녁 장군님께서 또다시 전화를 걸어오시였다.

공장설계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유연생산세포의 합리적인 배치와 구성을 토의하고있던 리정은 장군님께서 부르신다는 련락을 받자 보고있던 공장평면도를 손에 든채 지배인의 방으로 달려가 전화를 넘겨받았다. 그이께서는 리정에게 북천기계공장에 사장되여있는 문형후라이스반을 5면가공반으로 개조하는것과 함께 북천기계공장에 련하기계기술보급소를 내오고 운영할데 대한 과업을 맡겨주시였다. 또다시 불러주시는 믿음에 리정은 목이 메였다.

《앞으로 기술보급사업까지 맡아보자면 힘에 부칠수도 있는데 이건 필연코 련하가 가야 할 길이요. 우리가 가야 할 길이요. 건강하시오. 내가 련하에 부치는 꿈이 너무도 많소.》

장군님의 말씀은 무한한 힘이 되였다.

리정과 온덕수는 낮에는 낮대로 현장에서 바삐 보내고 밤이면 련하기계기술보급소를 내오는것과 그 운영을 어떻게 할것인가를 놓고 공장일군들과 진지한 토론을 벌렸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식사가 끝나자 리정은 온덕수에게 바람을 쏘이러 가지 않겠는가고 했다. 북천강을 거슬러올라가느라면 그전에 사금쟁이들이 망탕 뚜져놓은 강벌이 있는데 요즘 공장청년들이 주동이 되여 복토 겸 양어장을 꾸리고있었다. 공사가 주로 야간지원돌격대형식으로 벌어지고있어 홰뭉치가 사방 널리고 웃고 웨치고 화답하는 소리가 밤이 들썩하게 울려퍼지고있었다.

주변이 모래땅이여서 마대로 진흙을 져날라왔다.

그것을 양어장바닥에 고루 펴놓고 수십명씩 짝을 지어 메질을 하였다. 찰떡같은 진흙이 쩔깃쩔깃 소리를 내며 돌처럼 다져졌다.

그렇게 한겹을 다지고는 또 진흙을 폈다.

리정과 온덕수는 맞들이를 했는데 가슴팍에 땀이 쭉 돋았을 때 마침 휴식구령이 울리였다. 역시 젊음이여서 청년들은 삭정이를 주어다가 우등불을 크게 피워놓고 세겹인지 네겹인지 큰 원을 짓고 춤을 추며 돌아갔다.

《자, 춤을 추는것도 경쟁이요.》

《정인동무! 빨리 오라요. 나만 외기러기예요!》

《어! 가!》

무엇을 하댔는지 리정과 온덕수가 등지고앉은 으슥한 강버들쪽에서 검은 형체가 후닥닥 뛰쳐나오더니 방금전의 그 외기러기를 찾아서 껑충껑충 뛰여갔다. 온덕수는 그 청년의 이름을 정림이라고 들었던것 같아 마음이 별스러워졌다.

《그 전압주파수안정기 말입니다.》 리정이 입을 열었다. 《난 그걸 정림이한테 맡길가 하는데 지배인동무 생각은 어떤지요?》

《뭐요?! 그건 안되오. 장군님께서 련하기계에 맡겼으면 그건 곧 사장동무를 믿고 주신 과업인데 다른 사람에게 주고말고하다니 도대체 제정신같지 않구만. 사장동무, 난 자꾸 이런 생각이 들지 않소. 장군님께서 이번에는 리정이라는 사람을 꼭 만나보시자고 그 과업을 련하에 주신것이 아닌가 하는… 그럴수도 있지 않소?》

《그럴가요?》

《이보오 사장동무, 아마 내 예감이 틀림없을거요. 그러니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번만은 절대로 다른 생각을 해서는 안되오.》

리정은 주먹만 한 자갈을 손바닥우에 굴리고있었다.

《내 말을 듣소?》

《지배인동무, 난 이젠 그런 욕심을 내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엉? 사장동무, 그게 무슨 말이요?》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그 친필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앞으로 꼭 만나게 될거라고 하신 그 언약… 나도 그날을 고대했습니다. 초조하게, 안타깝게 그려보았습니다. 하지만 요즘에 와서야 내 생각이 잘못됐다는것을 깨달았습니다. 장군님을 만나뵙는것, 그것이 어떤 운이고 기회란 말입니까? 아니지요. 장군님께서는 이 리정이 무엇 잘나서 만나자고 하신것도 아니고 인생사에 깊이 얽혀있는 인연이 있어서 그러시는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나는 행여나 그것을 억지손으로 따보려고 했지요. 그럴수록 장군님곁에서 멀어지고있다는것을 난 지금에 와서야 깨닫게 되였습니다.》

《나는 그렇게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소.》

온덕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팔굽을 땅에 박고 고개를 뒤로 젖힌 리정은 하늘의 별들에게 묻는듯 《내가 책에서 본 옛말을 하나 할가요?》라고 하였다.

《뚱딴지같이 옛말은 무슨…》

그러거나말거나 리정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 어느 한 변방에 팔이 하나뿐인 외팔이장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지혜롭고 무예가 뛰여난 아들이 있어 장차 나라를 지키는 훌륭한 장수로 키우려고 했지요.

어느날 외적의 대군이 변방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적의 괴수가 창을 들어 성문을 가리키며 웨쳤지요.

〈살고싶거든 적장은 문열어라!〉

성루에 북소리 둥둥 울리더니 외팔이장수가 나섰습니다.

〈네가 열려무나. 나는 한손뿐인데 이 손엔 장검이 쥐여있다!〉

외팔이장수는 아들에게 자기 검을 넘겨주면서 성문을 열고 출전하라는 령을 내렸습니다. 아들은 패전하고 돌아왔습니다.

〈네 어찌 싸움에서 패하고 살기를 원하겠느냐?〉하고 외팔이장수는 꾸짖었습니다. 〈그놈이 바로 아비의 한팔을 앗아간 원쑤이거늘 패전은 군사로서의 수치요, 아들로서의 불효다. 마땅히 목숨으로 이 수치와 불효를 갚아야 할것이다. 그래 어쩔것이냐?〉

아들은 대답하기를 〈패전은 부끄러우나 부친께서도 당해내지 못한 용맹을 황차 아들의 힘으로 맞서라 함은 무리한것입니다.〉라고 했답니다. 외팔이장수는 두눈을 부릅뜨고 웨쳤습니다.

〈내 칼에 베이느니 싸우다 적앞에 목을 던져라!〉

그날 밤 불의에 적군영을 기습한 아들은 패주하는 적장을 발견하자 이를 악물고 뒤쫓아가 단창에 쓸어눕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피를 뿌리며 쓰러진 적장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튀여나왔습니다. 알고보니 그는 적장의 차림을 한 외팔이장수였습니다.

〈장하다, 아들아! 네 어찌 나만 못하다더냐!〉

그리고 영영 눈을 감았답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검을 넘겨받은 아들은 마침내 적장의 목을 베고 변방을 굳게 지켜냈답니다.》

온덕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우리 정림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게 아니요?》

《정림이가 사직서를 냈습니다.》

《그 애가 사직서를?!》

온덕수는 놀라 일어서려다가 자갈을 밟고 미끄러졌다.

《언제인가 공장에 취재를 왔던 녀기자가 생각납니까?》

《생각나오. 사장동무, 그는 효은이의 어머니였소.》

《저도 알고있습니다. 한가지만 물읍시다. 지배인동무가 정림이를 불러낸것이 효은이 어머니와 합의한 일이라는게 사실입니까?》

《그건… 아니요. 내가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소.》

《짐작은 했습니다만. 지배인동무, 어떻게 그럴수 있습니까. 정림이가 그 일로 해서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는지 압니까. 지배인동무는 그렇게 하는것이 앞으로 정림이를 위해서도 좋을거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왜 정림이를 한사코 남만 못한 존재처럼 여깁니까.》

《가만, 가만… 사장동무, 제발 그만하시오.》

온덕수는 머리를 싸쥐였다.

리정의 말이 옳았다.

그는 정림이와 효은이사이가 남다르다는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다.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정림이의 그 어벌찬 욕망으로하여 어느때인가는 꼭 불미스러운 일이 터질것만 같아 불안했다.

그는 늘 정림이는 남보다 부족한것이 있다고, 그러면서도 한사코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사춘기청년의 자존심으로 하여 인생의 고배를 맛보지 않도록 돌봐줘야 한다고 생각하고있었다. 그래서 효은이의 어머니가 취재를 왔을 때에도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정림이를 불러냈다. 정림이가 그에 예민하게 반응하는것을 보면서도 어쩌면 차라리 잘됐다고까지 생각했었다.

귀안이 멍 울리면서 몸이 잘 가눠지지 않았다.

《허!》 온덕수는 가슴을 쳤다. 《그러니 내가 무슨 아버지란 말이요. 그 애가 사직서를 낸것도 모르고 장군님께서 주시는 안경까지 버젓이 받아안았으니… 사장동무, 이 일을 어쩌면 좋소?》

《장군님께서 정림이에게 자신께서 쓰시던 안경을 보내주시였다는 맡을 듣고 난 많은것을 생각했습니다. 나도 제딴에는 정림이를 위한다고 했지만 그런 일에 부닥치자 눈앞이 캄캄해졌댔지요. 그들의 사랑을 다시 피워주자면 정림이의 잃었던 존엄부터 되찾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난 전압주파수안정기를 정림이에게 맡기자는겁니다. 지배인동무, 맡깁시다. 장군님께서도 정림이가 그 일을 해냈다는것을 아시면 더 기뻐하실겁니다.》

《사장동무!》 온덕수는 리정의 손을 찾아쥐였다.

며칠후 온덕수는 북천기계를 떠났다.

장군님께서 취해주신 조치에 따라 안흥과 자령에서 각각 선발된 로동자, 기술자대표단이 련하기계공장을 참관하러 온다는 긴급련락이 날아들었던것이다. 그를 역까지 바래주면서 리정은 가던 길에 자기 집에 꼭 들려달라고 곱씹어 당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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