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8 회)

제 2 편

제 2 장

7


평양처녀와 시골총각의 사랑이야기는 사람들의 큰 화제거리로 되였다. 소문은 사실과 달리 정림이가 효은이한테서 배반을 당했다는 새 줄거리로 엮어져 사람들에게 옮겨갔다. 그것은 가뜩이나 상처입은 정림이의 자존심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 되였다.

실련의 괴로움이 어떤것인지 리정은 체험해보지 못하였지만 그 고통을 겪고있는 당사자들 못지 않게 마음을 괴롭히는 도덕적책임감이 있었다. 그는 정림이와 효은이의 구김살없는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는 그들이 행복한 한쌍이 되기를 진정으로 바랐었다.

그래서 은근히 마음도 썼다. 리정은 그들의 앞길에 운명적곡절을 지어놓은 장본인이 자기인듯이 생각되였다.

그들의 사랑을 건져야 할 사람도 자기라고 생각되였다.

오늘 리정은 시내로 나왔다.

전압주파수안정기술과 관련한 자료들을 얻을가 해서 중앙과학기술통보사에 다녀오는 기회에 효은이 어머니가 일하는 출판사에 들려볼 생각이였다. 그는 오후 4시가 지나서야 계획했던 일을 다 보고 지하철도역으로 뛰여들었다. 한시간쯤 지나서 외국문출판사에 도착했다. 접수실에 앉아있던 녀성직원이 외래접수시간이 다되여 문을 닫으려는 찰나에 리정이 나타났다. 면회실과 잇닿은 미닫이창너머로 그를 내다본 녀성은 손님은 좀 늦었다는것을 강조하려는듯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접수책을 다시 펼쳐놓았다.

《리하심기자를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녀직원이 눈길을 들었다.

《지방출장중인데요?》

《출장이요? 언제 돌아옵니까?》

《오늘 떠났으니까 며칠 걸릴겁니다.》

《그래요? 알았습니다.》

리정은 맥없이 돌아섰다. 어제 저녁 리정은 효은이를 만나보려고 봉화기계공장 합숙에 찾아갔었다. 가다가 늙은 자귀나무가 허리를 굽히고 서있는 담장모퉁이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정림이 어머니를 보게 되였다. 혹시 그도 효은이를 기다리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뜻 다가가게 되지 않았다. 퇴근시간이 되자 합숙생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처녀들의 뒤에 외따로 떨어져오던 효은이가 담장곁을 지나갈 때에도 녀인은 그냥 멍청히 지켜보기만 했다.

이윽고 효은의 호실에 불이 켜졌다.

옷걸이에 솜옷을 벗어 건 처녀가 창문가로 다가서는 모습이 훤히 바라보였다. 마당가로 허둥지둥 걸어나오던 녀인은 량쪽에 갈라붙였던 창가림이 쫙 모아지는 순간 한숨을 내쉬였다.

《아주머니.》하고 리정이 불렀다.

돌아가던 녀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냥 돌아갑니까?》

《그럼 어쩌겠나요. 저 애한테야 무슨 죄가 있다구…》

녀인의 아픔은 곧 남편과 아들에 대한 원망으로 터져나왔다.

《우리 그 녀석이 저 애의 사진까지 다 없애버렸다오. 글쎄 제깐 녀석 뭐가 그리 잘났다고… 착한 효은이한테 못을 박았겠나요. 그러니 내가 이제 효은이를 붙잡고 그 애 어머니를 탓하겠나요, 아버지를 나무라겠나요. 다 우리 령감탓이지요, 령감탓.…》

《그건 무슨 소립니까?》

《사실은 그날 정림이를 불러낸것이 우리 령감이라오.》

《지배인동무가요? 설마하니…》

《제 말로는 효은이의 어머니를 만나보고 결심했다는데 난 모르겠어요, 그 령감이 무슨 의뭉스러운 생각을 하고있는지. 그리구는 속도 편안하지, 훌쩍 출장을 가버렸으니 어쩌면 좋을가요.》

《정림이한테 사연을 말해주지 않았습니까?》

《말이야 했지요. 한데 믿을게 뭐나요. 어머니까지 병신자식을 동정하는가고 제편에서 야단인걸요. 자기때문에 남들한테 머리를 숙이여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에그, 이런 마음고생을…》

온덕수가 있다면 당장 따져묻고싶었지만 그는 없었다.

그는 북천기계공장 현대화를 자진해서 맡고 출장을 갔다.

효은의 어머니를 만나볼 생각은 그때 들었다.

혹시 그가 정림이를 다시 만나준다면 모든것이 풀려나갈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그러나 모든것이 허사였다.

밖은 벌써 어두워지고있었다.

벌거우리한 불장식을 두른 맥주집간판이 눈에 띄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리정은 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도 취할수 있을가?)

맥주집으로 들어갔다. 맥주조끼를 다섯개나 받았다. 말린 조개살을 안주로 사가지고 그 나이벌쯤 돼보이는 사나이들이 둘러서있는 두번째 탁으로 다가가 자리를 잡았다. 마시기 시작했다.

《하여튼 박동무, 아들 하난 잘 뒀어.》

《자, 그럼 아들을 잘 둔 박동무를 축하해서 들자구.》

보매 그들은 한직장에서 일하는것 같았다.

《나도 아직 잘 믿어지지 않소. 악기 잘 타고 노래 잘하는 아이들이 다니는게 소년궁전인가 했더니 거기에 콤퓨터수재반이라는것이 생겨나 우리 녀석도 가게 될줄 어떻게 알았겠나.》

아마 박동무라고 불리우는 사람의 아들이 새 학년도부터 실시하게 되는 콤퓨터수재교육반에서 공부하게 된 모양이였다.

《4월부터 첫 수업을 시작한다지?》

《응. 엊그제 우리 집사람이 궁전구경을 갔다와서 하는 말이 개학날 그 애들에게 줄 콤퓨터가 강당에 가득 쌓였는데 눈이 다 휘딱 번져지더라는거야. 어떤 사람들은 우리 애한테 부모들중에 누가 과학자인가고 물어보더라는데 이보게 명수, 우리야 솔직히 콤퓨터라는 물건이 네모난지 둥그런지 보기나 하고 자랐나?》

《콤퓨터야 네모나지.》

《자, 그럼 네모난 콤퓨터를 위해 또 들자구.》

《하기야 내가 박동무와 학교를 같이 다녀서 잘 알지. 중학교를 졸업할 때 지리, 음악… 또 그리구 뭘 4점 맞았던가?》

《여보게. 우리 애가 듣는데서는 절대 그런 말을 하면 안되네. 우리 집사람이 아이를 교양할 때마다 아버지처럼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하고있는데 4점이니 뭐니 귀에 들어갔단 야단이야.》

《오, 그럼 동무가 늘 5점만 맞았다는 의미에서 들자구.》

리정은 자식들의 일로 웃고 떠드는 아버지들의 모습을 보면서 온덕수를 생각했다. 그도 아버지이고 자식을 가졌으며 그 아들도 공부를 잘해서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을 모았다는 공통점부터 생각했으나 그래도 뭔가 달랐다. 네번째 조끼를 들지 못하고 그는 밖으로 나왔다. 쿵쿵 거리를 울리며 지나가는 궤도전차의 차창들이 조금도 이지러지지 않고 똑똑하게 보였다. 자기가 취할수 없다는것이, 취해지지 않는다는것이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의 생활은 일정한 공식을 적용하면 맞는 답이 얻어지는 문제풀이와도 같았다. 절제, 규칙, 정돈… 언제나 이런것이였다.

아무 기별도 없이 맥주냄새를 풍기며 나타난 리정을 채이숙은 놀라운 눈빛으로 맞이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저녁상을 물리자 채이숙은 웃방 침대우에 걸어놓은 자기가 직접 만들었다는 수공예품을 보여주었다. 살집좋은 엄지닭이 병아리들을 가득 품에 안고있는것을 형상한 수공예품이였다. 채이숙은 엄지닭과 병아리를 손끝으로 꼭꼭 찍어가며 설명하였다.

《이건 나, 이건 지성이… 당신을 한번 찾아봐요.》

《나?! 나도 있소?》

채이숙은 벼짚색의 둥우리를 가리켜보였다.

남편은 바로 그런 둥우리가 되여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것을 이윽히 바라보고있던 리정은 《여보, 초상화를 하나 그려줄수 있겠소?》라고 물었다.

《초상화요?》

《래달에 정림이 생일이 있는데 초상화를 그려주기요. 안경을 낀 정림이가 아니라 두눈이 다 번쩍번쩍하는 모습을 말이요.》

채이숙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리정은 사진첩을 꺼내들고 지난해 련하기계창립일에 정림이와 함께 찍은 사진을 찾아냈다.

《당신은…》

채이숙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혹시 이렇게 묻고싶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나나 애의 생일은 기억하고있어요?》

물론 리정은 기억하고있었다. 뉴톤의 법칙들을 잊지 않듯 기억하고있었다. 그러나 기억하는것과 실행하는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좋은 남자는 되기 쉬워도 좋은 남편이 되기는 힘든것이다.

《언제까지면 될가요?》

《래달 스무날까지.》

《그럼 그날 집에 오겠어요?》

리정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시각 연형묵이 전화기에 불이 날 정도로 자기를 찾고있는줄을 리정은 알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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