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 회)
제 2 편
제 2 장
6
정림이의 사랑은 검정편리화를 신고 땀과 먼지에 얼룩진 얼굴로 공장에 나타나 《저…》하고 그를 불렀던 한 처녀와 마주섰을 때부터 생겨난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효은이가 좋았다.
그들이 공장대학을 졸업하던 해 어느 일요일 공장에서는 자원로동을 호소하여 정림이를 비롯한 청년들이 바구니에 점심밥곽을 담아가지고 산열매를 주으러 입산했다.
추봉산아래 20리 험골을 째놓은 골짜기들에서는 도토리 줏는 처녀들의 웃음소리가 총각들의 타령소리에 어울려내리고 밤장대기를 둘러멘 조무래기들이 청대놀음에 광대를 그려가지고 새끼청서들처럼 호독호독 숲속을 쏘아다녔다. 정림은 어릴 때부터 나무를 잘 탔다. 전주대처럼 미끈한 나무라도 일단 가붙으면 나래가 돋친듯 잘도 기여올랐다.
처녀들은 머루, 다래를 받아먹는 재미에 정림의 곁을 떠날줄 몰랐다. 곁눈 한번 팔지 않고 차근차근 바구니를 채워가는것은 오직 효은이뿐인것 같았다. 정림은 그를 생각해서 잘 익은 다래를 따로 건사해놓고 남들 모르게 줄 기회를 노렸다.
점심을 먹고나서 그런 기회가 생겼다. 처녀들이 총각들의 밥곽을 가셔주겠다고 나섰을 때 그는 다래를 넣은 자기 밥곽을 효은이에게 맡겼다. 묵직한게 이상한듯 머리를 기웃거리며 샘터로 가는 효은이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제딴에 신통한 궁리를 해냈다고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돌아온 밥곽에는 다래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이런, 바보같으니라구!)
어느틈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살짝 지어보이는 효은이를 보자 마음은 다시 구름속에 잠기는듯 했다. 산을 내리는데 갑자기 비구름이 몰려들어 대줄기같은 비를 퍼부어댔다. 향오동나무아래 잠시 몸을 피했으나 비를 긋기에는 별로 신통한 거처가 못되였다.
이때 누군가 《얘들아, 저기 옛날에 쓰던 잠실이 있어!》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모두 그곳으로 달려갔다. 오래전에 페잠한 곳이라 여기저기 널린 짚더미들에서는 먼지가 폴싹폴싹 일고있었다.
그래도 젊음은 자리를 탓하지 않았다.
《자, 오늘새참은 따바리새참이다.》
누군가 고삭은 나래장밑에 다리를 들이밀며 말했다.
모두가 좋아라고 깔깔거리며 《종달아, 종달아》놀음을 하던 때처럼 다리들을 빙 둘러모으고 앉았다. 어느 싱검둥이한테 발바닥을 긁히웠는지 빨간 수건을 쓴 처녀가 얼굴이 붉어져가지고 간지러워 죽겠다고 보살을 피워댔다. 자리가 잡히자 한가운데 닦은 콩과 강냉이를 쏟아놓았다. 우연이라고 할지 정림이의 곁에는 효은이가 앉았다.
《얘들아, 우리 글자맞추기를 하는게 어때?》
《글자맞추기?》
《그래, 하자.》
별게 아니였다. 잔등에다 손가락으로 뒤집은 글자를 쓰면 다른 사람은 그것을 알아내는 놀음이였다. 한데 둘둘씩 짝을 짓고나니 이번에도 꼭 정림이와 효은이가 남게 되였다. 효은이 등을 돌려댔다. 어디다 손을 대야 할지 정림은 허둥거렸다. 다른쪽에서는 벌써 무슨 재미나는 말들을 주고받았는지 배를 그러쥐고 웃는가 하면 콩콩 주먹다짐을 하기도 했다. 정림은 입술을 깨물었다. 썼다.
《너를 사랑한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심장은 더욱 불안하게 높뛰였다.
한참만에야 효은이 간신히 《다시…》하고 말했다. 또 썼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세상은 텅 비고 오직 그들뿐인것 같았다.
《자, 이젠 엇바꾸기!》
이번에는 정림이가 돌아앉았다. 효은의 손끝이 흘러갔다.
《고마워요.》
어느새 비가 멎었다.
모두가 무지개 비낀 하늘가로 와 소리치며 달려갔으나 정림은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달려가서는 비물에 젖어 번들거리는 나무밑둥에 볼을 쿡 대이였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방금 있었던 일들, 슬며시 기다렸고 닥치자 두려웠고 지나가자 아쉬운 광경들이 환등처럼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눈을 뜨고싶지 않았다. 그러면 영화관에 불이 켜지고 문이 열릴 때처럼 방금 목격한 모든것이 하나의 허구로 엮어진 예술작품처럼 막을 내릴것만 같았다.
대학을 졸업한 후 효은이는 분석실에서 일하였다.
그때도 효은은 종종 정림이를 찾아와 그 특유의 느릿한 목소리로 《저…》하고 찾군 하였다.
정림은 그 《저…》에 정이 든것 같았다.
그는 마음속에서 저절로 우러난 감정을 존중하였다.
이야말로 순수하고 지어 필연적인것이라고 생각됐다.
허나 가슴을 갓 헤집고 돋아난 그들의 사랑은 너무 연약했다.
하루는 출근해서 금시 일손을 잡으려는데 어느 출판사에서 화보에 낼 사진을 찍으러오니 차림을 단정하게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런 일이 있을줄 어떻게 알았으랴만 정림의 어머니는 개놓았던 와이샤쯔에 구김이 갔다고 못내 아쉬워하였다. 그리고 신을 신는데까지 따라나와서 구김을 펴겠다고 물을 푸푸 뿜으며 돌아갔다.
안경도 바꾸어끼고… 정림은 집을 나섰다.
마을입새를 돌아서는데 효은이 길가에서 기다리고있었다.
《저…》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가슴에 두손을 모았다.
《아이! 정말 멋있네.》
정림은 얼굴이 활딱 붉어졌다. 어렸을 때도 그랬고 안경을 끼게 된후부터는 더욱 누구한테서도 멋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던것이다. 혹시는 그 말을 영 잊어버리고있었는지도 몰랐다.
《정말… 멋있소?》하고 그는 물었다.
이번에는 효은의 얼굴이 당콩꽃처럼 발깃해졌다.
《오늘 우리 어머니가 오셔요.》
《어머니라니?!》
《취재온다는 그 화보기자가 바로…》
《어? 그래?!》 가슴이 쿵 했다.
《어머니한테 내 소릴 했소?》
《그저 피뜩…》
《피뜩》이라는 말에도 현훈증이 일었다.
그러니 효은의 어머니는 나를 만나려고 오는지도 모른다.
정림은 자기의 심장이 무게가 느껴질 정도로 속에 매달리는것 같았다. 그는 될수록 점잖게 행동하느라고 애쓰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녀기자일뿐인 효은의 어머니앞에 나섰다. 그러나 곧 자기의 생각이 얼마나 천진했던가를 깨닫게 되였다.
아릿답고 외교적인 미소(그가 보기에)로 가득찬 녀기자는 자기가 만드는 화보에, 아니면 다른 무엇에 손상이 갈가봐 정림이를 밖으로 불러내고 다른 사람들의 모습만 찍어갔던것이다!…
정림은 난생처음 자존심이 흘리는 눈물을 맛보았다.
배반당한듯 한 아픔에 가슴이 갈가리 찢어지는것 같았다.
결국은 그것이 자기에게 주는 대답이라고 정림은 생각했다.
어쩌면 그 대답을 예술적으로 하기 위하여 취재를 나왔을는지도 몰랐다. 모든것은 환각에 불과했다. 너무도 바라고 소원했던 나머지 《그랬으면》하는것이 《그럴거야》로 바뀌운 허상이였다.
《온정림동무가 누구예요?》라고 묻던 녀기자의 맑고 우아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어머니가 따라나오며 구김살을 펴준 샤쯔를 입고 색안경을 끼고 그는 일어섰다. 얼굴이 오이속같이 하얀 녀성은 정도이상으로 가까이 다가와 비밀을 속삭이듯 말하였다.
《나가보세요. 사람이 찾아왔어요.》
찾아온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런데 정작 불러놓고는 아무말없이 담배만 련속 붙여물었다. 정림은 초조해났다.
《아버지, 사람들이 기다리겠는데…》
《넌 사진을 찍지 않기로 했다.》
《예?! 왜요?》
《글쎄 그렇게 토론됐다니까!》
정림은 자기가 왜 사진을 찍지 말아야 하는지 그 리유가 아버지의 얼굴에 씌여있기라도 한듯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설마… 그 기자가 날 뽑으라고 한건 아니겠지요?》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어서 대답해주십시오.》
《정림아, 만약 그렇다면… 어쩔셈이냐?》
《아버지?!…》
그 말은 정림의 가슴을 널판대기로 만든 목표판처럼 숭숭 구멍을 뚫어놓는것 같았다. 쓰겁고 뜨거운 물이 치밀어올랐다. 정신없이 현장으로 달려간 그는 허탈이 온듯 휘청거리다가 금시 평삭가공을 하고 떨구어놓은 뜨끈뜨끈한 이송함우에 주저앉고말았다.
이렇게 그는 지금껏 꾸어온 꿈으로부터 《총살》당하였다.
그는 눅거리였고 아무 결정권도 없었다. 그저 도마우에 있을뿐이였다. 가마와 앞치마와 식칼을 가진 사람은 따로 있었으며 그들은 결정에 앞서 그의 의견따위는 묻지도 않았다. 무서운 일이였다. 박살을 내야 할 일이였다. 차별의, 분리의, 우렬의 집요한 그 관념!…
정림은 우로 올라갈수록 부담스러워지는
《나는 신체상 결함으로 하여…》
《나는 공장대학졸업생으로서 능력이 부족하므로…》
세번째만에야 얼찌근한 사직서를 하나 만들어가지고 과장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오히려 사직서에 구김이 갈세라 손으로 짝짝 펴기까지 해서 사업수첩에 끼워놓고는 돌아가라고 하였다. 그래도 누군가는 자기를 붙잡고 눈물이 쑥 나오게 욕을 해줄줄 알았건만 애바른 그 기대마저 허물어졌다. 눈앞이 흐려졌다.
가슴속에는 효은이라는 존재가 돌순처럼 맺혀있었다. 그러나 포기해야 했다. 그래서 이렇게도 생각해보았다.
이루어진 사랑과 이루지 못한 사랑…
둘중 어느것이 더 아름다운가? 이루어진 사랑, 그것은 다 지은 밥과 같다. 이제… 퍼먹기만 하면 그만이다. 허나 이루지 못한 사랑은 영원히 아름다운 기대와 희망이다. 애끓는 가슴밑에 옹이박인 장작을 하나씩하나씩 던져넣으며 공상에 잠길 때의 심정은 어떠할것인가. 후날 가슴을 열어보았을 때 거기서는 밥이 아니라 맹물이 끓고있을수도 있다.
너무 불을 세게 때서 까맣게 태웠을수도 있다.
그렇다, 사랑도 너무 태우면 가마치가 된다. 사랑은 설지도 타지도 않게 해야 한다. 그런데 혹시 내 심장은 밥도 죽도 짓지 못하고 연기만 풀풀 날리다가 꺼져버릴수도 있을것이다. 그래도 침을 뱉지는 않으리라. 바라는대로 되는것이 인생은 아닐진대 그 무엇이 자기를 외면했다고 하여 모두 침을 뱉아준다면 그런 인생의 돌아봄은 얼마나 서글플텐가. 이루어진 모든것과 더불어 이루지 못한것에 대해서도 변함없는 사랑과 갈망을 안고살아야 하리라. 종신토록 그것을 위하여 암암리에 애타고 준비하며 살아야 하리라.…
탁상시계가 짜르릉 울었다.
효은이와 만나자고 한 시간이였다.
그전에 할일이 있어 정림은 모자를 찾아 쓰고 밖에 나섰다.
솜옷주머니속에 찌른 그의 손에는 언제인가 리정의 손에 끌려 영화구경을 갔다가 효은이와 함께 찍은 사진이 쥐여있었다. 그에게는 유일하게 처녀와 단둘이 찍은 사진이였다. 정림은 읍으로 뻗어있는 길을 따라 걸어갔다. 사진을 어째야 할지 생각해보았다.
(불태울가?! 그럼 뜨겁겠지? 그건 차마 못할짓이야. 그러면 쪼각쪼각 찢어버릴가?! 아니야, 묻자. 깨끗이 땅에다 묻자.)
사진을 찾으러도 효은이와 같이 갔었다. 그때 돌아오다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 있었다. 길녘을 조금 벗어난 숲언저리였다. 거기 숨어서 사가지고오던 록두지짐을 나누어먹었는데 주변에는 볼품없이 키가 꺽두룩한 야생우웡꽃이 드문드문 피여있었다.
《야! 우웡꽃이 곱기도 하네.》하고 효은이 약간 사그라들기 시작한 그 꽃 한송이를 꺾어들었다. 하필이면 많고많은 꽃중에 처녀가 보라꽃을 좋아하는가고 심술을 부려보았더니 효은은 방그레 웃으며 정림의 가슴우에 그 꽃잎을 척 붙여놓았다. 이상하게도 잎이 접착성을 가진것처럼 잘 들어붙었다. 그게 우웡꽃이 가지고있는 특성인줄 정림은 그날에야 알았다. 효은은 잎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웡잎은 심장처럼 생겼거던요.》
정림은 바로 그 자리를 찾아서 땅을 뚜졌다.
땅이 얼어서 잘 파지지 않았다. 꼬쟁이를 하나 주어들고 그것으로 팠다. 아주 깊고 큼직하게 팠다. 그다음 종이로 싸고 비닐로 싸고 또 봉투에 넣은 사진을 묻었다. 봉분처럼 흙도 덩실하게 무져놓았다. 그리고는 무엇에 쫓기우듯 허둥지둥 길가로 되돌아나왔다. 효은은 약속한 장소에서 그때까지도 눈이 까매서 기다리고있었다.
정림을 보자 말했다.
《저… 나도 련하에 갈가 해요.》
《가오.》
《나 혼자서요?》
《우린 따로따로요.》
《제 말 좀 들어요.》
《들을게 없소!》
《제발 오해하지 말아요.》
효은이 안타깝게 호소하며 정림의 옷자락을 쥐여흔들었지만 그는 짚으로 만든 사람처럼 넋없이 흔들거렸다.
《부탁이요. 날 잊어주오.》
《뭐라구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난 사실… 그 말을 하자고 나왔소.》
《아니예요. 거짓말이지요, 예? 어서 대답해봐요.》
《효은이, 난 이제야 비로소 자기를 알게 되였소. 나라는
효은은 찬물을 들쓴듯 몸서리치더니 한발자국, 두발자국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정림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물러섰다.
어둠속에서 눈물에 젖은 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 그러면 지금까지 내게 했던 말… 다 가져가라요. 나도 안가지겠어요. 몽땅 가져가란 말이예요!》
처녀는 돌아섰다.
그리고 갑자기 할머니처럼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