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 회)
제 2 편
제 2 장
4
여기 자령기계공장에서 최수광과 다시 만나게 된것은 리정에게 있어서도 뜻밖이였다. 전에 같이 일할 때와 달리 최수광에게서는 로련하고 지어 범접하기 어려운 체취가 풍겨왔다.
그는 리정을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태연스러운 표정으로 대하였다. 보름이 지나도록 그와 주고받은 말은 사업상의 이야기외에 다른것이 없었다. 그러되 최수광은 리정이 제기하는것이라면 백사불구하고 다 들어주는 원칙에서 사업했다. 공장에 온 다음날 리정이 현장을 돌아보겠다고 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마 눈이 감길게요. 오죽했으면
과연 공장의 기술장비수준은 뒤떨어진 상태였다.
공장의 대다수 설비들이 1970년대에 1만대 공작기계새끼치기운동을 벌릴 때 생산된 낡은것이였다. 다른 나라와의 어려운 가격투쟁끝에 들여왔다는 설비들도 그것을 다룰만 한 기대공이 없어 세워둔채로 있었다. 현장온도는 낮고 통풍이 되지 않아 공기가 희박했다. 그런속에서 수명이 다된 설비들을 이렇게저렇게 얼려가며 생산을 보장하고있었다. 아마도 이곳에서는 거칠고 차고 텁텁한것만이 로동과의 인연으로 간주되고있는듯싶었다. 그래서인지 어떤 사람들은 반짝거리는 구두에 극장구경을 가듯 몸에 착 붙는 양복차림을 하고 나타난 평양손님을 곱지 않게 흘겨보기까지 했다.
그래도 리정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머리를 더 솟구고 다니면서 속으로 웨쳤다.
(어서들 나를 보십시오. 나도 동무들과 함께 일을 하려고 왔지만 이렇게 차려입고 왔습니다. 왜냐구요?
한달이 잠간새에 지나갔다. 그 기간 리정은 손님이면서도 로동자였고 선생이였다. 최수광과 지배인사업을 대리하고있는 젊은 기사장은 그를 《사장동무》라고 제대로 불러주었는가 하면 공장의 첫 CNC견습공으로 뽑힌 6명의 청년들은 그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몇사람 더 양성해볼 욕심이였으나 그자신의 시간과 여러가지 조건이 허락치 않았다. 인해전술이 몸에 밴 직장장들과 오랜 기능공들은 평양에서 온 손님이 어쩌면 신통히도 자기들이 가지고있는 기능을 내리물려주려고 했던 사람들만 뽑아갔노라고 혀를 차는것이였다. 하지만 젊고 야심찬 양성생들은 《련하기계》라는 신비의 세계에 빠져서 순간도 리정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순호, 수자조종체계가 어떻게 구성됐다구?》
《그야 뭐… 수자조종체계는 수자조종장치와 사보구동장치, 순차조종장치, 반결합수감요소 등으로 구성되여있습니다.》
《체계프로그람을 빼뜨렸어.》
《알아.》
《그럼 일형동무가 부호일람표를 말해보오. 〈G〉?》
《준비기능입니다.》
《〈M〉?》
《보조기능!》
《좋소. 가령 〈G04〉라고 하면?》
《그건 에… 오! 일시정지를 나타내는겁니다.》
자령기계공장에 놓은것은 3대의 《RT-125》형선반과 2대의 《RTC-136》형선삭가공중심반이였다. 며칠간의 무부하시험이 끝나자 기대들에 가공소재를 먹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흰 머리에 얹은 년한과 경험이야 어데 가랴고 생각하던 사람들까지 머리를 내밀고 저혼자 슬슬 돌아가는 기계를 희한해서 바라보았다. 퇴근길에 멈춰서서 알지 못할 부호며 수자들이 바삐 돌아가는
5대의 CNC설비들은 생산에 인입되자마자 공장의
《〈쇳대신〉이 왔구려! 공장에 변이 났어!》
지원나왔던 기사장의 할아버지가 하늘을 향해 손을 썩썩 비비며 춤추듯 돌아갔다. 일하는 재미란 이런것인가! 리정은 몹시 피로했지만 그런줄 모르고 일했다. 당장은 간단한 가공프로그람도 그가 다 짜주는 수였다. 얼마 지나서부터는 양성생들이 기대를 맡아보기 시작했다. 성격이 바글바글한 기사장은 철부지들에게 기계를 맡겼다가 어느 순간에 망가먹지나 않겠는지 마음을 놓지 못했다.
어느날 연형묵이 공장에 나타났다.
그는 비여있던 지배인방을 열고 차에서 큼직한 지함을 부리워 올려다놓게 했다. 그리고 참모, 행정, 업무부서들과 당위원회를 포함한 전체 종업원들을 조립직장에 모이게 했다. 기사장이 나서서 직장별로 인원을 빨았고 직장장들은 그들대로 작업반을 따졌다.
《포장! 포장엔 사람이 안 왔소?》
《오기는 왔는데 머리가 없으니 어떻게 말을 해요?》
《반장이라는게 또 헬렐레해서 CNC구경간게 아니야?》
정돈이 거의 끝나갈무렵 연형묵이 최수광과 웬 낯선 사람을 앞세우고 나타났다. 그뒤로 기사장이 무슨 축하모임을 사회하듯 박수를 쩌럭쩌럭 치면서 따라왔다.
그가 박수를 치니 모두 그런 대목인줄 알고 박수를 따라 쳤다.
《동무들!》 연형묵이 한마디 찾고나서 군중을 둘러보았다.
연형묵의 뒤에서 군관처럼 머리를 바투 올려깎은 사람이 한발 나서며 인사를 했는데 상체가 외투에 빡 끼운것이 몸이 퍽 다부져보였다. 채광이 정면으로 떨어지고있어 손채양을 하고있던 리정은 연형묵이 새 지배인의 경력을 소개할 때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는 분명 권춘호의 아버지였던것이다.
《직장장이상 일군들은 제 방에 모입시다.》
기사장이 짧은 모임끝에 알리였다. 사람들은 새 지배인에 대한 인상을 제나름대로 표현하면서 웅성웅성 헤쳐가기 시작했다.
건물밖에서 연형묵과 권하세가 리정을 기다리고있었다.
《인사하오. 우릴 도와주러온 련하기계 사장동무요.》
연형묵이 소개를 하자 권하세는 《알고있습니다. 우린 이미 구면이지요. 엄연히 따지면 스승벌이 된다고 할가.》라고 말하였다.
《뭐, 스승벌이라고?》
《예, 대학에 다닐 때 사장동무의 특강을 받았습니다. 〈CNC기술의 세계적발전추세와 련하기계〉, 이런 제목이였지요.》
《일자지사라고 그럴만도 하구만.》하고 연형묵은 말했다. 《그러니 리정동무가 제자의 실기시험을 받아내러 온셈이요.》
리정은 그 강의에 권하세도 참가했다는것을 알았다.
《춘호동무한테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춘호가 누군데?!》 연형묵이 물었다.
《제 아들입니다. 지금 안흥에서 부기사장을 하는…》
《그렇소? 이렇게저렇게 인연이 후하게 얽히누만.》
연형묵은 내용도 모르고 얼굴이 환해서 두사람을 재촉했다.
《하여튼 좋구만. 자, 어서 지배인동무의 방으로 올라가기요.》
해가 잘 드는 방이였다. 창턱에 놓인 토기화분에서는 꽃망울을 듬쑥 문 선인장이 자라고있었다. 책상우에는 지함이 놓여있었다.
《이게 뭔지 알겠소?》하고 연형묵이 물었다.
《글쎄올시다. 콤퓨터지함 같은데는…》
《옳소. 자령기계공장 지배인방에 놓으라고
권하세가 리정의 손을 스스럼없이 그러잡았다.
《사장동무, 많이 배워주시오. 내 기꺼이 종아리를 맞겠소.》
《김책공대를 나온 아들이 있다면서? 그가 아버지의 선생노릇은 하지 못하겠다오?》하고 연형묵이 물었다.
《아들 말입니까? 에에, 말도 마십시오.》하고 권하세는 맛적은듯 입을 다시였다. 《내 이걸 모른다고 괄시받은걸 생각하면…》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기사장이 사색이 돼서 뛰여들었다.
《책임비서동지! 지배인동지! 사곱니다, 사고.…》
《사고라니?! 무슨 소리요?》 연형묵이 물었다.
《〈CNC〉가, 련하기계가 녹았습니다.》
《기사장동무!》 련하기계라는 말에 리정도 긴장해졌다. 《좀 차근차근 이야기하십시오. 무슨 설비가 어떻게 됐다는겁니까?》
《그 철부지들이 일을 쳤습니다. 이자 모임을 끝내고 현대화지휘부로 가댔는데 현장에서 소동이 벌어지지 않았겠습니까. 순호가 맡아보는 기대인데 단내가 세게 나고 움직이질 않습니다.》
《가봅시다.》
리정이 앞서고 세사람이 뒤를 따랐다. 현장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와있었다. 최수광이 기대공을 세워놓고 연유를 따져묻는데 순박한 청년은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줄을 몰라하고있었다.
사고가 난것은 《RTC-136》형선삭가공중심반이였다.
리정이 나타나자 최수광이 슬그머니 귀속말을 했다.
《전압파동때문인것 같소.》
《전압파동이요?》
전압주파수파동의 영향을 제일 심하게 받는것은 집적소자가 리용된 연산 및 기억장치와 계전기, 사보전동기 등이다. 리정은 최수광의 말이 십중팔구 옳을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연형묵과 권하세에게 정확한것은 분해해보아야 알겠지만 모름지기 전압주파수파동때문에 사고가 난것 같다고 최수광이 한 말을 그대로 옮겼다.
권하세는 모를 소리라는듯 머리를 기웃거렸다. 다른 공작기계들은 아무 일도 없는데 련하기계만 이상이 생겼으니 그럴것이다.
권하세는 현대화지휘부에 들어가 전화통을 끌어당겼다.
《지배인이요. 동력을 찾소. 동력!》
《지배인동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 주변전소.》
그때 누군가 창문유리를 딱딱 두드리더니 얼굴을 바투 들이대고 《지배인동지, 제 여기 왔습니다. 동력기삽니다.》라고 소리쳤다.
사고소식을 듣고 달려왔는지 얼굴에 땀이 번들번들했다.
《기사동무, 지금 전력계통이 어떻소?》
《갑자기 동요가 심해졌습니다. 그렇지만…》하고 그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이만한 전압파동은 전에도 있었는데…》
권하세가 그런 떨떨한 소리는 하지도 말라고 소리치는데 연형묵이 이공장에서 어디 전기를 받아쓰는가고 물었다. 동력기사가 도내 중소규모발전소들을 통합한 전력망에 물려있다는것과 정전은 잘되지 않지만 대신 전력계통의 안정도가 높지 못하다고 대답했다.
《전압편차의 허용한도가 얼마요?》
《국가적으로는 ±10프로로 제정되여있습니다.》
《그건 일반설비들의 경우고 자동화설비는 다릅니다.》
리정의 말이 옳았다. 콤퓨터를 비롯하여 현대화된 설비들의 경우에는 그 한도가 5프로 더 낮았다. 하도 재래식설비들만 다루다보니 동력기사조차 서로 다른 허용한도가 있는것을 모르고있었다.
《이대로는 귀중한 설비를 다 못쓰게 만들겠습니다. 지배인동무, 아무래도 협의회를 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수광은 권하세가 아니라 연형묵을 보면서 말했다. 하기는 전력계통의 구성형태를 바꾼다거나 안정도를 높이는 문제는 공장일군들끼리 모여앉아 토론할 문제가 아니였다. 잠시후 권하세의 방에는 관련부서와 현대화지휘부성원들, 리정이 참가한 가운데 협의회가 열리였다. 말이 협의회지 사실은 연형묵에게 이것이 걸렸소, 저것이 걸렸소 하소연을 하는것과 같았다. 회의도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권하세가 전화를 받았는데 현장에서 사고의 원인이 예견했던바대로 전력계통동요때문이라는 확답이 올라왔다. 전화내용이 알려지자 분위기가 더 무거워졌다. 연형묵은 동력기사를 찾았다.
《전력계통구성이 어떻게 됐는지 다시 좀 설명해주오.》
《예, 전력계통은 그 구성형태에 따라 방사모양계통과 고리모양계통으로 나누는데 방사모양계통에서는 발전소, 변전소로부터 곧추 뻗어나간 송전선으로 계통을 구성합니다. 계통구성이 단순하기때문에 사고파급이 적은 반면에 사고때 다른 통로를 통하여 전력을 받을수 없으므로 정전되기 쉽습니다. 고리모양계통은 발전소, 변전소들로부터 방사모양으로 뻗어간 송전선을 린접하고있는 다른 송전선과 병렬하여 계통을 구성하는데 우리 공장이 그와 같은 경우입니다. 고리모양계통은 구성이 복잡하고 사고때 다른 계통에 파급되여 넓은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반면에 한통로 사고때에도 다른 통로를 통해서 전력을 받을수 있는 유리점이 있습니다.》
《지난 시기에는 전기의 질보다도 전력공급 그자체에 더 신경을 써야 했기때문에 지금의 체계가 유리했지만 이제부터는 질을 더 중요시해야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하고 기사장이 덧붙였다.
권하세는 난감한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당장 어데서 그런 질좋은 전기를 받는단 말이요?》
《필요하다면 위원이나 수풍에서라도 끌어와야지요.》
《허허, 그러느라면 세월이 다 가겠소.》
사방에서 웅성웅성했다. 연형묵이 최수광을 찾았다.
《처장동무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기탄없이 얘기해주시오.》
최수광은 일어나서도 말을 꺼내기를 주저하다가 연형묵이 거듭 기탄없이 의견을 나누자고 강조해서야 뜨직이 입을 열었다.
《자령기계공장의 현대화는 말그대로 본보기를 창조하는 사업입니다. 여기서 창조되는 성과와 경험이 앞으로 자강도는 물론 온 나라 기계공장들을 현대화하는데서 큰 고무가 될것입니다. 그런데 일이 여의치 않게 번져져보십시오. 그때 초래되게 될 후과는 경제적손실과는 대비도 할수 없을것입니다. 때문에 나는 현재의 전력망구성을 정리하고 결정적으로 단독선을 끌어야 한다고 봅니다.》
《단독선을 끈다…》 연형묵은 잠시 동안을 두고 리정에게는 할말이 없겠는지 해서 맞은켠에 앉아있는 그에게 눈길을 던졌다.
리정은 연형묵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일어나지는 않았다. 예상치 못했던 정황에 생각이 복잡한것 같았다. 연형묵은 리정에게 주었던 눈길을 거두며 말했다.
《처장동무의 말이 한가지는 옳다고 보오. 당이 바라는것은 자령기계만의 현대화가 아니요. 앞으로는 모든 공장, 기업소들에서 현대화의 불을 지피게 될것이요. 그런데 그들에게 CNC화를 하려면 필시 단독선을 끌어야 한다는 인식을 준다면 어떻게 되겠소? 저마다 동무들처럼 제기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말이요?》
연형묵이 문제를 그렇게 세우자 좌중은 숨을 죽였다.
이윽고 최수광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씀의 뜻을 알겠습니다. 당면하게는 대책이 강구될 때까지 련하기계설비들의 가동을 중지시켜야 할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연형묵은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장을 떠날 때 연형묵은 작별인사를 나누고도 이윽토록 차에 오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혼자소리처럼 《당에 보고를 드립시다.》라고 하였다. 그날부터 기계가동이 중지되였다. 공장분위기가 삽시에 저조해졌고 사람들의 얼굴도 밝지 못했다.
《글쎄, 어쩐지…》하고 머리를 젓는 사람들도 있었다.
CNC기계라는게 도회지처녀의 신다리처럼 맷맷해서 울퉁불퉁한 길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것이였다. 모처럼 시작했던 일이 난관에 부닥치자 리정의 심정은 괴로왔다. 협의회가 있은지 이틀이 지나 그는 권하세에게 평양에 다녀올 의향을 비쳤다.
속만 태우면서 앉아있기도 급하거니와 마침 김경조에게서 며칠간이라도 왔다갈수 없겠는가고 전화가 왔던것이다. 이래저래 무거운 마음으로 공장을 떠난 리정은 평양에 도착하여 하루밤을 묵고 이튿날 아침 교외로 나가는 통근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