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 회
제 1 편
21
드디여 그 시각은 왔다. 강부관장이 들어와 보고드렸다.
부관장의 목소리는 벌써 젖어있었다. 훌쭉해진 볼편의 근육이 알릴듯말듯 떨렸다.
《아버지!》
여전히 웃음을 띄우고, 그러되 여느때처럼 떠들썩하지도 않으며 퍼그나 낮게 부르짖는 어린 경희의 목소리였다.
《오, 우리 경희로구나!…》
그러자 경희는 두팔로
《아버지! 난… 난 참말 아버지 보고싶었어요.》 뜨거운 입김이 퍼부어지더니 이어 그 목소리는 흐느낌소리같이 들려왔다. 《그래도 울진 않았어… 정말이야요. 오빠한테 물어봐요. 난… 오늘도… 안울래…》
그 순간
《자, 방으로 들어가자. 영실이도 같이…》
등뒤에서 문이 닫겼다. 강부관장이 그 문을 꼭 닫고 거기에 등을 붙인채 까딱않고 서있있다. 방안에 웃음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강부관장은 흠칫 몸을 떨었다. 그 전화종소리가 방안의 웃음소리를 깨칠가 저어하듯 급히 송수화기를 든 그는 상대방의 말이 끝나자 이렇게 잘라 말했다.
《지금은 안됩니다. 한 30분후- 아니 1시간후에 다시 전화를 걸어주십시오.》
송수화기를 놓고 한동안 까딱않고 서있었다. 바로 그때 복도에서 또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복도쪽의 문을 열며 낮게 부르짖었다.
《좀 조용해주십시오!》
다음 순간 입을 다물고 굳어졌다. 손에 마이크를 들거나 전기줄을 늘이고있는 사람들앞에 문화선전상 허정숙이 서있었다. 그제서야 그는 오늘
《상동지, 지금
허정숙은 숨을 죽이고 서있다가 마침내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였다. 같이 온 사람들을 향해 조용하라는 의미의 손짓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부관실에 들어섰다. 허정숙은 쏘파 한끝에 자리잡고앉아 가만히 귀를 기울이였다.
침묵이 깃들었다. 창밖에서 우짖는 새소리도 여겨들을만치 방안은 고요했다. 이 사색적인 침묵속에서 허정숙은 부관장과 같이 조용히 앉아 한쪽 벽면에 드리우는 나무그림자를 보고있었다. 그러나 마음은 쓰리고 아파났다. 그런데 그때 집무실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웃음소리 뒤끝에 또 두런두런하는 말소리가 울리더니 조용해졌다.
그때 허정숙이 소리를 죽여 물었다.
《누가 자제분들을 모셔가요?》
《영실동무가 갑니다.》
허정숙은 펀뜻 눈길을 들었다. 예상외의 대답에 깜짝 놀라며 급히 캐물었다.
《그애 혼자서?!…》
《예.》
《?…》
허정숙은 마치 후려맞은듯 한 표정이였다. 벅찬 경련이 그의 얼굴을 줄달음쳐갔다. 그는 또 무슨 말인가 하려 했으나 혀가 말을 듣지 않아 떨리는 손가락으로 양복옷섶을 구겨대기만 했다. 그 순간 또 굳어졌다. 집무실에서 노래소리가 울려나오고있는것이였다. 쇠소리가 섞인 웅근 목소리와 가늘고 쟁쟁한 목소리들이 조화롭게 울리고있었다.
내 고향을 떠나올 때
나의 어머니
별안간 몸을 떨며 허정숙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타는듯 한 무서운 아픔이 가슴을 쿡 찌른것 같았다. 기억에도 생생한 이 노래, 언젠가 그의 부친의 생신날
잘 다녀오라 하시던 말씀
아 귀에 쟁쟁해
마감부분에 가서 노래소리는 겨우 분간해 들을만큼 작아졌으나 허정숙은
이윽고 집무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노래도 끝나고 마지막 절절한 인사와 당부도 끝나고 이제는 조용히 마주앉아계시는듯싶었다.
허정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발끝걸음으로 복도로 나섰다. 조용히 문을 닫고 다시 현관문까지 걸어나와서는 뿌얘진 눈으로 파아란 가을하늘을 쳐다보았다. 먼 하늘가 한끝으로 기러기떼가 날고있었다. 소리도 없이 화살모양의 대형을 지어 새까만 반점들로 사라져갔다. 정원너머에서 전차의 굴음소리가 들려왔다. 큰길쪽에서 커다란 보짐을 이고 어린 소년을 데리고 가는 녀인이 보였다. 잔등엔 젖먹이를 업고있었다. 소년의 등에도 작은 배낭이 지워져있었는데 녀인이 한손으로 그것을 들어주고있었다. 그들도 어덴가 먼곳으로 떠나가는 모양이였다. 허정숙은 그들이 굽인돌이로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떼지 못하고있었다. 그래도 저애들은 어머니와 함께 가고있구나!… 그는 가슴이 저릿저릿해나서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고있었다.
바로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오, 우리 경희가 정말 용쿠나!》
《응.》
경희는
《경희야.》
《응.》
경희는 이렇게 대답했으나 가느다란 두팔은
《아버지, 우린 또 언제 만나나?》
《경희야, 우린 인차 만난다. 이제 아버지가 미국놈들을 다 몰아내고 경희랑 오빠랑 부르지. 얼마동안만 헤여져있으면 돼. 알겠지?》
《응.》
비로소 경희는 목을 감았던 팔을 풀었다.
《오빠, 난 울지 않았어…》
그러자
《아버지, 경희는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그럼, 그래야지.》
《아버지도… 건강하세요.》
《그래, 그러마…》
《부탁한다!…》
이윽고 영실은 오누이의 손목을 잡고 걸음을 떼였다. 처녀의 얼굴은 뜨거운 눈물에 흠씬 젖어들고있었으나 그는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것 같았다.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정문쪽으로 타박타박 걸어갔다. 이렇게 처녀는 오누이의 보호자, 친누나, 친언니가 되여 어려운 후퇴의 길을 떠나게 되였다. 이때 누구도 그 정겹고 알뜰한 처녀가 몇달후 적기들의 폭격때 입원중이던 병원토굴에서 치명상을 입고 숨지리라는것을 알지 못하고있었다. 숨을 거둔 김영실의 한손엔 경희에게 주려고 며칠밤을 새우며 만들던 커다란 인형이 꼭 쥐여져있었다.…
영실의 일행이 정문가까이 이르렀을 때였다. 별안간
《얘들아, 하마트면 잊을번 했구나.》
《어머니사진이다. 가지고 가거라!…》
《아버지!… 우리 걱정은 마시고 부디… 몸조심하세요!》
《오냐. 정일아, 난… 믿는다!…》
이렇게 자제분들은 떠나갔다. 수백수천의 사람들이 자동차가 말아올린 먼지를 들쓰며 가는 그 길, 찌국거리는 달구지채에 매달린 늙은이, 어린이, 녀인들이 가는 그 길로 그들과 꼭같은 행장을 하고 떠나갔다. 이윽고 그들의 모습은 사람들의 물결에 잠겨 가뭇없이 사라져갔다.
이 모든 정경을 지켜보는 허정숙의 두볼에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있었다. 하지만 그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어느덧 눈물이 입귀로 스며들었다. 쩝쩔하고 따스한 눈물, 부지불식간에 그는 그것을 목메인 흐느낌소리와 함께 삼켜버렸다.
이윽고
《웬일이오?》
《방송준비는 다 됐소?》
《예,
《자 들어가기요.》
그러나 현관에 들어서려던 때 갑자기 련속적인 폭음이 대기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현관의 창문유리가 드릉드릉 떨렸다. 멀지 않은 서평양쪽에 또 적기들이 달려들어 폭격을 해대는것이였다.
허정숙은 심장이 졸아들었다. 끄물끄물 타오르는 검붉은 연기와 먼곳에서 번개불마냥 번쩍이는 섬광을 바라보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였다. 역시 그쪽 하늘을 바라보고있던 강부관장이 운전수를 소리쳐 불렀다.
허정숙이 그에게 다급히 물었다.
《그쪽이지요?》
《예, 그쪽입니다!…》
그쪽은 바로 자제분들이 떠나간 방향을 말하는것이다. 부관장은 차를 달려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는가 알아보려는것이였다. 호위원 리병섭이 먼저 달려나오고 뒤따라 김덕삼운전수가 나타났다. 그러나 그때
《소동을 피우지 마오. 모두 자기 위치를 떠나지 않도록 하시오!》
《예,
허정숙은 타는듯 한 입술을 놀려 겨우 이렇게 대답올렸다.
허정숙은 꿈속에서처럼 걸음을 옮겼다. 터질듯 부풀어오른 가슴속에서 뜨거운 입김이 쏟아져나왔다. 그 순간에는 지동치는 폭음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자기의 가슴속에서 잉걸불이 이글거리며 세차게 타오르는것을 느꼈다.
《사람들이여, 우리
그는 뜨거운 눈물이 어려 뿌얘진 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