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회
제 1 편
19
어느덧 산과 들은 울긋불긋 가을철단장을 끝내고있었고 먼 남쪽과 북쪽에서는 철새들이 날아가고 날아왔다.
락동강기슭에서 떠난 인민군주력부대들도 퇴색하는 산발을 타고 38°선부근에 이르렀다. 팔공산을 떠나 오대산, 태백산을 거쳐오는 부대도 있었고 가야산, 속리산을 떠나 어언 림진강에 이른 부대들도 있었다.
적들도 역시 38°선이북에 대한 대규모적인 침공에 열을 올렸다. 그리하여 전쟁의 열점은 38°선을 가운데 두고 무섭게 가열되고있었다.
기나긴 민족분렬의 수난을 지켜온 38°선!… 원래 이것은 《국경》으로 설정된것이 아니다. 1945년 8월 10일이였다. 그날 일본정부는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항복하겠다는것을 련합국정부들에 통보하였다. 그러자 일본관동군이 적어도 몇달은 쏘련군과 싸우리라 믿고있던 미국정부는 몹시 당황해했다. 예상했던것보다 사태가 빨리 도래했던것이다. 트루맨은 특히 조선반도문제로 초조해했다. 당시 만주에는 쏘련군, 중국에는 장개석군이, 동남아시아에는 미, 영군 등 각기 해당한 련합군이 있었으며 일본본토에는 미군이 주둔할 작정이였으므로 조선반도만이 공백이였다. 더우기 여기서는 무조건 항복이후에도 최후의 한사람이 남을 때까지 저항하기로 결의한 조선군관구 제17방면군 등의 일본군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이들의 무장해제를 누가 맡겠는가를 시급히 결정해야 했다. 즉 누가 조선반도를 차지하겠는가를 결정해야 하는것이다.
1945년 8월 10일, 아침 일찌기 트루맨은 국무장관 번즈, 륙군장관 스팀손, 해군장관 니미츠를 불러 비상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는 먼저
그리하여 비상회의는 일본군의 항복을 《북부조선에서 받》게 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조선북방》을 어디로 정하겠는가가 문제였다. 리유가 있어야 했던것이다. 하는수 없이 트루맨은 《3부조정위원회》가 대안을 만들어 제출하라고 지령했다. 《3부조정위원회》는 국무성, 륙군성, 해군성의 장관들로 이루어져있다. 여기에 국무차관 러스크까지 참가하여 조선반도의 북위 38°선이남을 일본대본영륙군이 관할하고있었던만큼 대본영륙군의 항복을 저들이 받는것으로 하여 38°선 이남을 차지하자는 모의를 했다. 그것은 당시 조선중부 이북의 군관구는 관동군의 지휘하에 있었고 관동군은 쏘련군대의 작전대상인 반면에 조선중부 이남의 일본 제17방면군은 미군의 작전대상인 대본영륙군야전부대이기때문이였다.
38°선 이남을 차지하려는 미국의 이 계획은 또한 당시 미군의 태평양륙군주력이 필리핀에 있고 조선에서 제일 가까운 미제24군단도 오끼나와에 있으므로 일본과 동시에 조선반도를 관리할만 한 병력의 여유가 없었던 사정과도 관련된다.
그리하여 38°선을 경계로 하여 일본군무장을 해제하자는 대안은 트루맨의 비준을 받고 쏘련정부에 통고되였다. 그때 미국은 쏘련이 전략적고려에 의하여 더 남하할것을 완강히 요구하리라고 생각했으므로 몹시 불안해하고있었다. 하지만 쏘련은 미국과의 교섭에서 앞으로 받아내야 할 정치적문제들을 고려하여 이 제의에 간단히 동의해버렸다.
이렇게 되여 조선반도의 순수 지리학적위도선에 지나지 않던 38°선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쏘미량군관할구역의 경계선으로 그어진것이 한달후인 9월 7일 미제침략군의 선발대가, 다음날엔 오끼나와에 있던 미제24군단의 2개 사단이 악명높은 하지중장의 지휘하에 상륙하면서부터 군사, 정치적분계선으로 고착되고 3 000만 조선민족도 북에 900만, 남에 2 100만명으로 갈라졌다. 민족분렬의 가슴아픈 비극은 이렇게 시작되였다. 처음은 그저 논가운데로 뻗어간 도로상에 하나의 쇠사슬을 늘이고 나무로 대충 만든 초소가 하나 세워지던것이 나라를 가르고 민족을 갈라놓았다. 또 여기서 미제침략자들은 참혹한 전쟁을 도발하였고 지금은 이 분계선을 땅크로 짓뭉개며 전조선을 강점하기 위해 미친듯 침공을 다그치고있다.
극적인 1950년 10월의 사변들은 이렇게 38°선을 넘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적들은 평양에로의 접근로들에서 특히 미친듯이 공격을 다그쳤다. 미제8군의 기간을 이루는 미1군단 관하 미제1해병사단, 영제27려단, 미제24보병사단, 괴뢰군1보병사단 등이 이 방향에 집중되였다. 조선중부와 동부에서는 괴뢰군 2군단과 1군단이 각기 양덕과 원산을 목표로 전진하였고 인천상륙작전부대였던 미10군단은 원산상륙을 준비하고있었다.
맥아더는 추호도 승리를 의심치 않고있었다. 그의 휘하에는 어언 륙상부대만해도 미군 12만 5 200명, 괴뢰군 10만 2 000명, 영국, 필리핀 등 추종국가군대 2만여명, 합계 24만 7 200명의 미군 괴뢰군 병참부대 11만 9 600명, 미극동공군 3만 7 000명, 미극동해군 5만 9 500명, 총병력 46만 4 300여명에 달하였다. 지난 그 어느 시기에도 맥아더는 이러한 대군을 지휘해본적이 없다. 그는 도꾜에서 성명을 발표했다. 인민군대에 《항복》을 권고하는 《최후통첩》이였다. 동시에 조선말로 된 성명문 250만매를 38°선과 평양 등의 주요도시들에 살포했다.
력사는 같은 날 베이징에서 발표된 하나의 강경한 성명도 기록하고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주은래외교부장은 그 성명에서 미제의 조선에 대한 비법적인 침략전쟁을 중국인민은 결코 수수방관하지 않을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하였다.
놀라운 이 사태발전을 지켜보며 세계는 긴장해졌다. 제3차 세계대전위기설이 나돌았다. 새로운 열핵전쟁에 대한 기사들로 서방세계의 신문, 잡지들은 떠들썩했다. 세계각국의 모든 통신사의 안테나들은 극동에서 울려오는 사소한 음파라도 놓칠세라 고도로 예민해졌다. 수억의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조선을 지켜보고있었다.
놈들은 이러한 야만적인 만행으로 우리 인민을 놀래우려고 한다. 전대미문의 무차별폭격으로 우리 인민의 의기를 꺾고 굴복케 하려고 한다. 그래서 매일과 같이 폭격을 들이대고있다.…
사람들이 뛰여다니고 고함을 지르고있었다. 어느 골목길에서는 한 처녀가 거쉰 목소리로 통곡하는 늙은이를 부축해가고있었다.
《인젠 이 대통로에 성한 집이라곤 하나도 남아있지 않구만!…》
《어제도 놈들은 서평양조차장일대와 평천리에 500kg짜리 폭탄과 소이탄 900개를 떨구었습니다. 내각사무국에서 장악한 자료입니다.》
《…》
《저 동무가 뭐라고 소리치오?》
부관장은 귀를 강구다가 길건너로 가려고 했다.
《가만, 들어보자구.》
청년은 불을 끄며 돌아치는 사람들을 향해 웨치고있었다. 떠들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인제는 청년의 목소리를 가려들으실수 있었다.
《들리지요?… 인젠 됐지요?》
그제서야
《들어보라요. 〈밭갈이타령〉이 나와요!》
청년은 한손으로 무슨 시늉인가 하고는 다람쥐처럼 날래게 기여내렸다. 사람들이 그의 어깨를 툭툭 쳐주면서 칭찬하는것 같았다. 청년이 큰소리로 무어라고 말하자 둘러섰던 사람들이 큰소리로 웃어댔다.
수도에로의 접근로들에서 전투가 치렬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짐을 싸들고 정든 거리를 떠나가는 이때 사람들이 웃고 고성기에서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고있는것을 무심히 스쳐지나실수 없으시였다.
아
에루화 데루화 모두다 떨쳐나 밭갈이가세
사람들이 전쟁에 습관되고있다. 승리의 환희도 알고 일시적인 난관도 겪어본 사람이라면 결코 다가오는 시련을 무섭게만 보지 않는 법이다. 그들은 용기를 가다듬고 그것을 이겨낼 마음의 준비를 갖춘다.…
민주의 새봄에 만풍년 불러불러
그렇다. 온 나라 전체 인민을 불러 원쑤격멸에 궐기시켜야 한다. 인민은
…집무실로 들어가시던
기술서기 오영혜가 그린 지도였다. 다심한 처녀는 매일
처녀는 마치 자기가 제일 먼저 그 소식을 받은것처럼, 자기만이 알고있는것처럼 뛰여다녔었다. 때로는
집무실에 들어서자 책상우에 종이를 꺼내놓으시였다. 며칠전부터 줄곧 생각해오신 방송연설원고를 쓰시려는것이였다. 그것은 전쟁이 일어난 후 두번째로 하시는 방송연설로 될것이다. 첫번째는 전쟁이 일어난 다음날인 6월 26일에 있었다. 그날의 연설에서는 미제에 의하여 강요된 이 전쟁의 본질과 성격을 규정하시고 모든 힘을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다 바칠것을 호소하시였다. 그리하여
그러나 오늘 정세는 급변하였다. 우리 조국과 인민앞에 엄중한 위험이 닥쳐와 나날이 커가고있다. 드디여 온 나라 전체 인민이 떨쳐일어나 침략자들과 판가리싸움을 벌릴 때가 도래하였다.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자
그때 홍명희부수상이 집무실에 들어섰다. 후방으로 자리를 옮기기에 앞서 인사를 드리려 찾아온것이였다. 처음으로 그는 아무런 서류도 든것이 없이 빈손으로
《잘됐습니다. 그런걸 저는 선생이 너무 지체하신다고 걱정하고있었습니다.》
《저… 실은 상임위원회에서 호위차와 인원을 더 많이 조직해달라고 해서… 상임위원회
《그래도 요구하는대로 해줄걸 그랬습니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
그러나 다음 순간 벌써
《념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선생이야 얼마나 큰 중임을 안고 가십니까. 그러니만큼 사업에 지장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제 이미 믿을만 한 사람한테 부탁해놓았습니다.》
《정말입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걸 가지고 가십시오. 다섯간 정도에서는 잘 맞습니다. 보통때는 탄알을 따로 건사해두십시오.》
《일없습니다. 이걸 가지고계시면 마음이 더 든든해질가 해서 드리는것입니다. 정숙동무가 쓰던 권총입니다.》
《예?!… 그럼…
《어서 받으십시오.》
홍명희는 입술을 실룩거리고있었다. 짧게 비다듬은 코밑수염이 바르르 떨리고있었다.
《로상에서 적기들의 공습에 주의하셔야겠습니다.》
《뭘 그러십니까. 김책동무가 내각사업에서 떠난이래 부담이 많으신줄 알고있습니다.》
《선생을 믿습니다. 그럼…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이런 말을 남긴 홍명희를 바래신 후 다시 집무실에 돌아오시였을 때 기다렸던듯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송수화기를 드시자 김종항비서(내각사무국 부국장겸임)가 흥분한 목소리로 보고드렸다.
《잘했소.》
《그런데…
《?…》
그때부터 무려 한주일나마 흘러갔건만 종무소식이였다.
하여 일부 사람들은 머리를 기웃거렸다. 리성조의 경우처럼 《도주》라고 락인하지는 않았지만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리고는 더이상 알아보지도 않았다.
놀라운 일이다. 전선형편이 어려워지자 많은 일군들은 무엇보다먼저 관심하고 돌봐주어야 할 귀중한 인재들에 대하여 잊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라의 운명이 위급한 때에 개별적사람들의 운명까지야 어떻게 돌아볼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고있다.
《우린 어려운 때일수록 사람들을 더 아끼고 책임지고 돌봐주어야 하오. 그런데 실종된 박사에 대해서도 제때에 보고하지 않고있었으니… 얼마나 엄중한 일이요. 즉시 모든 중앙기관, 대학, 연구집단 특히 유능한 인테리들의 소개정형을 다 장악해야겠소. 대학교원, 학자, 설계가, 작가, 예술인… 그들 한사람한사람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소. 그런데 지금은 정세가 위급하다고 내버리고있소. 안되오! 한사람도 남기지 말고 다 데리고 가야 하오. 즉시 대책을 세우시오!…》
다시 얼마간 시간이 흐른뒤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