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회
제 1 편
9
밤은 깊었다. 창밖은 물론 집무실의 구석구석과 방바닥에도 빈틈없이 두터운 어둠이 둘러싸고 겹치고 깔려있었다. 등갓을 씌운 탁상등불빛만이 탁자로부터 창가에 이르기까지 가까스로 어둠을 밀어내고있었다.
밤은 평온과 안정을 가져다주며 휴식을 요구한다. 하지만
서울과 락동강전선에 조성된 어려운 정황때문만이 아니다. 후퇴가 시작되면서 나타난 일부 심중한 문제들때문이였다.
물론 승리적으로 줄기차게 전진해가던 공격부대들을 그 목적지 바로 코앞에서 멈춰세우고 돌려세운다는것은 례사로운 일이 아니다. 최대속력으로 달리던 기관차에 급제동을 건다면 모진 충격으로 차량들이 세차게 흔들리고 련결부위가 끊어져나가고 부딪치고 찢겨지고 레루에 쓸린 차바퀴들에서는 불이 펄펄 일것이다. 바로 그처럼 많은 지휘관들이 충격을 받고 뒤흔들렸었다. 최현은 격하여 제발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고함을 쳤다고 한다. 전쟁의 승리를 이제 며칠안팎으로 내다보고있던 그였으므로 피흘려 넘어간 락동강을 도로 건너오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부터 너무도 분하고 절통하여 고질적인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류경수는… 부드럽고 단정한 그였지만 전선사령부의 문앞에까지 땅크를 타고 들이닥쳤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땅크에서 뛰여내렸을 때 김책이 폭우속에 나와 버티고 서있는것을 보고는 기가 죽어서
무정은 오늘 한 공병중대장을 체포하여 총살할것을 명령하였다. 그 중대장이 명령에 불복하여 엄중한 후과를 빚어냈기때뿐이였다. 그런데 그 중대장은 10여명에 달하는 부상병들이 오지 않아 기다리다가 불의의 습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자신이 희생적으로 위기를 막았으나 무정은 가차없이 벌하기로 했다. 누구든 군사적과오를 범하면 죽음으로 징계된다는것을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피의 교훈으로 새겨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처벌은 당연하다. 군법은 엄하며 전시하에선 더욱 가혹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여기엔 무엇인가가 결여되여있다. 날이 안선 장검처럼, 아픔이 없는 추억처럼 애매하고 어정쩡한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10여명에 달하는 부상병들의 문제이다. 왜 무정은 그들 부상병들에 대해서는 외면하였는가? 련합부대들을 적의 포위속에서 구출할 생각은 하면서도 10여명이나 되는 부상병들은 왜 구출할 생각을 못했는가?… 적어서? 도무지 여라문명밖에 안되기때문인가?… 위험한 견해이다. 보통 병사가 아니라 군집단을 지휘하는 군사지휘관인 까닭에 더욱 위험하다!…
《서해안방어사령부에선 아직 소식이 없소?》
《없습니다.
《좋소. 기다리겠소.》
탁자우에 펴놓은 지도를 묵묵히 내려다보고계시였다.
《아, 최용건동무, 기다렸습니다. 그새 정황이 달라진것은 없습니까?》
최용건은 서둘지 않고 천천히 보고드리기 시작했다.…
어제부터 적들은 미제1해병사단과 괴뢰군해병대들로 한강좌안을 강점하며 미제7보병사단과 괴뢰군 17련대로는 서울을 동남쪽으로부터 타격하려고 시도하였다.
날이 밝자부터 인천앞바다에서 날아오른 수백대의 비행기들이 인천-영등포사이의 큰길을 따라 파도식으로 밀려들었다. 그리하여 소사, 약대리, 할미산 일대를 비롯한 한강좌안은 아침부터 낮까지, 낮부터 밤까지 수십수백차례이상 불에 휩싸였다. 공습이 끝나면 바다우에 뜬 수백척의 함선들에서 각종 구경의 함상포들이, 지상에서는 200여대의 땅크와 수백문의 곡사포, 평사포, 박격포들이 일시에 울부짖었다. 그러나 가혹한 그 초토화작전에도 불구하고 영등포일대에서 한강을 도하하려던 적들의 기도는 파탄되였다. 닷새동안이면 서울을 점령하고 우리의 전선과 후방을 차단하겠다고 그리도 호기있게 선언해온 맥아더였지만 아직 한강도 건느지 못하고있다.
적들은 다른 출로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돌연 영등포일대에서의 한강도하를 포기하고 김포방향에로 주타격방향을 바꾸었다. 이러한 정세를 요약하면서 최용건은 보고를 계속하였다.
《한편 적들은 미제1해병사단 주력을 수색-서울사이의 큰길과 철길로 공격케 하고있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문천에서 기동해온 독립부대와 제143땅크련대를 중심으로 반돌격력량을 편성하고있습니다. 오늘밤… 계획하고있습니다.》
《음-》
《김증동동무입니다. 어제 도착하자바람으로 지휘에 착수하였습니다.》
《좋습니다!-》
《아직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찰을 강화하겠습니다.》
《아니, 그래가지고는 늦습니다. 영등포일대와 서대문구의 공격에서 실패한 적들은 우리의 방어가 약한 동남쪽으로 주공방향을 바꿀수 있습니다. 그때에 가서 부대들을 기동시킨다면… 혼란만 가져올뿐입니다. 즉시 서울시 원형방어를 조직하여야 하겠습니다.》
《원형방어말입니까?》
《물론 병력도 물자도 시간도 부족한 형편에서 대단히 어려울것입니다. 그렇지만… 지체해선 안됩니다. 그쪽에도 방어축성물을 만들어야 합니다. 참, 서울시 내부방어공사는 어떻게 되고있습니까?》
《예,
최용건은 흥분한것 같았다. 별안간 어조를 바꾸어 이렇게 덧붙였다.
《한덕모라는 기관사를 만났습니다. 지금 철도기관구 로동자들로 지원병대대를 뭇고 싸우고있습니다.》
《음- 반가운 소식입니다.》
《제가
《그렇습니까!…》
《최용건동무, 래일까지 서울시 원형방어준비를 끝내야 하겠습니다. 서대문구와 영등포일대의 방어부대들중 일부를 떼여 기동시키고 의정부계선에서도 증강할수 있습니다. 방어축성물공사는 서울시민들에게 호소하시오.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는 전인민적항전의 바리케트로 서울에서 놈들의 침공을 저지시켜야 합니다.》
최용건의 힘찬 대답소리는 공명판을 쩡쩡 울렸다.
무정!… 본명은 김병희, 고향은 청진이다. 젊은 나이에 혁명의 웨침소리로 들끓던 동북지방과 산해관너머의 중국내륙각지를 찾아다녔고 그동안 여러번 족쇄를 차고 감옥살이도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무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다. 견결하고 굽힐줄 모르는 투지로 하여 그는 8로군의 중급지휘간부로까지 되였다. 2만 5천리장정때엔 모택동을 옹호하면서 당시 중앙의 통수권을 장악하기 위해 비렬하게 책동하던 장국도의 반혁명적기회주의로선을 대담하게 반대해나섰다. 8. 15해방직후 곧 조국에 달려나온 그는 조국과 인민을 위해, 혁명을 위해 헌신분투할 굳센 결의에 넘쳐있었다.
《가서 말을 끌어오오.》
리병섭은 깜짝 놀란듯 했다.
《어서 끌어오라구.》
리병섭은 발뒤꿈치를 딱 소리나게 모았다.
《예, 알았습니다!》
그는 인차 돌아왔다. 기세좋은 황부루가 대가리를 주억거리며 따라오고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그것은 단순히 례사로운 아침일과로만 된것이 아니였다.
갑자기
거리는 잠들어있었다. 미친듯이 하늘을 썰던 폭격기들의 앙칼진 쇠소리와 지동치는 고사포소리는 물론 하늘을 샅샅이 뒤지던 탐조등마저 눈을 감아버렸었다. 파괴된 거리, 인적없는 거리, 불빛도 없다. 허리 꺾어진 가로수가 무너진 바람벽우에 넓은 잎가지를 한아름 편채 동댕이쳐있었다.
이 거리에 비좁게 들어앉았던 가게방, 료리점, 약국, 사진관, 려관 등의 간판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어둠, 싸늘한 정적, 규칙적인 말발굽소리만이 죽은듯 잠들어버린 거리에 뚜걱뚜걱 단조롭게 울렸다.
…실실이 드리운 버들잎들이 어깨에 스쳤다.
말발굽소리가 다가오자 두사람이 동시에 머리를 돌렸다. 먼저 중절모가 길우에 뛰여내렸다. 모자를 벗어들고 부르짖었다.
다음순간 급작스럽게 기침소리를 터쳤다. 병기생산국 서병호국장이였다. 몸이 체소하고 늘 얼굴에 병색이 도는 사람인데 사업에서는 놀랄 정도로 이악하고 내밀성이 있다는 평판이였다. 언제나 현장에서 침식을 하고 로동자들과는 허물없이 대하나 공장간부들은 무섭게 다몰아친다고 했다. 아까운 일군인데 건강이 좋지 못하다고 언젠가 김책이 걱정스럽게 말한 일도 있었다.
《서동무, 이 새벽에 무슨 일이요?》
《어서 말하오.》
《예, 리성조라고 전기관리국에서 기사장을 하던 사람이… 도주했습니다.》
《도주?…》
《예, 확인해봤습니다. 얼마전 내각사무국에서 그를 우리 병기생산국사업에 인입시켰는데… 제가 직접 그를 군수공장에 파견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공장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도주했다고 볼 근거야 없지 않소?》
《그렇지만 집에도 없습니다. 알아보니 그의 처도 사흘전인가 짐을 싸들고 어데로 가버렸다고 합니다. 그것도 밤중에 몰래 사라졌다고 합니다.
《?!…》
황부루가 발을 저겨디디며 투레질을 해댔다.
리성조는 광복전 일본와세다대학 전기공학과를 나온 기술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지난날 평안도지역에 가지고있던 많은 땅을 팔아 대구소림광업주식회사의 주권을 산 이후 서울로 옮겨갔으나 그는 남았다. 그만은 왜 남았는가 하는 문제로 일부 사람들이 고개를 기웃거린 일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더우기 해방후 서울에서 사람이 데리러왔었고 리화녀전졸업생인 그의 후처가 서울로 나갈것을 눈물로 간청하여 행장을 꾸린적도 있다는데 무슨 일로 다시 주저앉았는가 하는것이였다. 북에 남아있어 그에게 유리해보이는 점을 그들은 아무리 해도 찾아볼수 없었던것이다.
얼마후 리성조는 산업성 전기관리국 기사장으로 임명되였다. 다시 얼마후 그는 수풍발전소가 전례없는 대홍수로 물이 넘어나면서 언제물받이구조물(에프론)이 크게 파손되였을 때 현지에 파견된 기술자일행을 책임졌었다.
진지하고 소박하면서도 끈덕진 사람이였다. 넥타이 매는 법을 종시 배울수 없어 려행을 떠나서는 늘 그 모양대로 늦춰놓은채 걸어둔다고 했다. 미인으로 소문난 후처를 끝없이 사랑하나 그들사이엔 자식이 없다고 한다. 전처에게서 난 딸은 대학을 다닌다고 했던것 같다. 참, 이름이 뭐랬던가?… 체육과 예술활동에서 또 학과실력에서 뛰여난다고 했다. 수풍발전소의 에프론공사때문에 현지에 가 계실 때 그런 말을 들으신 일이 있었다. 그날 리성조는 류달리 얼굴이 밝았고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있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는게 아니요. 성조동무?》
이렇게
《그렇소?!… 그거 참 반가운 소식입니다.》하고
얼굴을 붉히며 면구스러워하는 그에게 따님의 이름이 무엇인가고 물으시였다.
《리숙이라고 합니다.
리성조의 대답이였다.
그렇다. 리숙!… 비로소 생각나시였다. 인상적인 두자 이름이였다.
…
과거를 결별하는데서도 주저를 몰랐던 강한 의지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리성조라면 나도 잘 아는 동무인데… 국장동무, 좀더 알아보시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서병호는 체소한 몸에 비해 류달리 굵은 목청을 가지고있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에
그래서 인적없는 밤길에 나섰을것이다. 온밤 잠을 못자고 뛰여다녔을수도 있다.
《물론 동무의 심정은 리해되오. 하지만 서동무, 우선 믿고봅시다. 어려운 때일수록 사람들을 더 믿어야 하오. 이 믿음이 없이는 어려운 싸움을 이겨내지 못하오.》
잠시후
웬일인지 마음이 무거우시였다. 서병호가 하던 말들이 계속 상기되시였다. 리성조가 도주했다, 사람들이 동요하고있다, 반동요언들이 떠돌고있다!…
물론 위급한 정세에 기가 질린자들이 적지 않다. 때를 기다리고있던 반동놈들 역시 도처에서 머리를 쳐들고있다. 흔히 그 어느때나 시대의 벽장틈에 몸을 숨기고 빈대처럼 살아가는자들이 있는 법이다. 어둠이 깃들면 기여나오고 불을 켜면 다시 숨어버린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개별적현상에 사로잡혀 보다 큰것을 보지 못하는 거기에 있다. 한그루의 나무에 사로잡히면 숲을 보지 못하는 법이다!…
부지중 무정의 일이 또 상기되시였다. 그도 승리적으로 진격할 때엔 지금같지 않았다. 후퇴가 시작되자 정신적변동이 일어났다. 앞으로 이러한 비정상적인 사태들이 또 얼마든지 있을수 있다.
멀리 강건너 사동중앙병원쪽에선가 수탉이 홰를 치며 울어대고있었다. 어느새 대기는 투명해지고 도처에서 선잠을 깨는 은밀한 음향이 느껴지시였다.
갑자기
마음이 뜨거우시였다. 새벽안개속의 수염발드리운 로인이 고맙고 귀중하게 느껴지시였다.
그렇다. 인민은 드팀없다. 어느때든 인민의 마음은 굳건하다!…
모락모락 연기를 뿜는 굴뚝들이 늘어갔다. 구기자넝쿨이 성한채로 남은 어느 울바자 안쪽에서는 뒤덜미에 커다란 비녀를 꽂은 아낙네가 걸싸게 뽐프질을 해대고있었다. 서평양조차장쪽에서 목메인듯 한 기차의 기적소리가 울려왔다. 전쟁의 하루가, 례사로운 수도의 새날이 또 시작되는것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