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 회)
제 2 편
제 1 장
5
리정이 동평양지구에 자리잡은 기계공업성청사에 도착한것은 한시간후였다. 아직 출근시간전이여서 청사는 조용했고 접수실에도 사람이 없었다. 근무성원에게 증명서를 보이고 사연을 이야기했더니 잠간만 기다리라고 하였다. 아마 안시학의 방에 전화를 걸어보려는것 같았다. 잠시후 근무성원이 다시 나타나 《들어가보십시오. 저기… 창문에 불이 켜진 방입니다.》 하고 가르쳐주었다.
날이 이미 밝았는데도 불끌 생각을 하지 못하고있는것을 보면 안시학이 간밤을 사무실에서 꼬박 새웠을뿐만아니라 지금도 경황없는 시간을 보내고있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리정이 2층계단에 올라섰을 때 복도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안시학이 마중나왔다.
《난 점심쯤에나 볼줄 알았더니, 누이는 떠났소?》
《예, 아마 지금쯤…》
안시학의 방은 크지는 않지만 무게있게 꾸려져있었다.
창문쪽벽모서리에 세워놓은 커다란 지구의가 방금 떠오르는 아침해빛에 반사되여 번쩍거리고 그 맞은켠 벽에 걸려있는 정방형의 전자시계는 국제표준시간에 따라 돌고있었다. 돋을무늬를 놓은 밤색화분에서는 사철 푸른 맥문동이 무성하게 자라고있었다. 자그마한 탁자우에 놓인 텔레비죤에서는 안시학이 보고있던 록화물이 흘러가고있었다. 리정은 그 화면에 얼핏 자기의 모습이 비쳐지는것을 보았다. 몇해전 련하기계가 개발한 CNC줄방전가공반을 가지고 국제기계전시회에 참가하였을 때 록화한 화면이였다.
《이걸 읽어보시오.》 하고 안시학이 책상우에 펼쳐놓았던 종이장을 거두어 리정에게 내밀었다. 거기에는 《CNC기술의 세계적발전추세와 련하기계》라는 글이 적혀있었다.
《이건… 뭡니까?》
《강연제목이요.》
《강연이요? 지금 어데서 이런 강연을 요구한단 말입니까?》
《사장동무, 어제 밤
리정의 머리속에는 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나 안시학도 그것이 언제, 무엇에 필요하며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설명해줄수 없었다. 그가 받은 전화말씀은 짧고 명료했다. 강연제강을 잘 만들어보라는것, 그외에 더 다른 설명은 없으시였다.
《지금 거기 형편은 어떻소?》 하고 안시학이 물었다.
《우리라고 다를게 있습니까. 이미 표준형CNC설비들을 개발하는데 성공했지만 성과를 확대하는데서 적지 않게 애로를 느끼고있습니다. 기본은 자금이 걸렸습니다. 국내에는 아직 그런 설비들을 욕심낼만 한 구매력을 가진 수요자가 없지, 그렇다고 국제시장에 내다가 실현시키기도 힘들지.… 우리 련하기계가 미국이 발표한 제재대상명단에 올랐다는것을 아시겠지요?》
《알고있소.》
《2축이상 가공설비는 들여오지도, 내가지도 못한다는겁니다. 지금의 형편에서 나라를 지키고야 공장도 있고 기계도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너무 흥분하지 마오, 사장동무.》
안시학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리정은 자기가 주위세계를 망각하고 너무 과장된 생각을 한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곰곰히 다시 생각해보았다. 련하기계를 찾는 소리가 멀어진지도 오랜 때에, 그렇듯 어려운 때에
《자료작업이 얼마나 걸릴것 같소?》
《세계적인 발전추세와 동향은 수시로 장악하고있습니다만 다음이 문제입니다. 세계와 련하기계… 그것을 어떤 각도에서 다뤄야 할지. 련하기계의 앞날을 독선으로 그려낼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소.》
《혹시
《참, 사장동무가 왜 자꾸 이러는지 모르겠구만.》 안시학은 리정이 편견적인 자기 감정에 빠져서 헤여나지 못하고있다고 못마땅히 여기는것 같았다. 《사장동무도 지금이 어떤 때인가 하는것을 잘 알지 않소. 그러니 피차 심사숙고하기요. 우리가 준비하는것은 명실공히 과학기술강연이요. 이걸 명심합시다.》
리정과 안시학은 제강을 준비하는데서 CNC기술에 대한 상식과 세계적발전추세를 알려주는것을 위주로 하고 거기에 련하기계가 이룩한 성과자료를 첨부하는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오후시간을 리정은 중앙과학기술통보사에서 보냈다. 《기계제작》을 비롯한 외국과학기술통보잡지들과 원문기술자료, 국제과학기술통보쎈터의 학위론문, 과학연구보문들을 분석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를 맞이한 채이숙의 얼굴빛이 심상치 않았다.
《당신 무슨 일이 있은게 이니요?》
《글쎄, 당신한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왜 그러오?》
채이숙은 대답대신 리순이 가져다준 목구두를 꺼내놓았다.
《누이가 지금 당신네 련하기계공장에 가있대요.》
《엉?! 그게 무슨 소리요? 누이가 우리 공장에 가있다니…》
참으로 천만뜻밖이였다. 그러니 누이가 새벽차를 타지 않고 아침통근차로 공장에 찾아갔다는것이 아닌가. 왜? 무엇때문에? 누구를 만나러?…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그런데 이 신발은 뭐요?》
《당신한테는 말하지 말자던건데… 사실 이번에 누이가 온건 이 신발때문이였어요. 누이와 학교를 같이 다닌 동무가 직장일을 그만두고 개인수공업으로 신발을 만들어 파는데 생활이 퍽 괜찮은것 같아요. 누이한테 도움도 많이 주었다는가봐요.》
《그런데?》
《그에게서 부탁을 받고 왔다던지…》
《무슨 부탁 말이요?》
리정이 집요하게 캐묻자 채이숙은 주저주저했다.
《저, 당신한테서 신골을 깎아다달라는…》
《신골을?!》
리정은 비로소 앞뒤사연을 짐작할수 있었다. 새로운 형태의 신발을 만들자면 우선 그러한 신골이 있어야 하는데 일반공작기계로는 묘한 굴곡과 정밀도를 요구하는 신골을 깎을수 없다. 바로 련하기계로 그러한 신골을 깎아달라는 부탁을 들고 누이가 왔던것이다.
아버지에게 말을 못하고 떠나온 리유며 헤여지던 때의 야릇한 얼굴빛과 나흘간의 초조감, 그 모든것이 이제는 선명해졌다. 문득 칼끝처럼 짚이는것이 있었다. 최수광, 누이가 그를 찾아갔을것이라는 생각이였다. 분하다고 해야 할지, 섭섭하다고 해야 할지.…
《그러니 당신은 알고있으면서도 말하지 않았소?》
《누이가 있는데 그걸 어떻게 말하겠어요? 또 그냥 돌아가겠다기에 당신한테는 후날 기회를 봐서 말하자고 했던것이 그만…》
《그 신발을 이리 내놓소.》
《당신… 어쩌자구요?》
《공장에 가서 누이를 데려와야지, 그것도 돌려주고.》
《여보, 그러지 말아요. 그러면 안돼요.》 채이숙은 거의나 사정하다싶이 했다. 《그야 돕지는 못할망정 누이 가슴에 못을 박는게 아니예요? 오죽했으면 공장까지 찾아갔겠나요, 지성이 아버지.…》
《뭐요? 당신까지 이럴줄은 몰랐소.》
채이숙의 눈가에 맑은것이 뭉클 고여올랐다.
《당신은… 당신은 다 몰라요. 몰라요.》 하고 채이숙은 입을 싸쥐며 방에서 달려나갔다. 리정은 잠시 망연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다음 천천히 차비를 갖추고 집을 나섰다. 현관을 벗어나자 싸늘한 바람이 몸을 휩쌌다. 그러나 리정은 속이 답답하기만 했다.
물론 채이숙은 누이가 떳떳치 못한 걸음을 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러나 같은 녀성으로서 아들, 며느리구실을 도맡아 고생이 많을 누이를 리해하고 도와주려는 마음이 앞서고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고맙소, 난 당신을 리해하오.》라고 말할수 없는 남편의 심정에 대해 당신은 생각해보았소? 하나밖에 없는 누이에게 아픈 말을 하려고 길을 떠나는 동생의 심정을 당신은 생각해보았소? 나는 나로서의 정당성을 설명하려는게 아니요. 밖에서는 내 말이 옳지만 생활에 들어와서는 당신의 말이 옳다고 각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것은 잘못된것이요. 밖에서나 안에서나,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우리의 리익은 한가지요. 우리 생활의 정당성은 절대로 이중적일수 없소. 우리는 각자가 나름의 방법으로 잘 먹고 잘 입고 잘살아서 그 합으로써의 부유한 사회를 만들자고 꿈꾸는 사람들이 아니라 나라가 부강해야 매 가정도 잘살수 있다는 철리를 간직하고 사는 사람들이요. 생활이 일시 어려워졌다고 그 신념에까지 얼룩이 가게 해서야 되겠소? 어서 대답해보오.…
리정은 채이숙에게 끝없이 속삭이며 걸어갔다.
경적소리가 울렸다. 그때야 리정은 자기가 차를 불렀다는것을 깨달았다. 리정이 공장에 도착한것은 밤 10시가 가까와서였다. 정문에서 마침 느지막해서 퇴근하는 온덕수와 만났다.
반기는 기색으로 보아 그는 리정의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모르고있는것 같았다. 그는 리정에게 아침까지도 시내에서 며칠 일을 더 보고 들어오겠다고 하더니 어떻게 나타났느냐고 했다.
《아, 그러니 소식을 듣고 온게지요?》
《무슨 소식 말입니까?》
《최수광부지배인이 소환되게 됐다오.》
《그가 소환된다구요? 어디로요?》
《정말 모르시오? 총국으로 소환됐다는걸.》
리정은 당황해졌다. 우연이라고 할가? 우연이라면 너무도 공교롭다.
그는 언젠가처럼 최수광이 멀리로 떠나가는 날에 그와 또 다른 의미의 《승부》를 겨루자고 찾아온 격이 되지 않았는가!
《그한테 손님이 찾아오지 않았던가요?》
리정은 온덕수의 대답이 은근히 두려웠다.
《손님? 왔소. 먼 친척벌이라던지… 사장동문 어떻게 아시오?》
(결국 내 짐작이 옳았구나.)
리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온덕수는 최수광의 조용한 당부도 있고 해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않았다는것과 그 친척이라는 녀성이 딱한 부탁을 가지고 공장에 찾아왔더라고 이야기하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최수광이 소환을 앞두고 하는 마지막부탁을 거절할수 없어 오늘 야간작업때 신골을 가공해주기로 약속했다는것이였다.
《설계와 프로그람은 내가 손을 댔소. 그래 퇴근이 좀 늦어졌는데 사장동무와 맞다들렸구려. 리해해주오, 생활이 아니요.》
《그러니 벌써 가공에 넘겼단 말입니까?》
《두시간째 정전이요. 불이 와야 가공에 물릴거요.》
《그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누구요?》
《최수광… 아니, 그 손님 말입니다.》
《아까 얼핏 합숙에서 봤는데… 참, 그러고보면 이상하구만. 그가 왜 자기 친척을 집으로 데려가지 않고 합숙에 넣었을가?》
그러면서도 온덕수는 최수광을 찾아온 녀성이 다름아닌 리정의 누이일줄은 전혀 생각지 못하고있었다. 그저 리정의 행동이 여느때와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을뿐이였다. 리정은 온덕수의 대답을 듣자 대뜸 합숙으로 발길을 돌렸다. 급하게 몇발자국 걸어가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온덕수에게로 돌아서서 웨쳤다.
《지배인동무, 그 손님은 내 누이입니다.》
《내 누이?!…》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리해되지 않았다. 한참만에야 그 뜻을 깨닫고 펄쩍 놀란 온덕수는 리정이 사라진 어둠속으로 뒤좇아 달려가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최수광이 있는 생산현장으로 달려갔다.
합숙계단을 올라갈 때 리정은 짜릿한 전률을 느끼였다.
리순은 리정이 쓰던 합숙방에서 묵고있었다. 리정은 그처럼 무거운 문을 열어보기가 처음인듯 했다. 리순은 두손으로 턱을 고이고 침대머리에 앉아 초불을 들여다보고있었다. 어쩌면 초불을 쬐고있는것 같기도 했다. 방문이 열리는 순간 초불이 콱 넘어지면서 뒤벽면에 그려놓았던 리순의 그림자를 마구 흐트러놓았다.
리순이 주춤 일어났다.
《누이!》
《왔구나.》 리순의 목소리가 먼 꿈나락에서처럼 들려왔다.
《네가 올줄 알았어. 미안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돌아가지 못하겠기에… 이런 결심을 했는데 네 낯을 깎지나 않겠는지…》
그속에서도 차타는 동생의 귀한 체면을 걱정하고있다. 차라리 붙잡고 네가 아들구실을 못하니 내가 이럴수밖에 있는가고 소리라도 탕탕 쳐주었으면, 그러면 이렇게까지 분하지는 않을것 같았다.
《어쩌면 이럴수 있습니까. 왜 나한테는 말하지 않았는가요? 내 낯이 깎일가봐요? 그래서 이런 걸음을 했습니까. 수학문제를 풀 때처럼 신세를 질가 해서요? 누이, 그렇게도 자존심이 없소?》
리정은 들고온 신꾸레미를 침대우에 던져버렸다.
《뭐, 자존심?! 자존심이라구? 네가 어쩌면… 어쩌면 그렇게 말할수 있니. 그래, 난 자존심도 체면도 없는 녀자다. 그러면 너는 뭐냐? 년로한 아버지를 내 손에 맡겨놓고 네가 언제한번 돌아보기나 했니? 재세를 하자는건 아니다. 그렇지만 넌 다 몰라. 이 어려운 때 녀자들의 마음을 넌 다 몰라.》
리순은 얼굴을 싸쥐였다.
(모른다고? 남자들은 다 모른다고? 어째서 녀자들은 수월히 그렇게 생각하는것일가? 가정과 생활에 대한 책임은 누구보다 세대주인 남자들에게 있다. 남자, 그 말은 가정에 무관심하고 생활에 무정하다는 의미와 나란히 놓을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녀인들이 싸주는 점심밥곽을 들고, 그마저 들지 못하고 매일매일 공장으로 출근하는 세대주들은 가정에 무관심한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가정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나라일이자 곧 가정일이다. 그런데 이 나라의 모든 아버지들과 아들들이 내 집, 내 밥그릇, 내 처자만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녀성들, 당신들이 애타게 쓸어만지며 눈물짓는 그 가정도 없을것이다. 사회가 무너질것이다.)
《예, 옳습니다.》 하고 리정은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 말했습니다. 이건 자존심문제가 아니라 신념문젭니다. 내가 너무 요란하게 말하는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누이의 주위에 매 가정이 각기 잘살아서 나라가 잘살게 되면 좋지 않은가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인데 그게 개인주의와 무엇이 다릅니까. 누이, 오늘이 아니라 래일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식으로 고난을 견디여내고 떳떳할수 있을가요? 오늘 누이를 걱정하고 소위 도와준 사람들이 그때에 가서도 고마울수 있을가요?》
《그래, 난 머리에 든것 없는 몹쓸 녀자다. 널 망신시키고 애매한 사람들의 얼굴에 흙칠을 하고… 가겠어, 이밤으로 돌아가겠어.》
《누이!》
《붙잡지 말아.》
《사장동무! 그만하지 않겠소?》
뒤에서 울린 목소리였다. 리정은 그것이 최수광의 목소리라는것을 알았다. 그가 나타난것이다. 리정은 뒤를 돌아보았다.
《사장동무, 나 좀 봅시다.》
최수광은 복도를 쿵쿵 울리며 걸어갔다.
리정은 최수광의 뒤를 말없이 따라갔다.
공장구내를 멀찍이 벗어났다. 껑충하고 앙상한 아카시아나무들이 죽지를 솟구고 서있는 큰길도 건너섰다. 여기서부터는 공장부업밭이다. 사방 드러나있는 강냉이그루터기에 발부리를 걸채이며 두사람은 그냥 걸어갔다, 넓은 부업밭의 꼭 한가운데를 찾아가야만 하는듯이… 일순 돌개바람에 흙몽당이 일었다.
최수광이 걸음을 멈추고 리정에게로 돌아섰다.
《자, 우리 사장이니 부지배인이니 하는것은 다 떼버리고 남자로서 말해보기요. 당신이 나한테 의견있는게 뭐요?》
《의견?》 하고 리정은 반문했다. 《굳이 의견이라 한다면 나에 대한 당신의 정도이상의 관심이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날 내세워주느라고 마음을 쓴다는데 그러지 마시오. 난 그게 부담스럽소.》
《옳소, 그러니 당신의 눈에도 이 최수광이 어느 옛적 아버지때부터 지고오는 빚을 갚기 위해 비굴하게 애쓰는 사람처럼 보였단 말이지. 허허허, 허허허.…》 최수광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리정이, 리정이란
《이건 사람을 모욕하는거요?》
《모욕?! 누가 누구를 모욕했다는거요? 당신만이 크나큰
최수광이 너무도 독한 말을 쏟아놓는 바람에 리정은 일언 대꾸를 할수 없었다. 그러고싶지도 않았다. 사람은 때로 누군가의 호된 꾸지람을 듣고 아픈 매라도 기꺼이 맞고싶은 때가 있는것이다.
지금 리정의 심정이 그러했다.
《난 내 등뒤에서 이러니저러니 허튼 소리를 들고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것을 알면서도 한사코 당신을 도왔소. 리정이 고와서가 아니라 과학기술이 중해서였소. 그런데 부담스럽다? 당신은 누구의 도움이 없이도 하늘의 별을 따올수 있다고 확신하겠지? 내 머리우에는 내 손으로 무지개를 그린다고 그렇게 자처하겠지? 참으로 위험하오. 그런 사람들이 나중엔 자기를 키워준 조국도, 혁명의 리익도, 혈육도 몰라보는 유아독존적인간이 되는거요.》
문득 리정의 머리속에는 먼 소년시절에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타이름이 떠올랐다. 그것이 그저 단순한 승벽심이였을가? 아닌것 같다. 그게 바로 나라는
리정은 동요했다.
《내가 당신한테 두뇌로는 진다는걸 아오. 그러나 심장은 당신보다 뜨겁소. 이 고난의 행군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겠지만 내 보기엔 그것이 끝나기 전에 당신은 얼음덩어리가 될것 같소. 우리가 또 만나게 되겠는지도 알수 없소. 그래 말하지만 뜨거워지시오. 그리고 독선적인 생활방식을 털어버리시오. 부탁이요.》
최수광은 올 때처럼 먼저 돌아서서 갔다.
리정은 텅 빈 들에 홀로 남았다. 또다시 먼지바람이 일고 입안에 모래알이 씹혔다. 이 메마르고 차겁고 긴 겨울밤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고있을 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난과
그 모든것은 실지 부닥친 현실만큼 절박하지는 못하였다. 지금은 밤이다. 신념이라는 불을 켜지 못한 사람들은 이 어둠속을 손더듬으로 헤매일수밖에 없다. 날이 밝으면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일것인가. 누이는 어떤 모습일것인가. 그리고 저 최수광은?… 아, 이런 때는 시원하게 눈이라도 펑펑 쏟아졌으면 하고 리정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