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 회)
제 2 편
제 1 장
2
한유준은 엿새만에야 잠에서 깨여났다.
눈을 뜨자 첫눈에 보이는것은 그을음을 풀풀 날리며 타고있는 등잔불이였다. 정애가 군불을 땠는지 구들이 뜨끈뜨끈했다.
《정애야, 물…》
《이제야 정신을 차리셨군요!》
머리맡에서 울리는 목소리…
한데 그것은 딸의 목소리가 아니였다. 한유준은 끙 하고 돌아누우며 머리를 들어보려고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목소리의 임자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 얼굴도 등잔불처럼 가물가물했다.
《날 모르시겠어요?》
목소리가 몹시 귀에 익었다. 누굴가?!…
《접니다. 김인순이예요.》
다름아닌 고등기계공업전문학교시절의 스승이였다.
《선생님!…》
한유준은 녀인의 손을 스스럼없이 그러잡았다.
그가 어떻게 내 집에 와있는것일가?…
한유준은 자기가 누워있는 방이 눈에 설다는것을 느끼였다.
그 많던 시계들도 보이지 않았다. 단칸방이였는데 벽쪽에는 미닫이로 된 네모창이 나있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시인민병원이예요. 선생은 여기 엿새나 누워있었어요.》
《엿새라구요?!》
뭔가 어렴풋이 떠오르는것이 있었다. 발이 너무 부어서 신발끈을 서로 련결하여 목에다 걸고 비칠거리며 퇴근길에 올랐던 밤, 겨드랑이쯤에 데룽데룽 매달려 성가시게 흔들거리던 로동화며 갑자기 숱한 별들이 와르륵 쏟아져내리고 하늘이 텅 비여버리던 일, 그리고 가물거리는 의식속에 마지막으로 들었던 물소리를 생각했다.
강가에 나와 빨래를 헹구던차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져서 내숭스런 밤물결에 몸을 홀라당 맡기고있던 젊은 두 아낙네가 강뚝을 굴러내리는 사람의 형체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뛰쳐일어났다.
그게 벌써 서너달전의 일이였다.
자리보전을 해서부터는 주위에서 벌어진 일을 알것 같기도 하고 잊은것 같기도 하고 알쑹달쑹했다. 먼저 간 로친네가 자꾸 찾아와 자기가 좋은 집을 한채 봐두었으니 같이 가보자고 졸라댔다. 이상하게도 그때마다 정애가 미음그릇을 들고 나타나 그를 흔들어깨우군 했다. 그러다 종시 아주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고말았다.…
의사들이 머리맡에 장사진을 쳤다. 나중에 웃머리가 동그랗게 벗어진 사람이 달려왔는데 그는 기술부원장이라고 하였다.
그에게서 그새 있었던 이야기들을 전해듣게 되였다.
박송봉을 만나던 이야기며 그가 한유준을 업어서 병원수직실(온돌올 놓은 방이 거기밖에 없었다.)에 눕혀놓던 일, 한유준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그게 정말입니까?
그러자 김인순이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선생이 누워있는 여기 이 수직실의 불당번을 누구들이 서고있는지 알아요? 시당과 공장당위원회 일군들이 교대제로 당번을 서고있어요. 선생을 평양병원에 후송한다는 소문이 나자 온 시내가 들고일어났어요.
그가 덮고있는 새 이불이며 갖가지 약재며 음식꾸레미들이 다 그렇게 생겨난것이였다. 한유준이 의식을 회복한것도 그날로 시내에 알려졌다. 전에는 얼굴조차 몰랐던 사람들이 아버지를 찾듯, 형제를 찾듯 줄지어 병원으로 달려왔다. 유치원아이들까지 노래를 불러주러 찾아왔다.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였다. 한유준은 사회주의가 살려낸것이다. 며칠후 김인순이 조카 만천이와 함께 또 병원에 찾아왔다. 그때쯤 한유준의 몸상태도 퍼그나 좋아져서 이따금 밖에 나가 해바라기도 하고 허옇게 살이 오른 냉이뿌리를 꼬챙이로 쑤셔보기도 하였다. 그날 김인순은 작별인사를 하러왔다. 안흥공업대학에서 진행된 교수강습을 마치고 돌아가게 된것이다. 그새 입원침실로 옮겨온 한유준의 머리맡에 만천이가 철쭉꽃을 놓아주었다.
《합숙뒤산에서 꺾어왔어요.》
신접살림을 꾸리러 온듯 넓지도 않은 입원실을 이리저리 살피고다니던 만천이가 엊그제 충수염수술을 받았다는 동무를 만나보겠다고 방을 나가자 방에는 한유준과 김인순이만 남았다.
《공업전문학교때 같이 공부한 지득명이라고 생각나세요?》
《나구말구요. 가우스식으로 정17각형을 작도해냈던…》
《기억하시누만요.》 하고 김인순은 손가방안에서 종이를 몇장 꺼내들었다. 《지금은 희천공작기계종합공장에서 설계원으로 일하고있지요. 그도 지난해에 생활상 고초를 겪었답니다. 여기로 떠나올 때 선생에게 정신적인 도움이 될가 해서 그가 쓴 글을 몇자 베껴왔댔는데 이제야 보여드리게 됐구만요.》
한유준은 돋보기를 찾아꼈다.
세페지가량 되는, 지득명이 희천려관에 남기고간 글이라고 하였다.
김인순이 대필한 글씨가 고와서 처음에는 눈에 잘 들어오는것 같더니 안경에 김이 서린듯 눈앞이 뿌예지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자강도사람들이 겪고있는 고난과 그것을 어깨겯고 헤쳐가고있는 불굴의 모습들이 어려있었다.
《…저는 환절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더이상 몸을 지탱하기가 어려워 안악 동생네 집에라도 가있으려고 려행증명서를 뗐습니다. 그러나 역에 나가다가 그대로 길가에 쓰러지고말았습니다.》
정녕 지난 한해는 자강도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최악의 시련기였다.
봄철에 들어서면서 희천시내에는 공작기계사람들이 먹지 못해서 다 쓰러져간다는 소문이 돌아갔다. 전국각지에서 모여드는 자재인수원, 참관단, 경제선동대들로 늘 끓어가지고있던 중신, 중평, 무갈동지구에 환상같은 고요가 깃들었다. 바로 그러한 때 설사 당일군들이 굶어쓰러지더라도 과학자, 기술자들에게만은 밥을 먹이라는
연형묵이 몇차례나 공장을 다녀간 후 희천려관의 《할머니》지배인이 공장 당비서와 함께 뻐스를 한대 내가지고 시내를 돌았다. 그곳 종업원들은 우선 기술자, 기능공들만이라도 려관에 받아들여 몸을 추세울것을 자진해나섰다. 먼저 려관생활을 시작한것이 110명의 기술자들과 기능공들이였다.
려관의 봉사자로부터 의사, 간병원의 의무까지 스스로 덧걸머진 그들은 90리밖에 떨어져있는 부업지에서 낟알을 거두고 집짐승을 기르며 가족들마저 다됐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기적같이 일으켜세우기 시작했다. 온 가족이 몇달씩, 지어 1년씩 보양을 받는가 하면 집을 뻔히 눈앞에 두고서도 려관에서 공장으로 출퇴근을 하는 놀라운 광경이 희천땅에 펼쳐졌다.
《…이때부터 저는 하루 다섯끼에 간식까지 받아먹으면서 꿈같은 백일곱날을 흘려보냈습니다. 어제 저는 공장에 나가 첫 도면을 그렸습니다. 려행증명서도 바쳤습니다. 제 일생에 려행증명서를 쓰지 않고 도로 바쳐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천명이라고 말을 하는데 그게 아니라 저는 사회주의명을 받아 살고있습니다.
그 글이 연형묵의 손을 거쳐 도내 각 공장, 기업소들에 아침독보용으로 속달되였다고 김인순은 설명을 덧붙였다.
《이걸 내가 건사하면 안될가요?》
인순이 기껍게 허락하자 한유준은 거무슥한 사무용지를 네등분으로 접어 자기 베개밑에 묻어놓았다. 그만 돌아갈 시간이 되였는데 만천이가 오지 않아 그대로 작별인사를 나누었는데 인순이 복도홀에 나와보니 그가 셈평좋게 거기 긴의자에 앉아있었다.
《아이구, 여기 있으면서도 그냥 기다리게 했니?》
《고모님두, 내가 뭐 그쯤한 눈치도 없는줄 알아요?》
능글스러운 소리에 인순은 얼굴이 붉어졌다.
떠나기 전에 그는 한유준의 집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홀몸이 된 남정의 집에 발길을 들여놓는다는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의 스승이라는, 저로서도 어색한 근거로
정애는 무엇이 안심치 않은지 앞질러 방에 들어가 집거둠을 하느라고 돌아갔다. 사방에서 똑딱거리는 시계소리가 유난했다.
《무슨 시계가 이리 많담!》 하고 인순은 감탄했다.
《이건 말하자면 우리 집의 력사예요. 저 낡은 태엽시계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기념품이구 저쪽건 내가 태여났을 때 사놓은거래요. 그리구 이 동그란 전자벽시계는요…》
인순은 저도 모르게 한유준의 가정세계로 끌려들었다.
《…200일전투가 끝났을 때 어머니가 가져다놓은거예요. 이제 와서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 어머니한텐 철학이 있었어요. 한번은 내가 무슨 시계를 계속 갖다놓는가고 물었더니 력사라는건 시간이다, 그러니 시간을 세는 물건으로 좋은 날들을 기념하는것이 얼마나 좋으냐 이러셨거던요. 이 시계들이 다 그렇게 생겨난거예요.》
잠시 귀를 강구고 서있노라니 저마끔 울리는 추소리, 초침소리가 신비한 정서를 풍기며 들려왔다.
《아버지가 학위를 받았을 때는?》
《그땐… 어머니가 없어서…》
인순은 자기가 그만 실언했다는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를 닮아 속이 여린듯 정애의 눈가에는 벌써 물기가 내배고있었다. 오후 한겻 정애와 함께 집안팎을 말끔히 청소하고 시렁대의 그릇들도 싹 다 내리워 닦을것은 닦고 소독할것은 소독했다. 오랜만에 어머니같은 녀인의 곁에서 일손을 잡은 정애는 신이 나서 볼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부지런히 입을 놀려댔다.
《난 이제 어쨌으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왜?》
《군관을 하는 창심이 오빠가 전번에도 글쎄 날 데려가겠다고 편지를 보내왔댔는데…》 정애의 얼굴이 달았다. 《난 사실 아버지때문에 시집가고픈 생각이 없었어요. 어디 가깜한 곳이라도 몰라 하필이면 천리밖에서… 한데 이젠 정이 기울었나봐요.》
닦은 늄식기를 물소랭이에 훌쩍 띄워놓으며 정애는 슬며시 인순을 훔쳐보았다. 그러다 눈길이 마주쳤다.
(어쩜 눈빛도 이리 꼬집는것 같을가?)
그 눈빛앞에서 인순은 자기 속이 유리로 지은 집처럼 말끔히 들여다보이는것 같아 무엇을 가리우려는듯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내가 여기에 와있는것을 보면 만천이가 뭐라고 할가? 고모, 부끄럽지도 않아요? 한때 아바이를 가르친 스승이였던 고모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거예요라고 할지도 몰라. )
불을 뒤집어쓴듯 얼굴이 화끈해왔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나보네.》 하며 정애가 인순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대왔다. 그리고는 흐윽 숨을 돌이켰다.
《우리 시장에 나가볼가?》
《시장엔 왜요?》
《글쎄, 나가보잔데.》
인순은 손수 정애의 머리를 빗겨주고 제 머리빈침까지 하나 헐어서 채워주었다. 시장에 나가서는 요즘 처녀들속에서 류행되는 봄가을목도리와 그릇가지를 몇개 샀다. 그러고도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아 바재이던 끝에 인순은 8각테에 초침이 유별나게 빨간 전자벽시계의 값을 물어보고야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