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 회)
제 1 편
제 4 장
2
한시간 좋이 걸어가느라니 마침내 도로가 열렸는지 띠염띠염 오가는 차들이 보였다. 여느때같으면 혹시 손을 흔들어보련만 그러고픈 생각이 없어 리정은 내처 걸었다. 이제 강을 건너 조금만 더 가면 공장의 소재지인 린접군지경에 들어서게 된다.
이때 미속으로 그의 곁을 스쳐지났던 승용차가 눈판을 지치면서 멎어서더니 《거 리정연구사가 아니요?》하는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목소리와 거동이 안시학과 비슷했으나 리정은 그럴수 없다고 자기 눈과 귀를 의심했다. 그러는 새 차에서 내려선 사람은 십여보쯤 더 다가왔다. 이제는 그의 얼굴을 알아볼수 있었다.
《응, 옳구만. 내가 잘못 보진 않았군.》
그는 정말 안시학이였다. 고깔달린 면직솜옷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그에게서는 이전의 모습을 거의나 찾아볼수 없었다.
《차에 타시오. 나도 봉화기계로 가는 길이요.》
《우리 공장에요?》
《오, 어느새 우리 공장이라. 하기야 그럴만도 하지.》
리정은 안시학의 손에 이끌려 차에 올랐다.
승용차는 가릉가릉 순한 소리를 내며 미끄러져갔다.
리정은 안시학에게 안흥공작기계에서 언제 올라왔는가고 묻고싶었지만 실례가 될것 같아 그만두었다.
봉화기계공장에서도 폭설로 피해를 입었다.
강풍에 휘달리는 눈발은 새벽녘 공장주택지구로 들어가는 전기줄을 두군데나 끊어놓고도 수그러들기는커녕 점점 더 기승을 부리고있었다.
직장별로 사람을 교대하면서 눈치기를 조직했는데도 가쁘지 않은지 기능공학교를 갓 나온 젊은이들은 히히껄껄대며 공장정문옆에 커다란 눈사람까지 빚어놓았다.
한창때라 그들에게는 자연의 도섭마저 즐거울지 모르나 김경조에게는 참 맹랑하고 야속한 눈이였다. 새형의 줄방전가공반을 3대혁명전시관에 이관할데 대한 문건을 올려보내놓고 결과를 고대하던중 선로가 단선되였던것이다. 이쯤 되면 김경조는 앉아서 기다리고있지 못하는 성미였다. 그는 딱딱한 나무걸상우에 방석처럼 깔고앉아있던 벙어리장갑을 툭툭 털어서 끼고 털모자의 귀덮개를 내리워쓴 다음 밖으로 나갔다.
최수광이 공장마당의 눈을 다 쳐내자 사람들을 차에 태우고 큰길의 눈을 쓸러 나가고있었다.
《큰길은 좀 있다. 쓸지 않으려오?》
김경조가 소리치자 최수광은 옆차창으로 상반신을 내밀고 《이제야 우리 공장이 소문나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지금 당장이라도 어데서 누가 찾아올지 모르지요.》라고 대답하였다.
《태백산》호자동차는 응축됐던 압축공기를 씨원스레 내뱉으며 정문구호밑을 빠져 앙 하고 달려갔다. 그때 화물자동차와 어겨 웬 승용차가 정문으로 들어섰다. 안시학이 탄 차였다.
그는 정문옆에 세워놓은 눈사람의 가슴팍에 솔잎을 박아 새겨넣은 《1993》이라는 수자를 보자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불과 두주일앞에 다가온 새해였다.
빙설천지에 웬 손님인가 해서 다가오던 김경조가 놀라서 굳어졌다.
안시학은 하루건너 들리는 공장에 온것처럼 태연히 어깨와 옷자락에 쌓인 눈을 탁탁 털며 《어, 그 눈 푸지게는 왔다.》하고 인사마저 천연스럽게 했다.
《이게 누군가? 시학이!》
김경조는 바깔이라는것도 잊고 그를 얼싸안고 돌아갔다.
《그래 언제 올라왔나?》
《한 사날 됐네.》
《그럼 온다고 기별이라도 할게지. 내 그때 자넬 푸대접해보내고 얼마나 속을 앓았는지 아나? 에끼, 이 한심한 친구야.》
《됐네, 저기… 누가 같이 왔는지 보게.》
그제야 김경조는 등뒤에 서있던 리정을 돌아보았다.
《어? 리동무, 동문 어떻게 이 차에…》
《자, 여기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서 이야기하세.》
안시학이 중간에 나서며 어서 그러자는듯 손짓했다.
김경조는 방에 들어서자 창문벽에 붙여놓은 긴쏘파에 자리들을 권했다. 그사이 안시학은 얼굴이 검실검실해지고 말투까지 달라진것 같은게 딱히 짚어 말할수는 없으나 변화가 느껴졌다.
《한데 정말 날 보러 이 눈길을 무릅쓰고 왔나?》
《난 자네네 그 줄방전가공반을 가져가려고 왔네.》
그 말에 김경조는 안시학이 나타났을 때보다 더 놀랐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나타난 안시학이 줄방전가공반을 내놓으라니 롱담을 하는지 진담을 하는지 분간할수 없었다.
《자네가 그건 해 뭘하려고?》
《뭘하다니, 나야 팔지.》
《팔아?》
《그래.》
《어데다 팔아?》
《국제시장에 내갈가 해서.》
《뭐, 국제시장?! 이 사람이 정 보자보자 하니까…》
김경조는 불쾌한듯 볼편을 씰룩거렸다.
(롱담할게 따로 있지. 이발도 안 나온 련하를 끌고 국제시장에 출입하겠다? 그게 어디 될법이나 한 일인가? 이 사람이 평양에 올라오더니 외국바람에 또 오금이 쑤셔난게 아닌가?)
《지금 지배인사업은 누가 대리하고있소?》
《기사장이지 누구겠소.》
《그를 불러주시오, 온덕수동무도 함께.》
김경조는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김경조는 교환을 찾아 열처리직장 로보수작업장에 나가있는 기사장을 빨리 불러오라고 지시한 다음 련하기계에도 같은 전화를 하였다. 그들을 기다리는 동안 김경조와 안시학, 리정은 리발소에서 만난 손님들처럼 덤덤히 앉아있었다.
안시학이 박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원주필꼭지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김경조의 심리를 더 초조하게 하는것 같았다.
10분쯤 지나 온덕수가 먼저 나타나고 몸이 훌쩍 마른 기사장은 그때부터도 시간이 퍽 흘러서야 방에 들어섰다.
안시학은 조금 도간을 두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서류가방을 쫙 열었다. 그때 김경조는 낯익은 표지를 보았다.
그가 직접 검토하여 올려보냈던, 줄방전가공반을 3대혁명전시관에 이관할데 대한 동의서와 기타 수속절차에 따르는 문건이였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안시학이 문건가방우에 시선을 떨구었다.
(내가 또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김경조는 온몸의 기운이 삽시에 빠져나가는것 같았다.
(그로써 련하기계에 대한 인정과 평가를 받고 나아가서 한 연구사가 기울인 노력의 값을 비싸게 매겨준다고? 그것이 지식인들의 운명을 책임지고 돌보는 당일군다운 생각이라고? 나는 왜 더 큰것을, 더 멀리를 내다보지 못했는가. …)
《그러나 련하가 내놓은 시제품은 우리 공업의 새 모습이자 그들이 이룩한 첫 열매이기때문에 더없이 소중하다고
그리고 안시학은 박수를 쳤다. 눈가에 맑은것이 고여올랐다.
이전의 안시학은 아마도 그것을 감추려고 했을것이다.
하지만 그는 버젓이 울고있었다. 씻지도, 숙이지도 않았다.
평양물이였다. 그 물에 얼굴을 씻었다.
그 얼굴로
《고맙습니다.
《힘이 됐다니 나도 기쁘오. 며칠 휴식을 주고싶지만 일이 있어 그러지 못하겠소. 본직무에서 다시 일하게 된걸 축하하오.》
리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보다 마음이 흔들린건 저였습니다. 연구사업을 해오면서도 저는 늘 이것이 성공하기만 하면… 하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래서 온 나라가 관심하고 바라보는 전시관으로 가는것이 나의 인생에 찾아든 행운의 기회가 아닐가 하고 동요했댔습니다.》
리정의 말을 들으며 김경조는 생각했다.
(그래, 이 사람들의 마음은 너무도 맑다, 내가 비쳐지는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그런데도 나는 〈당비서이기때문〉에 이렇게 큰 책상과 사업수첩을 앞에 놓고 자기보다 훨씬 나은 사람들의 자기비판을 종종 듣고 조언을 주고 한다. 이렇게 10년, 15년이 흐르는 사이에 나에게는 이 모든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일로 되여버렸다. 혹시는 바로 그것이 어제날의 용접공이였던 이 김경조를 만성적인 관료주의자로 만들어버린것은 아닐가?)
《그래서 내가 여기로 온것은…》하고 안시학이 모임을 결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