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 회)

제 1 편

제 3 장

7

 

최윤동의 장례는 기관장으로 진행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유가족들에게 보내시는 위로의 말씀과 화환을 안고 박송봉이 공장에 내려왔다. 발인식때 로동자들의 요구에 따라 그의 유해를 실은 차가 공장구내를 한바퀴 돌았다. 줄방전가공반이 놓여있는 조립직장앞에 이르자 운전사가 경적을 길게 울리였는데 그 목메인 소리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최윤동의 유해는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였다.

그후 김경조는 지배인이 결원인 상태에서 숱한 일거리들을 맡아안고 바쁜 시간을 보냈다. 공장의 년말생산을 결속하는 한편 련하기계공장 조기조업에 필요한 설비들의 납입과 조립을 다그치고 조선지식인대회에 보낼 대표도 선출해야 했다.

그 대표로는 온덕수가 선출되였다.

토요일 밤까지 밀린 일거리들을 기본적으로 처리하고 김경조는 사무실에 꼬꾸라졌다. 그동안 쌓였던 피로와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듯 온몸이 나른하고 귀안이 멍멍했다. 열감도 느껴졌다.

(집에 가야지. 들어가 좀 누워야겠어.)

김경조는 안해가 따뜻한 아래목에 펴놓은 이불우에 돌덩이처럼 몸을 던지고 만사를 잊어버렸다. 체온계가 몇번씩 겨드랑이로 드나들었다. 안해가 가져다주는 약도 군말없이 받아먹었다.

김경조가 눈을 뜬것은 이튿날 해가 중천에 떠올라서였다. 머리가 뗑 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김경조는 머리맡에 수면제봉투가 놓여있는것을 보고 놀라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여보! 여보!》

부엌문이 여닫기더니 안해가 방으로 들어왔다.

《당신 나한테 수면제를 먹였소?》

《예, 덕분에 잘 자셨수?》

《당신 정신있소? 지금이 몇시요?》

《10시가 좀 지났어요. 한데 큰소린 왜 치세요?》

《됐소, 됐소. 당신과 옴니암니할 새 없소. 내 양말.》

차비를 하면서 김경조는 공장에서 무슨 다른 련락이 온게 없는가고 물었다. 그러자 안해가 하는 말이 둬시간전에 최수광이 집에 찾아왔다가 그냥 돌아갔다는것이였다.

《왜 왔댔다오?》

《모르겠어요. 당신이 깨나면 그저 알려달라더군요.》

《저녁에 늦어지면 밥을 보내오.》

김경조는 공장정문을 통과하면서 저리 최수광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수광은 기다린듯 5분도 안되여 그의 방에 나타났다. 한공장울타리안에 있다고는 하지만 최수광이 조동된 후로 그전처럼 자주 만나보지 못했던 김경조는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무슨 일로 집에까지 찾아왔댔소?》

최수광은 덤비지 않고 얼마전 줄방전가공반 총조립시험때 찍었던 수십여장의 사진부터 펼쳐놓았다. 설비의 가동모습을 여러 위치와 각도에서 찍은 사진들은 정말 볼만 했다.

김경조와 리정, 온덕수의 각이한 모습들도 찍혀있었다.

《우리 지배인 사진은 없소?》

《지배인동지의 사진은 유가족들에게, 따로 보냈습니다.》

《잘했소, 정말 잘했소.》

김경조는 진정으로 최수광에게 사의를 표하였다. 그가 사진들을 처음부터 다시 보기 시작했을 때 최수광이 입을 열었다.

《리정동무도 김책공업종합대학 대표로 대회에 참가한다지요?》

《그렇소, 이번 주내로 대학에 도착시켜달라누만.》 무심중 대답했던 김경조가 눈길을 들었다. 《한데 그건 왜 묻소?》

《좀 생각되는게 있어 그럽니다. 지난달에 부에서 내려보낸 통지문 말입니다. 3대혁명전시관 개관과 관련해서…》

《오, 전시품을 추천하라던것 말이요?》

《거기에 줄방전가공반을 추천하면 어떻겠는지…》

《줄방전가공반을?!》

김경조는 말꼬리를 쑥 들어올리며 최수광을 바라보았다.

《3대혁명전시관에 추천한단 말이지. …》

최수광의 제의는 은근히 유혹적이였다.

김경조도 줄방전가공반이 성공하면 리정의 공로를 어떻게 평가해줄것인가를 생각 안해본것은 아니였다. 하지만 그때는 연구사업이 고충을 겪던 때였고 3대혁명전시관은 더구나 생각할수 없었다.

이제 최수광의 제의를 받고보니 마음이 자못 끌리였다.

우리 인민이 3대혁명로선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서 거둔 자랑찬 성과들을 집대성하여 새로 개관하는 종합적인 전시관에 줄방전가공반을 전시한다면 앞으로 계렬생산을 위한 국가적관심을 모으기에도 유리하고 리정의 성공도 더 빛날것이였다.

《리정동무와는 토론해봤소? 그리고 온덕수동무는?》

《토론하고말고 할게 있습니까.》

최수광은 괜한것을 묻는다는 투였다.

《내 생각에 반대하지는 않을거라고 봅니다. 그 역시 이런 날을 위해서 지금껏 애타는 노력을 기울여온게 아니겠습니까. 온덕수지배인과는 토론이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 비서동지네 집에 찾아갔을 때 그도 문밖에 서있었는걸요. 이번 지식인대회를 계기로 줄방전가공반을 내놓으면 당에 드리는 큰 선물이 되리라고 봅니다. 또 그렇게 하는것이 우리로서 리정동무를 위해 할수 있는 제일 좋은 일이 아니겠는지…》

《일리가 있소. 한데 온동무는 왜 같이 오지 않았소?》

《아마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는가봅니다.》

《미안하다구? 뭐가 말이요?》

《기계를 3대혁명전시관에 추천하는 경우 리정의 이름을 내세울건 명백한데 그러면 공장이 받아야 할 영예도 대학에 떠넘기는것으로 되지 않겠는가, 솔직히 저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과연 놀랍군.) 하고 김경조는 속으로 외웠다.

최수광이 무슨 일에서나 빈틈이 없고 궁냥이 빠르다는것은 알고있었지만 이 며칠새 그렇게까지 많은 타산을 해보았으리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어쨌든 그는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미안할건 없소.》 김경조가 의자등받이에 몸을 기우뚱 젖히며 말했다. 《우리가 처음부터 공장의 이름이나 내자고 그 일에 달라붙은건 아니지 않소. 그리고 김책공대의 신세를 지는것이 어디 우리 공장뿐이요? 그럴 진심만 있다면야 훈장을 달아주고 신문에도 내서 나쁠게 없지. 내 리정동무와 토론해보겠소.》

《비서동지,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이라니? 동문 참 별나게 묻누만.》

최수광은 김경조의 거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들으면서 한 과학자의, 그것도 다름아닌 리정의 운명발전에서 자기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다는 흥분으로 마음이 가볍게 떨리기까지 했다.

그는 인차 안정을 되찾고 말하였다.

《한데… 제가 그러더라는 말은 말아주십시오.》

《그건 어째서?》

《그 사람 성격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길로 가려다가도 누가 그쪽으로 가라고 시키면 안 가겠다고 할 사람이 리정이지요. 남의 동정이나 부축을 받는것을 죽기로 싫어하는 사람인데 더구나 내 말이 나오면 두말할것없이 반대할겁니다.》

《참, 당신들은 알다가도 모르겠소.》 김경조는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다. 《한번 속시원히 마주앉아 얘기라도 나눠볼게지.》

《어느때든 기회가 오겠지요.》

지금 같아서는 그런 기회가 인차 닥쳐올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김경조는 그의 미지근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였다.

《난 이따금 당신들관계에 끼여들고싶은 생각이 나오.》

《그럴수도 있겠지요.》

물론 그럴수도 있다. 그건 김경조의 직책상임무라고도 볼수 있으니까. 그러나 김경조는 서뿌르게 그들사이에 끼여들지 않았으며 최수광이 보건대는 자기네들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라고있는것 같았다. 최수광은 그것이 자신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고 간주하였지만 한편으로 김경조의 방금전과 같은 요구, 한두번 마주앉으면 다 해결될거라고 헐하게 생각하는데 대해서는 의견이 있었다.

마주앉는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할수 있단 말인가.

《지금 당장 나로서는 그를 힘껏 밀어주는것 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언제인가는…》 최수광은 《진심》이라고 말하려다가 그저 《마음이 통하게 되겠지요.》라고 하였다.

최수광이 돌아간 후 김경조는 리정을 부를가 하다가 이튿날 공장문화회관에서 년간계획을 앞당겨 완수한 모범로동자들에 대한 축하모임과 공연이 있다는것을 상기하고 그 시연회부터 봐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축하모임때 꽃다발을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은 온덕수였다. 그날 저녁에 김경조는 합숙에 찾아가 리정과 식사를 같이했다. 그는 돌아가기에 앞서 리정을 마당으로 불러냈다.

담배 두대를 피워물고야 심각해서 말을 뗐다.

《대학에는 언제쯤 가겠소?》

《금요일에 가겠습니다.》

《그전에 한가지 토의할게 있소. 난 이번 지식인대회를 계기로 동무의 사업성과를 당에 보고드릴가 하는데…》 이때 김경조는 리정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3대혁명전시관을 새로 개관하는것과 관련해서 전시품을 추천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소.》

《전시품을요?》

《쉽게 차례지는 기회가 아니지.》

많은 과학자들이 그러하듯 리정도 힘들고 괴로울 때마다 성공의 날을 그려보며 난관을 헤쳐왔다. 그 성공이야말로 과학자의 삶에 있어서 절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성공의 순간을 맞이하자 마음이 허전하고 불안해지는것은 무엇때문인지 몰랐다.

(그러니 이제는 모든것이 끝났단 말인가? 성공의 날을 멀리 바라보며 애쓰던 때보다 지금이 더 불안한것은 무엇때문일가?)

《내 말 듣소?》 하고 김경조가 불렀다.

《예, 듣습니다.》

《이건 사실 나 혼자만의 생각도 아니요. 최윤동지배인도 말한바 있소. 당신이 성공하면 평가를 잘해주자고 말이요. 애오라지 이날을 바라보고 뒤바라지를 해온 집사람의 생각도 해야지.》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수속절차가 복잡하오, 기술심의도 걸쳐야 하고. 우선은 주개발자인 동무의 수표가 있어야 하오.》

《수표요?》

《래일이 화요일이지.… 될수록 빨리 결심해주오.》

김경조는 외투주머니에 두손을 찌른채 눈인사만 끔벅 하고 돌아갔다.

방에 돌아온 리정은 불도 켜지 않고 침대에 벌렁 누웠다.

기회! 어느 책에선가 리정은 보았었다.

운명이 기쁜 얼굴로 대담하게 만나러오는것은 보통 일생에 단 한번밖에 없다고. 그런데 리정은 이미 많은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중 한번은 정말 운명이 기쁜 얼굴로 대담하게 만나러온 때가 아니였을가? 아니면 혹시 김경조의 말대로 지금이 그 기회인것은 아닐가? 어쨌든 연구사로서의 나의 의무는 시제품의 성공과 함께 끝난셈이다. 나에게는 총화만이 남았다. 그래, 총화다.…

그는 흥분으로 하여 온밤 잠들지 못하였다.

다음날 리정은 김경조를 찾아가 그가 요구하는 문건에 수표를 하였다. 김경조는 그의 수표를 들여다보며 싱글벙글하다가 《참, 떠나기 전에 공장상점에 들려보우.》라고 하였다.

상점에서는 그에게 양복지를 한감 내주었다.

공장에서 5리가량 떨어져있는 철도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통근차표를 끊은 리정은 렬차에 올라서 깜빡 졸았다. 그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것은 대학에 나타난 채이숙이 그에게 난데없이 커다란 박사메달을 걸어주는 꿈이였다.

《당신… 이거 어디서 났소?》

《내가 하나 만들었지요 뭐. 마음에 들어요?》

깜짝 놀란 리정은 무슨 올가미라도 목에 걸었던것처럼 소스라치며 샤쯔깃을 쥐여뜯다가 꿈에서 깨여났다.

밖을 내다보니 렬차는 그제야 화천역을 통과하고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좀 자야겠다. 한데 잠을 자는데만 이렇게 많은 시간이 차례지다니, 이렇게 한가할 때가 다 있구나!)

종착점인 대동강역에서 내려 로선뻐스를 갈아탄 그가 문수거리중심에 자리잡고있는 17호동살림집에 이른것은 오전 10시경이였다. 집! 이제 문을 열면 황금빛으로 깨끗이 물든 두그루의 은행나무가 첫눈에 안겨올 나의 집, 안해와 아들이 기다리는 집…

그는 층계를 올라 부름종을 눌렀다.

그 소리가 듣기 좋아 한번 더 눌렀다.

《누구예요?》

《나요.》

《〈나〉가 누구예요?》

《나》가 누구라니?! 그는 어이없어 웃고말았다.

문이 열리자 마음이 앞서 무작정 한발을 들여놓았다.

그러자 문안에 서있던 녀인이 화닥닥 놀라 뒤걸음치며 《누구예요?》 하고 소리쳤다. 그제야 리정은 뭔가 감각이 이상하다는것을 느꼈다. 분명 그의 집이 아니였다. 그의 안해도 아니였다.

리정은 당황하여 들이밀었던 발을 닁큼 뽑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빠금히 얼굴을 내민 젊은 녀인이 무턱대고 완력을 쓰며 접어들었던 (그렇게밖에 달리 생각되지 않을것이다.) 낯선 손님을 한참동안이나 경각성있게 살펴보았다.

《누구네 집을 찾아요?》

《예, 난… 지성이네 집을…》

《오, 지성이네!》 하더니 녀인은 입을 싸쥐였다.

《우리 밑에 집이예요.》

(그러니 내가 한층 더 올라왔단 말인가?)

알고보니 그 집은 얼마전에 이사온 신혼부부가정이였다.

리정은 녀인에게 량해를 구한 다음 혼자 씨물씨물 웃으며 계단을 돌아내려왔다. 부엌에서 무엇을 볶다가 달려나왔는지 한씨의 몸에서는 고소한 기름냄새가 풍겨왔다. 장모와 미처 선인사도 나누기 전에 전실과 잇닿은 화실문이 열리더니 모직쟈케트를 걸친 장인이 마른기침을 깇으며 나타났다.

《집에 계셨습니까?》

《소식을 들었네. 그간 수고가 많았겠네.》

《지성이 할아버지도 지식인대회에 참가한다네.》

한씨가 끼여들며 은근히 자랑했다. 이 오랜 지식인가정의 생활은 책속에 씌여진 문자들처럼 내용은 있으나 소리없이 조용하게만 흘러왔다. 그런데 오늘은 방마다 설레이는 그 무엇이 있었다.

《공장에서 양복감을 내주길래 가져왔는데…》

리정이 들고온 얄팍한 트렁크를 펼쳐보였다. 곤색바탕에 세로줄이 연하게 건너간 고급양복지였다. 천을 볼줄 아는 녀인의 입에서는 첫눈에 벌써 《에게나!…》 하는 소리가 울려나왔다.

《줄이 쭉쭉 간게 실한 사람들이 해입으면 더 좋겠수.》

한씨가 천폭을 어깨에 걸쳐보며 하는 말이였다.

집안에 실한 사람이라고는 자기밖에 없는지라 뒤에서 구부정하고 들여다보던 장인이 《그런 말 마오. 누가 들으면 늙은것들이 천이 탐나 그러는줄 알겠소, 허허.》 하고 궁근 웃음소리를 냈다.

때맞춰 부름종소리가 딸랑 울렸다.

량볼이 발갛게 상기된 채이숙이 싱싱한 국화꽃묶음을 안고 나타났다. 그는 집식구들이 주런이 전실에 나와있는것을 보자 누구에게 꽃다발을 주어야 할지 바재는듯 하다가 꽃묶음을 툭 터쳐 아버지와 리정에게 꼭같이 안겨주었다.

《향기가 좋구나, 사왔냐?》

《오다가 대학생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보낸거예요.》

《어느 대학?》

두사람이 동시에 물었다. 그제서야 채이숙은 자기가 그만 중요한것을 놓쳤다는듯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선생님에게 전해달라니 생각없이 받았지요.》

《그래도 물어봤어야 할걸 그랬다.》

채이숙의 아버지가 퍼그나 아쉬운듯 한마디 했다. 점심을 먹고 리정은 좀 쉬고싶었으나 채이숙이 자꾸만 양복점에 다녀오자고 졸라대는데 못 견디고 일어섰다. 겸해서 탁아소에 들려 지성이도 찾아오기로 했다. 규정위반이지만 지식인가정에는 가끔 그런 《특혜》도 차례진다는것이였다. 한씨가 손기척을 내며 방으로 들어왔다.

《령감이 이 돈을 주는구만.》

《돈은 왜요?》 채이숙이 눈이 커졌다.

《이걸루 양복값을 내라구.》

《아이참, 어머니두. 그만한 돈이 없을가봐요?》

《여보, 그러지 말고 받소.》

한사코 만류하던 이숙도 리정의 말에 더 거절하지 못했다.

《그럼 제꺽 같이 다녀오게나.》

옷도 옷이지만 한씨의 말에는 은근히 다른 뜻도 비껴있었다.

장인, 장모는 딸과 사위가 동부인하고 집을 나서는 모양을 흡족해서 바라보았다. 채이숙은 언제인가 밤강의를 마친 《리정선생》이 그를 집으로 데려다주던 때처럼 팔에 꼭 매달려서 걸어갔다.

《참, 누이한테서 편지가 왔던걸.》

《누이한테서?》

《아버님이 인차 년로보장을 받고 집에 들어오신대요. 당신만 반대없다면 부모님들을 데려다가 자기 집에 모시겠다고 해요.》

채이숙은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여보, 미안해요.》라고 하였다. 《내가 며느리구실을 잘 못하지요? 제 부모를 모시고 사니까 시부모님들 생각은 까맣게 잊을 때가 있군 해요. 지성이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밖에 아나요. 시부모님들한테 자주 찾아가보지도 못하고, 누이한테도 정말 미안해요.》

《누님은 그런 사람이요. 내가 오직 일에만 전념해서 부디 성공하기를 바라고있소. 그래서 지금껏 아들구실도 도맡아하고. 편지는 집에 가서 보기요. 그새 다른 일은 없었소?》

리정은 일부러 말을 돌렸다.

원래 말을 아끼는 채이숙이였지만 어쩌다 만난 남편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느라 숼새없이 입을 놀렸다. 지성이가 탁아소동무를 꼬집어주어 신소를 받았다는것, 늘 집을 비우는 리정을 두고 어머니가 저 은행나무 한그루는 지워도 되지 않겠는가고 롱담을 했다가 아버지한테서 《선옥동무!》 하고 옛날 민청회의를 할 때처럼 비판을 받았다는것 등등이였다.

《참, 아까 그 꽃다발 말이예요. 사실은 당신네 학생들이 준건데 혹시나 아버지가 섭섭해할가봐 그래 그랬어요.》

《잘했소.》

《한데 그들이 하는 말이 당신이 인차 학위를 받을거라고 하더구만요. 그 말을 들으니까…》 하고 채이숙은 긴숨을 폭 내쉬며 리정을 올려다보았다. 《참… 좋았어요.》

리정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럼 빨리 론문을 써야지요?》

《생각중이요.》

《어마, 거기에 뭘 생각해볼게 있어요?》

(뭘 생각해볼게 있는가구? 참, 김경조당비서가 뭐라고 했던가? 애오라지 이날을 바라보고… 그렇게 말했댔지. 저 사람도 이제는 내가 어떤 열매들을 가득 따가지고 집으로, 자기 곁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것이 아닐가? 하긴 그거야 너무도 당연한거지.…)

리정을 찾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돌아보니 채이숙은 이미 문수거리양복점의 문앞에 서서 정신없이 앞으로만 걸어가고있는 그를 의아히 쳐다보고있었다. 리정은 번거롭게 갈마드는 잡념을 털어버리려는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채이숙이 문을 열어놓은 양복점안으로 들어갔다.

사흘후에는 양복을 찾아왔다.

그날 김경조에게서 설비이관문건이 완료됐다는 련락이 왔다.

기술심사원들이 공장에 내려와 입이 벌어졌다는것이였다.

《그래 검사결과가 어떻습니까?》

《검사나마나 기계를 만들어낸것만도 대단하다고 합데.》

《그래도 검사는 다시 해볼걸 그랬습니다.》

《했지. 하니까 더 놀라더군. 그러나 자만하지는 마오.》

통화가 끝나자 야릇한 흥분이 몸을 감쌌다. 자만하지는 말라던 김경조의 목소리가 떠올라 리정은 입가에 가느다란 웃음을 띄웠다.

자만할수도 있지 않는가. 그게 뭐 나쁜가?

나도 인간이니만큼 이런 때 그래볼수도 있지 않는가?

대회장으로 떠나는 마음이 여느때없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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