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회)
제 1 편
제 3 장
3
온덕수는 련하기계공장 책임자로 임명되였다.
공장이라야 종업원이 스무나문되는 회사내의 자그마한 생산공장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그를 책임자라는 정식 직명대신 《지배인동지》라고 깍듯이 칭하여 불러주었다.
며칠후 공장설계가 나왔는데 련하기계회사의 사무청사이기도 한 그것은 량웃도리가 약간 올라온 ㅂ형의 다층건물이였다. 부업지를 늘구기로 내정되였던 곳에 부지를 정한것때문에 약간한 마찰이 있었다. 넓디넓은 땅에 새끼공장 하나 지을 자리가 없어 코잔등만 한 남새밭을 떼내겠느냐고 후방부지배인이 야단했던것이다.
어느 단위나 한뙈기라도 부업밭을 늘구자고 하는 때에 5정보나 되는 땅이 아깝지 않을수 없었다.
허나 역시 김경조의 뿔이 세긴 셌다.
그는 종업원들을 모여놓고 련하의 휘황한 전망을 펼쳐보이면서 앞으로는 련하가 시금치도 갖다주고 김장고추도 벌어줄테니 그까짓 코잔등이 벗겨지는것쯤은 걱정하지도 말라고 장담했다.
그런 다음 부지배인을 불러다놓고 호되게 답새겼다.
…당신이 이 공장의 《지주》인가? 당회의에서 결정했으면 됐지 뭘 자꾸 끙끙거리는가? 그게 어떤 공장이기에 감히 우린 입건사가 급하니 나라에서 땅을 내시오 하고 엉너리를 친단 말인가.…
기초공사가 시작될무렵 부문당비서를 겸하는 공장부책임자로 최수광이 임명되여왔다. 최수광을 그 자리에 추천한것은 김경조라고 한다.
본래 최수광이 맡고있던 직무와 비교해볼 때 급이 좀 떨어지는듯 한감도 있지만 사람들은 그만큼 련하기계공장이 맡고있는 임무가 중요하기때문이라는데로 리해를 모았다.
그 소식을 듣자 온덕수는 미간을 긁었다.
(허참, 왜 하필 그 사람인가?)
지나간 일들이 떠오르면서 어째서인지 그와 마주서기가 두려웠던것이다. 첫날에는 그럭저럭 자리를 모면했는데 이튿날에는 아침일찍부터 작업장에 나와 기다리는 최수광을 피할수 없었다.
《이거 시작부터 가래줄이 제가닥이다? 전에 일이 좀 있었다고 날 피하는게 아닙니까?》 하고 최수광이 바투 따지고들었다.
《피하기야 뭘…》
《그럼 오늘 저녁엔 우리 집에 가야 합니다.》
작업이 끝나자 최수광은 땀이 철철 흐르는 웃통에 물을 한 댓바께쯔 퍼붓고는 온덕수를 옆에 끼고 집으로 향하였다.
그의 집에서는 좋은 냄새가 풍겨오고있었다.
《여보, 우리 지배인동무를 모셔왔소.》
최수광이 뜨락에서부터 큰소리를 치며 들어서자 몸집이 남편 못지 않게 덩실한 그의 안해가 반색을 하며 달려나왔다.
《정림이 아버지 오셨구만요. 어서 들어가십시다.》
《여보, 기다리지 않게 제꺽!》
최수광의 집은 수수했다. 두사람이 마주한 아래방에는 앉은뱅이책상과 책장, 텔레비죤이 놓여있었고 미닫이문을 사이두고 잇닿아있는 웃방에 이불장과 서랍이 달린 옷장이 있었다. 부엌으로 난 문에는 어린 두 아들이 공부하는 구구표가 붙어있었다.
아직 상을 차리기 전이였다.
최수광은 방석을 권하며 어글어글한 눈에 웃음을 띄웠다.
《어쨌든 지배인동문 복을 타고난것 같습니다. 그전 전시회때도 그래 이번에도
《그런 말 마시오. 아무 해놓은 일도 없이 오히려 죄송스럽소.》
공장 은정원에서 미용사로 일하는 최수광의 안해가 손수 집에서 기르던 검정닭을 잡아 안주를 마련하였는데 그가 손맛이 달기는 엿집할머니같았다. 상차림만 보고서도 포만해진듯 최수광이 손바닥을 썩썩 마주 비비더니 《자, 외모는 거울로 보고 마음은 술로 보랬다는데.》 하면서 술을 따랐다.
온덕수는 술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별로 맛이 달았다. 요즘은 전에없이 기분이 좋은데다가 건설장에서 실컷 땀을 흘리고 마시는 술이여서 더 단것 같았다. 최수광이 부어주는대로 거퍼 두잔을 마셨다. 배안에 불이 당긴것처럼 화끈해졌다.
《내 한가지 물어봐도 될가요?》
최수광이 말을 떼는데 그 어조가 정색했다.
《지배인동문 리정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리정연구사요? 글쎄, 뭐라고 해야 할지.…》
온덕수는 자기가 할 대답보다도 별난 물음을 던진 최수광의 눈치를 살피였다. 리정과 한고향내기라니 굳이 나한테 그의 됨됨을 물을 까닭은 없는것이고, 그렇다면 어째서일가?…
《아무튼 나보다야 얼싸한 사람이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줄방전가공반개발문제가 복잡하게 번져졌을 때 내 처신이 어떠했는가 하는것은
《난 그의 기질을 잘 압니다. 언젠가는 세상을 발아래 딛고 서자고 할 사람인걸요.》 그러고나서 최수광은 웬일인지 한숨을 후 내쉬였다. 《솔직히 난 그를 보기가 괴롭습니다.》
《괴롭다구요?
《글쎄 생각해보십시오. 그가 우리 공장을 도와준게 어디 이번뿐이였습니까? 그때마다 공장의 영예는 빛났지요. 하지만 공장의 영예가 매번 그에게는 아픔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솔직히 털어놓고 말해서
《예.…》
온덕수는 최수광의 말에 감동되였다. 지금까지는 그저 자기 행복에만 취해있었는데 최수광의 말을 듣고보니 응당 리정이 서야 할 자리에 자기가 또 나선것 같은 심정이였다. 신세갚음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온덕수 역시 리정을 돕고싶었다.
《그럼 나도 한가지 물어보라오?》
《예, 뭔데요?》
《리정연구사한테 누이가 있소?》
《누이요?》 최수광은 약간 놀라는 표정이였다.
《있지요. 한데 그건… 어떻게 물어보는 말입니까?》
《그저 사람들속에서 말이 좀 돌아가길래.》
《무슨 말이요?》
《들을 소리는 못되오.
《살지는 않았다? 그 말이 꽤 묘한데요?》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꺼낸게 아니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지배인동무야 알아야지요. 예, 리정의 누이를 압니다. 내가 속도전청년돌격대에서 복무하던 때였지요.
그때 난 북부철길건설에 참가하여 〈청년전위〉신문에 소개됐더랬습니다. 중대장을 하면서 차굴을 세개나 뚫었으니까요. 하루는 휴가갔던 우리 대원 하나가 돌아와서 자기네 마을 유치원교양원이 그 신문을 보고 찾아왔더라나요. 한달쯤 지나 편지가 왔더구만요. 그 처녀한테서, 리정의 누이한테서 말입니다.》
리순이 보내온 편지는 추억에 젖어있었다.
소시적 수학학과경연때 있은 일도 한페지나 되게 썼다.
수학학과경연? 그런 경연에 참가한것은 생각나는데 옆에 앉았댔다는 처녀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편지 마감에야 리순은 자기가 리정의 누이라고 밝혔다. 리정이, 그야 어떻게 잊을수 있겠는가.
리순은 이태전에 고향을 떠나 새로 생긴 간석지마을에서 유치원교양원으로 일한다고 하였다. 회답을 보냈다. 아주 딱딱하면서도 긴 회답이였다. 차굴공사과정에 대해 어떻게나 지루하게 설명했던지 최수광자신도 읽어보고는 찢어버릴가 하다가 그냥 보냈다.
다시 쓸 시간도 없었다. 다음엔 소포가 왔다.
그 기특한 처녀가 휴가를 받고 고향에 가서 솔꽃가루를 쉰아홉봉지나 모아 보내지 않았겠는가. 중대인원수에 맞춰서…
짤막한 쪽지편지가 묻혀있었다.
《옛 책을 보니 솔꽃가루의 맛은 달고 성질은 따뜻하며 독이 없다고 썼더군요. 기를 보하고 풍습을 없애고 진통작용을 한대요. 한번 쓰는 량은 3그람정도… 3그람이 얼마만큼인지 알아요? 엄지손가락과 지시손가락, 가운데손가락을 한데 뫃고 가루속에 푹 잠그었을 때 떠지는 두번 량이 그만큼 될거예요.》
리순은 그해 가을 유치원아이들을 데리고 위문공연차로 그가 일하던 차굴공사장에 찾아왔다. 그와 유치원꼬마들에게 마가목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공연이 끝난 후 그를 바래워주면서 무슨 이야기인가를 했다. 고향소식이랑 리정에 대해서도 물었던것 같다.
이게 전부다. 아무것도 없다.
이것을 과연 사랑이라고 할수 있단 말인가?
《이게 답니다, 다요. 그런데 뭐라구요?》
《난 그런 뜻에서 물어본게 아니요. 돌아가는 말이 리정의 누이가 지나간 일로 상처를 입고 지금껏 혼자 산다기에…》
리순이 시집을 안 가다니, 뭐 그게 나때문이라고?!
《허, 허허허!》 최수광은 갑자기 허구픈 웃음이 나왔다. 그것은 헛소문이였지만 구차스럽게 이 자리에서 까밝히고싶지는 않았다.
《왜 리정의 누이에 대해 물어보았는지 알겠습니다. 그러니 지배인동무의 눈에도 이 최수광이 겉으론 멀쩡한척 해도 사실은 리정에게 진빚을 갚자고 낮추 붙어돌아가는 사람으로 보였겠구만요.》
《하, 아무리 객담이라도 그건 너무하구려.》
《아니, 난 조금도 량심에 꺼리낄게 없습니다. 나는 원칙을 지키고있습니다, 원칙을!…》 최수광은 흥분해서 말이 아니였다.
온덕수는 괜한 말을 꺼냈다고 후회하였다.
그는 최수광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술을 더 따랐다.
마침내 먼저 인사불성이 된 최수광에게 그의 안해가 베개를 고여주는것까지 보고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선 온덕수는 정말 일없겠는가고 념려하는 말에 《일없잖구요. 일없어요.》 하면서 꼿꼿이 마당을 벗어났다.
하지만 집오래를 채 벗어나지 못하고 땅바닥이 휘 돌아가는 바람에 시야에 든 별들을 좌르르 쏟으며 모재비로 나가넘어졌다. 삶은 닭알의 노란자위처럼 가루가 푹푹 일어날것 같은 보름달이 산날에 걸려있었다. 건들거리는 호박잎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니 몸이 허공에 등 떠서 오락가락하는것 같았다.
최수광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빚이면 빚, 좋을대로 말하라지요. 여하튼 우리가 리정을 도와줍시다. 그러자면 줄방전가공반을 꼭 성공시켜야 합니다. 금년중에 과학자, 기술자들의 큰 대회가 열린다는 말이 있는데 좋기는 그 계기로 새 기계를 내놓으면 좋은 기회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온덕수는 벌떡 일어나앉으며 생각했다.
(그러고보면 인생이란 어떤 계기의 함수일는지도 몰라.)
큰길쪽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희읍스름한 사람들의 형체가 나타났다. 그는 길에서 떨어져있는데다가 무성한 호박덕이 몸을 가리워주고있어 남의 눈에 띄울 념려는 없었다. 두런두런하는 말소리가 점차 가까와지자 온덕수는 몽롱하던 정신이 말똥해졌다.
분명 정림이의 목소리였다. 온덕수는 오늘이 수요일이라는것을 기억해냈다. 그러니 오늘도 《학습반》을 운영한 리정이 정림을 바래주러 여기까지 따라나온것이였다.
《형님, 나도 련하기계에 갈수 있을가요?》
《련하기계에?!》 리정이 걸음을 멈추는것 같았다.
《어떤 땐 공부를 하다가도 내가 공장대학이나 나와가지고 무슨 큰일을 치겠다고 이러나 하는 생각이 불쑥 들군 해요.》
《쭈그러들기는. 중요한건 자기 능력이야.》
그것도 모를 소리라는듯 정림이가 웅얼웅얼했다.
《그래두… 형님같은 사람도 가지 못했는데.》
(철없는 녀석, 남의 가슴을 허비고있구나!)
온덕수는 생각했다. 리정이야말로 련하기계와 떼놓고 생각할수 없는 사람이였다. 그러나 현실은 의외로 온덕수를 련하기계의 중요직책에 내세운 반면에 리정은 여전히 동원연구사로 남아있었다.
혹시 저 리정이라는 사람은 행운까지의 걸음이 늘 한발자국씩 모자라는 박복한 사나이였던가. 행운은 마치도 자기가 다니는 길이 따로 있기라도 한듯 늘 외곬으로만 오가고있지 않는가. ·
《그래, 아직은 나도 아니지.》 리정의 목소리였다.
《그렇지만 자기 쓸모를 갖추면 필요는 꼭 나타나. 그 필요를 만족시키면 바라던것도 이루어지고… 내 말이 리해되지 않는게지?》
《좀 알쑹달쑹해요.》
《나도 바라는게 많은 사람이야. 소원이야 누구나 가질수 있지. 그보다 먼저 자기가 그 소원을 실현할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있는가를 항상 자각하며 살아야 한다는것을 잊지 말아.》
《형님은 자기를 평가해봤어요?》
《나? 가끔 그래보지.》
아쉽게도 리정의 대답은 들을수 없었다. 그들의 목소리와 발자국소리는 한데 어울려 잔자갈들이 깔려있는 개울건너로 사라졌다.
온덕수의 눈앞에는 리정의 얼굴이 보이는듯 했다.
(
어느덧 동네에 불켜진 집도 몇집 안되였다.
개짖는 소리마저 뜸해져서 그가 집에 들어섰을 때 치마섶에 반짇고리를 껴안은채 끄떡끄떡 졸고있던 안해가 《웬 장난을 치다가 왔수?》 하며 잔등에 묻어온 줄당콩잎을 뚝뚝 뜯어냈다.
온덕수가 겉옷을 벗으며 물었다.
《정림이는?》
《쉬- 며칠 있으면 진급시험이 아니나요.》 하고 안해는 벌기우리한 탁상등이 켜있는 웃방을 대견스레 곁눈질해보였다.
옛스럽게 문창호지를 바른 미닫이에 길둥그러니 비껴있는 정림이의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온덕수는 《사날후에 출장을 가게 준비해주.》 하고 말하였다. 최윤동과 같이 가는 출장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