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회)
제 1 편
제 2 장
3
안시학이 안흥에 내려온지도 몇달이 지나갔다.
나라의 서북단에 자리잡은 안흥은 면적이 그리 넓지 않으나 력사가 자못 유구한 고장이였다. 안흥시내 한복판에는 고려 성종왕때인 994년에 세워진 남문유적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잘 다듬어쌓은 화강석축대우에 2층문루형식으로 세워진 성문유적을 옛적에는 《위원루》, 혹은 《진남루》라고 불렀는데 안흥성둘레 8개의 성문중에서 제일 크고 화려했다고 한다. 해질무렵 서늘한 그늘아래 노전잎을 깔아놓고 모여드는 늙은이들에게 옛 소리를 얼핏 비춰보면 서북면행영도통사 강감찬장군이 어떻고, 소배압의 10만경기병이 어떻고 하는 전쟁담이 흘러나오기가 십상이였다. 사실그대로 지세가 험준하고 인적이 황량했던 동북면과는 달리 우로는 국경을 접하고 아래로는 망망평야에 도로까지 순했던 이 요충지에서는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싸움 그칠 날이 별로 없었다.
어디나 널린것이 쇠붙이였다.
그러던 곳이 온 나라가 다 아는 기계고장으로 전변되게 된것은 무심한 백운천의 물결만이 수수천년 핥아먹던 흔들레판우에 공업건설의 웅대한 설계도가 펼쳐지던 1954년 1월 29일 그 아침부터였다. 그날 생눈길을 헤치고 이곳에 찾아오신
허나 그것은 창조의 노래였고 건설의 동음이였다.
하고보면 이곳은 이래서저래서 쇠붙이와의 인연을 물고난 모양이였다. 안시학이 이곳에서 로동생활을 시작할 때 사람들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지도사업》이라는 어마어마한 용건으로 공장에 드나들던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저…》 하는 애매한 말을 붙이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바이》가 되였다.
언젠가 그가 상사라는 직무를 부러워했던것처럼 이 《아바이》는 참으로 무탈스러웠다. 그러나 점차 공장에서 《아바이》들이 차지하는 지위를 알게 되자 안시학은 불안해졌다. 이곳에서는 오랜 관록과 높은 기능을 가지고있되 특별한 직위가 없는 사람들에게 《아바이》라는 토색적인 존칭사를 붙여주고있었던것이다. 모체공장에서 백운천을 거슬러 반시간쯤 올라가느라면 새로 건설한 분공장이 나지는데 그 어중간에 자리를 잡은 로동자합숙 1층 두번째 방이 안시학의 호실이였다.
거기서 그는 갓 열여덟에 난 《팔만천》이와 함께 살았다.
《팔만천》 이란 별칭이고 본명은 김만섭이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마저 《성》을 떼버리고 《만천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만가지 일에 다 간섭하라고 만섭이라고 지었대요, 김만섭. 우리 할아버지는 소원도 참 별나지요?》
용수철처럼 강기있고 익살스러운 청년이였다.
그의 별칭도 누가 달아준것이 아니라 자작 고안해낸 엉터리 《력법》에서 기인된것이였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는 지구가 한번 자전하는 동안을 하루로 보는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 새로운 과학기술성과가 한가지씩 나올 때마다 그것을 하루로 기준한다는것이였다. 하긴 시간이란 그 기준을 무엇에 두는가에 따라
《오늘 설계사업소 한유준아바이가 또 한가지 꽝 하는걸 내놓았대요. 그 순간에 벌써 나한테는 하루가 지나간셈이예요. 이렇게 꼽아보면 내 나이가 얼추 〈팔만천살〉이 넘는다니까요.》
안시학은 이런 청년의 견습공이 되여 한때는 자기가 국제전시회에 들고다니던 그 《안흥3》호선반을 다루었다.
처음 한동안은 사람들이 모두 자기만 쳐다보는것 같고 뒤에서 무슨 말들을 하는것 같아 신경이 쓰이였지만 그것도 한때고 지금은 마음이 이상스럽게 편했다.
단지 그를 편안치 않게 하는것은 부지배인 권하세가 우정 그랬는지 아니면 우연인지 그때 안시학이 잘못 들여온 수입설비들을 하필이면 생산현장으로 드나드는 통로입구에 세워놓아 어쩔수없이 아침저녁으로 보게 된것이였다.
로동자들을 각성시켜 자체로 분공장설비들을 만들어내게 하는데는 좋을지 모르겠으나 안시학에게는 매일 그것을 보기가 일종의 고통이였다. 일부러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 설비들을 기웃기웃 들여다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마다 안시학은 공장사람들이 밝은 눈초리로 자기 몸을 들여다보는것처럼 느껴졌다.
한번은 만천이가 일러바치기를 권하세가 그앞에서 《어쩌면 이놈을 여기 가져다놓기도 잘했어.》 하고 중얼거리더라고 한다.
이달에는 월초부터 온 공장이 5면가공중심반제작에 들어갔다.
한유준이 드디여 공장에 파견된 2월17일과학자, 기술자돌격대와 힘을 합쳐 수백매에 달하는 설계를 완성하고 도면을 출도했던것이다. 5면가공중심반은 기둥 하나의 무게가 10톤이나 되는 거물인지라 대형물가공이 기본이였고 그래서 가두에서 찾아오는 떡함지며 국수임들은 닿는 차례로 줄줄이 주물이 아니면 1가공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실지 덩지 큰 주물품들은 락원과 북중에서 부어왔다. 소형물가공을 맡은 2가공에 어쩌다 지원이 들어오는 날은 직장을 담당한 권하세가 바람을 일구는 날이였다.
5면가공중심반제작에서 이를테면 제2제대를 지휘하는 그였지만 물건이 제 손에서 똑 떨어지기라도 하는듯 사람들을 들볶아댔다. 몽둥이 세개 맞아 담 뛰여넘지 못할 놈 없다는 식이였다. 규격소재가 보장되지 않아 자재랑비가 많았음에도 권하세는 막무가내였다.
그는 늘 제품검사원을 옆에 끼고 나타나 기술과에서 넘겨보낸 공정표와 생산지령서를 건건이 따져가며 《아직도 불이 붙지 않았소. 우리가 자체로 5면반을 만든다니까 기신기신 찾아왔던 코큰 량반들이 뭐라고 지절대고 갔는지 잊었소?》 하고 수염을 한줌 뽑힌 호랑이처럼 펄펄 뛰였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저녁식사후 만천이와 함께 거뜬하게 목욕을 하고난 안시학은 언제부터 벼르고있던 티눈을 뽑느라고 땀을 뽑았다. 만천이가 발바닥에 박힌 티눈우에 오디알만 한 뜸봉을 빚어놓고 불을 달았다.
《아아!… 앗! 앗!》
안시학이 감전된 사람처럼 흠짓흠칫 몸을 떨었다.
《헤헤, 아바인 참을성이 없구만요.》
《아직 더 떠야 되나?》
《나이만큼은 떠야 뚝 떨어져요.》
그 말에 안시학은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발바닥이 뚝뚝한게 괜찮은데요.》
녀석이 삶은 감자알을 찔러보듯 안시학의 발바닥을 꾹꾹 눌러보며 어리궂게 하는 말이였다. 불현듯 코마루가 쩡해왔다. 처음 로동화를 타신을 때 그의 발을 만져본 만천이가 《세상에 이렇게 말랑말랑한 발도 있나.》 하고 놀라와하던 일이 생각나서였다.
그 발에 굳은살이 박히고 이렇게 뜸질까지 하게 됐으니 안시학으로서도 어쩐지 생각이 많아지는것이였다. 역사질을 꽤 해서야 티눈이 뽑혔다. 상처를 대충 소독하고 가제를 붙인 다음 꼭 끼는 양말을 신었다. 잠자리에 들면서 안시학이 물었다.
《만천이도 래년엔 대학에 가야지?》
《글쎄, 젊은 패들은 너두나두 하는데 우리 직장장은 못해도 창의고안을 서너건은 차고 오라니 야단이 아니예요. 에에, 직장장고개 가파롭다는건…》 하고 만천이는 혀를 내둘렀다.
《왜, 설계사업소 한아바이랑 가까운것 같던데?》
《가깝다구 뭐 창의고안까지 대신해주겠나요.》
《음…》 고개를 끄덕인 안시학이 턱밑에 베개를 고이며 까근스레 물었다. 《한데 아바이하고 어떻게 그렇게 가까워졌나?》
《예에, 제 고모님이 고등공업전문학교때 아바이를 가르친 스승이라나요. 아바인 본래 평양태생인데 대동고급중학교인가를 졸업하고 희천에 가서 선반을 돌렸대요. 나이가 들어서 공부를 하느라고 종아리깨나 수태 얻어맞았다던지. 아우, 졸린다!》
만천이가 하품을 쫙 했다.
《그랬댔구만.》 안시학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여간 만천이가 빨리 빠져야 나도 견습생신세를 면해볼게 아닌가?》
《그러게 내 떡, 네 떡 좀 도와주셔야지요.》
어떻든 안시학이 한때는 큼직한 증명서를 가지고다니던 사람인지라 은근히 영향력을 과시해주기를 바라는것 같기도 했다.
《내 다 생각이 있어.》 하고 안시학은 웃었다.
며칠후 2가공직장 만천이가 대단한 창의고안을 내놓았다는 희한한 소문이 돌아갔다. 비규격소재로 제품을 가공하는 경우 어쩔수없이 쇠밥으로 깎이여나가던 절삭부분에서 환봉소재를 얻어내는 창안이였다. 공장에서는 기대공들을 모여놓고 경험토론 겸 기술보급사업을 벌려놓았다. 만천이는 난생처음 그렇듯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연설》하게 되였다. 천정기중기가 물어다놓은 베트우에 올라설 때 얼마나 긴장했던지 온전하게 신은 신발이 짝짝이로 돌려신은것처럼 내려다보여 눈이 퀭해졌다.
《에, 여러분!》 하고 만천이가 정색해서 말을 떼자 청중은 오히려 정색해지지 않고 웃음을 터뜨렸다.
《만천아, 네가 언제 연설을 다 배웠구나!》
프레나를 다루는 변아바이의 말이였다.
웬 쇠붙이를 땅땅 두드리며 주의를 끄는 소리가 났다.
《넨장, 무슨 서두가 그리 기냐? 직판 말해라.》
가령 통나무로 굴뚝을 깎는다고 할 때 그 내경만 한 드릴을 쓰면 그것이 뚫고 지나가는 부분은 톱밥으로 버려지게 된다. 하지만 맞춤한 바이트를 써서 따내기를 하면 능히 환봉소재를 하나 얻어낼수 있다. 만천이는 그에 대한 표상을 주기 위해 삶은 닭알을 껍질채 절반 짜갠 《소도구》 를 리용했다.
《노란자위, 흰자위, 껍질이 있습니다. 우린 지금 이 껍질을 쓰기 위해 속을 다 깎아버리고있습니다. 만약 일정한 바이트를 써서 이 흰자위부분만을 따낸다면 어떻게 될것 같습니까? 노란자위와 껍질이 분리됩니다. 이 노란자위가 바로 환봉소재로 됩니다.》
사실 그것은 안시학이 튕겨준것이였다.
가족지원자들이 말아온 강냉이국수를 들다가 꾸미로 놓인 닭알쪼각을 보면서 궁리한것이였다. 하지만 그것을 알길 없는 사람들은 만천이가 이제야 진짜 나이를 한살 잡숫게 됐다고 말했다.
안시학은 그것을 보면서 행복을 느끼였다.
제 처지에 무슨 발명을 했다고 오는 감회가 아니였다.
오히려 그는 사람들이 자기의 이름만은 제발 꺼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며칠후 공장정문에 세워진 대형속보판에는 만천이와 함께 그의 이름도 크게 나붙었다.
다음날에는 그들의 사진이 영예게시판에 올랐다.
그때부터 2가공에 오는 가두녀성들은 저마다 만천이의 동숙생아바이부터 찾았다. 그리고는 누가 볼세라 지짐 한짝이라도 주머니에 더 챙겨주군 하였다. 이전 같으면 안시학은 그것을 부끄럽게 느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시학은 진심으로 기쁘고 만족했다.
그런 자기가 전혀 어리석게 생각되지 않았다.
속보는 인차 교체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안시학의 이름을 기억했다. 차를 타고 수년세월 드나들도록 누구 하나 기억하지 못했던 그의 이름을 말이다.
마침내 5면가공중심반 총조립이 끝났다.
자동공구물개장치를 제작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으니 말이지 그렇지만 않았더라면 한 보름쯤은 기일을 더 앞당길수도 있었다.
그날이 마침 안시학의 생일이여서 합숙식당에서는 소박한 축하연을 차렸다. 한유준은 집에서 기르던 닭까지 잡아가지고 왔다.
만천이가 타는 기타반주에 맞추어 젊은이들은 《나의 공장아》 노래를 불렀고 안시학의 차례가 왔을 때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한곡 부르십시오!》
《시! 시를 잘한다던데요!》
안시학이 엉거주춤 일어서서 이마를 문지르는데 쿵덩쿵덩 복도를 울리는 다급한 걸음소리가 나더니 권하세가 불쑥 식당문을 열고 들어섰다. 모두의 눈길이 그에게 쏠렸다.
(저 사람이 내 생일을 알고 왔을가?!)
길게 생각해볼 사이가 없었다. 권하세의 뒤로 또 한사람의 낯익은 모습이 나타났다. 기계공업부장이였다. 잘생긴 얼굴에 안경을 낀 그의 눈가에는 반가움이 어려있었다
《안시학동무, 반갑소. 축하하오.》
안시학은 창황중에 인사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한유준이 기계공업부장에게 자리를 권했으나 그는 앉지 않고 말했다.
《부지배인동무, 가까운 방에 텔레비죤이 있소?》
《2층홀에 〈소나무〉가 한대 있습니다.》
《그걸 여기로 옮겨오기요. 시간이 없소, 빨리!》
기계공업부장이 서두르는 까닭을 알수 없었다.
돌연 뒤바뀐 분위기에 익숙되지 못한 안시학은 어리뻥뻥해서 서있었다. 그동안 몇몇 젊은이들이 텔레비죤을 날라오고 만천이가 식사칸의 어느 구석에서부터 전원접속코드를 길게 뽑아왔다.
《자, 편안히 자리들을 잡소. 난 안동무와 함께 보겠소.》
텔레비죤을 켜니 새 품종의 벼종자와 그 비배관리에 대한 과학영화가 방영되고있었다. 뒤에서 젊은이들이 수군거리자 기계공업부장이 돌아보며 입가에 손을 세워들었다.
《쉿! 이제 안시학동무 딸들이 나오오.》
안시학은 놀랐다. 설화, 설림이… 우리 딸들이 텔레비죤에 나오다니, 그런걸 난 왜 몰랐을가? 하기야 언제 그런데 신경을 쓸 새가 있었는가. 기계공업부장은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가?…
화면에 손풍금풍낭이 쫙 펼쳐지더니 《전국근로자들의 노래경연》이라고 쓴 반원형의 제목이 떠올랐다.
두번째 출연자가 노래를 끝내자 무대에 나온 방송원이 《다음출연할 동무들은
《아바이! 정말 쌍둥이들이 나와요. 손풍금까지 메구!》 만천이는 입이 함박만 해서 일어서기까지 했다.
《히야, 기딱막힌데!》
《꼭같이 생겨서 누가 누군지 모르겠구만.》
쌍둥이들은 전보다 더 예뻐진것 같았다. 얼굴에는 그늘 한점 없었다. 그들은 안시학이 그렇듯 사랑하고 즐겨부르던 노래 《당의 품은 우리사는 집》을 불렀다. 생김새도 목소리도 서로 비슷한 딸들이 부르는 노래였지만 안시학은 두 딸의 소리를 명확히 가려들을수 있었다, 부모들만이 가지고있는 감각과 사랑으로.… 노래가 합격으로 평가되자 더욱 요란한 박수갈채가 터져올랐다.
《아바이, 축하합니다.》
《우리 텔레비가 기특하거던.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알잖아.》
그때 기계공업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무들, 안시학동무 딸들이 노래를 잘 부릅니다. 나도 정말 기쁩니다. 이 뜻깊은 자리가 어떻게 마련된것인지 동무들은 다 모를것입니다.
안시학은 눈물이 앞을 가리웠다.
소리내여 울고싶었다. 불미한 전사의 생일을 잊지 않으시고 이렇듯 뜨거운 사랑을 베풀어주시다니…
《안동무, 이제는 아까 부르지 못한 노래를 불러야지.》
기계공업부장이 그를 불렀다. 안시학은 어깨를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노래가 아니라 사죄를 하고싶었다.
《동무들, 난 사실 이 자리에 서있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동무들을 믿지 못해서 동냥바가지를 차고 나라망신을 시키며 돌아다닌 사람입니다.장군님앞에서까지 조업기일을 미루자고 망언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축하라니? 노래라니? 가슴이 터져와 못 견디겠습니다. 내 이제 무엇으로 어떻게
《아바이!…》 만천이가 곁에서 팔소매를 잡아흔들었다.
《안동무, 이러지 마오. 진정하시오. 동무가 생일을 즐겁게 보내야 나도 돌아가서
《예.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안시학의 머리속에 불쑥 떠오르는것이 있었다. 《그럼 저는 언젠가 책에서 보았던 문장을 한구절 외워보겠습니다. 제목은 〈개천일의 추감〉이였던지…》
좌중이 물뿌린듯 조용해졌다.
《…아아, 반만년이란 기나긴 세월동안 놀기야 잘도 놀았다. 별의별 경험을 많이도 겪었다. 한창시절에는 우리 한번 으악 소리칠 때 천지가 뒤집힐듯 덜썩덜썩하였고 한번 침묵하면 온 누리가 괴괴하여 다 죽은듯 하였다. 힘센 놈과 팔씨름하여 넘겨뜨려도 보았고 후진들을 어루만져 이끌어도 보았었다. 욕심사납게 남의것을 빼앗아 내것 삼아도 보았고 인심좋게 내것 좋은것을 남 주어도 보았다. 대지우에서 훨훨 뛰기도 하였고 펄펄 날으기도 하였다.
남 하는것이란 못하는것이 없었다. 남 못하는것을 나 혼자 하여도 보았다. 그러더니 웬걸 한이 오고 당이 오고 몽골이 오고 청이 오고, 무엇이 잘났다는것, 서로 물고 찢는것, 빼앗기고도 아까운줄 모르는것, 설음을 당하고도 덩실덩실하는것, 내것이라면 어찌 그리도 밉고 남의 것이라면 물고 빨고싶은것, 이러구저러구 하는 사이에 성조의 대업은 말끔히도 탕진하고말았다.》
안시학은 잠시 큰숨을 몰아쉬였다.
《이렇듯 우리는 너무도 불효요, 불순이다. 우로는 성조께 막대한 죄악이요, 아래로는 자손들에게 무상의 치욕이다.》
안시학이 옛글을 빌어 무슨 심정을 아뢰이려고 했는지 사람들은 모두 말없이 느끼고있었다. 권하세가 주먹을 코밑에 가져다대고 헛기침을 컹컹 깇더니 한유준에게 말을 돌렸다.
《갸들이 말이요, 저희네 프로그람을 가져다가 시운전을 해주겠으니 우릴 보구 뭐 미국놈돈을 8만원씩 내라고 한다면서?》
《원이 아니라 딸라예요.》
웬 젊은것이 입빠르게 주어붙였다.
권하세는 대뜸 눈살이 꼿꼿해져서 《딸라는 뭐 말라빠진게야? 그게 우리 말로 원이나 같단 말이야. 알겠어?》 하고 소리쳤다.
언제는 우리 힘으로 5면가공중심반을 만들수 없다고 머리를 저으며 가버렸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한다는짓이 그 모양이였다. 기계는 만들었다 해도 프로그람만은 자체로 개발하지 못할것이라는 타산에서였다. 하기야 그들에게는 1990년 10월로 조업을 선포한 년령 1살의 조선콤퓨터중심이 이 나라 쏘프트웨어수준의 직관으로 보일테니 그럴만도 하였다.
한유준이 입을 쩝쩝 다셨다.
《그러래. 언젠 뭐 우리가 할수 있다는걸 했소? 우리가 다른건 몰라도 이것만이야 잘 알지요. 할수 있느냐, 없느냐? 그 기준은 당의 요구이고 우리
《거 말 잘했소!》
권하세가 식탁을 꽝 치며 호응했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드센 완력과 열정이 넘치였다. 그것이면 뭐나 다 해낼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권하세는 반년후에는 자기가 수자조종공작기계분공장 지배인으로 임명될것이며 그 살붙이같은 공장과 피도 눈물도 함께 맛보면서 고난의 행군을 겪게 될줄 꿈에도 알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