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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12월의 그이》

황용남

 

(제 3 회)

 

3

 

을씨년스러운 겨울날의 저녁이였다.

삼륜차에 앉은 리희호는 2층 창가에서 락조가 비낀 서울장안을 바라보고있었다. 우리의 중대방송이 나가자마자 리희호는 며칠 있으면 아흔고개에 들어서는 고령의 몸이였지만 결단코 조의방문을 결심했다. 필경 마지막일수도 있는 기회였다. 남편 김대중이 살아있었더라면 반드시 함께 떠났을 두번째 평양길… 그의 마음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저도 모르게 남편이 눈을 감던 때가 생각났다.

《실용정부》의 등장으로 6. 15는 찬서리를 맞았다.

6. 15공동선언과 10. 4선언을 모독중상하는 온갖 훼방과 랑설이 남조선의 3대신문이라 일컫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의 지면이 좁다하게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이미 내다보고있었던듯 마지막까지 태연했고 한생을 자부했다.

《내 별호가 그래서 인동초야.》

겨울을 이겨내는 풀…

그래, 리명박치하는 참으로 엄혹하기도 했다.

《인명은 곧 천명이라 내 명이 하늘의 뜻을 가늠하는 실눈금이라도 되여준다면 기꺼이 그를 숙명으로 받으리라. …》

김대중은 생의 말년에 이 말을 줄곧 뇌이였다.

《잃어버린 10년》이니 《굴욕의 10년》이니 하는 악에 받친 소리가 《국회》에서, 청와대에서 로골적으로 튀여나올 때 벌써 자신의 생명이라고 할수 있는 6. 15의 장래가 걱정되였던지…

가까스로 북에 의하여 유지되던 그 6. 15!

그러나 이제는 김정일위원장님도 안계시니 정녕 6. 15는 언뜻 비꼈다 사라지는 무지개처럼 영영 이 반도를 떠나간단 말인가.

《장차 6. 15는 어떻게 되는거죠?》

북의 중대방송이 나온 후 집에 찾아왔던 박수원에게 리희호가 저도 모르게 던진 말이였다. 이것은 대답을 바라는 질문이 아니라 탄식이였다. 박수원 역시 그것을 알고있는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꼭 1년 남았었습니다. 희망이 다시 걸릴 날까지…》

《실용정부》의 퇴진을 념두에 두고 하는 말이였다.

2012년 12월까지는 꼭 1년 남았다.

그런데 이제는 6. 15의 맞도장을 누르신 두분께서 다 가셨으니 그 립지를 과연 누가 지켜가겠는가 하는것이였다.

그가 즐겨부르던 노래의 한구절이 생각났다.

 

                                      깊은 밤 쪼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다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것을

                                      …

 

고향이 목포여서인지 김대중은 생전에 《목포의 눈물》을 애창했었다. 김대중박물관이 개관된 날 저녁에도 그는 이 방에서 흘러가는 초생달을 바라보며 이 노래를 불렀었다.

통일은 정녕 못 오는 님이 되여 마음이나 실어보는 꿈으로 남는것일가.

중대방송이 발표되자 남쪽땅이 일시에 들고일어났다. 재야계는 물론 《국회》와 법조계에서까지 《정부차원의 조문단파견이 동족으로서 응당한 도리이고 또 가물든 북남관계에 물고를 트이기 위한 반드시 필요한 조치》라며 저마다 조문신청을 냈다. 그런데 《정부》는 너무도 완고하였다.

분향소를 설치하는것마저 《보안법》위반으로 몰아가는 판이니 《정부차원》의 조문단파견은 말할 형편이 못되였다. 하여 사람들은 싸이버분향소들을 설치하고 인터네트를 통해 애도의 감정을 표시하고있었다. 사회각계에서 부고를 받고 리명박이 취한 처사를 두고 비난이 비발치듯 하였다.

리명박은 부고가 발표되자 깜짝 놀라 미국, 일본의 상전들에게 전화질을 하다못해 유엔사무총장까지 찾았다.

그것을 비웃을내기 인터네트망이 터져날듯 했다.

《북의 유고를 제일먼저 유엔에 전한 MB대통령.》

《조상전래 상가풍속 모르나. 〈일본형님, 미국큰형, 상가례절 한수 가르쳐줍쇼. 〉… 나이 일흔 창피해.》

공교롭게도 부고가 발표되던 날이 리명박의 일흔돐생일이였다고 한다. 점심참에 고깔모자까지 쓰고 청와대의 측근들속에 둘러싸여 생일축하잔치를 벌렸던 《실용정부》의 《페하》는 그만 생일과자에 가져다대던 칼을 깜짝 놀라 떨어뜨렸다던지… 어느 인터네트신문에는 《생일 축하합니다, 대통령각하!》라는 표제를 달고 《…일흔돐이랬죠? 왜 점심오찬 걷어치우셨나요? 이웃의 부고를 들어서라구요. 근데 생일축하모자를 벗어제낀것까지는 좋았는데 왜 지하방공호에 들어가 철갑모자를 쓰셨나 그거죠.》라는 글이 실려 보는 사람마다 쓴웃음을 짓게 했다. 리희호가 공화국방문신청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민주통합당 박수원《의원》이 찾아왔다.

《녀사님, 그 몸으로 북행길을 결심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감동이 컸습니다.》

《그분에 대한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했어요.》

《녀사님과 그리고 먼저 가신 대통령각하앞에서 제 죄를 빌려고 왔습니다. 녀사님의 용단을 놓고 많은것을 생각했습니다. 저도 역시 김위원장님과 절친한 인연을 맺은 사이지만 하도 지금 〈종북세력〉척결소동이 요란타보니 많이 주저했거던요. 용서하십시오. 저도 녀사님과 같이 가렵니다.》

《고마워요, 박장관님!》

리희호는 그전처럼 그를 장관이라 불렀다.

《세상이 어찌다 이렇게 되였는지…》

6. 15공동선언의 발표로 온 이남땅이 들썩들썩하던 그 시절이 그리웠다. 반공선전에 열을 올리던 언론사대표단이 이북에 가서 고두사죄하고 사면이라도 받은듯 활개치며 돌아오고 남북예술단들이 분계선을 넘나들며 한해에도 몇차례씩 《아리랑》을 합창하던 그 시절, 금강산으로 향한 관광객들로 속초항이 터져나갈듯 하고 부산에 온 미인응원단이 이남청년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던 나날들이 꿈만 같기도 했다. 박수원을 마주한 순간 리희호는 그 시절이 생각키워 눈물이 절로 났다.

그 나날은 다 어디로 가고 조선반도우엔 전쟁의 공포가 망령처럼 떠돌고있는것인가.

《조, 중, 동》을 비롯한 보수언론들은 다시 입에 피를 물었고 연평도엔 불벼락이 쏟아졌다. 남북간의 팽팽한 긴장고조로 서울장안에 《전시식품마련》이라는 괴상한 풍이 불었다. 게다가 이제는 반도의 평화를 한몸에 안고계시던 국방위원장님마저 가셨으니…

《그냥 이대로만 갈순 없잖아요? 그끝이 뻔한데…》

《글쎄 말입니다. 김위원장님마저 가셨으니 통일은 더욱 료원해지는것 같습니다. 세상이 너무도 변했지요.》

박수원의 심정도 리희호와 다를바 없었다. 그도 앞날이 막막하기만 한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지금 나뿐아니라 림동훈 전 장관님도 그렇고 로무현대통령의 부인인 권양숙녀사랑 많은 사람들이 방북을 표명해나섰습니다. 그런데 정부가 과연 허락할는지… 저도 힘껏 나서긴 하겠지만 현 정부의 소갈머리를 봐선 신청을 다 수락하리라고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리희호는 처음 그의 말을 야당정치인으로서의 현 《정부》에 대한 어쩔수 없는 거부감이 많이 작용한것이라고 보았다.

아무리 옹졸한 《정권》이기로서니 온 이남땅이 추모열기로 끓고있는데 감히 무슨 명분으로 조문길을 막는단 말인가.

중대보도가 나간지 한시간만에 《다음》, 《네이버》 등 남조선의 5대인터네트싸이트들에 련이어 개설된 추모홈페지들에는 김정일장군님을 추모하고 그이의 업적을 칭송한 글이 12만건이나 올랐다.

전라도 광주 모악산에 안치된 전주 김씨 시조묘를 찾는 경향각지 조객들로 승용차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는 바람에 교통혼란이 일어났다고 한다. 분향소설치를 탄압당한 사람들이 거기로 가서 그이의 명복을 빈다는것이다.

그러나 박수원의 우려는 맞았다.

처음엔 신변안전이 걱정된다느니, 북에서 일체 외국대표단입국을 불허한 상태에서 신청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망신이라느니 하면서 《방북신청을 철회하라.》고 협박하던 《정부》는 북에서 야당, 여당, 정치인, 경제인 가림없이 다 받아들일것이며 직항로를 비롯한 모든 통로들을 다 열어놓는다는 통고가 오자 부옇게 되여가지고 어떻게 하나 못 가게 할 구실을 마련하느라 끙끙거렸다.

번거롭게 유가족이 다 가겠느냐면서 리희호자신과 아들 한명만 가고 나머지는 신변보장도 그래 저희네 사람들을 붙여주겠노라며 렴탐군들을 끼워놓고싶어하더니 웬일인지 갑자기 그마저 집어치웠다.

그리고 이번엔 방문일정과 형식, 절차를 공론한답시며 또 귀중한 하루를 흘려보냈다.

오늘 아침에야 《통일부》의 관계자가 리희호에게 전화를 걸어 인츰 떠날 준비를 갖추라고 하면서 북은 지금 경황이 없을텐데 가서 먹을것, 입을것 든든히 장만해가지고 떠나는게 좋을거라는 속에 없는 관심을 돌려주었다. 그러면서 조의를 간다고 그저 머리를 숙이지만 말고 전 대통령의 부인답게 존엄있게 처신하라고 은근히 그 무엇을 충동질하더니 마감엔 북에 가서 편찮은 일이 생기면 그땐 단호하게 돌아서야 한다면서 각별주의하라는 앞뒤없는 소리를 주어섬겼다.

마지못해 보내긴 하지만 가서 랭대를 받고 왔으면 하는 비뚤어진 심사가 빤히 들여다보였다.

28일날 영결식을 한다고 했는데 오늘이 벌써 며칠인가. 하루이틀만 더 놓치면 그야말로 늦어진 상제가 되고만다.

리희호는 지금 《통일부》에 간 아들 김홍일을 기다리는중이였다.

점심이 좀 지나 떠났으니 이젠 올 때가 넘었는데 왜 이리 늦어지는것인지. 이때 그의 속생각을 알아맞춘듯 아래층에서 손자 종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 아버님이 오셨습니다.》

방안에 들어서는 홍일의 안색을 보니 기분이 그닥 좋지 못했다. 떠날 때엔 어지간히 흥분했었는데…

《불을 켜거라.》

불이 켜지는 순간 홍일의 눈가에 맞은켠벽을 꽉 채운 한장의 대형사진이 안겨왔다. 김정일국방위원장님과 아버지가 평양비행장에서 만나 악수하시는 장면의 사진이였다. 홍일은 오후내껏 이 방에 있은 어머니의 심중이 가슴에 마쳐왔다.

그는 잠자코 창가로 다가가 삼륜차를 탁앞으로 밀어왔다.

《박의원님의 동행은 끝내 불허되고말았습니다. 정치인은 안된다는거죠.》

맞은켠안락의자에 앉으며 홍일이 내뱉은 소리였다.

《그는 개인자격으로 우리 일행을 따라가겠다고 했는데?》

《어쨌든 그는 현국회의원으로서 정치인이라는거죠. 박의원뿐이 아니예요. 민간단체들의 신청도 어느 하나 수용된게 없어요. 통일부 류장관이 직접 나와서 정부의 소신을 발표하던데 후에 따로 남은 나에게 큰 선심이나 베푼듯이 생색을 냅디다.》

《문목사네 가족은?》

그는 가까스로 눈길을 들어 아들 김홍일을 바라보았다.

《말도 마십쇼. 박용길녀사네는 어림도 없고 로무현재단의 신청도 거절당했는걸요. 민화협(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의 김덕룡대표가 나서서 권양숙녀사만은 꼭 보내야 한다며 로무현재단의 이름으로 신청한것이 집단적성격때문에 안된다면 이제라도 로대통령의 유가족에 국한시켜서라도 방북을 추진시켜야 하지 않느냐고 항의하던데 끝내 그마저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민주통합당이고 범민련이고 참여련대고 그저 한몽둥이로 거절당했습니다. 래일 또 굉장할겁니다. 재야계가 윽윽하니까요. 이자도 오면서 보니까 저기 서울대학교에 또 다른 현수막이 걸렸습니다.》

아침까지만도 《북은 슬프고 남은 서글프다》라는 글이 실려 슬픔조차 건늴수 없는 한겨레의 비극을 실감케 하던 곳이였다.

《거기에 벌써 〈길 비켜라, 북에 조문간다〉는 글이 나붙었습니다.

류장관이 나한테 생색을 낼만 하지요.》

김홍일은 쓰거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우리 말고 누구네가 가게 됐니?》

《현대의 현정은회장이 가는것 같습니다.》

《현대가?》

김정일위원장님과의 연고로 말하면 문목사네도 로 전대통령네도 현대그룹에 못지 않다.

현대가 간다면 로무현전대통령네가 못 갈리는 없는데… 또 연고로 본다면 문목사나 박용길녀사만큼 북과 절친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있었는가. 로태우시기 북을 방문하고 돌아온 문익환목사를 구속처분했을 때 그가 썼던 항소리유서가 생각났다.

《현대의 정회장은 북에 가도 일없는데 나를 가둔다는것은 북과 장사는 하되 통일은 말자는것이 아닌가.》…

리희호는 한숨을 내쉬였다.

《그 사람들 나름으론 방북허가기준이 있는것 같더군요.》

여전히 쓰거운 홍일의 소리였다.

《그래 무슨 기준이기에?》

《권양숙녀사네를 용인할수 없는것은 로대통령의 서거때 김정일국방위원장님의 조전만 왔을뿐 특사는 오지 않았다 이거죠. 류장관은 남쪽이라고 늘 퍼주기만 하겠냐고 합니다.》

퍼주기? 《실용정부》가 생겨서부터 정치계일각에서 입버릇처럼 쓰이는 소리다. 그러니 조의를 표하는데도 더 가고 덜 가고가 있고 크고 작고와 득실이 있단 말인가.

리희호는 기가 차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의 방북이 수락된것도 아버지의 서거때 북의 조문특사가 온 까닭이라는거냐?》

《그 소리지 뭐겠어요. 우리 집과 현회장네도 정부로서는 용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고 하면서 아버지때 북에서 조문특사가 온것을 특별히 감안해서 취해진 조치라고 류장관이 말합디다.》

리희호는 경악을 금할수 없었다.

이것이 실용을 떠드는 리명박식의 셈법인가. 아무리 장사군출신이라지만 적어도 《대통령》이 아닌가. 국익뿐아니라 민심을 대변해야 할 《대통령》이란 사람이 어찌 민족의 불행이 닥친 마당에서 위로 한마디라도 더 건너갈가봐 수판을 튕긴단 말인가.

슬프기 그지없었다.

이남민중을 대표한다는 《대통령》이 인간의 정과 민족의 미풍량속에 야박한 가격표를 붙인 장부책을 가지고있는것이다.

리희호의 눈앞에는 텔레비죤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화강석대돌을 피나게 긁으며 《장군님!》을 목놓아찾던 모습들… 이북의 동포들이 이걸 안다면 침을 뱉지 않을가.

그는 죄의식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더 큰 격분은 뒤에 있었다. 홍일이 아까부터 호흡이 빨라지는 리희호의 낯색을 살펴보며 주저주저하다가 말꼭지를 뗐다. 아무래도 뱉아놔야 할 말이였다.

《제가 늦어진건 말입니다. 기일문제때문에 옥신각신이 있었어요.》

종익이 또다시 울분을 토했다.

《기일이란건 또 뭡니까? 이제는 애도기간도 며칠 안 남았으니 래일이라도 당장 떠나야겠고 가서 영결식이야 참가해야겠지요? 뻔한 문제를 놓고 또 무슨 오그랑수를 피웁디까?》

홍일은 답답한듯 넥타이를 풀어던지였다.

《겨우 1박2일을 받았습니다. 26일부터 27일까지.》

겨우 하루밤? 그것도 28일이 영결식인데 영결식도 보지 않고 하루전에 돌아서라니?

《도대체 그 사람들이 왜 그런다는거냐? 이왕지사 보낼바에 왜 이틀밖에 줄수 없다는거냐?》

《북의 조문특사의 체류기일이 1박2일이였다는…》

방안에는 숨소리 하나 없었다. 잠자코 머리를 숙이고있던 리희호가 머리를 들었다. 그의 눈가에서 슬픔인지 분노인지 모를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너무하구나. 정말 너무해!)

이 제도에, 이 사회에 몸담그고있는 자신까지도 역겨워졌다. 이 현실에서 벗어나고싶었다. 문득 눈앞에 두분의 영상이 안겨왔다. 사진속의 두분은 환하게 웃고계셨다.

두분은 이 강토의 미래를 축복하시건만…

방안에는 오래도록 쓸쓸한 기운이 돌았다. 한참만에 리희호는 삼륜차를 밀어 창가로 다시 다가갔다. 저 멀리 남편이 묻혀있는 릉쪽의 하늘에 무거운 구름이 낮추 드리워있었다.

비운이 서린 하늘은 또 한바탕 눈을 퍼부으려는 모양이였다.

(여보, 이해 겨울은 몹시 추울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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