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회
5. 하늘도 감복하는 숭고한 도덕의리
60여년세월이 흘렀어도
가렬처절했던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37살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친 종군작가-김사량.
그에게는 그의 뒤를 이어 문필활동을 하는 손자가 있다.
그가 바로 중좌의
30대인 그는 할아버지에 대한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고있다.
짧았어도 천년, 만년을 산 사람들도 가지지 못한 인생의 영광을 다 받아안은 할아버지의 삶에 비쳐진 거룩한 광원에 대한 그의 추억은 혈육간의 단순한 감정의 축적이라기보다 그 어디에서 생의 출발을 떼였다 해도 조국과 인민을 위한 길에서 조금이라도 흔적을 남긴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생을 빛내주고 영생을 꽃펴주는
그가 《빛을 노래한 나의 할아버지-김사량》이라는 표제를 달고 오늘에도 그 련속편을 계속 쓰고있는 장편수기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며 애독되고있다.
《생이란 무엇인가. 살아숨쉬며 생존만 한다면 그것이 생인가. 이 땅에 뿌리를 둔 천태만상의 생들이 모여
어떤 생이 참다운 생이며 어떤 생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끝나지 않는 생으로 남아 길이 전해지는가.
김사량, 나의 할아버지이다.
작가였던 그를 공화국인민들은 물론 남조선과 해외의 동포들도 알고있다.
세상에 태여나 서른일곱해밖에 살지 못한 그가 세상을 떠난지도 어언 70여년이 지났지만 평양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영웅홀에 공화국영웅이 된 할아버지의 사진이 있다. 풍치수려한 석박산기슭 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에 생전의 자기 모습을 천연화강석에 새긴 할아버지가 살아있다.
너무도 젊은 나이에 붓을 놓은 작가였어도 할아버지는
오늘 공화국의 인민들은 물론 온 겨레는 또 한분의 희세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때로부터 70년이 지났지만 그를 공화국영웅으로, 온 세계가 아는 자폭종군작가로 영생의 언덕에 세워주신
손자의 심장의 웨침과도 같은 할아버지에 대한 장편수기에 숭고한 도덕의리로 이 땅에 펼쳐진 사랑과 정의 화원을 더더욱 아름답게 가꿔가시는
주체102(2013)년 7월 자정도 지난 어느날 밤이였다.
한대의 승용차가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건설장으로 미끄러지듯 달려오더니 기념탑앞에 이르러 서서히 멈춰섰다.
승용차문이 열리면서
황급히 달려온 일군들이 놀라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격해지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뒤말을 잇지 못하는 일군들을 둘러보시며
밤은 점점 깊어져 어느덧 새벽 2시를 가까이하였건만
이곳에 이르신
이때였다.
해방된 조국땅에서 낮과 밤이 따로 없는 창작활동을 벌리며 수많은 문예작품들을 세상에 내놓은 김사량은 전쟁이 일어나자 즉시 전선탄원을 제기하였다.
다음날 대위견장을 단 군복을 입은 그는 여러명의 종군기자, 종군작가들과 함께 신임장과 권총을 수여받고 즉시 분담된 전선지역으로 떠났다.
9월 어느날 마산근방의 어느한 고지점령을 위한 옹근 하루동안의 힘겨운 전투끝에 전사들과 함께 고지정점에 오른 김사량은 눈앞에 펼쳐진 남해를 보고 끓어오르는 격정을 금치못하며 유명한 종군기 《바다가 보인다》를 썼다.
하지만 이것이 유고작품으로 될줄은 그자신도 몰랐다.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김사량의 건강은 급기야 악화되였다. 심장병이 도져 눈을 뜰수 없게 얼굴이 붓고 숨이 차 말하기도 힘들어했다.
기침이 시작되면서 각혈까지 하였다.
어느날 혼수상태에서 깨여나 자기가 대오에 짐이 된다고 판단한 그는 어려운 결심을 하였다. 그곳에 떨어졌다가 병이 낫는 차제로 지리산인민유격대를 찾아갈 생각이였다.
대렬책임자에게 소지품과 종군수첩을 넘겨준 김사량은 동지들과 헤여지기에 앞서 조국에 보내는 마지막편지를 썼다.
지금까지의 후퇴과정과
《…조국과 인민, 민족앞에 한점 부끄럼없이 살것이다. 그길에서 생명이 필요된다면 기꺼이 바쳐
나의 종군수첩은 작가동맹에 전해다오. 승리를 위하여, 희망을 위하여.
1950년 10월 1일 김사량》
후날 김사량의 편지와 종군수첩은 작가동맹중앙위원회에 전달되였다.
하지만 그의 운명에 대해서는 오래동안 누구도 알수 없었다.
좀처럼 알려지지 않는 김사량의 생사여부를 두고 요설의 능수인 일본의 보수언론들은 한때 《김사량실종》설을 내돌리며 그가 복잡한 경력과 가정환경때문에 《조선의 내부사정으로》 매장되였다는 괴이한 론조를 퍼뜨리기도 하였다.
《전향》과 《변절》설을 퍼뜨리는 일부 편협한 사람들은 머리를 기웃거린적도 있었다.
하지만 김사량을 변함없이 믿으시고 그의 명예와 가족들을 끝까지 지켜주신분은
그후 김사량과 인연이 있는 관계자들에 의하여 그가 지리산인민유격대에 들어가 출판선전사업을 책임지고 투쟁하였다는것이 알려졌다.
김사량의 장렬한 최후에 대하여서는 남조선출판물에 실린 좌담회자료에 의하여 밝혀지게 되였다.
그에 의하면 해방전부터 김사량을 잘 알고있던 남조선의 한 작가가 좌담회에서 자기가 지리산빨찌산《토벌》에 참가했던 남조선군 장교에게 김사량과 같은 인재를 죽인것은 큰 실책이였다고 비난하자 그 장교가 김사량은 자기들이 죽인것이 아니라 본인이 자폭했다고 증언했던것이다.
이처럼 그의 최후는 영웅적이였다.
지리산의 산과 골짜기에 《토벌》의 총포성이 멎을 날이 없던 1951년 6월 어느날, 적들의 화염방사기가 뿜어대는 불길에 휩싸인 초막안에서 불에 그슬린 두 부상병이 서로 부축하며 걸어나왔다.
두사람은 가없이 펼쳐진 하늘을 쳐다보았다.
다음순간 《
그들중의 한사람이 김사량이였음은 후에 확인된 사실이다.
그는 이렇게 최후를 마치였다.
세계전쟁사나 인류문화사를 살펴보면 종군한 문예인들이 적지 않지만 자기의 최후가 영원히 알려질수 없는 정황에서 영웅적으로 자폭한 사람은 작가 김사량뿐이다. 그가 생의 마지막순간에 터친 심장의 웨침, 오랜 세월의 곡절많은 언덕을 넘어 조국에 전해진 사실은 결코 세월의 장막으로 없앨수 없고
너무도 애석하고 아쉬운 삶이였다.
그러나 누가 감히 그의 생이 끝났다고 말할수 있겠는가.
누가 그의 창작이 끝났다고 생각할수 있겠는가.…
깊은 감회속에 잠기셨던
새벽 2시, 삼라만상이 다 잠든 야밤삼경에 60여년전에 세상을 떠난 한 작가의 생애를 뜨겁게 추억하시며 동서고금에 없는 사랑과 의리의 숭고한 세계를 펼쳐가시는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영웅홀에 전시된 참전영웅들의 사진을 하나하나 정겹게 바라보시며 걸음을 옮기시는
2013년 6월 어느날이였다.
이 땅의 천만자식을 따사로운 사랑의 한품에 안으시여 삶을 지켜주시고 빛내여주시는
영웅칭호를 수여하는 모임에서 김사량의 후손이 터친 진정의 목소리는 큰 진폭으로 장내를 진감하며 사람들의 심장을 울렸다.
《저의 할아버지는 해방후 약 6년동안 창작활동을 한 평범한 작가로서 독자들속에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의 최후 역시 지리산속 어느 골짜기의 고립무원한 정황에서 마쳐진것으로 하여 오랜 세월 생사여부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희 일가친척들의 마음속 한구석은 늘 무거웠고 그것도 세월이 흐르고흘러서 이제는 없어지고 모습조차 기억에 남지 않았댔습니다.
그런데
너무도 감격이 극하여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오열을 터뜨리였으나 사람들은 그가 하려던 심장의 고백을 똑똑히 듣고있었다.
60여년세월이 흐른 뒤 수여된 공화국영웅칭호.
이는 혁명전사들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천품으로 지니신
과연 누가 그대의 삶이 37살에 끝났다고 말하랴.
× ×
일화
약상표는 대양과 대륙을 넘어
어느날 저녁
그때 기침을 연거퍼 하는 한 일군을 걱정어린 안색으로 바라보시던
대답을 들으신
이렇게 되여 한 평범한 일군의 건강을 위하여 복사된 여러장의 약상표가 대양과 대륙을 넘어 저 하늘을 날게 되였다.
또 하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