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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제3장 태양의 빛발 찬란해

1. 그 손길 꼭 잡고

조국통일의 날을 그리며


《해외교포를 〈민족의 파편〉으로 보는 견해는 1950년대 전반기에 일부 재일조선인운동에 관여한 사람들에 의하여 주장되였으며 그것은 재일조선인운동발전에서 부정적작용을 하였다.

민족은 형성된 다음 주권을 빼앗기거나 자기가 살던 지역에서 쫓겨날수 있다. 이 경우에도 민족의 성원들이 민족적특징을 체현하고있는 이상 엄연히 그 민족은 존재하고있는것이지 없어지는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해외교포를 〈민족의 파편〉으로 보는것은 자기 민족의 현실적존재를 부인하는 극단한 민족허무주의적인 견해이다.》

이것은 1950년대 재일조선인운동안에 대두하였던 해외교포에 대한 그릇된 견해, 재일조선인들을 민족과 분리된 존재, 민족의 운명과 련관이 없는 별개의 집단으로 여기는 부당하고 위험천만한 견해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그에 엄한 경종을 울리며 한덕수의장이 쓴 글의 한 대목이다.

그가 정당하게 지적했듯이 재일조선인들은 결코 민족이라는 운명집단에서 떨어져나간 파편이 아니라 민족과 뗄래야 뗄수없는 겨레붙이이고 민족의 피덩이이며 운명공동체의 한 부분이다. 언제나 겨레를 떠나 살수 없는 한피줄, 자기 민족, 자기 겨레와 희로애락을 같이할수밖에 없고 또 운명을 같이해야 하는것이 해외교포들의 생명리치이고 생활리치이다.

하기에 민족이 불행을 겪으면 해외교포들도 수난자의 운명을 피할수 없고 민족이 상처를 입으면 동포들도 그 아픔에 몸부림치는것이다.

해방후 미제의 남조선강점으로 우리 겨레가 겪는 분렬의 비극은 해외동포들의 가슴에도 고통과 불행을 가져다주고 동포사회에도 보이지 않는 38︒선을 그어놓았다. 이역땅에 끌려와 겪는 멸시와 차별의 설음은 피차일반이였지만 사상과 정견이 다르고 소속과 단체가 다르다는 리유로 반목하고 담을 쌓고 사는것이 동포사회의 실태였다.

이것을 누구보다 가슴아프게 여기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찌기 재일동포들은 다 같은 조선사람으로서 민족적으로 굳게 뭉쳐야 단합된 힘으로 자기들의 민족적권리와 리익을 지킬수 있으며 존엄있게 살아나갈수 있다고, 재일동포들이 조국을 통일하는데 적극 이바지하기 위해서도 민족적으로 단결하여야 한다고 간곡히 가르쳐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이 가르치심은 한덕수의장에게 있어서 동포사회의 단합을 이룩하고 조국통일에 이바지할수 있는 애국의 길을 밝혀준 명철한 가르침이였다.

하기에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조국통일사상과 로선을 높이 받들고 조국의 평화적통일독립을 위하여 헌신하는것을 총련강령의 중요조항으로 틀어쥐고 그 관철을 위한 투쟁을 앞장에서 이끌어나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56년 4월에 진행된 력사적인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에서 전 조선의 모든 애국적정당, 사회단체들과 민족적량심을 가진 개별적인사들을 망라한 통일전선을 결성하며 남북조선의 정당, 사회단체들과 애국적인사들이 련합하여 협상의 방법으로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할데 대한 공명정대한 조국통일방안을 제시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제시하신 북남협상과 평화통일방안은 북과 남, 해외의 전체 조선동포들속에서 커다란 지지와 공감을 불러일으켰으며 남조선정치무대에서도 거대한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1956년 5월에 있은 남조선《대통령》선거에서는 민족분렬을 반대하고 평화통일을 주장한 진보당 당수 조봉암이 각계의 광범한 지지속에 200만표이상의 찬성표를 획득하여 리승만통치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남조선정계를 크게 뒤흔들어놓았다. 바빠맞은 반통일세력은 조봉암을 북의 지령을 받은 《간첩》으로 몰아 처형하였지만 날로 높아가는 련북화해, 평화통일의 기운은 막을수 없었다. 그것이 홰불이 되여 전 남조선판도에 파급된 1960년 4월인민봉기의 불길은 반통일과 동족대결에 미쳐날뛰던 리승만《정권》에 종말을 선고하였던것이다.

온 겨레를 평화통일을 위한 정의로운 투쟁에로 불러주는 어버이수령님의 탁월한 조국통일방안에서 크나큰 신심과 용기를 받아안은 한덕수의장은 동포대중을 민족적단합과 통일위업실현을 위한 투쟁에로 적극 불러일으켰다. 동포들속에 들어가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북남협상과 조국통일방안의 정당성에 대하여 깊이 인식시키고 그 관철을 위한 대중적투쟁을 광범히 조직전개함으로써 온 동포사회가 통일열기로 끓어번지고 동포들이 사는 그 어디에서나 민족단합과 평화통일의 분위기가 세차게 고조되였다. 그 과정에 동포들속에서는 조국통일에 이바지하려는 애국지성이 높이 발휘되였을뿐 아니라 이전과는 달리 《민단》산하 동포들과의 협력사업도 활발히 진행되였다.

어느날 한덕수의장은 도꾜도 아라가와구에서 제화업에 종사하는 한 동포가 통일의 일념을 안고 《민단》계렬의 제화업자들과 적극적인 협력을 벌리고있다는 소식에 접하였다. 이에 대해 료해하는 과정에 한의장은 당시 《민단》이 겉으로는 총련조직에 대한 대립자세를 허물지 않고있지만 내부적으로는 리승만일당이 강행추진하고있는 《한일회담》문제, 《보안법》문제 등에 대한 립장을 둘러싸고 내부알륵과 갈등을 겪고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특히 《민단》산하 동포들은 상층부가 내세우는 《반공》, 《반총련》구호에 신물이 나하면서 우리 공화국의 평화통일방안에 무언의 지지와 공감을 표시하고있었다.

《민단》의 동포들속에서 민족단합과 통일열기를 높여주기 위하여 한덕수의장은 《동포들사이에서 38︒선을 없애자!》는 구호를 제시하고 계층과 경력의 차이를 초월하여 동포사회의 단합을 이룩하기 위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밀고나갔다.

1960년 3월에 들어서면서 남조선에서는 외세의존과 반통일, 파쑈독재를 일삼던 리승만《정권》을 반대하는 대중적인 봉기가 발단되였으며 투쟁의 불길은 반역의 아성인 경무대를 휘감으며 격렬하게 타올랐다.

신문과 방송을 통하여 시시각각으로 변화발전하는 봉기상황을 지켜보며 한의장은 모든 동포들이 4.19인민봉기에 떨쳐나선 남조선 각계층을 고무격려하고 사회의 민주화와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로 불러일으키기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벌려나가도록 하였다.

우선 4월인민봉기가 고조되는데 따라 총련중앙상임위원회의 명의로 미제의 막후조종밑에 진행되는 남조선에서의 《정, 부통령선거》를 규탄하며 남조선인민들의 애국투쟁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하였으며 잇달아 간또와 교또, 오사까 등 각 지역의 지부들에서 지지성명을 발표하고 우리 학교들에서 다양한 형식의 선전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하도록 하였다.

총련중앙은 남조선 각계층의 투쟁기세가 높아지는데 맞게 중앙위원회 제22차회의를 긴급히 소집하여 전체 재일동포들을 반파쑈민주화, 반미구국투쟁에로 총궐기시킬데 대한 방침을 토의결정하였다. 그후 중앙위원회 제30차회의에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통일전선사상을 구현하여 조국의 평화적통일을 위하여 나서는 사람이라면 정견 및 신앙의 차이, 재산의 유무, 과거여하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과 손잡고 나가며 《민단》과도 호상 상대방을 존중하고 불간섭의 원칙을 견지하며 조국통일을 위한 공동의 투쟁에서 서로 협조하고 단합하기 위하여 노력할데 대한 문제를 토의결정하였다.

회의후 한덕수의장은 《민단》과 그 영향하에 있는 동포들을 포함한 각계각층의 재일조선인들을 조국통일의 기치아래 단합시키기 위한 사업을 정력적으로 벌려나갔다. 총련의 명의로 지난시기 남남처럼 지어 원쑤처럼 지내던 《민단》과 한자리에 모여앉을데 대한 공개서한을 발표한데 이어 총련중앙대표들을 《민단》중앙본부에 파견하여 조국통일을 위한 공동보조를 취할데 대하여 론의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진지한 노력에 의하여 총련과 《민단》 및 중간층들사이의 접촉과 련계가 개별적으로 혹은 조직적으로 깊어지고 민족단합의 기운은 날을 따라 높아갔다.

1961년 1월 도꾜에서 해방후 처음으로 실현된 재일본조선언론출판인협회와 재일《한국》인기자단의 간담회에서는 《민족지상의 념원을 달성하기 위하여 힘을 합치자.》, 《먼저 일본에서 38°선을 없애고 조국의 평화통일에 이바지하자.》는 목소리가 높이 울려나왔으며 제2차 간담회를 거쳐 언론활동보조와 관련한 공동성명이 발표되였다. 경제인들도 그해 3월 1일에 조선독립투쟁기념간담회를 진행하고 4월에는 통일된 립장을 반영한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문화인들의 《조국평화통일, 남북문화교류촉진합동문화제》, 예술인들의 《연주의 밤》, 미술가들의 《조국의 평화통일, 남북문화교류촉진련합미술전》 등 다양한 협력교류활동들이 련이어 진행되였다. 류학동과 《한국》학생동맹간의 련계가 긴밀해지는 속에 청년학생단체들도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위하여 매진하자》, 《남북학생회담을 적극 지지한다》 등의 공동구호를 내걸고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북과 남, 해외에서 비등된 민족단합과 통일열기로 하여 막다른 처지에 이르게 되자 미국은 남조선사환군들을 사촉하여 5.16군사쿠데타에 의한 군사파쑈독재《정권》을 조작하고 활화산처럼 타번지는 우리 민족의 애국투쟁에 도전해나서는 한편 리승만《정권》시기에 아퀴를 짓지 못한 《한일회담》을 마무리하기 위한 책동에 본격적으로 달라붙었다.

《한일회담》이란 본질에 있어서 미, 일, 남조선의 침략적일체화를 실현하며 남조선을 미제와 일제의 2중식민지로 전락시키고 조선의 분렬을 영구화하는데 목적을 둔 현대판 《을사5조약》의 모의판이였다. 더우기 이 모의는 재일조선인들의 운명을 희롱하는 엄중한 사태를 몰아오는 전주곡으로 되고있었다.

이 엄중한 시기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최고인민회의 제3기 제3차회의 호소문을 통하여 전체 해내외동포들을 《한일회담》반대투쟁에로 불러일으키시였다.

이에 따라 한덕수의장은 총련과 재일동포들속에 민족의 자주권을 롱락하고 일본반동들의 재침책동에 발판을 깔아주는 《한일회담》의 매국적성격을 똑똑히 인식시키고 그것을 파탄시키기 위한 애국투쟁에로 동포들을 궐기시켰다. 총련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회의에서는 《한일회담》을 반대하고 나라의 평화적통일을 위하여 일떠선 남조선인민들의 애국적투쟁을 지지성원하며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촉진하기 위한 반미구국투쟁을 한층 강화할데 대하여 토의결정하였다. 제7기 제4차회의에서는 남조선과 일본이 내외여론의 한결같은 규탄과 항의를 무시하고 끝끝내 《한일조약》을 조작해낸 조건에서 그 매국문서의 불법무효성을 내외에 폭로하고 그것을 백지화하기 위한 투쟁을 강화할데 대하여서와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내외반동들의 남조선《국적》강요책동을 철저히 반대하며 그들의 공화국공민권과 제반 민주주의적민족권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투쟁할데 대한 결정을 만장의 일치로 채택하였다. 이와 함께 동포들이 사는 모든 곳에서 남조선통치배들과 일본반동들과의 범죄적결탁을 반대하는 투쟁을 군중집회를 비롯한 다양한 방법으로 힘있게 벌리도록 하였다.

내외반동세력의 침략기도가 로골화되고 민족분렬이 구조적으로 고정화될 위험이 짙어가던 시기에 총련이 거족적인 통일성업에 뛰여들어 이룩한 공적은 청사에 아로새겨져있다.

총련과 재일동포들이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투쟁에서 자기의 민족적본분을 다할수 있은것은 자기자신과 동포들의 운명을 조국과 민족의 운명과 하나로 결합시키고 용약 통일애국의 대하에 뛰여든 한덕수의장의 순결한 충성, 불타는 애국심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다.

한 작가는 화강석이 굳고 윤택이 나는것은 운모와 석영, 장석이 어울린 조화이고 인간이 억세고 빛나는것은 량심과 신념, 의지가 어울린 조화이라고 한바 있다.

참된 혁명가, 애국자들의 영웅적인 생의 리치를 비유적으로 밝힌 이 말에는 긍정되는 점이 적지 않다.

신념과 량심으로 하는것이 혁명이고 애국투쟁이다. 강요로써는 희생도 각오해야 하는 머나먼 혈로를 걸을수 없다.

조선혁명사에 이름을 남긴 유명무명의 투사, 애국자들은 다 비길데 없는 배짱군이였고 량심인들이였다.

한덕수의장은 수령과 조국에 대한 충성과 민족적사명감을 량심으로 간직하고 삶의 시작도 끝도 한본새로 살았다.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높으신 뜻과 의지를 지상의 명령으로, 조국의 신성한 부름으로 새겨안고 언제나 그에 충실한 애국충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조국통일사상과 민족대단결로선, 나라의 평화를 위한 전략전술들은 곧 그의 신념이고 의지였으며 그것이 그대로 총련의 활동방침으로 구체화되였다. 조국통일성전의 고비마다 총련과 재일동포들이 애국투쟁의 익측을 믿음직하게 지킬수 있은것은 한덕수의장이 위대한 수령님께서 밝혀주신 길에 침로를 정하고 거기서 한치의 탈선도 몰랐기때문이다.

조국통일을 위한 간고하고도 준엄한 투쟁의 나날 통일애국이 반통일분렬주의를 압도하며 승승장구하는 속에 1970년대가 밝아왔다.

우리 공화국의 확고한 통일의지에 의하여 1972년 7월 4일 북과 남이 조국통일의 근본원칙을 내외에 엄숙히 천명한 7.4공동성명이 발표되였다. 그것은 통일운동의 앞길에 서광을 비쳐준 휘황한 등대였다.

어버이수령님의 과학적이고 현실적인 조국통일사상과 숭고한 애국의지의 결정체인 7.4공동성명을 끓어오르는 격정속에 받아안은 한덕수의장은 즉시 의장담화와 중앙상임위원회 성명을 발표하여 그에 전폭적인 지지찬동을 표명하였으며 《민단》중앙본부에 공동성명을 지지실현하기 위한 운동을 어깨겯고 벌리며 북남적십자단체간의 본회담을 열렬히 지지하는 대회를 공동으로 가질데 대하여 거듭 제의하였다.

일본 각지의 총련조직에서는 7.4공동성명을 지지하는 대회와 모임들을 성대하게 벌리도록 구체적인 대책을 강구하였다.

이러한 행사들을 계기로 동포들속에서는 《60만재일동포들은 38︒선의 장벽을 없애고 민족적으로 굳게 단결하자.》는 목소리가 높이 울려나왔다.

동포사회에서 용암처럼 분출하는 통일의지를 더욱 격앙시키고 7.4공동성명에 대한 국제적인 지지분위기를 높이기 위해 한덕수의장은 일본의 각계층 인사들과의 접촉과 교류를 적극화하면서 지지자, 동정자대렬을 급속히 확대해나갔다.

7.4공동성명이 발표된 후 일본사회당, 공명당, 민사당을 비롯한 각 정당들과 사회단체, 로동조합 등 여러 정당, 단체는 《7.4남북공동성명과 조선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지지하며 일조우호를 강화하기 위한 각계 대표들의 모임》을 가지고 조선통일지지운동을 폭넓게 벌렸으며 8월에는 일본 각계의 대표적인 인사들이 결집하여 《남북공동성명을 강력히 지지하는 발기인회》를 뭇고 지지운동을 구체화하여나갔다.

한덕수의장의 불같은 노력과 눈부신 활약으로 하여 우리 동포들이 사는 일본 각지는 물론 일본의 정계와 사회계에서도 우리 당의 조국통일사상과 로선에 대한 옳은 인식과 지지여론이 확산되였으며 그것은 분렬주의세력을 고립약화시키고 조국통일에 유리한 분위기를 마련하는데 이바지하게 되였다.

박정희일당이 7.4공동성명을 배신하고 《두개 조선》조작을 선언한 《6.23특별성명》발표놀음을 벌렸을 때 총련과 《민단》을 불문하고 동포사회전반에서 《특별성명》을 반대하고 우리의 조국통일5대방침을 지지하는 운동이 힘있게 벌어진것은 위대한 수령님의 조국통일령도를 받들려는 한덕수의장의 애국헌신을 실증해주고있다.

총련은 비록 조국과 멀리 떨어져있어도 언제나 조국과 숨결을 같이하고 걸음을 같이하며 운명을 같이한 조국의 한 부분이였고 분렬된 조국의 아픔을 가시기 위한 힘겨운 투쟁에서 자기의 전호를 믿음직하게 지켜선 전위부대였다.

바다건너 이역에서 애국의 전위부대를 진두에서 이끈 해외교포운동의 명망높은 활동가는 바로 한덕수 총련중앙상임위원회 의장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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