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3 회
제 8 장
12
어느 간호부의 동정의 손길이 갖다놓은 창턱의 유리꽃병에서 벗꽃(사꾸라꽃)이 연분홍으로 환히 피였다. 창턱밑의 방열기에서는 증기가 새는 찌-찌르륵… 하는 기이한 소리가 계속 흘러나오고 훗훗한 방안에는 향긋한 꽃향기가 떠돌았다.
병상에 누워있는 구니모도는 창턱에 피여난 벗꽃에 자기 운명과 관련한 숱한 의미를 부여하고 명상에 젖어 그것을 바라보군 하였다. 그러느라면 그 꽃이 창밖의 나무가지들에 하얗게 피여난 눈꽃과 한데 어울려져 온 세상이 벗꽃천지로 변하는듯 한 환각이 문득문득 일군하였다.
그날 아침 창밖에 내내 피여있던 환상적인 벗꽃천지가 하얗게 흩날려내리자 꽃병의 벗꽃들이 한잎두잎 떨어져내리며 애달픈 시정을 불러일으키다가 일순에 화라락 흩어져내렸다.
구니모도는 가슴이 허물어져내리는듯 하여 벌떡 일어나앉았다가 머리를 베개에 맥없이 던지고는 물기가 번들번들한 눈을 디룩거렸다. 꽃병에 앙상한 벗나무가지, 거먼 마루바닥에 점점이 흩어진 꽃잎들… 아, 피자 지는것이 꽃의 운명인가! 떨어져 흩어진 꽃잎들은 뭇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히기마련이다!
지는 꽃, 지는 해, 지는 인생을 막을 힘이 없는것이 우주의 섭리라면 《천황》페하께서도… 나도 이 섭리에 순응해야 한단 말인가? 밖에서는 무서운 추위가 계속됐지만 구니모도는 아늑한 입원실의 침대에 누워 오래동안 이러한 상념에 젖어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있었다.
며칠째 그를 짐승처럼 발광케 한 복통은 몇시간전에 잦아들었다. 그러나 의사들이 자기를 속이고있지 않는가 하는 새로운 불쾌감이 가슴한구석으로 흘러들어왔다.
의사들은 처음부터 저산성위궤양이라고 했다. 그러나 구니모도는 자기를 똑바로 보지 못하는 그들의 이상스러운 눈길이며 벌써 저세상사람으로 치부하는것 같은 행동거지들에서 모든것을 느꼈다. 의사들의 말과는 달리 무서운 병마가 배에 주둥이를 틀어박고 자기 생명을 파먹고있는것이 틀림없다. 그는 그것이 무엇이라는것을 어렴풋이 알고있었으나 입밖에 내여 물어보기가 무서웠다. 의사들도 자기를 속이고 자기자신도 자기 기만에서 위안을 얻고있는것이다. 그래서 불쾌하고 울적하였다.
구니모도는 머리를 움직여 베개우에 반듯이 놓았다. 그리고는 복도로 지나가는 발걸음소리들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 누구 하나 걸음을 멈추지 않고 모두 조용조용 지나간다. 막역한 동료라고는 별로 없었지만 있다는 부하들도 찾아오기를 꺼려하는것 같다. 의사들도 용건만 보고 피해달아난다. 겁쟁이들! 비렬한들!… 온 세상을 저주하고싶어졌다.
이윽고 고요를 흔들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실내화를 끄는 사륵사륵하는 소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위생모와 마스크, 위생복으로 온몸을 덮어 머루알같이 까만 눈만 보이는 간호부가 곁에 와 섰다.
구니모도는 《나는 아직 살아있소.》 하고 속으로 뇌까리며 쓰거운 비양조의 웃음을 머금고 그를 쳐다봤다.
간호부는 봉합편지를 머리맡에 놓고 얼른 나가버렸다.
봉투의 뒤면에는 사또 요시나리라는 이름자가 적혀있었다.
(이자는 두달전에 왕청전선에서 전사했다더니?…)
각하!
저는 치욕을 당한 황군장교로서
방략수립단위의 사고를 하지 말라던 각하의 충고를 어기고 하고싶은 말을 다 적으오니 용서하기 바랍니다. …
구니모도는 이런 첫 구절을 읽고 말라터진 두툼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건방진 자식, 저 혼자 죽는가?…)
각하!
황군은 패하였습니다. 오늘은 왕청전선에서, 래일은 북지전선에서도 패할것입니다. 패할것입니다!
우리는 왜 패배하였는가? 우리는 왜 죽는가? 저의 부하인 한 장교가 야간정찰중 농가에 매복하였던 조선농민의 도끼에 뒤통수를 찍혀 즉사한 일이 있습니다. 그 며칠후 공산군은 아군의 배후에 돌입하여 왕청시가를 공격하여 점령하였습니다. 우리는 총퇴각을 명령받았습니다.
아군장교의 뒤통수로 날아든 도끼는 이 전쟁의 특징을 암시하는 하나의 상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 죽음을 하나의 우연적인 재해로 여기고 인차 망각해버렸습니다. 자기의 뜻대로 안되는 모든것을 우연적인것으로 밀어버리는 그 저주맞을 사고방법때문에 황군수뇌부는 공산군의 전략을 파악할수 없었습니다. 사색에 태만한 군수뇌부때문에 우리는 죽습니다.
각하!
아십니까? 소화8년, 지난겨울 아군 대무력이 두만강연안 적색근거지들에 대한 포위를 완성하였을 때 그안에 공산군병력이 얼마나 포진되여있었는지 아십니까. 매 근거지에 반일자위대라는 반군사조직까지 합하여 불과 몇개 중대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알았을 때 바위를 내리쳐 군도를 꺾어버리고싶었습니다.
어떻게 되여 공산군은 그 렬세한 력량으로 황군에게 완강하게 저항할수 있었으며 주동적인 공세를 반복 취하면서 우리를 이런 파국에로 몰아넣었는가?
아군이 적색근거지의 좁은 구역에 포위환을 둘러치고있을 때 우리 배후의 광활한 지역에서는
각하는 이것을 알았습니까?
저는 알게 됐습니다. 여러가지 경로를 통하여 알게 되였습니다.
그것은 거목의 큰 뿌리와 잔뿌리들처럼 도시와 공장지구, 읍들과 산간마을, 어촌, 광산막장에까지 뻗어내리고있습니다.
언제 이렇게 되였는가? 각하는
사방으로 뻗은 이 진출방향만 봐도 많은것을 상상할수 있습니다. 그 진군이 황군을 군사적으로 공격하자는데만 목적이 있지 않았다는것이 지금에는 명백해졌습니다. 장학량군벌에서 반변해나간 구국군두령들도 그들과의 련합을 형성하였으니 하물며 조선인들이야 더 말할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황군수뇌부는 어떻게 타산하였는가? 공산근거지의 방어종심이 30km도 안된다. 1주일이면 소탕할수 있다. 하하하… 바보같은 타산입니다. 그들의 종심은 무궁합니다. 황군수뇌부의 굳어진 두뇌들은 그 무궁한 종심을 보지 못했습니다.
치안당국자들은 지금에야 경악하여 그 종심을 이룬 조직선들을 드러내자고 동분서주합니다. 그러나 이미 늦었습니다. 잘못 건드리면 조선인들속에 저항의식만 격증시켜 그 조직선들은 더 깊은 지하로 들어가며 걷잡을수 없이 뻗어나갑니다. 인체에 생긴 암조직처럼 메스를 잘못 대면 확산되여갑니다.
각하, 저는 이 최후의 순간 각하와의 첫 상봉을 회고합니다. 룡정제국령사관에서였지요. 그때 각하는 한 문필가의 글때문에 몹시 불쾌해했습니다. 그 문필가는 갓 생긴 적색근거지를 제국의 암으로 묘사했던것입니다. 페하의 시종무관 가와기시소장을 맞으러 가던 그 잊지 못할 밤마차에서도 각하는 문필가의 신경쇠약증을 비난하며 불쾌감을 참지 못해했습니다. …
입원실천장을 들었다놓으며 단말마의 함성이 터져올랐다. 모포가 날아나고 베개가 튀여올랐다. 구니모도는 털이 부르르한 다리를 드러내고 맹수처럼 뛰여일어나 문을 차고 복도로 뛰여나갔다. 때마침 문앞을 지나가던 간호부가 약병들을 떨구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쳐갔다. 마주 걸어오던 안경쟁이담당의사가 얼굴이 백지장처럼 되여 뒤걸음질치며 손에 들었던 청진기를 떨어뜨렸다.
구니모도는 눈에서 불찌를 펄펄 날리며 그에게 덮쳐들어 멱살을 움켜잡고 마구 휘둘러댔다. 의사의 비명과 환자의 함성에 병원이 진감하였다. 온 병원이 발칵 뒤집혀졌다. 복도와 층계를 가득 채우며 의사와 간호부들이 밀치고 닥치며 달려내려왔다.
구니모도는 얼굴이 흙빛이 되여 담당의사의 머리를 복도벽에 짓쫗아대며 입거품을 날리면서 고래고래 소리쳤다.
《나를 속였지? 속였지? 나는 암이다.… 암이다!… 나는 암이다.… 살려내!… 살려내라!》
그리고는 복도바닥에 쿵 하고 둔중하게 굴러떨어졌다. 죽어버린것이다.
저녁 사고심의에서 누가 환자에게 병명을 대주었는가고 엄격히 추궁되였을 때 안경쟁이담당의사는 환자의 침대밑에서 주었다는 한장의 편지를 제시하며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 편지가 환자에게 그 어떤 련상작용을 일으킨것 같습니다.》
구니모도의 시체는 륙군장의조례에 따라 즉시 화장가마로 실려가 석회질분말로 되여 작은 목함속에 포장된 다음 땅속에 깊숙이 묻혔다.
관동군사령부는 직속병원에서 생긴 의미심장하고 불길하기 짝이 없는 이 사건을 여러가지 고려로 엄비에 붙이기로 하고 대본영에는 고인의 명예를 생각하여 순사라고 보고하였으며 유가족들에게는 경건한 조의를 표하였다.
×
봄이 왔다.
꽃샘을 하던 쌀쌀한 추위가 숙어들자 전쟁의 불길이 휩쓸고지나가 시꺼멓게 얼룩진 두만강연안 산발들에는 훈훈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숯으로 되여 시꺼멓게 서있는 나무숲들과 재무지들밑에서는 파릇파릇한 싹들이 창공을 향하여 머리를 쳐들었다. 골짜기들에서 달려내려오는 봄물의 기운찬 흐름소리는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대기를 뒤흔들고 양지바른 산기슭과 벼랑턱이며 산봉우리들의 밑에는 렬사들의 피흔적인듯 진달래가 점점이 수놓아졌다.
여느해보다 일찌기 날아든 계절조들은 찬란하게 쏟아져내리는 해빛속을 누비며 아득히 날아올라가 모래알처럼 아물거리다가는 곤두박혀 내려와서 푸른 봄이 설레이는 대지우를 스칠듯이 날며 고운 목청으로 노래를 불렀다. 새는 제 혼자 혁명의 새봄을 한껏 누리는듯 하였다.
모든 근거지들에서는 겨우내 계속해온 복구사업이 다 끝났다. 겨울추위와 굶주림을 이겨내며 허리를 치는 눈속을 헤치고 산으로 올라가 통나무를 찍어 끌어내려다가 다듬어서 재무지만 남은 마을에 집들을 일으켜세우기란 헐한 일이 아니였다.
변변한 옷과 신발도 없는데다가 아무것으로나 배를 채워야 힘을 쓰겠는데 낟알이 없었다. 유격대가 전투에서 로획해오는 쌀과 간도의 곡창이라고 하는 라자구쪽에서 구해들이는 식량이나 국내에서 원호물자로 들여보내는 곡물들로 그 많은 근거지인민들을 먹여살리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게다가 어떤 마을에는 열병까지 돌았다.
과연 무슨 힘이 그들로 하여금 복구의 도끼소리를 그토록 힘차게 울리게 하였는가? 세끼, 네끼를 굶고도 대들보감을 씽씽 메나르는 아바이도, 잔등살이 벌겋게 드러난 홑옷을 입고도 땀을 뻘뻘 흘리며 톱질을 하는 청년도 그 까닭을 몰랐다.
큰 전쟁을 치르고나니 어느 마을에나 이야기풍년이 들었다. 사람들은 도끼질을 하고 자귀질을 하고 기둥을 세워놓고 땀을 들이면서도 근거지방위전때 누구는 어떻게 잘 싸웠고 누구는 어떻게 죽을 고비를 넘겼고 누구는 어떻게 꾀를 써서 왜놈을 때려잡았는가를 이야기하며 은근히 제자랑도 하고 남을 놀려도 주며 웃어대는가 하면 왜놈들이 도망치던 흉내를 내면서 배를 그러안고 돌아갔다. 그러고나면 신이 나서 허기증도 잊게 되고 팔뚝에 새 기운이 꿈틀거려 다시 도끼를 휘둘러대군 하였다.
그런 이야기들중에는 김진세와 마종삼의 《돌대포》이야기, 보금이 더운 밥함지를 이고 불길속을 뛰여다닌 이야기, 림성실이 장의날에 김중권의 호주머니에 담배쌈지를 넣어주던 이야기, 오풍헌이 왜놈 14놈을 나무단처럼 묶어놓은 이야기, 김진세가 왕청시가까지 잡혀갔다가 구원된 이야기… 등 별의별 이야기들이 다 있었다. 여러번 입에 오르고 뭇사람들의 입을 거치는 과정에 농민들 특유의 해학으로 채색된 그 인민영웅서사시의 절정은
그리고 그때 도망쳐나가지 못하고 산골짜기들에서 얼어죽은 놈들을 보면 거개가 두손으로 사타구니를 그러잡은채로 눈에 묻혀 굳어졌는데 그것은 이런 싸움을 계속하다가는 제놈종자들의 씨가 마를것 같은 걱정을 마지막순간에 했다는 증거라고들 하였다.
이래서 웃고 저래서 떠들썩해지다나니 일판은 언제나 흥성거리고 사람들은 기운들이 부쩍부쩍 나서 뛰여다녔다. 승리의 통쾌감에서 오는 해학으로 충만된 그들의 이야기들에는 범속한데도 없지 않았지만 가슴가슴들에는
그 자부심과 긍지감은 어느덧 자귀날과 대패날에도 번뜩이여 기둥 하나를 깎아도 더 미끈하게, 문틀 하나를 세워도 더 번듯하게, 주추돌 하나를 앉혀도 더 든든하게 앉히게 되였다. 우리는 이제는 남에게 업수임을 당하며 아무렇게나 허술하게 살아갈 민족이 아니라는 자각이 나날이 그들의 가슴에서 북받쳐올랐다.
그들은 허기증에 시달려 아침이 되면 신음소리를 내며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방위전의 나날에 제 살붙이들을 잃은 비감이 밤마다 가슴에서 울었으나 일터에 나와서는 웃으며 노래를 부르며 일손들을 다그쳤다. 그들은 왜놈들의 목을 짓누르는 마음으로 기둥뿌리를 박고 억천만번 죽더라도 일제통치를 때려부시고 내 나라를 찾는다는 결심으로 벽을 쌓아올리고 조선민족의 기개를 만방에 떨치리라는 배심으로 지붕들을 덮었다.
새들이 날아예는 푸르른 봄하늘밑에 이렇게 일떠선 모든 근거지들의 집들과 학교와 기관건물과 유격대병실, 무기수리소, 출판소, 병원건물들은 말그대로
근거지의 마을들이 이렇게 꾸려졌을 때 그 복구의 나날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며 다듬어지고 보태진 방위전의 이야기들도 감명깊은 인민영웅서사시로 엮어져 세상에 널리 퍼졌다. 그것이 국내인민들속에 전해지자 그들의 념원에서 피여난 환상까지 가미되여
새봄이 잡혀 무서운 추위와 굶주림속에서 방위전의 시련을 이겨낸 사람들의 얼굴에서 껍질이 벗겨지고 머리칼과 눈섭이 부슬부슬 빠질 때 병석에까지 드셨던
그러나 그런 내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으시고 이 봄에 튼튼히 다져진 근거지에 의거하여 혁명을 보다 새로운 높이에로 앙양시키기 위하여 유격대지휘관들과 당, 공청, 부녀회 등 각 대중단체 일군들의 강습을 광범히 조직하시는 한편 만주와 국내의 광활한 대지에 혁명의 씨앗을 뿌리기 위하여 수많은 정치공작원들을 파견하시였다.
그리하여 김창억은 소대장으로 제발되여 북만으로 가게 되고 최형준은 연길쪽 지하조직에로, 림성실은 온성반유격구에 각각 파견되게 되였다.
그날
십리평 앞벌의 밭들에는 사람들이 하얗게 널려서 밭갈이도 하고 씨도 뿌렸다. 사람들은 피로써 지켜낸 땅에 다시 씨를 뿌리게 되니 감격이 새로왔고 기쁨이 더 커 큰 경사가 난듯 흥성거리며 일손을 부지런히 놀렸다. 여기저기에서 소들의 영각소리가 울리고 흥겨운 농부가의 가락까지 들려왔다. 길이며 밭지경에서는 아지랑이가 아물아물 피여오르고 고르게 갈아엎은 사래긴 밭이랑들에서는 김이 문문 피여올랐다.
군복저고리를 벗으신
리재명은
흙을 툭툭 차며
뜨거운 감회에 잠긴 리재명이 다시 흙을 툭툭 차나가는데
그쪽 길가의 느티나무밑에 검정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녀자가 자그마한 보꾸레미를 안고 서서 이쪽을 바라보다가는 머리를 소곳이 숙이고있었는데 무엇인가를 망설이는듯 하였다.
얼마후 밭으로 돌아오신
《림성실동무가 아닙니까?》 하고 리재명이 물었다.
《…》
《성실동무야 아침에 떠난다고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까? 무슨 일이 생긴게지요?》 하고 리재명은 다시 물었다.
《성실동무는… 솔골로 해서 온성으로 건너가기로 되였더랬는데 사포여울쪽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제의하러 왔소.》
《예? 그쪽길이 좀 안전한가요?》
《아, 참 동무는 잊었는가요? 사포여울 말입니다.… 원호물자를 도강시킨 두만강여울이 있지 않습니까? 그우에 김중권동무가 최후를 마친 자리가 있습니다.》
《아!…》
리재명은 걸음을 멈추었다. 두만강가에 저고리고름을 나붓기며 서서 눈물을 머금고 애인의 혁명정신이 흐르는 강물에 맹세를 다질 림성실의 모습이 뚜렷이 떠올랐다.
아,
이날 정오 대왕청하의 물결우에서는 해빛이 눈부시게 부서졌다. 성림이 끌어온
말은 너무도 시원하고 상쾌해져 푸른 하늘을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큰소리로 울어대였다.
최형준은 웬일인지 심각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잔디풀이 푸릇푸릇한 기슭을 천천히 오르내리고있었다.
손을 다 씻으신
어디를 보나 봄빛이 짙어가고 봄의 훈향이 차넘치였다.
리재명이 환한 얼굴로 최형준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여보 시인동무! 이런 날에 한마디 읊어볼 생각이 없소? 동무는 명색이 시인이라면서 여태 시를 썼다거나 읊은 일이 있소? 어떻게 된노릇이요?》
그의 머리우에 드리운 수양버들실가지들이 바람결에 고요히 흐느적이였다.
봄이 왔노라
겨울이 가고 봄이 왔노라
가냘픈 한 시인 두팔 활짝 벌려
이 봄을 안고 눈물짓노라
기쁨에 겨워 행복에 겨워…
눈물짓노라 이 봄에 안겨
겨울에 깊이 머리숙여 감사하며…
초연 굶주림 피 절망과 죽음을 박차고
선조들이 떨기만 했던 왜적을 때려엎은 겨울
때려엎고 민족의 기개를 떨친 혈전의 겨울에
준엄한 인민전쟁의 그 겨울에…
…
수양버들실가지들 흐느적이는 밑에서
봄에 취한 가냘픈 시인
온 심혼을 담아 웨치고싶노라
우리에게
이 봄에
진리의
사랑의
아
이 봄을 안고 조국으로 가자
이 봄을 조국삼천리에 활짝 꽃피우자…
흐느적이는 수양버들실가지들밑에 즉흥시의 여운이 서려도는데 리성림이 군마를 끌고 물속에서 첨버덩첨버덩 뛰여나왔다.
말다리밑에서 물이 철썩철썩 튀여올랐다.
야무진 종소리가 땡- 땡- 울려오며 파란 공간에 파문을 그리는듯 하였다.
《아차, 큰일날번 했군!》
《글쎄말이요. 허허허…》
《좋은 시를 들려주어 정말 고맙소! 구체적인 의견은 저녁에 좀 나누어봅시다.… 그리고 내가 학교에서 일을 다 보고 떠난 다음에 꼭 오오! 이런 날에 새별눈이 흐려져서야 되겠소?》
버드나무밑에 서서
(아, 얼마나 좋은가! 그래… 그렇지.… 최동무가 읊은 시대로 조국이 광복되면
창억이는 대왕청하의 시원한 물속에 선채로 이마에 손채양을 붙이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득히 높은 푸른 하늘로 기러기떼들이 두줄을 지어 유유히 날아들어오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