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6 회
제 8 장
5
유격대원들이 김중권이를 메고 마촌에 도착하였을 때 림성실을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김중권이와 림성실의 관계는 사람들속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때문이다.
구정부로 달려온 사람들도 고인에게 영결의 묵상을 하고 나오다가는 그가 해놓은 일의 크기를 말해주듯 마당에 산더미같이 쌓인 원호물자의 무지를 쳐다보며 눈물에 젖어 혀를 차거나 무거운 한숨을 짓기만 하였다.
그리하여 그 원호물자들을 근거지로 들여보내기 위해 목숨바친 젊은 투사는 남모르는 열정으로 사모해온 약혼녀의 눈물에 가슴도 적셔보지 못한채 영별의 시각을 기다리며 누워있었다.
현관과 사무실에 빼곡이 들어선 사람들은 뒤로 물러서며
김중권의 몸에는 그때까지 붉은 기발이 덮여있었다. 비바람에 씻겨 색이 날고 얼룩이 진 기발이였다. 그것은 셋째섬을 지나올 때 그곳 일군들이 자기네 촌정부의 지붕에서 나붓기는 기발을 내려 덮어준것이다.
그러시고는 김중권의 얼굴에 기폭을 도로 덮어주시고 그옆에 머리를 떨구고 오래동안 움직임없이 앉아계시였다.
시간의 흐름조차 멎는듯 하였다.
《성실이가 왜 보이지 않소?》
옆에 서있던 리재명이 그 말씀에 비분이 울컥 터져올라 머리를 외로 돌리며 눈을 껌뻑거렸다. 굵은 눈물방울들이 경련이 이는 볼이며 옷자락에 후두둑 뿌려졌다. 그는 바지주머니에서 누런 손수건을 얼른 꺼내 눈이며 코밑을 훔치고는 벌겋게 피진 눈으로
《좀 말씀드릴 일이 있어서… 성실동무는 지금 서대포에 나가있습니다.》
《왜 거기 나가있습니까?》
《아동단학교 아이들 겨울옷 만드는 일에 부녀회원들을 동원하느라고… 당장 눈이 오겠기에.》
《그 동무한테 알렸습니까?》
《너무 기막혀 알리지도 못했습니다. 달려와도 기막혀서 어떻게 알려줍니까…》
《오면… 저한테 보내십시오!》
뒤울안에서 나오신
방안에 들어가 어찌할바를 모르고 서성거리시던
사진속의 김중권이와 림성실은 머리를 가지런히 하고 앉아있다. 림성실은 얼굴에 밝은 미소를 활짝 피웠고 김중권은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졌지만 한쪽입귀에 보일듯말듯 한 미소가 어려있다.
《중권이!》
오후에 입술이 새까맣게 탄 전령병이 달려들어와 부녀회장동무가 온다고 알리였다.
림성실은 새로 지은
그는 말없이 통버선을 아래목에 놓고는 어리둥절해진 눈으로
림성실은 자기 운명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것을 막연하게 느끼는것 같았다.
《오다가 누구를 만났소?》
《리재명회장동무를 만났는데 부르신다고 해서…》
《또 누구를 만났소?》
《창억동무를 만났습니다. 먼발치에서 인사를 하고는 어째 그러는지 피하는것 같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성실동무, 혁명투쟁과정에 있을수도 있는 일이라고 말들은 하지만 막상 당해놓고보니 어떻게 말했으면 좋겠는지… 아, 기막힌 일이요.…》
림성실은 놀란 눈으로
《나도 믿어지지 않소. 이게 거짓이고 사실이 아니였으면 얼마나 좋겠소. 그런데… 김중권동무는 지금 저 구정부사무실에 누워있단 말이요!》
림성실은 아래입술을 깨물고 어딘가 먼 앞쪽을 뚫어지게 바라보는것 같았다. 그의 속눈섭에 이슬이 방울방울 맺혔다. 그것은 피할길 없는 불행을 막아보려는 마지막저항의 눈물이였다.
《두만강에서… 어제밤 그렇게 됐소.…》
림성실은 저고리고름을 쥐여 눈을 가리우며 소리없이 울었다.
《국내 혁명조직들에서도… 김동무를 오래오래 잊지 못할게요. 성실이… 여기서 숨을 좀 돌리오. 좀 있다가 내가 동무해줄테니 같이 구정부로, 김중권동무한데로 가자구.》
성림이 밖에 내다 거풍을 시킨듯한 이불을 안고 들어와서 웃목에 내려놓고 나가려다가 림성실쪽을 돌아보며 울먹이였다.
새 이불이다. 언제인가 림성실이
림성실은 의아한 눈으로 성림이를 쳐다보았다. 어린 전령병은 외면하여 벽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조용히 말했다.
전령병이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휘뿌리며 달려나갔다.
그가 나간 다음 이불을 쓸어만져보던 림성실은 약혼사진을 찍도록 배려하시고
마당가를 거니시던
불에 시꺼멓게 탄 먼 산발들에서는 광풍이 휘몰아치는지 재가루가 뿌옇게 날아올라 하늘가를 덮었다. 어딘가 먼 서남방향에서는 포성이 구궁- 구궁- 울려왔다.
저 아래 소왕청하우의 하늘에서는 메새 한마리가 바람속을 날아돌고있었다.
한동안이 지나서 림성실이 방에서 나왔다. 그는 머리를 단정하게 다듬었고 옷매무시도 산뜻하게 바로잡았다. 얼굴은 피기가 가셔져 해쓱해지고 눈은 약간 부어보였다.
《아아, 조심조심!》
《자, 놓고!》
장룡산이 캄캄하게 질린 얼굴로
림성실은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여
리재명이 림성실의쪽을 흘깃 돌아보는것 같더니 눈물이 가득 어린 눈으로
절통한 비감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한흥권이 꽁무니에서 쇠마치를 빼들자 손자귀를 쥔 오풍헌이도 덧저고리주머니에서 대못을 꺼내 입귀에 물었다.
이때
《잠간만!》
어느 사이에 달려갔는지 림성실이 쇠마치를 든 한흥권의 앞에 막아서서 절절하게 부탁하였다.
《좀 기다려주세요.》
그리고는 사람들을 헤집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림성실은 5분도 못되여 돌아왔다.
가슴앞에 모아쥔 그의 두손에는 푸른 공단천으로 기운 담배쌈지가 들려있었다. 쌈지에는 진달래꽃 두송이가 빨갛게 피였다. 이번에 김중권이 온성에서 돌아오면 주자고 남몰래 기워둔것이다.
림성실은 관으로 천천히 다가가 절을 하듯 허리를 굽히고 김중권의 얼굴을 정겹게 들여다보다가 단추들이 바로 채워졌는가 손으로 더듬어보고 옷깃을 쓸어만져 잘 여미여준 다음 담배쌈지를 오른쪽 호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성실이는 말없는 행동으로써 자기가 그의 애인이였으며 안해로 될 녀성이였다는것을 세상에 자랑하는듯 하였다.
문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던 박현숙이와 윤보금이 손으로 입을 싸쥐고 흐느껴울었다.
리재명이 성실이앞으로 다가가 그의 팔을 붙잡고 머리를 떨구며 황소같은 울음소리를 터뜨렸다.
《부녀회장동무!》
방안은 흐느낌소리로 가득차고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서 눈물이 번들거렸다.
한시간후 큰배나무골의 양지바른 산기슭에서 추도문을 읽는 리재명의 비장한 목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에 젖어들고 영결의 조총소리가 하늘에 메아리쳐오를 때 림성실은 땅에 쓰러져 흙을 그러쥐고 목놓아 울었다.
(둘이서
렬사의 묘앞에 세워진 조촐한 패말에는 생전에 그의 군모에서 빛나던 오각별이 새겨졌다.
림성실은 장의에 참가한 사람들이 다 돌아간 다음에도 묘옆에 쪼그리고 앉아 두손으로 봉분의 흙을 쓸어만져 고르롭게 펴고 다독이며 정성스레 다져주고있었다. 그 부드러운 손길은 안식을 모르고 열정에 끊던 심장을 편안히 잠재우려고 있는 정성을 다 기울이는듯 하였다.
그를 벗하여 남으신
산기슭에는 고요가 흘렀다.
그는 이 하루사이에 마음이 더 굳세여지고 속이 넓어진듯 흔연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는 정말 오손도손하게 지낸적이 별로 있은것 같지 않아요.》
성실이는 행복한 지난날을 더듬는듯 눈길이 부드러워졌다.
《이런 말은 하지 말자고 했는데 이제야 떠나간 동지인데 일이 있나요. 체육대회가 있은 며칠후에 빨래를 했는데
모두 맘들을 의지하고있는데 그러다가 눕기라도 하시면 어찌겠어요.》
그리고 다시 돌아앉아 그를 잠재우려는듯이 손으로 봉분의 흙을 정성스레 다독이였다.
×
《아까운 동지는 가고 제같은건… 제따위 쓰레기는 이렇게 펀펀히 살아있습니다!》
최형준은 지원물자무지에서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쳐들고 비분을 터뜨리면서 자기 모멸감에 치를 떨었다.
지원물자들의 분배를 보아주시려고 구정부에 내려오셨던
《좀 조용하오. 저것 보오, 물자 타러 사람들이 오고있지 않소. 듣겠소. 진정하오.》
그러나 그는 눈물에 젖은 얼굴을 떨며 오열을 삼키지 못하였다.
《저는 김중권동지한테 죄를 진놈입니다. 죄를 졌습니다! 지난 이른봄 왕재산으로 나갈 때도 저는 그의 앞을 막아섰더랬습니다. 눈이 펑펑 오는 날이였습니다. 겉으로는 좋은 말로 반대했지만 속으로는 그 원정이 실패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로 처음 오셔 그토록 타이르고 가르치셨지만 저는… 저는… 조선혁명의 립장에 철저히 서지 못하고 우리 인민을 몰라봤습니다. 그때 나가지 않았더라면 이런 지원물자들이 들어올수 있겠습니까. 국내에서 지원물자들이 들이닥치고 김중권동지가 희생되여 들어오자 저는 정말 괴로왔습니다. 량심이 저려나 사람들앞에 얼굴을 내밀수 없었습니다. 저는 오늘 제 보잘것없는 일생을 다 돌이켜보게 됐습니다.…》
그의 숙인 얼굴에서는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이 동무는 사업을 잘해왔으나 지난날 일시적으로 잘못 생각했던 그 일때문에 다시 몸부림치는게 아닌가!)
《솔직한 말을 해줘 고맙소.… 나는 동무가 자기를 타매하던 나머지 너무 예리하게 과장된 말도 튀여나왔으리라고 생각하오.》
《저는 솔직히 말하면 새 로선이 옳다는걸 이미 알고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중권동지처럼 이 로선을 그렇게 열렬히 옹호하고… 이 로선을 위해 그렇게 헌신적으로 투쟁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오늘 왜 그렇게 됐겠는가 가슴을 치며 생각해봤습니다. 저는… 이전에 숱한 사람들앞에서 강연도 하고 연설도 하면서… 그렇게 하는게 혁명인가 해서 쏘베트로선을 열광적으로 선전하며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새 로선을 그렇게 옹호하고 돌아가면 사람들이 저를 무슨 어리광대나 풍각쟁이로 보지 않겠는가? 또 여기엔 이전부터 제가 인연을 깊이 맺은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또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러루한 묵은 거미줄에 걸려 나가다가는 주춤거리고 일어섰다가는 움츠러들게 되는 때도 있었습니다. 참 뭐가 뭔지… 저는 그랬습니다.…》
《정동무! 젊은 사람이 속이 왜 그렇소? 허허허… 속을 쭉 펴오! 쭉 펴란 말이요. 한때 시까지 썼다는 동무가… 정의를 알았으면 누가 뭐라든 그길로 나가야지!》
그도
《안되겠소. 동무를 혼자 놔뒀다가는 무슨 할망구가 되겠는지 모르겠다니까. 한번 내 시키는대로 해보지 않겠소?… 당장 강연제강을 하나 쓰오.
길게 쓰지 말고 격문 비슷하게… 원호물자들이 가는 모든 유격대, 반일자위대, 마을들에 가서… 당신들이 받는 한되박의 소금, 한토리의 실, 한꾸레미의 미역 등에 인민들의 어떤 지지가 담겨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오늘 근거지는 여기에 있는 유격대나 인민들의 근거지일뿐아니라 전체 조선인민들의 조국광복을 위한 근거지로 되였다. 때문에 국내인민들까지도 이렇게 지지성원들을 보내면서 자기들도 근거지방위에 떨쳐나섰다는것을 시위하고있는것이다, 우리는 인민들의 이런 지지성원을 받기때문에 왜놈들의 공세를 격파하고 근거지를 능히 지켜낼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이런 내용으로 제강을 짜서 강연도 하고 연설도 하오. 할수 있겠소?》
자기에게 활력을 부어주시려고 이토록 열변을 토로하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