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3 회
제 8 장
2
련락원들속에는 윤보금이도 들어있었다.
보금이는
그는 온성반유격구에 나가 공작하고있는 김중권에게 지금 그곳에 집결되고있는 소금을 비롯한 후방물자들을 한주일안으로 근거지에 도착시키라는 지시를 전하고 그의 임무수행을 도와야 하였다. 그리고 도착하는 즉시로 진명서숙의 교육사업을 돕고있는 박현숙을 근거지로 들여보내야 하였다. 박현숙은 김중권으로부터 원호물자를 어느 지점에서 어느 시간에 도강시키겠는가 하는 의견을 반드시 받아가지고 들어와야 하였다.
보금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구정부앞에서 서성거리고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최형준이 마주 걸어들어왔다.
그는 보금의 차림새를 눈여겨보더니 어디 먼곳으로 떠나가느냐고 물었다. 보금이는 그저 웃어보였다. 그러자 그는 얼굴이 벌개져서 무엇인가 말할듯말듯 망설이다가 만약에 온성으로 간다면 박현숙동무가 거기 나가있는데 인사를 전하고 날이 차지는데 감기에랑 조심하도록 일러달라고 부탁하였다.
보금이는 밀정들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멀리 에돌아서 고향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는 도문쪽으로 나가 두만강을 건넌 다음 종성에서 기차를 타고 온성으로 들어갔다.
날이 아주 저문 다음에야 풍인동 친정집의 문고리를 잡은 보금이는 지난날의 불우한 신세가 아니라 어엿한 혁명전사로 되여 친정집으로 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부풀어 터질것만 같았다.
온 집안이 기쁨에 넘쳐 발칵 뒤집혀졌다. 근거지에서 열린 운동대회에 갔다온 전장호를 통하여 자랑스러운 소식들을 많이 들은 윤치석이와 조씨는 딸을 안아들이다싶이 하고 알뜰살뜰히 보살피며 밥을 짓는다 중닭의 목을 비튼다 야단법석을 떨었다.
보금이는 집안의 이런 야단법석을 뒤에 두고 인차 전장원이를 찾아갔다.
아버지가 따라나섰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아 대낮처럼 환한 밤이였다.
마을의 밤은 예전처럼 침침하고 고요하지 않았다. 어느 집 방문들에나 불빛이 밝았다. 마을은 웅성웅성거렸다. 문들이 여닫기는 소리, 다듬이질소리, 방아찧는 소리, 녀인들의 웃음소리… 온 마을이 혁명의 새 기분으로 거세차게 숨쉬였다. 적의 깊은 후방인 여기는 정세가 긴장되여있는 근거지와는 다른 판이였다.
윤치석이 은근한 미소를 머금고 딸의 눈치를 살폈다.
《거기도 이렇느냐? 여기서는 요새 근거지에 들여보낼 원호미를 찧는다, 군복천을 장만한다… 정말 대단하다. 나한테야 근거지가 사둔집마을이 아니겠니. 내가 뭐나 내도 더 내야겠는데… 저 전선생이란 사람은 아예 그러지 못하게 한다.
근거지에는 유격대후방가족을 우대하는 법이 있다면서 우리 집을 보살피려고만 한다.… 사위가 유격댄데 내가 뭐 후방가족이라구, 허참… 운동대회에 갔다온 전선생한테서
로인의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갈리였다.
보금이는 목이 메여올라 아버지옆에 다정하게 붙어서며 거쿨진 손을 꼭 잡았다.
달빛이 환한 진명서숙의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이 줄을 지어서서 풍금소리에 맞추어 유희를 배우고있었다.
교단우에서는 얼마전 서울에서 들어왔다는 녀선생이 유희동작을 하여보이고 그밑에서는 남자선생이 풍금을 치고있었다.
보금이는 그 녀선생이 《새별눈》 박현숙이라는것을 첫눈에 일아보았다.
《새별눈》이 두팔을 번쩍 쳐들어올리면 옷차림이 람루한 아이들도 하늘을 가슴에 그러안는듯 두손을 높이 쳐들어올리는것이였다.
녀선생은 입에 문 호각을 호록, 호로록… 불면서 허리를 굽혔다가 펴기도 하고 가락맞게 발을 옮겨디디며 한바퀴 돌기도 하였다. 운동장의 아이들도 선생을 따라하였다.
보금이는 길가의 막돌처럼 버림받았던 아이들이 근거지의 아동단원들처럼 저렇듯 줄을 지어 춤을 추는것을 보노라니 저도 모르게 눈굽이 저려났다. 운동장둘레에는 마을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그 광경을 구경하고있었다. 사람들의 뒤에서는 황순사가 자전거안장에 배를 붙이고 기대여서서 구경하고있었다. 그가 풍금소리와 유희에 취하여 손바닥으로 자전거손잡이를 가락맞게 다독이는것은 가관이 아닐수 없었다.
보금이는 아버지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아니, 순사가 저렇게?…》
《일없다.… 저놈이 알고 저러는지 모르고 저러는지 그 안속은 알수 없지만 지내보면 못되게는 안 군다.
어떤 때는 우에서 아무기가 오시는데 청결을 잘하라고 으르면서 형사가 오는게랑 슬며시 대준다. 한번 간이 떨어지게 혼찌검이 난 다음부터 그렇게 된것 같다. 아무리 미욱한 놈이라도 대세가 어떻게 기울어져간다는것쯤이야 모르겠니? 유격대가 여기저기를 내치니 저놈들이 주눅이 들었다. 못되게 놀던 놈들이 얼마나 간사하게 굽석거리는지 모르겠다. 어떤 때는 겁이 나서 그것들이 주재소에 모여 잔단다.》
그들은 진명서숙의 뒤뜨락으로 돌아들어갔다.
아버지는 창호지에 불빛이 불기우리하게 어린 문을 가리키며 전장원이선생방이라고 알려주었다.
책상에 머리를 숙이고 글을 쓰던 전장원이는 방에 들어서는 보금이를 첫눈에 알아보고 놀라서 벌떡 뛰여일어났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요?》
《선생님!》
보금이는 밝게 웃었다.
전장원이는 반가움에 겨워 헤덤비며 그를 끌고가서 난로가의 걸상에 앉혔다.
전장원이는 일이 분주해서인지 얼굴이 전에보다 좀 수척해보였다. 그러나 그의 몸에서는 생신한 활기와 열정이 풍겼다. 그는 이전과는 달리 돋보는 눈으로 보금이를 바라보며 좀 어려워도 하는것 같았다.
보금이는 그를 만나자 옛추억이 사무쳐와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여 어깨에 걸친 털수건자락만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새 소식이 감감하길래 여기는 아주 잊은줄 알았지?》
《제가 여기분들을 어떻게 잊겠어요. 근거지에서 좋은 일이 생기고 경사가 생길 때마다 풍인동에서는 어떻게 지낼가 하고 여기만 생각했어요.》
《암, 그래야지. 아무리 혁명의 중심지에 산다고 고향을 잊어서야 되오. 암, 그렇구말구요. 허허허…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불쑥 나타났소?》
보금이는 자기가 오게 된 사연을 간단히 이야기하고 김중권을 찾았다.
전장원은 인차 얼굴빛이 긴장되여 김중권이 읍의 운송점으로 나갔는데 이제 곧 주영백이와 함께 여기로 올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박현숙이 총알처럼 달려들어와 난로옆에서 허리를 굽석거리며 숨이 넘어가는 소리로 깔깔 웃어댔다.
《호호호… 선생님, 아이구… 아이구… 우스워죽겠네. 유희공부가 끝났는데 글쎄 구경군들속에서 한 아바이가 순사놈 팔을 덥석 잡아 운동장으로 끌어들이며 우리두 같이 춤을 춰보자고 하지 않겠어요. 순사놈이 덩덩한김에 춤을 춘다는데… 호호호… 아이고… 아이고, 배야…》
전장원이는 의자에 앉은채로 몸을 뒤로 젖히며 벙글벙글 웃었다.
보금이는 박현숙을 향하여 의자에서 일어나며 반겨웃어보였다.
박현숙은 그제야 그를 알아보고 눈을 불꽃처럼 빛내였다.
《아이, 이게 누구세요?》
두 녀자는 반가움에 겨워 손에 손을 붙잡고 팔이며 등을 쓸어만지며 어찌할바를 몰랐다.
《현숙선생은 곧 근거지로 들어가야겠습니다.》하고 장원이가 말하였다.
《예?》
박현숙은 얼굴빛이 좀 긴장해지며 보금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거기 정세가 긴장하지요? 울려오는 포소리를 듣고 짐작했어요.》
《그래요.…》
박현숙은 저고리고름을 잡아당겨 꼭 매며 의자에 단정히 앉았다. 밖에서 발자욱소리들이 쿵쿵 울렸다.
문이 조용히 열리며 허름한 농민옷차림의 김중권이와 수수한 양복차림의 주영백이 들어왔다.
보금이는 김중권에게
김중권은 마침 이 자리에 다 모였는데 전략물자도강문제를 의논하자고 하였다. 심각한 론의끝에 그들은 닷새후인 24일 22시부터 사포동여울쪽에서 물자들을 도강시키기로 합의하였다. 박현숙은 곧 근거지로 들어가 그 날자와 장소를
전장원과 주영백은 몹시 서두르며 이 밤중으로 전수원면장을 만나야 하겠다고 떠나갔다.
그리하여 방에는 근거지에서 나온 세사람만 남았다. 그 어떤 가정적인 공기가 깃들었다.
김중권이 책상우의 보자기를 풀어 장부책을 꺼내들고 뒤적거리다가 보금이와 현숙에게 자랑스럽게 보였다.
《여기 동무들은 모두 대단한 활동가요! 근거지에 들여보낼 소금만해도 이백가마니나 장만해놓았소. 웅기, 라진, 청진, 경성, 어대진, 성진… 국내의 각처에서 끌어들인게요. 제가 나른것도 있지만 대개는 그 고장 지하조직원들과 인민들이 가명으로 주영백동무네 운송점앞으로 부친게요. 저 주영백동무는 참 굉장한 선동가요. 저 동무 연설을 듣고는 감격하여 혁명을 지원해나서지 않는 사람이 없다오. 한번은 화약을 구하려 토막동광산에 갔다가 갱막장에서 유격근거지를 소개하는 강연을 하고는 광부들과 함께 탁배기로 조선독립을 위해
보금이와 현숙이는 머리를 가지런히 붙이고 장부책을 들여다보았다.
책장들에는 물자명과 발신인 주소, 성명이 획이 방정한 글씨로 촘촘히 적혀있었다.
소금외에도 지원물자의 품종은 다양하였다. 천, 솜, 신발 각종 실토리, 의약품, 재봉기바늘, 등사원지… 어떤 농민은 초신 열컬레를 삼아보냈는가 하면 한 녀인은 미역짐속에 머리태와 함께 어느분이나 그것을 신발밑에 깔아달라는 글쪽지까지 찔러넣었다. 어떤 책장에는 비방울같은것이 떨어져 글자들이 종이에 번지고 얼룩이 졌다. 주영백의 눈물흔적인것 같았다.
박현숙이 먼저 얼굴을 들고 물기어린 그 인상적인 눈으로 김중권을 쳐다봤다.
《정말 이렇게까지 지원하는줄은 몰랐어요.… 근거지에서도 짐받으러 많은 인원들이 나와야 되겠지요?》
《중권동지도 이번 기회에 들어가지요?》
《나는 물자만 넘겨주고 더 남아있어야 할것 같소, 뒤수습도 하고… 좀 할일도 있어서…》
《함께 들어가면 안돼요? 나와있은지 퍼그나 오래되는데…》
《남아있어야 될것 같소.》
그리고 김중권은 담배를 피워물고 성급히 뻑뻑 빨며 그윽한 눈빛으로 벽의 한점을 지켜보다가 무슨 볼일이 있는듯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 보금이는 여기로 떠나올 때 최형준강사를 만났다고 하며 그의 인사를 전하였다.
《그-래-요?》하고 박현숙은 눈섭을 치켜올리며 심드렁하게 대답하였다.
최형준의 당부를 모처럼 전하고 이런 소리를 들으니 보금이는 무안스럽고 섭섭한 생각도 없지 않아 더 말이 나가지 않았다.
박현숙은 화제를 바꾸려는듯 인차 앉음새를 고치고 눈을 빛내이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기로 올 때 성실언니를 못 만났어요?》
그 말에 보금이는 얼굴이 화끈거려 눈을 아래로 깔았다.
《만나지 못했어요.
박현숙은 한숨을 호- 내쉬였다.
《아이, 성실언니가 애처롭다니까. 서로 깊이 사랑하면서도 공작임무가 달라 내내 떨어져있게 되지요. 아마 그래서
이때 밖에서 누구인가 입속으로 석쉼하게 부르는 노래소리가 흘러들었다. 들리는듯마는듯 한 그 노래소리에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던 두 녀자는 그것이 김중권의 목소리란것을 알고 놀라서 마주보았다.
밖으로 나간 김중권이 아마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에 잠긴 모양이다.
《성실동무를 생각하는게 아닐가?》 하고 보금이 속삭이자 박현숙은 의미있게 조용히 머리를 끄덕이며 부러움에 젖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김중권동지와 성실언니는 그런 감정은 가슴속에 깊이 묻어두고 서로 남모르게 아껴주고 도와주고 이끌어주고있는것 같애요. 귀중한 감정일수록 함부로 겉에 내보일게 아니라 가슴속에 깊이 간직해야지요. 그렇지 않아요?》
김중권의 석쉼한 노래소리가 방안에 계속 흘러들었다.
두 녀자는 잠자코 그 노래소리에 귀를 기울이였다. 방안에 떠도는 구수한 담배냄새가 그의 체취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