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 회
제 7 장
1
하늘에서는 비를 머금은 시꺼먼 구름이 낮게 떠서 날아지나갔다. 낮이나 밤이나 라자구쪽의 등판과 골짜기, 벌판들에서는 구국군 기마병들이 조야한 함성과 휘파람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나와서 근거지의 동정을 살피는가 하면 로골적인 적의를 드러내고 인민들에게 이것저것 트집을 걸다가 사라지군 하였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라자구에서 날아온 소식이 아주 풍설이거나 과장된것이기를 은근히 바라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현지에 갔다온 박훈의 보고는 그런 사람들의 마지막기대마저 뒤엎어놓았다.
리광이 희생된 후 유격대는 구국군의 행패로 하여 낮에는 행군조차 못하는 형편이 되였다.
박훈은 이러한 실태를 보고하면서
진한장은 일찌기 길림시절부터
지난날의 우여곡절많은 투쟁과 생활을 통하여 진한장의
진한장은 편지에 이렇게 썼다.
《…채려장의 부대는 근거지에서 유격대가 언제든지 리광의 복수를 하기 위해 쳐들어올수 있다고 하면서 맞서싸울 태세를 취하는가 하면 근거지에 선제공격을 가할 기미도 보입니다. 사려장은 무모하게 날치는 그를 뒤에서 꾸짖으며 중립을 지키고 오사령은 자기의 동의없이 채려장이 그렇게 날치는데 대하여 불쾌하게 여기지만 그를 제지시키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리광동무까지 희생된 지금의 형편에서 저 하나의 힘으로 구국군과의 동맹문제를 해결하는것은 료원한 일로 되였습니다.
때문에 저는 위험한줄 알면서도 정의가 묵살되고 무지와 횡포가 란무하는 살벌한 땅으로 감히
리광은 사령부에 왔다가 라자구로 돌아가서 근거지에 선 인민혁명정부의 성격과 사명, 인민혁명정부가 실시하는 민주주의적개혁들과 시책들에 대하여 구국군병사들속에 널리 선전하는 한편 연극공연준비에 달라붙었다. 그러다가 동산호부대의 고참모로부터 련락을 받고 동산호부대와의 련합작전문제를 토의하려고 10여명의 대원들과 로흑산으로 떠났다. 그런데 동산호는 리광이네를 잘 대접하고는 모조리 학살하였다.
학살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한 대원이 동산호가 고참모와 짜고서 자기들을 속였다고 통분하여 부르짖었다. 언제인가 리광을 반변모의에 끌어들이려고 했던 고참모가 그렇게 나왔다는 바람에 그것이 모략이였다는것을 알게 된
지휘관들과 대원들은 라자구로 쳐들어가 리광공작조의 원쑤를 갚자고 들고일어났으나
지금에 와서 그 일은 더는 미룰수 없는 초미의 문제로 나섰다고
×
대오가 밋밋한 고개마루에 올라서니 시야가 탁 트이며 앞에 넓은 벌방지대가 펼쳐졌다. 저 멀리에 보라빛으로 바라보이는 로야령산줄기로부터 흘러내린 푸른 지맥들이 들쑹날쑹한 파도를 이루며 벌방변두리를 울바자처럼 둘러쌌다. 벌방 여기저기에 바다의 섬처럼 점점이 널려진 야산들 기슭에 인가들이 촘촘히 들어앉았다. 어떤 마을에는 조선식초가집들이 몇채 보였으나 거의모두가 벽이 어둑한 만주식집들이였다. 라자구시가쪽은 짙은 연무에 덮여 아무것도 바라보이지 않았다. 땅도 흑토이고 하늘역시 검스름하게 흐려보였다. 대기속에서는 매캐한 그을음내와 니긋니긋한 기름내 같은것이 흐르는듯 하였다.
송아지만 한 재빛털개가 짐승의것인지 사람의것인지 모를 허연 뼉다귀를 물고 길에 올라서더니 다가오는 대오를 멍청하니 바라보았다.
한흥권이 발을 구르며 꿱하고 소리지르자 개는 기이한 신음소리를 내며 꼬리를 사리고 길을 느릿느릿 가로건너갔다. 그 짐승도 형형색색의 무장단과 군대들의 출몰에 습관이 된 모양이였다. 누구나 이방의 하늘밑으로 왔다는 생각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재빛이 약간 도는 백마를 타신
가깝고 먼 야산들의 숲속에서 구국군들이 황황히 뛰여다니는것이 언뜻언뜻 바라보였다. 그들은 난생처음 보는 희한한 군대의 도도한 기상에 어정쩡해져 함부로 접어들지 못하고 유격대가 들어온다는것을 서로 련락해주며 경계를 강화하고있는것 같았다. 공격에 유리한 지형에서 적당한 시각에 덮쳐들자고 은밀히 포위의 올가미를 둘러치고있는지도 모른다.
대오는 자그마한 중국인촌락들을 몇개 지나서 라자구시가에서 멀지 않은 태평촌으로 들어갔다.
대오가 초가집들앞을 지나갈 때였다. 웬 녀인의 부르짖음소리가 총소리의 메아리처럼 공기를 째며 울려왔다.
길에서 백걸음남짓한 거리의 집들쪽으로부터 옷차림이 람루한 녀인이 남새밭을 가로질러 허둥지둥 달려나왔다. 그 녀인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달려오면서 손을 높이 들어 정신없이 흔들어댔다.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체소한 그 녀인은 길로 뛰여올라와 군마에 매달려 등자에 끼여있는
《아주머니!》
《아주머니! 아주머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리광의 안해는 얼굴을 싸쥐며 흐느껴울었다.
전 대오에 비감과 절통한 울분이 굽이쳐흘렀다.
《아주머니, 안심하십시오. 우리가 가서 구국군문제를 풀어야 리광동무 수고도 헛되지 않을겝니다.》
공숙자는 눈물이 북받쳐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한흥권동무, 오늘은 여기서 묵읍시다.》
다음날
그들은
몸이 호리호리하고 얼굴이 갱핏한 젊은 장교는 리성림의 안내를 받으며 걸어들어오다가 마당에 서계시는
《성주!》
반가움에 겨워 얼결에 터져나오는 부르짖음이였다.
《아-니, 이게 누군가?》
《와달라고 해놓고는 후회했는데 끝내 왔구만.》
《이런데서 만날줄이야, 하하하…》
《성주!》
진한장의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갈리였다.
《여기까지 나와 일없겠소?》
《오사령이 마중나가서 안내해오라고 분부했소.》
《오의성사령이?》
진한장은 기쁨에 겨워 의미있게 눈을 슴벅이며 머리를 끄덕이고는 오의성의 동향에 대하여 말하였다.
아침에 진한장은 련락원이 가지고온
오의성은 펄쩍 놀라 서리가 내린 장미를 곤두세우고 매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뭐라구? 그 사람은 공산당인데 님자, 어떻게 그를 잘 아는가? 님자도 공산당과 내통해있는게 아닌가?》
그때 진한장이 지은 선량한 미소가 효과를 낸것이 틀림없었다.
《사령님, 제가 부친의 뜻을 거역하여 공산당이 되겠습니까? 저는 길림에서 같이 공부한 동창생으로서 과거부터 김사령을 잘 압니다.》
《아- 동창인가!》
《예… 육문중학교에서 같이 공부를 했습니다. 그때부터도 뜻이 높고 의리가 깊은 출중한분이였습니다. 한번 만나보셔도 크게 랑패가 없으리라고 봅니다. 세상에 흔한 공산주의자들과는 판판 다를겝니다. 옛날사람들은 영걸이 영걸을 알아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의성은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그럼 한번 만나 점심이라도 함께 나누어보자고 하였다.
점심까지 나누자고 하며 자기의
그러나
《들어갑시다!》
대오가 기복이 심하지 않은 구릉지대의 밋밋한 올리받이를 몇개 넘으니 라자구시가가 한눈에 안겨왔다. 우중충한 산들을 병풍삼아 그앞에 오붓하게 펼쳐진 도시였다. 해빛에 창문들이 운모쪼각처럼 반짝거리는 관청건물들과 삐죽하게 솟은 제분소의 지붕 그리고 제재소건물들을 제외하고는 땅에 들어붙은듯 한 단층집들이 빽빽이 들어앉은 시가는 대지의 빛갈과 어울려 그 륜곽이 뚜렷하지 않고 어둑하게 보였다. 력사의 먼지를 고스란히 들쓰고있는 고풍의 도시라는것이 첫인상에 느껴졌다.
시가로 들어가는 길옆과 남새밭 건너쪽에는 추녀가 낮은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았다.
한흥권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요?》
진한장은 억이 막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밭두렁의 복병들쪽을 보다가 두손으로 가슴을 움켜잡고 몸부림쳤다.
《아, 제가… 제가 무능해서… 저건… 저건… 채가의 복병들이 틀림없습니다!
《한번 내디딘 걸음인데 물러서겠소? 한흥권동무! 기발을 올리오! 나팔을 부오!》
그리고 대원들을 향하여 신심이 넘치는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동무들, 복병들에게 눈을 팔지 마오. 절대로… 앞만 똑바로 보오! 보무당당히 시가로 행진해들어갑시다!》
대오의 선두에 선 기수가 기대에 말았던 붉은기를 풀어 높이 쳐들자 기폭이 바람을 안고 불길처럼 펄펄 휘날리였다. 뒤이어 힘찬 나팔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그 나팔소리는 온갖 편견과 적의를 밀어제끼는 선언처럼 시가우로 랑랑하게 울려퍼져갔다.
대오는 발구름소리를 힘차게 울리며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푸른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는 해빛에 대원들이 어깨에 멘 총들이며 가죽배낭, 혁띠, 군화들이 번쩍번쩍거렸다. 나팔소리는 시가의 상공에 메아리치고 척척 울리는 발구름소리는 거리를 들었다놓았다. 군마들도 숨결이 벅차지여 코김을 씩씩 내불며 귀를 쭝긋거리였다.
거리를 따라 마주 달려오던 포장마차에서 마부가 황황히 뛰여내렸다. 기름때가 알른알른한 검은 옷차림의 마부는 허리를 동그랗게 굽히고 안깐힘을 쓰며 고삐를 당겨 말을 길옆으로 끌었다. 마차의 소창에서 어느 부호의 마님인듯 한 중년녀인의 유들유들한 얼굴이 밖을 내다보더니 기겁을 하여 눈이 휘둥그래졌다.
거리에서 붐비던 사람들은 왁작 떠들며 길량옆으로 갈라져 섰다. 광주리를 안은 아낙네도 전족을 재게 놀리며 뚱기적뚱기적 길옆으로 피해갔다. 멜대를 집고선 장정, 군청색다부산자에 은테안경을 낀 신사, 파파늙은 로파, 쌍태머리처녀, 앞머리칼이 보르르한 사내아이… 길옆에 늘어선 형형색색의 그 사람들은 공포와 의혹, 경악과 찬탄의 착잡한 눈길로 대오를 바라보았다.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게 어느편 군대요?》
《첨보는 군댄데…》
《에그, 끌끌해라!》
《저 기발을 보오. 혁명군이야!》
《조선군대요! 조선유격대요!》
《조선군대가 왜 오노?》
은테안경쟁이가 화가 나는듯 손을 홱 내저으며 뇌까린다.
《신문이 있어야지, 신문이… 이 도시엔 젠장, 신문도 없단 말이야!》
거리에 즐비하게 늘어선 점방들에서 주인들이 목을 길게 빼들고 내다보았다.
날개를 퍼덕거리는 게사니 두마리를 옆에 끼고 가던 구국군병사가 뒤를 돌아보더니 펄쩍 놀랐다. 그는 안았던 게사니를 내동댕이치고 골목으로 달려들어가며 무엇이라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길홈타기에 떨어진 게사니가 날개를 푸득푸득거리며 시궁창물을 튕기였다.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달려나오는 사람들, 달려들어가는 사람… 온 거리가 와글와글 끓어번졌다. 총들을 거꾸로 둘러메고 걸어오던 한개 분대가량의 구국군병사들이 걸음을 뚝 멈추고 이쪽을 빤히 바라보더니 기겁한 소리를 지르며 골목으로 뛰여들어갔다. 그러나 반장인듯 한 자는 총을 벗겨들고 거리 한복판으로 달려나가며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질렀다.
《래-슈-이-》
《래-슈이-》
《저건 무슨 소리입니까?》
진한장은 얼굴에 난처한 미소를 그리였다.
《네, 별거 아닙니다. 물이 온다고 소리치는겝니다.》
《물이 온다니?》
《그전날 마적들이 쓰던 은어인데… 물은 륙군의 래습이나 재난을 예고하는 뜻인것 같습니다. 강물이 자주 범람하여 대대로 내려오며 막대한 수해를 입은 송화강류역의 인민들에게는 물이 제일 무서운게였습니다. 이런 연원에서 생긴 마적들의 은어인데… 군기가 문란해지다나니 마적단의 은어까지 통용되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