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 회


제 6 장

6

넓게 닦은 운동장에는 흰모래로 여러가지 경기용줄들이 얼기설기 그어졌고 축구꼴문대까지 세워졌다. 운동장을 마주하고 약간 둔덕진 곳에 여러개의 풍막으로 차일들이 쳐있었다. 가운데 차일은 주석단자리이고 그 량쪽의 차일들은 래빈들의 자리였다.

가슴에 꽃송이를 단 보금이는 주석단옆 차일의 제일 앞줄에 국내대표들을 앉히고 자기도 그옆에 자리를 잡았다. 각 지방에서 온 대표들은 명절기분에 설레이며 서로 아침인사들을 하고 구면인듯 떠들썩하게 이야기들도 나누었다.

운동장에는 무장을 갖춘 유격대와 반일자위대의 중대들이 주석단쪽을 향하여 줄을 지어 섰다. 운동장둘레에는 근거지인민들이 빙 둘러앉아있었다.

보금이는 설레이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고 손님들의 얼굴표정도 훔쳐보고 유격대의 대렬쪽에도 눈길을 주었다. 지휘관들이고 대원들이고 모두 낯선 얼굴들뿐이다. 창억이는 어디에 서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운동장둘레에 앉았던 군중들이 일어나며 박수를 치고 만세를 부르자 차일안의 래빈들도 웅성거리며 일어섰다.

목갑총을 차신 키가 후리후리한 장군님께서 군모를 벗어들고 환하게 웃으시며 래빈석앞으로 걸어오시였다. 한흥권을 비롯한 여러 지휘관들과 인민혁명정부의 간부들이 그이의 뒤를 따라 걸어왔다.

온 산천을 들었다놓는 만세와 박수의 환호속에서 장군님께서는 손님들과 하나하나 인사를 나누며 걸어오시였다.

장군님께서 앞에 오시자 전장원과 전수원면장, 한설봉이도 허리를 굽혀 그이께 절을 하였다.

장군님께서는 한설봉을 먼저 알아보시고 못내 반가와하시며 로인의 손을 뜨겁게 잡아흔드시였다.

《로인님, 먼길에 오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로인은 기쁨과 흥분에 채머리를 떨며 그이를 우러러보았다.

《장군님, 수고는 무슨 수고겠습니까? 날아왔습니다. 지난봄에 장군님을 우리 류다섬에 처음 모셨을 때 내 이제는 죽어 원이 없다 생각했는데… 오늘은 이런 영광을 누리게 되니 정말 꿈만같소이다.》

《류다섬인민들은 모두 무고하십니까?》

《예, 모두 장군님을 하늘같이 믿고 살아갑니다.》

《숙소는 불편하지 않습니까?》

《좋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극락세상에 온것 같은게 잠도 잘 오고 밥맛도 더 나고 그저 마음이 편안합니다.》

《좀 불편한 점이 있더라도 널리 량해해주십시오. 저는 그때 류다섬에서 국수대접까지 잘 받았는데… 여기서는 대접이 변변치 못한것 같습니다.》

《원, 무슨 말씀을… 장군님, 잘 말지도 못한 국수였는데 아직도 그걸 잊지 않으셨습니까?》

《잊다니요. 조국에 나가 대접받은 국수인데 그 맛을 제가 잊겠습니까. 허허허…》

로인도 그날의 추억에 눈굽이 젖어올라 손을 눈가에 올리며 《허허…》하고 웃었다.

이때 전장원이 사촌형을 장군님께 소개하였다. 그이께서는 전수원면장을 보시고 매우 놀라며 기뻐하시였다.

《저는 면장님은 못 오실줄로 알았습니다. 몸을 용케 뺐습니다. 정말 이렇게 와주시니 고맙습니다.》

전수원은 송구한 마음을 금할수 없어 앞에 모아쥔 손을 주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올렸다.

《장군님, 저는… 저는… 죽어도 한번 장군님을 만나뵙고 여기 현실도 보고싶었습니다. 장군님께 말씀올릴것도 있고 해서…》

《예, 후에 조용히 만납시다. 그런데 면장님은 특히 후환이 없어야겠는데… 놈들이 무슨 기미라도 차리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전장원이 연길에 있는 5촌조카의 결혼잔치를 핑게로 삼아 들어왔으니 별일이 없을것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렇다면 여기서 일을 보고 꼭 연길에 들려 잔치도 보십시오. 우리도 지하조직을 통해 별일이 없도록 대책을 취해놓겠습니다.》

장군님께서 다음다음 래빈들에게로 걸음을 옮겨가며 멀어지시자 한설봉이 전수원의 허리를 툭 건드리며 그러면 그렇다고 말해야지 사람을 그토록 머저리로 만드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제사 노여운 말을 하였다. 욕을 당한 전수원은 년장자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사과의 말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운데에 선 전장원이 껄껄 웃어대자 두사람도 마주보며 화해의 뜻으로 너털웃음을 웃었다. 뒤에 앉은 사람들이 무슨 일이냐고 안내원에게 물어왔다.

보금이 사연을 소곤소곤 이야기해주자 그들은 과연 이런 자리에서 있을만 한 일이라고 유쾌하게 웃었다.

환호소리에 들끓던 장내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맑고 푸른 하늘에 나팔소리가 랑랑하게 울려퍼지고 뒤따라 연길폭탄(소리폭탄) 3발이 폭발하였다. 그것은 체육대회의 개막을 선포하는 신호였다. 폭음에 놀란 새들이 하늘에서 야단스럽게 우짖으며 날아다녔다.

장군님께서 차일밖으로 나서시여 운동장에 모인 군중을 둘러보시였다.

장내는 물을 뿌린듯 고요해졌다.

래빈석의 손님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그이만을 바라보았다.

장군님께서는 먼길을 걸어 찾아온 래빈들에게 사의를 표하는 따뜻한 말씀을 하시고 격정에 넘치신 음성으로 인민혁명정부의 수립과 민주주의적개혁들의 실시가 갖는 의의에 대하여 연설하신 다음 이 체육대회가 항일무장력과 유격구, 반유격구인민들, 각계각층 반일력량들의 단결을 더한층 강화하는 계기로 되기를 바란다고 하시였다. 그리고 선수들은 매 경기종목마다에서 평소에 단련된 체력과 투쟁정신, 단결력을 남김없이 발휘하라고 격려하시였다.

장군님의 짤막하고 격동적인 연설이 끝나자 국내혁명조직들을 대표하여 전장원이가 온성인민들의 지성이 깃든 축기를 들고 주석단앞으로 나가 그이께 드리였다. 주석단의 리재명이 축기를 높이 들어 펼쳐보이자 운동장에 정렬한 유격대원들과 자위대원들은 총을 높이 들어올리며 우렁찬 만세로 화답하였다.

래빈석의 사람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이어서 유격대와 반일자위대의 분렬행진이 시작되였다.

4렬종대로 선 유격대의 중대들이 먼지구름을 날리며 보무당당히 행진하여 앞을 지나갈 때 래빈석은 박수와 만세, 찬탄의 소리들로 끓어번졌다.

래빈석의 뒤좌석에 앉은 한 로인은 손바닥으로 무릎을 철썩철썩 내리치며 환성을 터뜨렸다.

《조선군대구나! 우리 군대구나!》

래빈들은 일어서서 지나가는 대오에 박수를 보내는가 하면 목이 터지게 만세를 부르다가 발돋움하여 목을 길게 빼들고는 장군님께서 계시는 차일쪽을 바라보기도 하였다. 한설봉은 눈물에 젖어 박수를 치다가 자리에 주저앉아 팔소매에 얼굴을 묻고 잔등을 떨며 소리를 내여 흐느꼈다.

《어- 살았구나, 나라가 살았구나!》

윤보금은 로인의 그런 모습을 보자 눈앞이 자꾸 흐려와 앞을 지나가는 대오의 얼굴들도 똑똑히 가려볼수 없었다. 한 종대가 래빈석앞을 지나갈 때 뒤에서 시아버지의 목소리가 울렸다.

《얘야, 보니? 저기… 저기… 두번째 줄에 우리 사람이 간다. 보이나? 응? 두번째 줄이야!》

그러나 보금이는 가로 두번째 줄인지 세로 두번째 줄인지도 알수 없었거니와 모두 같은 군모, 같은 군복에 한결같은 모습들이여서 눈앞이 아물거릴뿐 누가 누군지 알아볼수 없었다. 그저 대오의 힘찬 발구름소리와 환호소리에 정신이 얼떠름해지고 가슴이 터질듯이 벅차올라 정신없이 두리번거리기만 하였다. 마지막종대가 래빈석앞을 다 지나갔을 때 운동장밖에 담벽을 이루고 서있는 군중들속에서 한 로파가 달려나와 대오의 옆에서 허둥지둥 따라가며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석범아- 야- 석범아- 이쪽으로 고개를 돌려라. 네 얼굴을 좀 보자- 이녀석아-》

로파는 손자의 장한 얼굴을 보았던지 두팔을 날개처럼 벌렸다가 내렸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래빈석에서도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어대였고 주석단쪽에서도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분렬행진을 끝낸 유격대와 반일자위대의 중대들은 운동장둘레에 일정한 사이를 두고 자리를 잡았다.

곧 아동단학교 어린이들의 유희가 시작되였다. 손에 손마다 꽃다발을 든 어린이들은 박현숙선생의 풍금소리에 맞추어 씩씩하게 걸어나오며 부채살모양으로 대형을 펴더니 운동장에 가득 현란한 해살무늬를 그리였다.

련이어 신기한 조화들이 일어났다. 대형은 힘찬 만세소리와 함께 늘어지며 조선지도를 그리는가 하면 활짝 피여난 꽃송이들로 운동장을 점점이 수놓았다.

사처에서 박수갈채와 환성이 터져올랐다.

아동단의 유희가 끝나자 달리기, 씨름, 왜놈때리기, 보물찾기 등 다채로운 종목의 경기들이 진행되여 웃음소리와 응원소리가 그칠사이 없었다.

축구시합이 시작되자 운동장은 열광의 도가니로 끓어번졌다. 선수들보다 응원하는 사람들이 더 수고하는듯 하였다. 축구공이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날아갈 때마다 2중대와 3중대의 응원대들은 길길이 뛰여오르며 함성을 내지르고 꽹과리를 두드리고 북을 울리고 삼삼칠박수를 치고 야단법석들이였다. 구경군들도 자연히 두패로 갈라져서 죽을내기로 동쪽문을 차지한 2중대를 응원하는가 하면 서쪽문을 차지한 3중대를 편들어 벅적 떠들어댔다.

보금의 눈길은 처음에는 공만 따라다녔으나 시아버지가 창억이를 가리켜준 다음부터는 공은 버리고 남편의 움직임만 쫓아가며 바라보았다.

창억이는 자기에게로 공이 날아오면 왼쪽가녁으로 냅다 몰아가다가 어느사이 2중대 문대앞으로 번개같이 달려들어가는 마동호에게 차주군 하였다. 마동호는 그 공을 받아 몰아가다가는 갈범처럼 달려드는 2중대의 방어수들에게 걸리군 하였다. 때로는 발길에 채워 앞으로 거꾸러질번도 하고 미끄러져 딩굴기도 하였다.

보금의 코등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내돋았다.

갑자기 사방에서 환성이 터져올랐다. 마동호가 또다시 공을 몰고 2중대의 문대앞으로 준마처럼 달려들어가고있었다.

3중대의 응원대들이 몽땅 일어서서 껑충껑충 뛰여오르며 함성을 질렀다.

《동호-》

《마동무-》

《야-》

동호는 그 함성에 떠받들려 공을 안고 날아들어갔다. 뒤걸음질을 치던 2중대의 방어수가 무슨 마음을 먹었던지 총알같이 달려나와 동호와 부딪쳤다. 딱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어수는 땅에 곤두박혀 먼지구름속에서 딩굴고 동호는 공을 옆으로 홱 꺾어몰아 두번째로 날아드는 방어수를 피하여 지나갔다.

온 운동장이 들고일어나 와- 와- 소리질렀다. 마동호는 공을 몰아 문대앞으로 곧바로 달려들어갔다. 문지기는 몸을 도사리고 공을 향하여 날아들가 말가 하며 뒤걸음질쳤다. 이 위급한 찰나에 뜻밖에도 이상스러운 일이 생겼다. 동호가 문대 바로 앞에서 공을 멈춘것이다. 문지기는 웬일인지 배를 그러안고 맥없이 주저앉아버렸다.

그 순간에 동호는 공을 가볍게 걷어찼다. 공은 문지기의 머리우를 스쳐 문대안으로 서서히 날아들어갔다.

응원대는 물론 구경군들과 래빈석에서까지 자리를 차고 뛰여올라 환성을 질렀다. 운동장이 떠나갈듯 하였다. 그러나 이때 문지기를 둘러싸고 무엇인가 수군거리던 2중대의 선수들이 운동장복판으로 달려나오며 실점의 무효를 주장하는듯 손을 마구 흔들어대더니 심판에게로 달려가 왁작 떠들며 들이대였다.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것이 분명하였다.

심판은 동호를 데리고 2중대 문대앞으로 갔다. 2중대 문지기는 팔을 홱홱 내저으며 심판에게 무엇이라고 열을 내여 소리쳤다. 마동호는 팔짱을 끼고 그옆에 장승처럼 끄떡없이 서있었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거쳐 운동장에서 시비에 오르고있는 문제가 래빈석에까지 전해졌다.

동호가 문대앞에서 공을 멈추고 입을 딱 벌리며 말울음소리를 내질렀다는것이다. 웃음보따리인 2중대 문지기는 그만 배를 그러안고 털썩 주저앉게 되였다.

문지기의 주장에 따라 2중대에서는 반칙이라고 들고일어나며 왁작 떠들어대고 3중대에서는 축구경기규정 어디에 그런것을 반칙으로 지적한 항목이 있느냐고 떠들어대였다.

래빈석에서도 반칙인가 아닌가를 두고 옥신각신이 벌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관조자의 립장으로 운동시합에서는 의례 이런 일이 생기기마련인데 그래야 재미있다고 하며 태평스럽게 껄껄 웃었다.

2중대 응원대쪽에서 최춘국정치지도원이 어슬렁어슬렁 걸어나오자 3중대에서도 장룡산이가 뛰여나왔다. 그들은 심판을 둘러싸고 제 주장을 먹이려고 하였다.

《입을 다물고 축구를 하는 법이 있는가? 아무래두 급해맞으니 소리를 치게 된단 말이요. 반칙은 무슨 반칙이요?》

《사람소리라면 몰라도 망아지소리를 냈단 말이요. 이건 벌써 우리 문지기가 웃음보따리란 약점을 노리고 한 고의적행동이란 말이요. 반칙이요, 반칙!》

《여 동호, 동무 고의적으로 그랬는가?》

《예? 저는 성이 마가 돼서 그런지 급해맞으면 그런 소리가 저절로 나옵니다.》

《아-니, 그럼 동문 사람이 아니라… 흐아 흐아 흐아…》

몸을 앞으로 내밀고 그 소리들을 엿들은 전장원이 손으로 형의 무릎을 내리치며 숨이 넘어가는 소리로 웃어댔다.

《저절로 망아지소리가 나갔다우. 걸작이로구나, 하하하…》

전수원이도 입을 싸쥐고 눈물을 흘리며 웃어댔다.

온 래빈석이 웃음판이 되였다.

《하하하…》

《허허허…》

《흐흐흐, 이젠 그렇게 우길수밖에… 좌우간 괴짜다. 핫하하…》

보금이는 손님들옆이라 터져오르는 웃음을 참고참아오다가 끝내 참지 못해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발만 콩당콩당 굴렀다.

이때 누구인가 뒤에서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그 충격에 보금이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박현숙이 급히 달려온듯 숨이 턱에 닿아 헐떡거리며 올롱해진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정신이 있어? 그네뛰기가 시작됐는데…》

보금이는 웃음을 못 참아 손님들곁에 있기 괴로왔는데 마침 잘되였다고 후닥닥 뛰여일어났다.


× 

그들은 그네터로 달려갔다.

록음이 짙은 대왕청하의 버들방천에 꾸려놓은 그네터에는 녀인들이 하얗게 몰켜서서 여기야말로 녀성들끼리의 세상이란듯 왁작 끓어번지고있었다. 그들은 그네선수의 날씬한 자태가 버드나무숲우로 날아오를 때마다 야-야 마음놓고 환성을 터뜨렸다.

그네선수는 어디서 난것인지 연분홍치마저고리를 떨쳐입었다. 그는 머리를 갸웃이 하고 저고리고름과 치마자락을 뒤로 날리며 사람들앞을 휙- 날아지나 하늘높이 아스라하게 떠오르며 방울을 찰랑 하고 차는것이였다. 그때마다 땅우의 녀인들은 손벽을 치며 《좋다- 좋-다.》 하고 응원소리를 높였다.

보금은 가슴이 움츠러들었다. 여러날 련습하였지만 도저히 저렇게 높이 날아오를것 같지 못해서였다.

그는 인차 차례가 되여 그네에 오르게 되였다.

보금은 흥분한 나머지 어떻게 마촌부녀회원들이 모여들어 발로 앉을깨를 바로 짚게 하고 그네줄을 잡은 손에 수건을 감아주었으며 그네를 앞으로 떠밀어주었는지 몰랐다.

벌써 그의 몸은 날개라도 돋친듯 허공으로 날아오르고있었다. 바람이 휴-휴- 울부짖으며 얼굴을 스치고 옷자락이 찢어져 날아날듯이 푸륵푸륵 소리를 내며 나붓기였다. 자그마한 새처럼 해빛이 눈부신 창공으로 날아오르는듯 한 쾌감에 휩싸이는가 하면 천길나락으로 미끄러져떨어지는듯 한 무서움이 들이닥치는 속에서 버드나무의 푸른 숲과 부녀회원들의 얼굴들이 한데 얼버무려져 날아지나가고 날아지나오면서 어렴풋한 웨침소리들이 들려왔다.

《언니- 방울을 네번 차요-》

《보금아- 십리평에서는 세번 찼다-》

《땅을 보지 말라- 하늘만 봐라-》

하늘에 매달린 방울줄은 아득한 공간으로 날아오르는듯 하다가도 그를 향하여 유유히 날아내렸다. 방울들은 발끝에 스칠듯말듯 하다가는 골려주려는듯 멀리로 날아올라갔다. 그러면 몸이 울부짖는 바람소리속에서 천길나락으로 미끄러떨어지는듯 하였다.

곤두서는 땅, 뒤번져지는 버드나무숲, 어디에선가 웨쳐대는 간간한 목소리들… 보금이는 이를 사려물고 다리에 힘을 주며 앉을깨를 한껏 내밀었다. 발밑으로 날아지나가는 푸른 대지, 획- 스쳐지나가는 버드나무숲, 멀리에서 키를 낮추며 엎드리는 산발들… 해빛이 눈부신 하늘이 한가슴에 확 안겨드는 순간 발끝에 무엇이 닿는것 같더니 절랑 장쾌한 음향이 온 하늘에 가득 울려퍼졌다. 보금이는 이름할수 없는 쾌감에 저도 모를 환성을 터뜨리며 그네줄을 넓게 벌리면서 시원한 바람속에 몸을 내맡기였다. 저고리고름이 얼굴에 희롱질을 걸며 연꼬리처럼 나풀거리고 푸른 대지우에서 미친듯한 환성이 터져올랐다.

《방울을 찼다-》

《한번 더-》

웨치며 웃어대는 얼굴, 얼굴들의 옆을 날아지나 허공에 꺼꾸로 날아오른 보금이는 강심을 먹고 다리에 힘을 주며 앉을깨를 힘껏 내밀었다. 바람소리, 날아지나가고 날아지나오는 푸른 숲, 응원하는 목소리들…

《영-차-》

《두만강이 보인다-》

보금이는 그 웨침소리에 떠받들려 창공높이 훨훨 날아오르는듯 하였다. 그는 다가드는 방울들을 보자 그네줄을 벌리며 발길로 그것을 힘껏 내찼다.

절-랑

《야-》

보금이는 자기 몸이 그대로 환성이 되여 그 방울소리와 한데 어울려지며 저 푸른 하늘 아득히 날아오르는듯 하였다.

《영-차-》

《두만강이 보인다-》

하늘에 날아오른 보금의 눈에는 키를 낮추며 다가드는 산발들 저너머에서 두만강의 번쩍거리는 흐름이 언뜻 비껴드는듯 하였다.

또다시 절-랑- 장쾌한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밑에서 벅적 끓어번졌다.

《한번 더-》

《영-차-》

《온성땅이- 보인다-》

《친정집이 보인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보금이는 가슴이 찌르르 저려났다.

아, 어머니가 이런 딸을 보았으면… 나때문에 한뉘 마음고생을 한 어머니!…

순간 웬일인지 눈앞이 탁 흐려지며 머리속이 아찔해졌다.

다음 그는 흐릿하게 사품치는 안개바다속에서 녀인들의 기겁을 한 아우성과 비명소리, 부르짖음소리들을 어렴풋하게 들었다.

그네를 붙잡고 그를 안아내려 바람이 시원한 나무그늘속으로 옮겨간 부녀회원들이 의사를 불러야 하겠다고 왁작 떠들어대였다.

그를 품에 안은 박현숙은 손수건으로 땀에 젖은 그의 이마며 눈언저리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보금이는 담장처럼 둘러선 부녀회원들을 둘러보며 꿈에서 깨여난듯 눈을 슴벅거리였다.

부녀회원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래져 숨만 헐떡거릴뿐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지도 못하였다.

박현숙이 보금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갑자기 어지럼증이 났어?》

《아니… 그저…》

보금이는 그를 쳐다보며 방긋 웃어보였다.

부녀회원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도 쉬고 가슴을 쓸어만지기도 하였다.

《에그-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글쎄 그 높은데서 떨어지면 어찔번 했소.》

《에그, 우리가 너무 우둔하게 응원했지비. 이길 욕심에 사람을 잡을번 했다니까.》

둘러선 부녀회원들은 모두 웃음이 환한 얼굴로 이런 말들을 주고받았다. 얼마후 그네터옆의 나무그늘밑에서 점심을 먹고난 보금이는 치마허리를 동였던 중동매끼를 풀어서 풀밭에 홱 내동댕이쳤다.

《아이, 분해, 이젠 십리평하구 비겼지요?》

그러자 박현숙이와 나이든 몇몇 부녀회원들이 좋은 말로 그를 달래였다.

《1등이 둘이면 좋은게지 꼭 남을 눌러야겠어?》

《그 로친네 얼굴이 갑자기 떠올라 그랬다니까. 모두 온성이 보인다고 소리치는 바람에…》

그제야 까닭을 안 부녀회원들은 머리들을 끄덕이며 혀를 찼다.

《왜 그렇지 않겠소.》

《저때문에 별별 맘고생을 다한 친정에미가 와서 이 구경을 하문사 에그, 오죽이나 좋아할가!》

두만강건너 저 멀리 고향에 두고온 어머니가 생각나서 눈에 저고리고름을 가져가는 녀인도 있었다.

키가 크고 얼굴이 남자처럼 생긴 부녀회원이 운동장쪽을 무심결에 바라보다가 큰소리로 웨쳤다.

《저걸… 저걸 보우! 저게 누구요? 그 집 새서방이 아니요?》

부녀회원들은 모두 일어나서 그쪽을 바라보았다.

창억이 풀덤불속을 누비며 이쪽으로 정신없이 뛰여왔다.

《그네에서 떨어져 몹시 상한줄 아는 모양이지?》

그러자 녀인들은 장난기가 들어 저마다 한마디씩 하였다.

《저 훌훌 나는걸 보오. 야- 제 색시가 귀하긴 귀한 모양이다.》

《우리 어찌는가 한번 떠보자! 숨이 꼴깍 넘어가서 땅에 파묻었다고 할가? 호호호…》

《그래야 곧이듣나? 병원에 실어갔다고 하지!》

《보금이, 숨어… 숨어라!》

《이젠 늦었어. 이 하불을 씌워놓구 밥함지랑 올려놓자. 빨리 누워.…》

그들은 보금이를 붙잡아 우격다짐으로 풀밭에 눕히려고 덤벼쳤다.

보금이는 수집고 우스워 그들의 손을 뿌리치고 뛰쳐나갔다.

그는 두볼을 싸쥐고 풀밭으로 멀리 달려나가서 무성한 수풀의 싱그러운 풀냄새속으로 뛰여들어갔다. 숫눈송이처럼 정갈하게 흰 꽃송이들이 향기를 풍기며 설레이면서 가슴에 안겨들었다. 그 향기때문인지 머리가 핑 돌았다. 걸음을 멈춘 그는 숨을 조용히 몰아쉬다가 한손을 낭자쪽에 가져가고 머리를 한껏 뒤로 젖혀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름할수 없는 행복감에 겨워 꽃들을 서둘러 꺾어서 한팔에 가득 안았다.

이때 창억이 수풀속으로 걸어들어왔다.

땀이 번들거리는 그의 얼굴에는 웬일인지 좋지 못한 기색이 어렸다.

보금이는 그네터에서 롱담들이 지나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수집게 웃어보였다.

창억이는 군모를 벗어 이마의 땀을 씻고는 아연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노전을 어디다 뒀소? 노전말이요?》

《예?》

보금이는 그제야 부녀회장의 부탁이 아리숭하게 떠오르며 가슴이 섬찍해졌다.

《부녀회장이 노전 석장을 맡겼다면서?… 그걸 어쨌는가 말이요?》

《마동호동무가 가져오겠다고 해서 맡겼는데… 안 가져왔어요?》

《안 가져왔길래 없지?》

《예? 제가 맡겠다고 하구선 왜 안 가져왔을가?》

《마동무는 마동무고 왜 제가 맡은 일을 남한테 미오?》

《무슨 일이 생겼어요?》

《생겼소.… 사령관동지께서 점심시간에 저 대왕청하 나무그늘밑에서 국내에서 온 손님들과 자리를 같이하고 식사를 들며 중요한 말씀이랑 하게 되였는데… 자리를 마련하자니 깔게 있어야지. 그런 자리에 헌 멍석장을 깔겠소?》

보금이는 입술이 새까맣게 타들었다.

《리재명회장이 숱한 사람들이 있는데서 어떻게 된 일인가 나한테 묻는데 얼굴을 들수 있어야지. 바빠서 뛔왔소.》

《아이참, 이 일을 어째요. 제가 어디 가서 구해올가요?》

《그만두오. 리재명회장이 어디로 뛔갔으니 어떻게 되겠지.》

그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여보, 제가 어디다 쓰는겐지 알았으면 그랬겠어요. 어째 부녀회장은 그런 소릴 안했을가요?》

《누가 그런것까지 일일이 대줘야 알겠소? 참… 이 체육대회가 보통 운동회 아니란게야 알지 않소. 여기서 조직하는 일은 크나작으나 다 사령관동지 뜻을 받드는 일이란 말이요!》

창억이는 대왕청하쪽을 돌아보다가 한숨을 내쉬였다.

《여보, 이 일을 어쩔가요?》

《실수로만 생각하지 마오.…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소? 내 온성에서 처음 들어왔을 때 밭김을 매면서 그만큼 일렀는데 붕 떠가지고…》

창억이는 더 무슨 말을 하기 멋적다는듯 돌아서 결패스럽게 걸어갔다. 그 걸음이 보통걸음인것 같지 않았다. 보금이의 얼굴이 해쓱해지고 가슴에 안았던 꽃가지들이 화라락 떨어져 발밑에 흩어졌다.

그는 남편을 불러세우고 무엇인가 말하고싶어 흩어진 꽃가지들을 밟으며 달려나갔다. 그러나 몇걸음 못 나가서 멎어서고말았다. 남편을 부를 맥이 없어서였다.

체육대회가 있은 다음날 장군님께서 휴식을 주시여 가족이 있는 유격대원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왔으나 창억이는 오지 않았다. 보금이는 그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자기들의 사이가 이전처럼 버성겨지는것 같아 눈굽이 바싹 말라들고 목안에 재가 차는듯 하였다.

이튿날 보금이는 침통한 얼굴로 내내 집에 붙박혀있다가 빨래함지를 안고 소왕청하로 나갔다.

그처럼 흥성거리던 마을길은 조용하였다.

보금이 빨래함지를 물녘에 놓고 손맥이 풀려 오도카니 앉아있다가 빨래를 물에 느릿느릿 헤우는데 물결우에 비누거품이 둥둥 떠내려왔다.

그는 무심결에 얼굴을 들어 웃쪽을 바라보았다. 그쪽의 물황철나무그늘밑에서 흰 머리수건을 쓴 녀자가 빨래를 하고있었다. 부녀회장이였다. 림성실이도 이쪽을 보더니 그를 알아보고 빨래들을 얼른얼른 소랭이에 담아가지고 움쭉 일어나 내려왔다.

두 녀자는 가지런히 앉아 빨래를 하였다.

보금이는 부녀회장의 빨래솜씨를 눈여겨보게 되였다. 림성실은 빨래돌우에 남자웃내의를 접어놓고는 비누칠을 살살 한 다음 조심스러우면서도 매우 부드럽고 날랜 솜씨로 문질렀다. 어느덧 비누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그의 손등을 덮어버렸다.

그는 무슨 생각이 드는지 문득 일손을 멈추고 비누거품이 묻은 손등으로 이마에 흩어져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보금에게 밝게 웃어보였다.

《요전날 세게 욕을 먹었어요?》

보금이는 구슬픈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숙였다.

《아니…》

《무슨 일이 날것 같아 내 몰래 따라갔다가 돌아섰지요.… 내가 잘못해서 보금이가 욕을 봤어요. 차근차근 말해주는건데…》

《어린애라고 그러겠어요. 내가 속이 설익어서 그렇지.…》

《창억동무가 몹시 성났지요?… 무섭게 굴어요?》

《아니… 차라리 그랬으면…》

《탓하지 말아요.… 나는 부러운 생각이 들던데요. 제 안해를 곱게 가꾸어주자는 심정이겠지요. 자기를 그렇게 가꾸어주는 손길이 있다는게 얼마나 좋아요. 호호호…》

그 말에 보금이는 설음이 북받쳐 얼굴을 외로 돌렸다.

림성실은 신이 나서 다시 빨래를 문지르며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그날 저녁에 마동호동무가 보금의 편을 들었다가 창억동무한테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몰라요. 호호호… 창억동무가 이전보다 사람이 달라졌지요?… 보금이는 좋겠어요.…》

보금이는 남의 일을 그처럼 좋게 생각하며 기뻐하는 그 성품이 놀라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림성실은 빨래를 물에 활활 헤우더니 물소리를 쭈르르 내며 들어올렸다. 그의 두손에 들려올라오는 속적삼잔등에서 찢어진데가 보였다.

보금이는 그를 돌아보다가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아니, 왜 그렇게 됐어요?》

《땀에 절어 천이 이렇게 삭아떨어졌어요.》

림성실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그는 적삼을 조심조심 짜고는 가볍게 물기를 턴 다음 보금의 오른쪽옆에 있는 해볕이 잘 드는 너럭바위우에 펴놓았다.

《누구 적삼이야요?》 하고 보금이는 물었다.

림성실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리로 돌아와서 다음빨래를 빨래돌우에 올려놓고 또 비누칠을 하기 시작하였다.

《누구 적삼인가요?》 하고 한참후 보금이는 다시 물었다.

림성실은 빨래돌우에 끓어오른 비누거품속에 두손을 묻은채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잠자코있었다. 고요가 흘렀다. 파란 하늘을 담아싣고 유난히 번들거리는 물우에 버들잎이 한잎 두잎 날아떨어져 파문을 그리였다.

《장군님… 적삼이야요.…》

보금이는 놀라서 너럭바위우에 넌 그 적삼을 돌아보았다. 그 적삼 잔등에서는 수많은 사연을 이야기하는듯 김이 보일락말락 피여오르고있었다.

림성실의 목소리가 귀전을 스쳤다.

《여기 와서부터 입은것 같은데 저렇게 됐어요. 흘리시는 땀에 천이 견디지 못해요.…》

그는 장군님의 로고가 얼마나 크시면 적삼이 저 지경이 됐으랴싶으면서 이름할수 없는 가책에 가슴이 저며지는듯 하였다. 보금이는 장군님의 손길에 이끌려 근거지의 품에 다시 돌아와 살면서도 이런것을 몰랐었다. 난생처음으로 남의 밭이 아니라 제 밭에서 남편과 가지런히 앉아 김을 매는 기쁨을 누리면서도, 그네를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면서도 이 근거지에 기울이신 그이의 로고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다. 삿자리때문에 남편이 꾸짖던 일이 생각되자 그는 한손으로 눈을 가리우고 조용히 흐느꼈다. 림성실이 놀라서 달려와 비누거품이 휘뿌려진 팔로 그의 잔등을 안아 흔들며 다급히 속삭였다.

《보금이… 보금이… 왜 이래요?》

《아니, 그저… 그저…》

우중충한 산그림자가 푸르게 비껴든 물우에 빨래방치 하나가 한가로이 떠돌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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