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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4 회


제 6 장

5

날로 푸르러가는 여름하늘밑에서 솟아올라 펄럭이는 인민혁명정부의 기발들은 두만강연안의 넓은 땅을 붉은 일색으로 덮는듯 하였다.

인민혁명정부의 각급 위원회들은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부문에서 민주주의적개혁들을 실시하여 근거지의 생활에서는 나날이 새로운 변화들이 일어났다.

마을들이 새 모습으로 꾸려져갔다. 곳곳에서 인민혁명정부와 유격대와 반일자위대의 병실들, 아동단학교들이며 살림집들이 새로 건설되거나 보수되고 길들이 닦아지고 징검다리만 놓였던 개천들에 나무다리들이 번듯하게 건너놓였다.

마촌에서는 장군님께서 계시는 자기네 마을을 어느 부락보다도 더 훤하게 꾸리자고 한사람같이 떨쳐나섰다. 리재명회장이 사람들의 앞장에 섰다. 마을사람들은 매일 그의 작업지시에 따라 길도 닦고 고삭아 쓰러진 울바자들도 새로 세우고 집들의 벽이며 퇴마루에 흙매질도 깨끗이 하였다.

인민들은 하얗게 달라붙어 인민혁명정부 구위원회가 든 집에 새 동기와를 잇고 문도 새것으로 갈아달고 벽도 새벽으로 다시 발랐다.

마을은 매일 흥성거렸다. 이러던 어느날 저녁녘에 토지부위원으로 선거되여 회의에 자주 다니는 김진세가 숨이 턱에 닿아 집으로 달려들어왔다. 마침 정지간에서는 허씨와 보금이가 저녁밥상을 차리고있었다.

김진세는 로친과 며느리앞에서 놀라운 소식을 말하였다.

장군님께서 전체 유격근거지들에 인민혁명정부가 수립되고 민주주의적개혁들이 승리적으로 수행되는것을 경축하여 큰 체육대회를 열도록 하셨다는것이였다. 식구들이 기쁨에 겨워 흥성거리며 밥상에 둘러앉았을 때 그는 장군님께서 이번 체육대회에 국내의 인민대표들까지 초청하시였다고 하며 온성에서도 누가 올것 같다고 말하였다.

보금이는 너무 기뻐서 머리가 핑 도는듯 하였다. 그는 얼굴이 발그레 상기되여 시아버지를 쳐다보며 온성에서는 누가 오는지 모르시는가고 물었다. 김진세는 점잖게 수염을 쓸어내리고 빙그레 웃으며 그건 오는것을 봐야 알겠지만 좌우간 이번 체육대회는 그저 운동회가 아니라 근거지인민들의 단결력을 시위하고 각계층 인민대표들을 통하여 전체 조선인민들에게 여기 생활을 알려주자는데 그 취지가 있다고 하였다.

이튿날부터 허씨와 보금이는 어느 대표가 들어와봐도 부끄럽지 않도록 윤이 찰찰 흐르게 집안을 거두고 뜨락과 집으로 들어오는 길가의 풀까지 말끔히 뽑아버렸다. 그리고는 사람들속에 섭쓸려 마을을 거두는 일에 나섰다. 기쁨에 겨워 일하니 치마자락에서 바람이 일도록 뛰여다녀도 힘든줄 몰랐다. 그런데 뜻밖의 경사가 생겼다. 보금이 마촌 그네선수로 뽑힌것이다. 그는 매일 한두시간씩 그네뛰는 련습을 하고 돌아와서는 저녁밥상둘레에 모여앉은 식구들에게 체육대회준비소식을 이야기하였다.

보금이는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던 벅찬 흥분을 그대로 간직하고 그네터에서 얻어들은 소식들을 밥상머리에 펼쳐놓았다. 유격대, 반일자위대, 청년의용군, 부녀회들에서 축구, 달리기, 보물찾기, 그네타기 등 다채로운 경기종목들에 대한 선수들이 선발되여 맹렬한 련습이 벌어지고있으며 셋째섬의 버덩에는 벌써 넓은 운동장이 닦여지고 십리평을 비롯한 여러 마을들에는 래빈들이 들 숙소들이 다 마련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집안에 또다시 새 기쁨이 날아들었다. 보금이 국내에서 들어오는 인민대표들을 맡아 안내하는 안내원으로 뽑힌것이다. 그것은 체육대회의 이틀전 저녁녘에 부녀회장 림성실이 달려들어와서 알린 소식이였다. 성실이는 저도 기뻐서 허씨의 손을 꼭 붙잡고 국내대표들이 안내원의 모습에서도 우리 생활의 일단을 엿볼수 있기때문에 며느리를 빠진데 없이 환하게 차려서 내놓아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허씨는 며느리를 그런 점잖은 손님들앞에 내세우는것이 자랑스러워 잠도 잊고 밤새도록 며느리의 저고리에 풀을 먹여 다듬질을 해놓고 치마조끼가 저고리 아래단밑으로 내밀지 않도록 곱게 손질해놓았다.

이튿날 아침은 날씨가 유난히 화창하였다. 하늘에서는 신선한 해빛이 쏟아져내리고 날아가던 까치는 울바자에 내려앉아 집안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맑은 소리로 우짖어댔다.

허씨는 며느리의 손목을 이끌고 뜨락으로 나와 해빛밑에 세워놓고 머리단장이며 옷차림을 깐깐히 살펴보았다. 내 집에 어찌다가 이런 자랑이 생겼는가싶어 앞에서 한번 여겨보고 뒤에서 다시 두번 세번 뜯어보았다. 단정히 빗어넘겨 크지도 작지도 않게 쪽진 칠흑같은 머리에서 흐르는 윤기, 볕을 잘 들여 옥당목 못지 않게 흰 무명저고리, 인품에 무게를 주는 검정치마… 아무리 여겨봐야 누구한테 짝질것 같지 않아서 이 동네에 사람들앞에 내세워 허물이 되지 않을 사람은 그래도 제 며느리밖에 없다는 자랑까지 슬그머니 들었다.

허씨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며느리의 동실한 어깨를 쓸어만져주었다.

《내 손이 거칠어 이렇게밖에 차려주지 못한다. 쯧쯧…》

보금이는 저 푸른 하늘로 날아오를것 같이 가슴이 부풀어올라 시어머니에게 곱게 웃어보이고 팔을 들어 저고리소매며 치마폭을 기쁨에 넘쳐 훑어보았다.

《어머니 됐어요!》

사립문으로 들어오다가 그 모습을 본 마동호가 이마에 손채양을 불이고 한걸음을 물러서며 흰소리를 던졌다.

《히야- 이거야 눈이 시여 어디 보겠소?》

《이 사람아, 우리 집사람은 안 오나?》 하며 허씨가 그를 반기였다.

《창억이요? 지금 축구련습에 정신이 팔려 색시도 다 잊었수다, 하하하…》

《그 사람도 선수로 뽑혔는가?》

《예, 이 집에 경사에 경사가 겹쳤수다.》

《원 저런… 자네는?…》

《저도 겨우 축구에 들었습니다. 하하하…》

방금 공을 차다가 왔는지 얼굴에 땀이 줄벅한 마동호는 보금의 희한한 모습에 눈을 팔며 창억이 발싸개감을 가져오라고 해서 왔노라고 말하였다.

《왜 저는 못온다나. 이런 날에 집에 좀 들렸으면 얼마나 좋겠나.》

《어머니, 바빠서… 바빠서… 제가 우리 집에 왔던김에 들리기로 했습니다.》

《원 사람두…》

허씨는 아쉬운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고는 얼른 집안으로 달려들어가 발싸개감을 내왔다. 마동호가 그것을 받아쥐고 벙글거리며 돌아서는데 마을길로 무슨 커다란 보짐을 이고 지나가던 림성실이 뜨락을 들여다보며 소리쳤다.

《보금이- 이제 십리평으로 넘어가겠어요?-》

보금이는 그를 반겨 달려나가 사립문을 잡고섰다.

《예-》

《그럼 좀 수고해줘요- 오풍헌아바이네 집에 새 구름노전 석장을 말아놓은게 있는데 그걸 이고 넘어가서 리재명회장동지한테 주라요- 일손이 모자라서 그래요.》

림성실은 걸음이 급하여 더 다른 말이 없이 지나가버렸다.

보금이 돌아오니 허씨는 흐려진 얼굴로 한숨을 지었다.

《에그, 그런 일이 있으문 진작 시킬게지 원, 이제 그걸 이고 십리평까지 가느라문 그 저고리 다 덞겠다!》

그러자 마동호가 오후에 십리평으로 넘어갈 일이 있는데 그때 자기가 지고갈테니 걱정말라고 하였다. 보금이는 시어머니뿐아니라 남인 마동호까지 자기를 이렇게 생각해주는 바람에 얼굴이 더 이쁘장해져 별생각없이 떠날차비를 서둘러 하였다.

얼마후 보금이는 날듯이 걸음을 다그쳐 십리평으로 넘어갔다.

장군님의 초청을 받고 먼곳들에서 찾아온 손님들을 맞이한 십리평은 명절기분으로 흥성거렸다.

집집에서는 대낮인데도 밥짓는 연기가 굴뚝이 터지게 피여오르고 함지며 그릇들을 든 아낙네들이 이집저집으로 바삐 뛰여다녔다. 마을길에 나와 소풍을 하며 근거지의 산천경개를 둘러보는 손님들의 모습도 여기저기에 보였다.

국내대표들이 들어있는 아담한 동기와집으로 가슴을 울렁거리며 찾아들어가던 보금이는 너무도 놀랍고 기뻐 두손을 가슴앞에 모아쥐며 《엄마!》 하고 비명비슷한 소리를 내질렀다.

마당에서 전장원이와 전수원면장이 서성거리고있었던것이다. 전장원은 수수한 밤색양복차림이고 전수원은 조선바지저고리에 민족의 얼이 흐르는듯 한 흰두루마기까지 떨쳐입었다.

보금이는 물기가 반짝이는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를 알아보고 환성을 지르며 달려나온 전장원과 전수원은 반가와 어찌할바를 몰라했다.

사연깊은 녀인을 만난 반가움에 낯선 사람들속에서 비로소 아는 사람을 만나 이제는 손님체면을 덜 차리게 되였다는 기쁨까지 겹쳤던것이다. 보금이 또한 옛 은인을 만났을뿐아니라 전면장까지 초빙되여온것으로 보아 자기가 떠난 사이 고향에서 얼마나 큰 변혁이 일어났겠는가가 짐작이 되여 더 기뻤다. 반가움에 반가움, 기쁨에 기쁨이 겹치여 저도 모르게 눈물부터 머금게 되였다.

전장원은 그의 손을 잡은채로 고향소식부터 서둘러 말하였다. 친정집은 무사하였다. 아버지는 농민협회에 들어 근거지를 돕는 일의 앞장에 서있고 어머니는 야학에까지 나온다고 하였다.

떠들썩하게 온성소식을 말하던 전장원은 문득 뒤를 돌아보며 보금이더러 저 손님한테 인사하라고 귀뜀했다.

퇴마루에 소복단장을 훤하게 한 체구가 장대한 로인이 점잖게 앉아서 수염발을 쓸어만지며 웅심깊게 번쩍이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있었다.

보금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자 로인은 움쭉 일어나서 두루마기앞섶을 천천히 여미며 류다섬대표로 온 한설봉이라고 자기를 소개하였다.

비밀준수상 필요로 대표들은 함부로 자기 주소를 밝히지 않기로 되여있는데 로인은 여기에 믿지 못할 사람이 누구냐는듯 한 배심인지 그쯤한 주의사항에는 아랑곳없었다. 대표들이 점심식사를 푸짐하게 대접받고 푹 쉬고난 다음 보금이는 그들을 데리고 숙소를 나섰다. 근거지생활의 이모저모를 참관시키기 위해서였다. 온성대표들은 안내원과 구면인데도 별로 말을 건네는 일없이 점잖게 따라왔으나 류다섬대표인 한설봉은 그 나이나 풍채에 어울리지 않게 노상 입을 다물줄 몰랐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 보금이와 전장원사이에 오가는 말을 듣고 자기와 한 숙소에 든 두사람이 온성의 풍인동에서 왔다는것을 알았는지 그들에게 그곳 면장이 이전에 해먹던 그놈인가고 물었다. 전수원이 좀 당황해하며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한설봉은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그놈이 유격대가 공작나온것을 왜놈수비대에 고발해서 큰 싸움이 벌어지고 숱한 유격대원들이 피를 흘리게 했다는데 아직도 목숨이 붙어있는가고 물으면서 눈을 무섭게 번뜩이였다. 로인은 거기가 조선넋이 살아있는 땅인가, 왜 그따위놈의 사등뼈를 일찌감치 분질러놓지 못하는가고 엄한 추궁까지 들이대였다. 당사자인 전수원면장은 얼굴이 벌개졌다. 전장원은 껄껄 웃으며 경원땅에는 그따위놈이 없는가고 묻고는 주구 한놈을 처단한다고 조선이 당장 독립이 되는것도 아니기때문에 참아오는데 이제 때가 되면 다 알도리가 있을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보금이는 전면장의 옹색한 립장이 안되기는 했지만 이런 오해와 옥신각신이 재미나기도 하여 손님들 몰래 미소를 지었다.

그는 손님들에게 인민혁명정부 구위원회 각 부서의 사무실들을 참관시키고 마을을 구경시킨 다음 그들을 버덩의 밭으로 안내하였다. 밭들에서는 푸르싱싱하게 자라오른 조, 귀밀, 감자, 강냉이 등의 곡식들이 해빛에 잎사귀들을 반짝이며 살랑살랑 설레이고있었다.

보금이는 그 곡식들을 보자 이들에게 자기네 밭을 꼭 보여주고 긴 이야기를 해주자는 욕심이 들어 토지개혁에서 농민들이 토지를 얼마씩이나 분여받았는가에 대하여 대충 말해주었다. 그래도 한설봉이와 전수원은 너무도 꿈같은 일이여서 밭이랑으로 달려들어가 곡식들을 쓸어만지고 흙을 쥐여 부스러뜨려보며 감탄을 금치 못해하였다.

보금이 손님들을 데리고 마촌 아동단학교에 이르렀을 때 마침 한 교실에서는 박현숙선생이 수업을 진행하고있었다.

새로 보수한 교실안에는 향긋한 송진냄새가 떠돌았다.

세줄로 놓인 책상들에 앉아있는 어린이들은 낯선 손님들이 들어오니 뒤를 돌아보며 잠시 웅성거리다가 인차 앉음새를 바로가지고 흑판을 쳐다보았다.

손님들에게 상냥한 눈인사를 보내고난 박현숙은 흑판에 조선지도를 크게 그리고 강들을 그려놓기 시작하였다.

선생이 강을 하나하나 그려놓을 때마다 입속으로 그 강이름들을 외워보는 기쁨에 넘친 속삭임소리들이 방안에 가득찼다.

이윽고 박현숙은 어린이들쪽으로 돌아서서 그 인상적인 새별눈을 빛내이며 맑은 목청으로 말하였다.

《아동단원동무들, 지도에 그려진 이 강들이 우리 나라의 제일 큰 강들입니다. 지금 이 강들에는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피눈물이 흐르고있습니다. 피눈물과 한숨이 흐르는 강은 죽은 강이나 다름없지요. 그러나 동무들이 어서 배워 훌륭한 혁명가로 자라나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한다면 이 강들은 다시 투쟁의 노래가 흐르는 강으로 살아나서 세차게 물결치며 흐를것입니다.… 제가 먼저 강이름을 부르면 동무들은 따라불러야 합니다. 지도를 보십시오. 백두산의 정기를 담아싣고 동서로 갈라져 흐르는 이 두 강은 압록강과 두만강입니다.》

박현숙은 지시봉으로 압록강을 짚으며 맑고 높은 목소리로 불렀다.

《압록강!》

어린이들은 목소리를 합쳐 힘차게 따라불렀다.

《압록강!》

《두만강!》

《두만강!》

《청천강!》

《청천강!》

《대동강!》

《대동강!》

보금이는 문득 검푸른 두만강물결의 희끗희끗한 물갈기가 눈앞에 떠오르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박현숙의 눈에서도 무엇인가 번쩍거리는것이 보였다.

《다시… 대동강!》

《대동강!》

《다시… 대동강!》

《대동강!》

어린이들은 머리들을 흔들며 더 높이, 더 우렁차게 부르짖었다. 그 피타는 부르짖음소리에 교실이 떠나가는듯 하였다.

《여기서는 조국의 넋을 불러일으키고있습니다.…》

보금이는 이런 속삭임소리가 들려 옆을 돌아보았다. 전수원면장이 얼굴을 수굿하고 팔소매끝으로 눈굽을 찍어내고있었다.

그의 곁에 선 한설봉로인은 자랑이 넘치는 눈으로 아이들을 둘러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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