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 회
제 6 장
4
이날
귀틀집형식으로 새로 번듯하게 지은 아동단학교 교사에서는 송진내가 풍겨나오는듯 하였다. 넓게 닦은 학교마당에 가설무대처럼 림시로 꾸려놓은 연단앞에는 가슴마다에 꽃송이를 단 아동단원들이 학년별로 서고 그뒤에 수백명의 사람들이 빼곡이 둘러서서 설레이고있었다.
마당둘레에는 여러 마을들에서 온 참관단원들이 환한 얼굴로 겹겹이 둘러서있었다. 그들속에서는 목책을 펼쳐들고 무엇인가를 자꾸 적어넣는 사람들도 보였다. 연단뒤에는 이깔나무를 잘 다듬어서 만든 기발게양대가 세워졌다. 그뒤에는 유격대참관단이 총을 세워쥐고 두줄로 엄숙하게 서있었다.
교문에 높이 세워진 솔문앞에는 아동단가창대가 길을 사이에 두고 늘어서서 《인민주권가》를 부르며 꽹과리, 북소리를 들썩하게 높였다. 학교갈 나이가 못된 조무래기들은 세상에 나서 처음보는 이런 경사에 얼이 쳐서 강아지를 뒤에 달고 이리저리 뛰여다니는가 하면 남의 집 담장이나 헛간, 옛날에는 범접도 못하던 국수당나무우에까지 주렁주렁 열린 박처럼 올라앉아서 명절일색인 마을을 내려다보며 좋아라 깔깔 웃어대였다. 여느때 같으면 어른들이 당장 내려오라고 호령이겠으나 오늘은 모두 어찌나 너그러워졌는지 하나의 구경거리로 쳐다보며 빙그레 웃기만 한다.
학교마당에 모여서 설레이는 형형색색의 사람들속에서 누구누구 하여도 학부형들이 제일 흥분되여있었다.
사람들은 이 산골마을에 학교까지 생겼으니 이것이야말로 천지개벽이 아닌가고 하면서 너무도 희한하여 목을 길게 빼들고 장내를 둘러보며 《야-》, 《야-》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까까중이머리, 더벅머리, 상투머리의 얼굴, 얼굴들… 그 얼굴들은 끝없이 떠들고 웃으며 설레인다. 외태머리, 쌍태머리 처녀의 얼굴들도 점점이 피여난 꽃잎처럼 여기저기에 흩어져있어 모임장소의 색채를 돋군다.
서로 이웃이면서도 이런 경사의 자리에 오니 새세상에 새로 태여난듯 하여 새삼스럽게 손들을 잡고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연단옆 게시판에 활달한 붓글씨로 써서 붙인 개교식순서를 목소리를 합쳐 읽었다.
베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인 어리무던하게 생긴 중년농민이 옆에 선 청년에게 말을 건넨다.
《여보게, 저 여섯번째 식순에 있는 기발게양이란건… 어떻게 한다는겐지 자네 아나?》
청년은 그를 언짢게 돌아본다. 그것도 모르면서 여기와 섰겠는가 하는 표정이다. 그러나 베수건은 얼굴이 엄엄해져서 청년에게 일러준다.
《인민혁명정부 건물우에 붉은기발을 올린다는 소리네…》
그러자 청년은 빙긋이 웃으며 그의 귀에 대고 수군거린다.
《아저씨, 잠자코 있어요. 누구나 다 아는걸. 자꾸 큰소리로 말하면 우리 자갈촌 체면이 깎여요.》
베수건은 얼굴이 벌개져서 눈을 껌뻑거린다. 앞줄에 앉아있는 할머니들은 입을 싸쥐기도 하고 서로 어깨를 치기도 하면서 숨이 넘어가는 소리로 웃어댄다. 그들은 인민혁명정부 이야기가 나오자 지난날 쏘베트때 《쇠버치》를 구경하러 가던 이야기를 하고있는것이다.
《아이고, 말을 마오. 요새는 모두 웃지마는 그때 무산집아매는 진짜 쇠버치로 알지 않았소?》
《뉘기 아니라오. 호호호… 모두 헤가 안 돌아가 쏘베트를 쇠버치… 쇠버치… 하다나니까 그렇게 됐습지비. 그때 구경갔다가 공걸음을 하고 돌아와서 뿔이 났던 일을 생각하문사… 호호호.》
《지금 와서 나는 똑똑했소 할 사람이 벨로 없다이까. 저 지유복이란 사람도 요새는 룡이 됐지만 그때는 얼빤했지. 글쎄 그때
《마촌에서 나온 부녀회장이
《하하하…》
《아이고, 이 로친네가 땅임자에 학생까지 되문 이제 어떻게 되겠소. 호호호…》
《그러게 나이가 원쑤라는게요. 호호호…》
이때였다.
혈전만리의 전진흔적이 력연한 군복차림과 초연에 그슬려 철색이 도는 억센 얼굴모습, 정기가 불타오르는 눈 그리고 신선한 기운을 만장에 풍기시는 그 젊음과 출중하신 인품에 놀란 군중들은 한순간 숨도 못 쉬고
《
《만세-》
마음이 여린 아낙네들과 처녀들은 얼굴을 싸쥐고 어깨를 마구 떨며 흐느껴울기 시작하고 앞줄의 청년들은
리재명은 무진애를 써서 군중들을 진정시키고는 개회를 선언하고 이제부터
연단에 나서신
《여러분, 우리는 수많은
인민들은 분기를 참을수 없어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가 하면
사람들은
《어쩌문 저렇게 젊으시고 용모도 어디 하나 빠진데가 없으실가!》
《내 뭐라고 했소. 그래서 하늘이 낸분이라는 말이 돈다니까.》
《아재, 그런데
그러자 그 아재라는 얼굴이 갸름하게 생긴 젊은 녀자는 얼굴이 무던하게 생긴 아낙네를 돌아보며 제법 아는 소리를 한다.
《인민의
《글쎄- 나두 그렇다- 생각했다니까.》
《여러분, 우리가 나라를 찾고 잘살기 위해서는 우선 왜놈들과 끝까지 싸워이겨야 합니다. 그래야 이런 모든 행복이 영원히 우리의것으로 됩니다. 우리가 왜놈들과 싸워이기자면 유격대와 인민이 한마음한뜻이 되여야 합니다. 유격대는 인민을 위하고 인민은 유격대를 도와야 하며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혁명을 도우며 왜놈들과 싸워야 승리할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민혁명정부의 혜택으로 토지를 분여받고 학교까지 내왔으니 이제부터는 유족하고 편안한 생활만 누리게 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할일은 이제부터 많습니다… 또 왜놈들은 우리 혁명이 이렇게 성숙돼가고 우리 혁명력량이 강화될수록 더 미친듯이 발악해나설것입니다. 때문에 적이 언제 쳐들어와도 우리의 정권이 선 이 근거지를 지켜낼수 있도록 튼튼히 준비를 갖추고있어야 합니다. 지금 어떤 지방들에서는 구국군들이 조선공산주의자들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있기때문에 적지 않은 난관을 겪고있습니다. 그들이 부당하게 나온다고 하여도 우리는 참을성을 가지고 그들을 신중하게 대하여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 혁명에 대하여 옳은 인식을 가지도록 꾸준히 설복하며 좋은 정치적영향을 주어 일제의 기만선전에 넘어가지 않고 우리와 어깨겯고 조중인민의 공동의 원쑤인 일제를 반대하여 싸우도록 하여야 합니다. 인민혁명정부는 이 점에 특별한 관심을 돌리고 중국인민들과의 친선을 강화하는 사업도 잘해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혁명력량을 강화하는 한편 국제적련대성을 강화하는 사업도 잘해야
래빈들의 축사가 있은 다음 리재명이와 지유복이
지유복은 손을 거북하게 놀려 기폭을 가슴우에까지 끌어올리고는 어찌할바를 몰라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지유복은 허리를 꿋꿋이 펴고 경건한 얼굴로 게양대로 다가갔다. 그는 게양대끝에서 흘러내린 노끈에 기폭의 두귀를 매였다.
순간 설레이던 학교마당은 잔잔한 바다처럼 고요해졌다. 아동단원들과 인민들은 숨을 죽이고 게양대만 바라보았다. 수많은 시선들이 집중된 초점에 선 지유복은 긴장된 얼굴로 노끈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기기 시작하였다.
기폭은 무엇에 화락하니 젖기라도 한듯 밑으로 드리운채 게양대를 따라 무겁게 끌려올라갔다.
《이게 무슨 일이요?》
《하, 왜 펴지지 않을가? 왜 저럴가?》
《좀 수선을 떨지 마시오.》
《저게 보통 기발인가!…》
지유복이도 무슨 의혹에 사로잡힌듯 흠칫 놀라며 손을 멈추었다가 다시 힘을 주어 게양줄을 씽씽 당겼다. 기폭은 여전히 펼쳐지지 않은채로 올라갔다.
마침내 게양대의 아스라한 끝에까지 이른 기발은 별안간 푸른 하늘에서 생명력을 받아안은듯 기폭을 활짝 펴고 퍼덕퍼덕 소리를 내며 나붓기였다.
사람들은 기발을 넋없이 쳐다보았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였다. 움직이는 사람도 없었다. 열화같은 격정에 목이 메여서인가, 이름할수 없는 희열과 지난 시절의 회억들이 휩쓸어들어서인가 장내는 그 깊이를 가늠할수 없는 바다속처럼 고요해졌다. 기발이 점점 세차게 펄럭이는 소리가 이 놀라운 고요를 더 짙게 하였다.
앞줄에 서있는 수염발이 허연 로인이 허리를 앞으로 푹 꺾었다가 두팔을 번쩍 쳐들어올리며 함성을 내질렀다.
《만- 세-》
그러자 사람들은 땅을 차고 뛰여오르며 만세를 불렀다.
이때 리재명이
《무슨 일이요?》
《올랐소. 장포리! 함께 나가보기요.》
《옳소! 룡산동무, 우리 잘 새겨둡시다. 먼 후날에도 오늘을 잊지 맙시다.》
창억이도 곁에서 머리를 쳐들고 기발을 올려다보았다.
학교운동장에서 터져오르는 인민들의 환호소리, 노래소리, 징과 북을 두드려대는 소리, 만세소리들이 하늘땅을 뒤흔들었다.
《만세!-》
《인민혁명정부 만세!-》
《
기발게양대의 둘레에서도 억대우같은 장정들, 꽃나이 색시들, 아낙네들, 파파늙은 로파들이 한데 어울려서 농무를 추며 돌아갔다. 처녀들도 수태를 머금고 눈을 아래로 깔고는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돌아갔다. 한 할머니는 등에 업은 손자놈의 엉치를 뚝뚝 두드리며 처녀들의 뒤를 따랐다.
징잡이는 처녀들쪽에 대고 흥을 버쩍 올리라고 귀가 아프도록 꽹매기를 두드려댔다. 처녀들은 그 소리에 쫓기는듯 바스러지는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잰걸음으로 돌아갔다. 징소리, 노래소리, 외마디 탄성들…
《좋-다.》
《좋-지-》
창억이는 저도 모르게 온몸이 흥분으로 차올랐다.
기발은 만리대공을 나는 수리처럼 깃을 활짝 펴고 생기발랄하게 나붓기며 붉은빛을 온 누리에 뿌리고있었다. 문득 장룡산중대장의 말소리가 가슴에 젖어들었다.
(…책이 따로없다… 근거지가 큰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