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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7 회


제 7 장

6

사흘전에 정애경은 송금주가 보낸 등기편지를 받았다. 말이 편지였지 실상은 결혼식에 와달라는 청첩이나 다름없었다. 그 한장의 청첩을 통하여 정애경은 송금주를 평양에 소환하려던 자기의 꿈이 망상이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이 엄청난 사실앞에서 주눅이 들 지경으로 실망하였으나 송금주의 상대가 최창화라는 구면인물이라는것을 알게 되자 안도감을 느끼였다.

송금주의 등기편지를 받은 그날부터 정애경은 영천행차에 필요한 맹렬한 준비작업에 돌입하였다. 송금주와의 우정으로 보나 그가 자기네 결혼식에 참가한 선례로 보나 정애경이 영천행을 결심하고 그 준비에 달라붙은것은 응당한 일이였다.

처음에는 그가 혼자서 명세까지 만들어가지고 영천에 들고갈 례물을 마련하느라고 사방으로 뛰여다니였다. 신부옷 1벌, 녀자내의 1착, 신랑옷 1벌, 트렁크 1개, 손목시계 1개, 상술, 상과자를 비롯하여 갖추어야 할 례물과 상품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이 모든것을 혼자서 사들이자니 힘에 부치였다.

오봉선이 보다못해 한마디 하였다.

《금애 에미야, 독불장군이란 말을 잊었느냐. 너처럼 그렇게 혼자서 뛰여다니다가는 아이달린 녀자가 견디지 못한다. 명세를 놓고 분공만 해라. 그럼 나두 뛰구 미영이두 뛰구 금애 애비도 뛸게 아니냐.》

《어머니두 참, 좀 힘들면 뭐라나요.》

《그런게 아니라는데두. 여러 말 말고 그 준비품명세나 좀 보자.》

정애경은 마지못해 자기가 손수 작성한 준비품명세서를 시어머니에게 보이였다. 그는 절약형의 녀성인 오봉선이 준비품의 가지수가 너무 와디디하다는 지청구라도 하지 않겠나 하여 은근히 마음을 조이였다.

그런데 오봉선은 예상외로 미간이 환해지더니 함박같은 웃음을 담고 정애경을 칭찬하는것이였다.

《친구를 생각하는 네 마음이 참으로 따뜻하구나. 이보다 더 많은걸 해준대도 나는 달리 생각지 않겠다. 금주선생은 량친을 다 잃은 전사자유자녀이고 밭은 살붙이라고는 고모와 이모밖에 없다는데 네가 친자매구실을 해야 할게 아니냐.》

절약형녀성의 전형이라고 할수 있는 시어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말치고는 너무도 뜨겁고 정겨웠다. 정애경의 눈에는 이 순간처럼 오봉선의 모습이 돋보인적이 없었다. 오늘은 그의 덧이에까지 정이 푹푹 실리는것 같았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욕심같아서는 이불장, 옷장, 찬장일식을 결혼기념으로 해주고싶은 심정인데 그건 마음뿐이고… 그래서 한가지라도 더 해주고싶어 빨래줄같은 명세를 만들었는데 우리 집 살림살이에 영향을 미치지 않겠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애경은 여기까지 말하고나서 시어머니의 얼굴을 살짝 쳐다보았다.

한번도 내뱉지 않았던 심중의 말을 말짱 해놓고나니 마음도 개운해지고 굳은살이 배긴것처럼 뻣뻣하던 혀바닥도 말랑말랑해지는것 같았다.

오봉선은 마주앉은 정애경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슬쩍 건드리며 나무람이라도 할것 같은 표정으로 량쪽눈섭을 모아붙이였다.

《영향은 무슨 영향, 남을 돕느라면 제 쌀독이 곯을수도 있지. 그런 걱정일랑 하지도 말아라. 돈을 뒀다가 그런데 쓰지 않고 어따 쓰겠느냐. 사람이란 돈으로 사는게 아니라 정으로 산단다.》

이런 말을 하는 순간의 오봉선을 보면 흡사 철학자같기도 하였다. 송금주가 걸핏하면 정애경을 보고 《정헤겔》이라고 부르군 했는데 오봉선이야말로 《오헤겔》이라는 별명을 붙일만한 녀인이였다.

그날부터 영천행사준비와 관련한 정애경의 작전은 포장도로우에 미끄러져가는 자동차바퀴처럼 거침없이 굴러갔다. 친정집 부모들까지 이 작전에 합세하였다. 정애경은 신바람이 나서 두 집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사들이는 물건들을 분류별로 선별하여 트렁크에 집어넣었다. 출발 하루전까지는 작전이 끝났다. 닷새후에는 영천땅에서 송금주의 결혼식이 거행되게 된다.

다음의 준비는 정애경자신의 차림새이다. 차림새를 갖추는데서는 삼자의 조언이 필요없다. 그가 결심하면 그것으로 준비는 끝난다. 10월의 절기에 어울리는 옷으로는 어떤게 좋을가. 10월에는 대체로 소매가 긴 달린옷을 입든가, 양복을 입든가, 양장에 봄가을외투를 걸치고 다니는것이 상식이다.

수도생활 4년사이에 정애경은 일곱벌의 옷을 해입었다. 봄가을옷 세벌에 여름옷 세벌, 겨울옷 한벌이다. 영천과 청진서 학교를 다닐 때 입던 옷까지 합치면 도합 12벌의 옷이 옷장속에 있는것으로 된다. 평양에 와서 해입은 옷은 모두 나이론과 데트론, 약산단으로 지은 품위있는것들이다.

정애경이 영천에 가면 송금주는 십중팔구 그를 둘러리로 세우자고 할것이다. 둘러리는 양장을 하지 않고 치마저고리를 입고 서는것이 어느 고장에서나 전통화되여있다. 그런즉 조선치마저고리 한벌은 무조건 지참해야 한다. 그다음은 렬차안에서 입고갈 옷이 문제이다. 렬차안에서는 간편한 옷을 입어야 한다. 양복에 바지를 입어도 좋고 소매가 긴 달린옷도 좋다.

정애경은 이런 식으로 얼추 타산을 세운 다음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둘러리용으로는 약산단치마저고리를 꺼내고 렬차용으로는 자주색 바탕에 깜장콩알무늬가 박힌 달린옷을 집어냈다. 둘러리용 치마저고리는 맞춤한데 달린옷은 절기로 볼 때 철이 늦은감이 들어 옷장의 두번째 단까지 발칵 뒤지였다. 그러다가 그는 가슴이 뜨끔해지는 충격을 받고 전기에라도 감전된 사람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입직후 첫 생활비로 송금주가 지어준 도라지색 치마저고리가 눈에 걸려들었던것이다.

영천서 교원을 할 때 세번인지 네번인지 입어보고는 한번도 입어보지 못한 옷이다. 평양에 와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후로는 자기에게 그런 치마저고리가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온 정애경이였다. 설사 그 옷의 존재를 늘 의식하고있었다 하더라도 입지는 않았을것이다. 그가 수도에 와서 해입은 옷들은 어느것이나 다 그보다 천도 좋고 모양새도 좋은 최신류행에 충실한 품위있는것들이였다.

송금주의 우정을 상징하는 치마저고리는 스스로 현대풍의 그 옷들에 자리를 내주지 않으면 안되였다.

정애경은 불발탄이라도 다루는 사람처럼 옷장 아래단 맨 밑바닥에서 문제의 그 스프치마저고리를 조심조심 꺼냈다. 코를 알싸하게 하는 좀약냄새에 머리가 핑 도는것 같았다. 장속에 사장시켜두었던 옷이건만 어쩐지 탈색이 된듯 한감도 나고 천살이 나른해진듯 한감도 들었다. 포개여넣을 때 손질을 잘못했던지 저고리와 치마에 보기 싫은 흉터처럼 전에 없던 주름까지 잡혀 주글주글했다.

수도에 온 후 4년동안 한번도 입지 않고 옷장속에 구겨박아둔것은 그런대로 변명할 여지가 있다. 그렇지만 영원히 변치 않을 우정의 상징물처럼 신성시해오던 그 옷에 여러가닥의 주름이 지도록 아무렇게나 건사해온 잘못은 그 어떤 구실로써도 변명할수 없을것이다.

왜 이런 주름이 생기였을가. 장속에 옷을 넣을 때 되는대로 넣은탓일가. 송금주가 만일 주름을 안은채 여러해동안이나 버림받은 이 옷의 꼬락서니를 본다면 얼마나 섭섭해하겠는가.

시작이 언제였던지 딱히 꼬집어 말할수는 없어도 처녀의 뽕뽕한 볼처럼 기름기가 흐르고 허물자리 하나 없던 나의 우정에 주름살이 생기고 때가 들어앉았다. 한여름의 복숭아인양 질벅질벅하던 우정의 즙도 반나마 말라버리고 갓난아기의 젖살마냥 뽀얗던 우정의 윤기에서도 광채가 꺼졌다.

둘이서 꼭같이 이 옷을 해입으려고 상점으로, 양복점으로 발에서 불이 일게 뛰여다니던 송금주의 6년전 모습이 지금도 눈에 삼삼하다. 양복점의 거울앞에서 다 된 치마저고리를 떨쳐입고 나란히 서서 이른아침의 나팔꽃같은 미소를 지으며 희열에 넘쳐 《됐어!》, 《멋있어!》하고 귀속말로 속삭이던 전경도 기억에 새롭다. 그 치마저고리를 걸치고 개학날의 운동장에 서있을 때 나와 송금주에게 쏠리던 그 수백쌍의 선망에 불타는 눈길들을 어떻게 잊을수 있겠는가. 둘이서 그 치마저고리를 뽑아입고 국립교향악단공연이 벌어지는 공설운동장으로 쌍나비처럼 날아가던 그밤의 그 공기는 또 얼마나 신선하고 달크무레했던가. 그래 그 모든 사연들이 이제 와서는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것으로 되였단 말인가.

아니다, 그럴수가 없다! 그것은 피와 살처럼 소중한 내 인생의 한토막이며 우리의 처녀시절을 장식한 지울수 없는 화폭이다. 다만 내 생활의 넓은 공간에서 향기를 풍기며 끝없는 즐거움을 주던 그 사연들이 그동안 추억의 변두리에서 물러나 안개속에 싸여있었을뿐이다.

그러면 그 넓은 공간은 무엇이 차지하였는가. 그것은 결혼과 가정이라는 개념의 합성으로 이루어지는 수도에서의 신혼생활이다. 송금주가 차지했던 자리를 강석민이 차지했고 금애가 차지했으며 시부모들과 친정집부모들이 차지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불가피한 일이다. 우정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신혼생활에 몰두하면서도 송금주라는 존재를 잊은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송금주와의 우정에 주름살이 가게 하였는가. 다른 리유란 있을수 없다. 그것은 신혼생활로부터 오는 중하와 그 중하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향락일것이고 자만자족일것이다. 이것이 그의 우정에 주름살과 변색을 가져왔다.

내가 어느새 자기만을 생각하며 생활의 진미에 현혹되여 과거를 잊어버리는 그런 용렬한 인간이 되였을가. 우리의 우정에는 금이 가도 안되고 주름이 져도 안된다. 처녀시절의 우정이란 백합같이 하얀 순결을 그대로 간직한 락락장송이 되여야 한다. 우선 이 치마저고리의 주름살부터 펴놓아야지.

이런 결심을 한 순간부터 정애경은 송금주가 지어준 그 스프직치마저고리에 다림질을 하기 시작했다. 입으로 물을 뿌리고 전기다리미로 주름살을 펴나갔다. 시래기같이 보이던 옷에 꼴기가 되살아났다. 다림질을 끝낸 치마저고리를 옷걸개에 걸어 옷장 문손잡이에 걸어놓았다.

가만, 이 옷을 입고 영천에 가면 어떨가. 절기로 보면 물론 철늦은 옷이다. 그러나 관례에 구애될 필요는 없다. 렬차안에서도 이 옷을 입고 둘러리를 설 때도 이 옷을 입자. 그러면 송금주가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그리고 영천중학교 교원들은 또 얼마나 깊은 감회에 잠기겠는가.

다음날 정오에 정애경은 결심대로 절기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단아하고 청초한 멋을 느끼게 하는 그 스프직치마저고리를 입고 서평양역으로 나갔다. 강석민이 량손에 트렁크를 하나씩 들고 그를 따라나섰다.

《여보, 그 옷을 입으니 당신이 더 고와보이누만.》

전차정류소에서 내려 역으로 걸어가던 강석민이 안해의 차림새를 흘끔흘끔 살펴보다가 진심으로 말했다. 정애경은 남편의 그 말에 안도감을 느끼였다. 절기에 맞지 않는 옷이라고 하면 어쩌나 했는데 웬걸 오히려 칭찬이다.

《정말 옷이 마음에 들어요?》

《정말이요. 어데서 이런 멋쟁이옷이 굴러들었소?》

《송금주선생이 교단에 선 후 처음 받은 생활비로 해준 옷이예요. 결혼후 옷장속에 넣어두고 한번도 입지 않았으니 당신 눈에 설수밖에.》

《아까운 옷이 사장돼있었구만. 색갈도 고상하고, 품위도 있고. 당신은 그 옷으로 처녀시절을 재생시켰구만.》

《처녀시절이 아니라 처녀시절의 우정이지요.》

강석민은 그 말의 의미를 음미하는지 고개를 짓숙이고 묵묵히 걸음을 옮기였다. 기다림칸 의자에 트렁크를 내려놓은 그는 표파는 곳에 다가가 영천행 차표 한장을 사가지고 얼른 돌아왔다.

역홈은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우리 나라 철길중에서 제일 긴 로선을 달리게 될 사람들이다. 여기는 고원역 기다림칸처럼 평안도말씨와 함경도말씨가 비빔밥처럼 뒤섞여서 들리는 곳이다. 고향의 말씨가 귀전에 와닿자 양덕, 맹산의 급류처럼 향수가 가슴이 버그러지게 밀려오고 그 향수속에서 송금주의 정겨운 모습이 불쑥 솟구쳐올랐다.

빈정거리는듯 한 눈매, 빈정거리는듯 한 입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그것은 송금주가 정애경과 마주서서 입방아질을 할 때에만 보여주군하는 특이한 표정이다. 그 표정이 그립고 이죽거리는 야지와 유모아도 그립다.

정애경은 창가에 다가서서 창유리에 그의 이름을 써보았다.

그의 어깨너머로 안해의 손가락자국을 새겨가던 강석민이 조용히 말했다.

《당신들의 우정은 참으로 특이한 우정이요. 정말 탄복할 지경이요.》

정애경은 고개를 돌려 남편의 얼굴을 할끔 쳐다보았다.

《그 우정을 두고 나는 늘 자부심을 느끼군 해요. 그 우정이 없었더라면 난 정말 고독하고 따분한 인간이 되였을거예요. 당신이 나를 끌고가는 하나의 견인차라면 송금주는 다른 하나의 견인차와 같은 존재라고 말할수 있지요.》

《내가 당신을 평양으로 채오지 않았더라면 당신네 우정은 좀 더 아기자기하게 발전했을거요. 나때문에 당신네 우정이 서리를 맞은셈이지.》

강석민은 짐짓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내심 아픔을 느끼는듯한 처량한 표정을 그리였다.

《그건 사실이예요. 내가 영천을 떠날 때 금주선생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당신은 다 모르지요.》

개찰을 알리는 려객안내원의 쟁쟁한 목소리가 그들의 대화를 사정없이 잘라던지였다.

정애경과 강석민은 장사진을 이룬 려행자들의 뒤꽁무니에서 서두르지도 않고 흐르는 물결에 실려 천천히 나들문을 빠져나가 차에 올랐다.

10월의 대기는 차고 눅눅하였으나 인파로 북적대는 렬차안의 공기는 후끈하였다. 서로 부르고 화답하는 가지각색억양의 목소리들이 한 10분쯤 그 후끈한 공기에 열을 보태주는듯싶었다.

차량의 중심부 창문쪽으로 자리잡은 정애경은 강석민과 함께 천정밑에 매달린 선반에 짐을 올리느라고 안깐힘을 썼다. 트렁크가 자그만치 3개나 되였다. 첫 트렁크와 두번째 트렁크에는 송금주에게 전할 옷과 내의류들이 들어있고 세번째 트렁크에는 상술과 상과자와 정애경이 려행도중에 쓸 세면도구와 허드레옷 한벌이 들어있었다.

짐을 다 들어올리자 강석민은 안해에게 걱정스러운듯이 물었다.

《여보, 당신 혼자서 트렁크 세개를 감당할수 있겠소?》

정애경은 남편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볼부은 소리로 응수했다.

《그런 걱정은 말라는데두요.》

《걱정 안하게 됐소. 트렁크 한개만 들어도 팔뚝사리가 얼얼해나는데…》

《나한테 다 수가 있어요.》

《수라니?》

《이것 봐요. 렬차에 일단 오르면 이 차안의 손님들이 다 친구가 되고 동지가 되는데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 될게 아니예요. 나를 고립무원한 존재로 보니까 그런 쓸데없는 걱정이 생기지요.》

《옳수다!》

맞은편 의자우에서 고리짝을 올리느라고 분주스럽게 덤벼치던 40대의 뚱뚱한 녀인이 부자집마나님같은 풍채에 어울리는 여유작작한 거동으로 정애경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아재말이 지당하우다. 이제부터는 나두 아재 친구니까 트렁크같은건 걱정말라이.》

《아주머닌 어디까지 가십니까?》

강석민이 물었다.

《어랑까지 가지비. 서방님 색시는?》

《영천까지 갑니다.》

《그럼 됐구마. 영천하구 어랑은 한고향과 같은데 내가 도와주지비. 그런데 서방님 색시만은 건사 못하겠소다.》

《건 왜요?》

《너무 고우니까 그러지비. 누가 자루에 넣어서 훔쳐가면 나같은 아낙이 그걸 막아낼 재간이 있겠습메. 그럼 난 책임 못 지겠다이.》

차안에서는 유쾌한 웃음덩어리들이 꽃보라처럼 터져올랐다. 강석민도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그래 저 아주머닌 나를 도와줄것이다. 외형만 보아도 믿음이 가는 얼굴이다. 겉치레와 아양을 모르는 투박한 그의 말투가 또한 믿음을 더해준다.

정애경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재빨리 주먹구구를 굴리였다. 차가 고덕역에 도착하면 저 녀자가 승강대아래까지 트렁크를 들어다줄것이다.

그다음은 송금주가 부임지인 영천땅에 들어설 때처럼 제2의 김동주가 기적같이 나타나 내 짐짝들을 역기다림칸으로, 역기다림칸에서 다시 신영천행 통근렬차로 날라다줄것이다. 신영천역에서 또 다른 김동주들이 나를 거들어줄것이다. 아니, 송금주와 최창화가 나를 마중할것이다.

기적소리가 빵- 하고 울리자 강석민은 《여보, 잘 다녀오오.》 하고는 렬차에서 내리였다. 그다음 두번째, 세번째로 되는 기적소리가 다시 울리였다. 그러자 렬차가 서서히 역구내를 미끄러져가기 시작했다.

바라고바라고 또 바라던 영천행이 마침내 닻을 올리였다. 렬차는 구내를 빠져나가면서 점차 속도를 높이였다. 레루우로 굴러가는 차바퀴소리가 귀맛좋게 들린다.

서포, 간리, 배산점, 평성, 봉학… 낯익은 역명들이 눈앞으로 연거퍼 지나간다. 무심히 스쳐보내군 하던 그 역명들에도 오늘은 어째서인지 정이 쏠린다. 어인 까닭일가, 탈선되였던 인생을 궤도에 올려세울 결심을 하고 떳떳치 못한 과거와의 결별을 선언한데 대한 마음속 보상일가.

수도견학을 올 때 금주와 둘이서 역의 개수를 세다가 수자를 삭갈려 더 세지 못하고 115개니, 118개니 하고 승벽내기로 떠들던 일이 불쑥 떠올랐다. 렬차식당에서 순번을 기다릴 때 저마끔씩 자리를 양보하던 일, 렬차원의 손에서 밀대를 뺏아쥐고 바닥청소에 열을 내던 일, 건설중에 있는 도시와 마을들을 차창너머로 내다보며 《내 나라》와 《내 고향》노래를 부르던 일… 그 모든 정경들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눈앞에서 아롱거리였다.

어찌하여 오늘은 이다지도 지난날의 모든 일들이 감회깊게만 안겨오고 그 모든것들이 다 보라빛으로만 되살아오는것일가. 내 마음속에 과거를 돌이켜보고 아무런 자랑거리도 없는 오늘을 뛰여넘어 생기발랄한 미래를 설계할만한 여유가 생긴 까닭일가.

차는 어느새 순천역을 가까이하고있었다. 약간 설익기는 하나 기백이 넘치는 악대의 나팔소리가 멀리서부터 회오리바람과도 같이 렬차로 날아들었다. 《청년사회주의건설자행진곡》의 선률이였다.

정애경은 반나마 열린 차창밖으로 고개를 뽑아들고 역사쪽을 바라보았다.

서천으로 기울어지는 해빛에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나팔들이 시야로 확 안겨들었다. 대가리에 솜망치를 두른 채를 들고 이따금씩 북을 두드리는 대고수학생의 멋스러운 동작이 유표하게 정애경의 눈을 잡아끌었다.

렬차는 악대의 연주에 정숙이라도 보장해주려는듯이 바퀴소리를 죽이며 천천히 홈으로 미끄러져들어갔다. 모표자리가 그대로 남아있는 학생모를 쓴 스무나문명 되는 청년들의 한떼거리가 두패로 갈라져 질서정연하게 렬차에 올랐다. 앞가슴에 꽃을 달고 등에다가는 배낭을 진 10대 말기의 애리애리한 청년들이다. 모두가 싱글벙글하면서 환송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어준다. 역두에 몰켜선 수백명군중의 대부분은 청년학생들이다.

악대가 연주를 멈추자 여기저기서 뜨거운 석별의 정을 담은 목소리들이 날아가고 날아왔다.

《영진아, 도착하면 꼭 편지를 해야 해!》

《다들 공훈탄부가 되라구!》

《리수복영웅의 모교를 졸업한 영예를 잊으면 안돼!》

《래년도 체육축전에선 꼭 1등을 해야 해!》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있어!》

보내는 인사도 남기는 인사도 열에 뜨고 정에 겨웁다. 청년들이 산으로, 바다로, 탄전으로 진출하던 풍경이 한물졌다고 생각해왔었는데 그건 착오였다. 청년들이 힘든 일터로 진출하는것은 한물진 과거가 아니라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였다. 지금도 그들은 영웅탄부가 될 꿈과 포부를 안고 탄전으로 찾아가고있지 않는가.

승강대를 오른 청년들이 마침내 정애경이 자리잡고있는 방통에도 밀려들었다. 승객들이 사방에서 그들을 끌어당기며 자리들을 좁힌다. 정애경도 얼굴이 처녀들처럼 해말쑥하게 생긴 청년을 옆에 끌어다 앉히였다. 청년이라기보다 아직 애티를 벗지 못한 말랑말랑한 애숭이였다.

저런 육체로 어떻게 석탄을 캐낼가. 영웅탄부는커녕 제 몸건사나 제대로 할가. 하지만 그 애숭이의 얼굴에서는 시종 신심에 넘친 미소가 남실거리고있었다.

《어느 탄광에 진출하나요?》

정애경은 애정을 담아 귀속말로 물었다.

《송남청년탄광에 갑니다.》

애숭이는 가슴을 쭉 펴고 자랑스럽게 대답하였다.

《송남에야 전에도 많은 청년들이 가지 않았나요.》

《탄광이 자꾸 확장되니까요.》

리유도 명백하고 대답도 자신만만하였다. 그래 갱들이 늘어나고 일감이 많아지면 근로자들의 머리수도 늘기마련이다. 전후에 고덕탄광도 수천명으로 불어나지 않았던가. 탄전이 많아지면 집집의 불도 밝아지고 공장의 기대들도 더 기운차게 돌아간다. 이런 리치를 알아서일가 청년들은 평탄한 길을 등지고 줄곧 힘든 곳으로, 힘든 곳으로만 찾아간다.

내 동생벌밖에 안되는 청년들, 나의 첫 제자들의 동년배들이라고 할수 있는 젊은이들, 가슴에 무슨 불덩이를 안고있기에 다들 이처럼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탄전을 향해 달려가는것일가.

《그래 석탄을 꽤 캐낼만 해요?》

정애경은 애숭이청년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통로 맞은켠 좌석에 앉아있던 짝패가 애숭이의 팔소매를 슬그머니 걷어올리였다. 아기의 젖살처럼 해말간 얼굴의 인상과는 달리 힘살이 울근불근한 애숭이의 팔뚝이 정애경의 눈앞에 드러났다.

《석탄은 념려마십시오.》하고 짝패는 그 힘살을 슬슬 어루만지며 말했다. 정애경은 부질없는 질문을 한데 인차 후회하였다. 하기는 리수복도 저런 나이에 화구를 막고 영웅이 됐지. 그러니 이 청년도 탄전에 가면 석탄을 꽝꽝 캐낼거야.

발차를 알리는 기적소리가 길게 울리자 악대는 다시금 연주를 시작하였다. 이번 노래는 《민주청년행진곡》이였다. 이런 날에는 왈쯔풍의 노래보다 저런 행진곡이 제격이다. 렬차는 악대가 연주하는 씩씩한 선률을 등뒤에 달고 서서히 역구내를 빠져나갔다.

앞에는 탄전이 있고 새 생활이 있다. 청년들은 지금 그 새 생활을 향해 앞으로, 앞으로 질주한다. 나도 그들의 동행자가 되여 저 행진곡에 발을 맞추리라. 그러면 아무때건 금주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것이다.

아, 금주. 정말이지 네가 보고싶구나. 나는 지금 이 북행렬차와 함께 너를 향해 가고있다. 렬차가 아니라 비행기를 탄들 내 심중에서 일어나는 조바심을 가실수 있겠니. 정말 보고싶었다. 그리고 그리웠다.

이번 려행은 너의 초청에 대한 답례방문으로 되는 동시에 내 인생의 4막에 속하는 방향전환의 행차라고도 할수 있어. 무슨 방향전환인가구? 무위도식으로부터 창조적생활에로의 방향전환이지. 얼마전에 동흥중학교 지도일군은 나에게 자기네한테 와서 음악교원으로 일해달라는 요청을 해왔어. 난 그 요청을 쾌히 받아들이였어.

내가 어떻게 되여 이런 용단을 내리게 되였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건 너때문이야, 송금주라는 귀감이 나에게 새 출발을 요구했던거야. 난 다 알고있어. 네가 최근 몇해사이에 해놓은 모든 일을. 얼마전에는 학교세포조직에 입당청원서도 냈다지. 인생의 전구간을 속보로 달려가는 너의 모습앞에서 내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고있는지 아마 너는 다 모를거야. 너의 모습은 마력을 다 내여 일하는 인생만이 참다운 인생으로 된다는걸 가르치고있어. 그래서 난 대오에로 다시 돌아가자고 결심한거야. 금주, 네가 지금까지 구슬땀을 바쳐 개척해온 인생은 명곡으로 가득차있어. 네가 이 사회를 위하여, 후대들을 위하여 창조해온 생활은 나무랄데 없는 교향곡이야. 그 교향곡에 진심으로 되는 박수를 보낸다.

나는 너의 모습을 통하여 자기가 사는 시대를 위해 한몸을 다 바치는 사람들이 그리는 인생의 악보만이 명곡으로 된다는걸 깨달았어. 인간들이 아름다와야 시대도 빛나고 나라도 번영할게 아니냐.

헛살아온 세월이 아깝구나. 나도 첫걸음은 너와 함께 명곡으로 떼였건만… 이 벅찬 시대에 나와 같은 인간이야 백해무익한 존재이지. 하지만 금주, 내 꼭 다시 잇고야 말련다. 청춘의 첫기슭에서 너와 함께 새기던 인생의 명곡을 말이야.

결혼과 가정이라는 두가지 측면에서는 부끄럽게도 내가 너의 선배로 될수 있지만 그 두가지를 제외한 다른 모든데서는 네가 내 선배이고 언니라는걸 난 지금에 와서 더 똑똑히 깨닫고있다. 넌 항상 내앞에서 자기자신을 《송언니》라고 자칭하며 우쭐댔지. 그래, 너야말로 그 무엇으로써도 부정할수 없는 언니야!

고향땅 영천을 향해 살같이 달리는 마음에 나의 꾸밈없는 부름을 실어보낸다.

《송언니!》

나는 너를 나의 영원한 언니로 존경하고 사랑하련다. 다시한번 절절하게 부르고싶구나.

《금주언니!》

렬차는 기적소리도 우렁차게 만속으로 평라선철길을 질주하였다. 그것은 송금주와 정애경도 포함한 천리마시대의 모든 인간들이 미래에로, 미래에로 달음쳐가는 돌격의 함성소리처럼 대지를 진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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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가을에 송금주는 영천중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였다.

다음해 봄에는 그가 쓴 수기 《인생의 악보》가 《교원신문》에 련재되였다. 물론 파문은 대단히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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