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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6 회


제 7 장

5

존경하는 선생님!

저는 중앙경연에서 1등으로 입상한 《삼천리려행단》의 성과를 축하하는것으로 선생님에게 드리는 인사를 대신하려고 합니다. 신문지상에서 심사결과를 읽어본 그날은 온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사랑하는 모교와 선생님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는 지금 전우들이 다 잠든 야영지의 모닥불가에서 이 편지를 씁니다. 오늘 우리 중대는 폭우속에서 하루종일 강행군을 하였습니다. 신병훈련이 힘들다고 하지만 오늘의 행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이를 악물고 힘든 고비를 이겨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대학을 하나 졸업한것만치나 흐뭇합니다.

역에서 저와 철룡이를 바래줄 때 선생님은 우리들더러 군대에 가면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고 하셨지요. 병사생활 첫시작부터 저는 매일 매시각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있습니다. 이밤 분대장이상 지휘관들이 잠도 자지 못하고 병사들의 군복과 신발을 말리는 광경을 보면서도 사랑하는 법을 체험하고있습니다.

저도 10분전까지는 폭우에 물참봉이 된 전우들의 군복과 신발을 모닥불에 말리였습니다.

선생님, 제가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졸업을 두달 앞두고 선생님과 함께 칠보산야영에 참가했던 일을 회상했습니다. 장일남을 태운 손달구지를 끌며밀며 비내리는 반달령을 넘던 일이 지금도 눈에 서물서물합니다. 장일남이 학급에 끼칠 부담이 걱정되여 야영에 못참가하겠다고 나가눕는통에 우리모두 얼마나 마음을 썩이였습니까. 갱견학을 가던 날은 장일남을 떼던지지 못해 악악거리던 아이들이 칠보산야영을 떠날 때에는 데리고가지 못해 애를 박박 쓰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새 우리 동무들이 퍼그나 철이 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건 교단에 선 첫날부터 제자들에게 사랑하는 법을 배워준 선생님의 덕이였습니다. 학급전체가 교대로 장일남을 업고 땀을 철철 흘리며 고개길을 오를 때에도 힘들다고 투정질을 하거나 불평을 부리는 아이들은 한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학급전체가 동무들을 사랑할줄 알았습니다. 그때의 그 야영이 내 인생에서는 귀중한 체험이였습니다.

해칠보백사장에서 우리가 모두 굳잠에 곯아떨어졌을 때 잠시도 쉬지 않고 모닥불에 우리의 옷과 신발을 말려주시던 선생님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수 없습니다. 밤중에 깨여나 그 모습을 보았을 때 저는 속으로 울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그밤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는데 대해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사랑이란 남을 위해 자기를 다 바치는 특수한 정열이라는 결론을 찾아냈을 때 저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제딴으로 얻어낸 정의이니 설익었다 하더라도 나무람하지 말아주십시오.

남의 사랑을 받는것도 좋지만 남을 사랑할 때에 더 좋다는것을 저는 입대후 군사복무를 하면서 더 깊이 깨닫게 되였습니다.

전우들의 옷과 신발을 말리느라고 밤을 지샐 때 너울거리는 모닥불너머에서 나를 지켜보며 그래야지, 그래야지,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거야 하고 저를 칭찬해주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보이는것만 같았습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올리사랑은 없다고들 한다는데 우리 중대에는 내리사랑도 있고 올리사랑도 있고 부모형제사랑에 못 비길 모든 사랑이 다 있습니다. 사랑으로 호두알처럼 딴딴하게 뭉쳐진 우리 중대는 한집안식구나 다름없습니다.

선생님, 남을 사랑한다는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것을 저는 잘 알고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남을 위해 자기를 바치느라면 힘에 부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전 탄광견학때 장일남을 끼고 갱에 들어가시던 선생님의 모습과 칠보산야영을 앞두고 장일남을 태우고 갈 손달구지를 구하느라고 읍내를 발칵 뒤지며 돌아가시던 선생님의 불같은 정열을 되그리며 거기서 힘을 얻군 합니다.


송금주는 벌써 이 대목을 세번이나 곱씹어 읽어보았다. 오전에 편지를 받자마자 한번 얼추 훑어보고 점심시간에는 호젓한 합숙방에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재탕하였으며 퇴근시간이 지난 지금은 아무도 없는 텅빈 분과실에 앉아 매 말마디들을 씹어가면서 글 전체에 흐르는 감정과 정서를 조용히 음미해보았다. 편지를 세번 읽고나니 동주가 어른이 다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덕역사앞에서 첫 《선》을 보던게 어제일 같은데 6년사이에 사람이 그처럼 몰라보게 달라졌다.

인제는 송금주의 손때가 묻은 제자들이 《양묘장》을 떠나 온 나라 방방곡곡에 다 가있다. 김동주와 같이 군사복무를 하고있는 제자들이 있는가 하면 대학공부를 하는 제자들도 있었으며 사회주의건설의 어려운 초소들에서 채탄공, 용해공, 검사공, 선반공, 열관리공으로 일하는 제자들도 있다. 《양묘장》에서 자란 《나무모》들이 얼마나 견실한가하는것은 이제 시간이 판정하게 될것이다.

그래 교단이야말로 쓸모있는 인간들을 《생산》해내는 《양묘장》이라고 할수 있지. 난 이 《양묘장》의 관리공의 한사람이고 《나무모》들을 키워서는 사회라는 대지에 내보내거던. 그 대지는 풍랑도 세차고 폭우도 격렬하지. 그래서 《양묘장》의 관리공들은 《나무모》가 대지에 뿌리를 내린 후에도 거기서 눈을 떼지 못해. 그 관리공들이야말로 《나무모》가 싹으로부터 거목이 될 때까지 잠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꾸준히 돌봐주어야 할 영원한 관리공들이라고 말할수 있어.

김동주는 착실히 뿌리를 내린것 같애. 그의 정신세계가 정말이지 놀랍거던. 우리 사회가 사랑으로 유지되고 사랑으로 움직이며 사랑이라는 힘에 의해 발전한다는 심오한 원리를 그 나이에 터득한다는건 쉽지 않은 일이야. 나어린 전사이지만 김동주는 인생관의 골격을 세웠다고 볼수 있어. 아, 모든 제자들이 다 김동주와 같은 인생관을 가지고 이 나라의 거목으로 자라난다면 얼마나 좋을가. 저도 모르게 숨결이 높아지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편지에서 받은 충격때문이리라. 눈길이 가닿는 곳마다 김동주의 얼굴이 얼른거리였다. 온 방안이 그의 목소리로 진동하고 그의 체취로 차넘치는것 같은 환각이 일어나는것은 무엇때문일가.

수백명 제자들중에 김동주만큼 인상깊은 제자도 드물다. 정의감, 의협심, 과감성, 실천력… 이것은 그가 가지고있는 성격적매력이다. 그래서 송금주도 그를 특별히 애지중지하였다. 온 학급이 그를 사랑하였다.

송금주는 온몸에 번져가는 번열을 느끼며 분과실창문을 활짝 열어제끼고 한참동안 인적이 끊긴 동쪽교정을 내려다보았다. 울타리를 따라가며 《-》자형으로 지은 화목창고가 눈에 밟혀오는 순간 그 창고앞 마당에 고덕탄광 제재소에서 실어온 톱밥을 널어놓고 물을 쳐서 얼쿠느라고 법석거리던 김동주네의 모습이 떠올랐다. 톱밥을 얼쿠었다가 토막쳐서 겨울나이용땔감으로 쓰자고 발기해나선 제자도 바로 김동주였다. 그는 무슨 일에서나 선구자였다.

송금주는 50명이나 되는 첫 제자들의 얼굴을 눈앞에 하나하나 그려보며 점도록 창문가에 서있었다. 문밖에서는 어느새 저녁어스름이 소리없이 스며들고있었다. 송금주가 명상에 잠겨 추억의 바위츠렁을 한치한치 톺아오르고있을 때 어떤 심술궂은 손이 대지에 먹물이라도 뿌려놓은상 싶었다. 어스름이 짙어가는 대지에는 절기에 어울리지 않는 보슬비가 내리고있었다. 눅지근한 공기가 분과실에도 스며들었다.

송금주가 창문을 등지고 돌아서는 순간 똑똑 하는 손기척소리가 들리였다. 이 학교교원들중에서 저런 식으로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력사교원 조학문밖에 없다. 그는 마치 수천년 인류사가 전시된 대회장에 찾아온 사람처럼 매번 그렇게 정중히 손기척을 하였으며 문고리도 그런 식으로 조심스럽게 잡군 하였다.

문앞에는 조학문이 안경을 번들거리며 서있었다. 그는 바른손을 뻗쳐 분과실 바깥벽에 붙어있는 스위치를 돌리면서 숙연한 어조로 말했다.

《금주선생, 탄광에서 손님이 왔습니다.》

조학문은 나들문뒤에 가리워 보이지 않는 손님을 문설주밑에 내세우고나서 조용히 사라졌다. 색이 퍼그나 날은 탄부복을 입은 등이 구부정한 낯익은 사람의 형체가 전등불밑으로 주춤주춤 다가왔다. 손님은 고덕탄광 화약고지기 박경만아바이였다.

《할아버지!》

몸의 움직임보다 환성이 앞섰다. 그 환성을 앞세우고 송금주는 박경만의 앞으로 다가들어 로인의 두팔을 부둥켜안았다. 년세로 보면 큰아버지쯤 되는 사람이였으나 어려서부터 그를 할아버지라고 불러온 송금주는 그보다 더 친근하고 붙임성있는 호칭은 알지 못했다.

《할아버지!》

그는 다시한번 이 부름을 입술에 올리며 박경만의 손을 끌어당겨 의자에 앉히였다. 그리고는 살틀하게 물었다.

《오래간만입니다. 날씨도 궂은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군문화회관근처에 대사갱에서 일하다 은퇴한 내 동갑친구가 한사람 있는데 그 친구도 만날겸 너도 만날겸 겸사겸사해서 왔다. 퇴근시간도 퍽 지났겠는데 왜 상기 합숙에 들어가지 않니?》

《군대에 나간 제자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그걸 읽느라고…》

《아무리 바빠도 식사시간이야 잘 지켜야지. 위병을 〈훈장병〉이라고도 한다는데 끼니를 건네거나 시간을 늦잡다가는 랑패를 보느니라.》

박경만은 살이 빠져 관골이 비죽해보이는 송금주의 강마른 얼굴을 한참동안 미심쩍은 눈길로 쓰다듬다가 탄부복주머니에서 절연지에 감싼것을 정히 꺼내여 책상우에 놓고 그것을 한겹한겹 벗겨내기 시작하였다. 종이가 탈색하여 한쪽귀퉁이가 누르끼레해진 봉함엽서가 나타났다. 엽서의 아래단에 보라색잉크로 쓴 군사우편함 대호가 희미하게 보이였다. 절연지로 세겹네겹 겹싼걸 보면 영구보존을 목적으로 지금껏 소중히 간수해온 편지임이 틀림없었다.

송금주는 비상히 빠른 속도로 온몸과 넋을 흔들어대는 어떤 예감에 이끌려 박경만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로인의 벼락같은 행차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자기자신과 박경만, 군사우편함 대호를 가진 봉함엽서가 삼각형을 이루는 세개의 정점처럼 느껴졌다.

이 편지에 문제가 있다. 로인과도 련관되고 나와도 련관되는 어떤 의미심장한 엽서일수도 있다. 혹시…

《이건 1952년 여름에 네 아버지가 1211고지에서 나한테 보낸 편지다. 전쟁때 그 사람이 나에게 보낸 편지가 모두 세통인데 이게 마지막편지다. 오늘 사품들을 정리하다가 다시 읽어보니 네 아버지생각이 왜 그렇게도 나던지. 편지에 금주가 보고싶다는 말도 했더라. 이 편지는 네가 유물로 간수하거라. 폭격에 집이 다 날아났으니 너한테 뭐가 남았겠니. 아버지의 필적도 싹 쓸어갔겠지?》

《네, 저하구 어머니한테 보낸 편지가 한통씩 반짇고리속에 있었는데 다 불타버렸어요.》

《죽일 놈들같으니. 자, 받아라. 아버지의 사진도 없겠는데 이거라도 갖고있으면 너한테 힘이 될게다.》

박경만은 송금주앞으로 봉함엽서를 조심스레 밀어보냈다.

송금주는 력사에 남을만 한 어떤 가치있는 유품의 이양식에라도 참가한듯 한 엄숙한 기분으로 편지를 집어들었다. 엽서를 무슨 증서처럼 받아안은 두손에 천근의 무게가 실리였다. 아버지의 몸에 흐르던 피가 그 엽서에 실려 그대로 딸의 혈관속으로 흘러드는것 같은 쩌릿쩌릿한 순간이였다.

송금주는 편지를 가까이 끌어당겨 엽서의 거죽에 씌여진 아버지의 필체를 뚫어지게 부감하였다. 90도각도로 세로획을 장대기처럼 길게 내리긋군 하는 고유한 서체가 눈앞으로 육박해오는 순간 가슴속에서 뜨거운것이 뭉글뭉글 타래를 지으며 목구멍으로 치달아올랐다. 그것은 딸이 소학교에 입학할 때 학습장표지마다에 《송금주》라고 또박또박 써넣어주던 그 필체가 틀림없었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아버지의 유품이 하나도 없었는데 잘 간수하겠습니다.》

송금주는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숙여보이였다.

《오냐, 그래야지. 밑줄을 그은 부분이 너에 대한 이야기이니라. 어서 읽어보려무나.》

송금주는 붉은색연필로 밑줄을 친 부분에 시선을 박았다. 몇줄 안되는 글이였으나 가슴을 흔들어대는 충격은 컸다.


형님, 내가 혹시 전장에 쓰러져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이 석정이를 대신하여 금주를 잘 돌보아주십시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다음 아무때건 짬을 내서 전차갱에 그 애를 데리고 들어가 아버지가 어떤 곳에서 일하였는가를 보여주십시오. 그 애를 갱에 데리고 들어가지 못한게 지금도 가시처럼 목에 매달려있습니다. 부탁입니다.


《나는 네 아버지부탁을 하나도 들어주지 못했다. 고아가 된 너를 돌봐준건 내가 아니라 아간장에 있는 너의 고모였다. 그 고모의 뒤에서는 당이 줄곧 너를 보살펴주었다. 갱에는 네스스로 들어갔다 나왔고… 그런데두 넌 설마다 나를 찾아와서…》

박경만은 말을 잇지 못하고 마라초를 깊숙이 들이빨았다가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타래쳐오르는 황색초연기와 슴뻑슴뻑하는 눈섭의 움직임이 그가 채 하지 못한 말을 대신해주는것 같았다. 로인은 의자에서 일어나 의자가름대를 두손으로 붙잡고 송금주의 얼굴을 오래도록 살펴보았다.

《금주야, 너 지금 몇살이냐?》

《스물일곱살입니다.》

《일만 일이라고 하면서 혼기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해라. 약속한 남자는 없니?》

《아직 없습니다.》

《결혼식을 할 땐 꼭 알려라. 아버지를 대신해서 내가 대사를 주관하겠다. 그럼 난 가보겠다.》

박경만은 방안을 한바퀴 휘둘러보고나서 천천히 복도에 나섰다. 한걸음한걸음에 무거운 사색을 실으며 천천히 발을 옮겨놓았다. 송금주는 로인의 팔을 끼고 한단한단 층계를 내리였다. 교사전체가 깊은 정적에 잠겨있었다. 이맘때가 되면 수직교원들이 교사동쪽과 서쪽에 있는 현관문들에 빗장을 지르고 근무실에 틀고앉아 당번을 선다. 출구는 중앙현관뿐이다. 싯누런 전등불빛이 흐르는 복도를 따라 근무실쪽으로 로인을 안내하였다.

가을의 보슬비는 어느새 작대기비로 변하였다. 교사밖은 비소리로 소연했다. 어찌나도 맹렬하게 쏟아져내리는지 귀가 멍멍해질 지경이였다. 이걸 어쩌나. 이 비속을 우산도 없이 아바이가 어떻게 가나. 송금주에게도 우산은 없었다. 합숙이 지척에 있으니 웬간한 비에는 우산을 들지도 않는 그였다. 강짜로 맞은 비는 체온으로 말리우군 하였다.

송금주는 근무실문을 열고 조학문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 저…》

조학문은 그의 말을 채 듣지 않고 한손을 쳐들었다가 허공을 홱 내리그었다.

《알만 하오. 화약고 경비아바이한테 비옷을 입혀보내자는거겠지. 그러지 않아도 내 지금 걱정을 하던중이요. 자, 그럼 아바이한테 이 비옷을 입혀보내시오.》

조학문은 말코지에서 방수직으로 된 암록색의 비옷을 벗겨 송금주에게 안겨주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인사는 나한테가 아니라 우리 탄실녀사한테 하는게 좋겠소. 내가 맨 양복차림으로 집을 나서는데 그 녀사가 한사코 따라나와 그걸 씌워주는게 아니겠소. 녀자들의 육감이란 참…》

《육감이 아니라 사랑이지요 뭐. 시샘이 날 정도로 정분이 두터운데요.》

《말도 마오. 사랑이니 정분이니 하는 그 현란한 간판뒤에서 나는 벌써 12년째나 금주령이라는 악법의 피해를 보고있소. 내 배속의 사랑하는 주충들은 모두 다른 나라로 달아나버렸소.》

조학문은 달아나버린 주충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이라도 흘릴듯 한 비통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술벌레들의 집단적인 탈주가 단행되였다는 배를 처량하게 쓸어만지였다. 송금주는 허리를 까부리고 배가죽이 늘어나게 웃어댔다.

《선생님, 그 금주령의 피해에 대한 보상으로 선생님은 끼니때마다 아주머니한테서 감주를 한사발씩 공급받는다던데요.》

조학문은 그런 말은 하지도 말라는듯이 손을 홰홰 내저었다.

《금주선생, 그건 나와 술을 리간시켜 영원한 숙적으로 만들려는 탄실녀사의 계교라는걸 알아야 하오.》

송금주는 또다시 배를 그러쥐고 한참동안 웃어댔다. 박경만로인이 떠나간 다음에도 처녀는 중앙현관처마밑에 한식경이나 서있었다.

오늘은 이래저래 좋은 일들만 생기였다. 조학문의 우스개소리까지 듣고나니 심신이 더 거뜬해졌다. 공기마저 이를데없이 청순하고 신선했다. 우주공간에 가득찬 저 비소리는 이 딸에게 아버지가 하고싶었던 부탁의 말마디들은 아닌지.

송금주는 방금전에 편지를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된 아버지의 유언을 한마디한마디 새롭게 음미해보며 합숙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였다. 이제 때가 되면 아버지의 유골이 묻혀있는 1211고지전장에도 다녀오리라. 몰박으로 쏟아지던 비는 기세를 숙이였으나 그의 옷은 물에 잠갔다가 꺼낸것처럼 흠뻑 젖었다.

비발로 장막을 친 녀교원합숙 처마밑의 뿌유스름한 어둠속에서 푸르께한 거구의 형체가 그를 맞이하였다. 푸르께한것은 비닐로 만든 비옷이였다. 그 비옷밑으로는 아래도리를 걷어올린 바지가랭이와 종아리가 보이였다. 세상에 원, 저런 거인도 있구나. 송금주가 합숙방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그 거인은 말을 꺼냈다.

《금주선생이 오는구만.》

그것은 벌써 1년째 들어보지 못한 최창화의 목소리였다. 송금주는 덤벼치면서 합숙문을 열었다.

《창화동지였군요. 오래 기다리셨나요?》

물참봉이 된 신발을 벗어 신장안에 넣을 계제도 없이 서둘러 부엌칸과 아래방의 전등을 켰다.

《한 10분쯤 기다렸을가. 금주선생, 내가 누굴 데려왔나보우.》

최창화는 머리에 걸친 비옷을 벗어내치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송금주를 바라보았다. 그의 등에서 난데없이 장일남이 뚝 떨어져 허리를 푹 꺾으며 절을 한다.

《선생님, 생일을 축하합니다!》

생일? 오늘이 내 생일이던가? 아니다. 나의 생일은 래일이다. 정애경이 영천에 있을 때만 해도 그들은 생일을 꼭꼭 쇠군 했었다. 정애경의 생일상은 송금주가 차려주었고 송금주의 생일상은 정애경이 차려주었다. 정애경이 떠난 후에는 분과교원들이 산발적으로 식당에서 송금주와 함께 생일식사를 하였다. 어떤 교원들과 제자들은 집에서 생일음식을 만들어 녀교원합숙에 들고왔다. 세월이 자꾸 흘러가도 인정의 개울은 마르지 않고 줄기차게 장강으로 흘러들었다.

장일남이 그만 날자를 헛갈렸을가. 생일도 아닌 오늘 그것도 폭우를 무릅쓰고 왜 이렇게 야단스런 행차를 했을가. 최창화가 동행한것도 의미심장한 일이다. 하긴 한동네에서 사는 사람이니까, 일남이하고 미리 약속을 하고 벼락행차를 했을수도 있다. 어쨌든 귀잡고 절도 할만 한 일이다. 날씨는 심술궂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경사로운 일만 생긴다. 동주의 편지, 박경만아바이가 넘겨준 아버지의 유품, 폭우속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최창화와 장일남.

《어서 방에 들어와 앉으세요.》

송금주는 최창화의 손에서 비옷을 받아 아래방에 대각으로 엇비스듬히 지나간 빨래줄에 널어놓고 그밑에 대야 두개를 받쳐놓은 다음 손님들에게 왕골로 짠 방석을 하나씩 내밀었다. 최창화앞에는 수건을 내밀어 물이 줄줄 흐르는 정갱이를 씻게 하였다.

《선생님, 래일은 시간을 낼수 없기에 하루 먼저 찾아왔습니다. 래일은 제가 수리한 대형전동기 시운전을 하게 됩니다.》

장일남이 왕골방석에 올방자를 틀고앉으며 말했다.

《최창화동지도 저의 생일을 축하하려고 오셨나요?》

송금주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묻는 말이였다.

《나야 뭐 금주선생의 생일을 아나. 사실은 일남의 둘러리로 따라온거지. 친구들 집에 마실을 갔다가 오는데 이 친구가 짝지발을 짚고 집을 나서는게 아니겠소. 이 비에 어디로 가는가고 물으니 금주선생한테 생일기념품을 드리러 간다는거요. 비는 무더기로 쏟아지는데 그냥 보낼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예까지 곧장 업구왔소.》

최창화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송금주의 가슴에서는 용암같은것이 녹아내리였다.

《선생님, 변변치 않은것이지만 기념으로 받아주십시오.》

장일남이 보자기에 싸가지고온 목각품을 꺼내여 밥상우에 내려놓았다. 그는 그 목각품에 아무런 주해나 설명도 달지 않고 송금주의 얼굴표정만 덤덤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중발을 한 젊은 녀성이 옆구리에 짝지발을 끼고 중학모를 쓴 소년을 업고가는 모습을 형상한 정교한 목각품이였다. 20살청년의 손끝에서 태여난 목각품치고는 너무도 기발하고 세련된 흠잡을데 없는 걸작품이였다. 중학 1학년때 전동기가 달린 마차를 만들어 동무들을 놀래우더니 고덕탄광 생필직장기술조작공으로 일하면서 거보의 약진을 한것 같았다. 전동기가 달린 마차는 손끝재간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장난감이였지만 이 목각품은 생동한 체험에 기초한 예술작품이였다. 코와 입술은 물론 한오리의 머리카락과 모표의 글자에까지 지어 얼굴에 흘러내리는 비물까지도 깐깐하게 세공을 한 목각품에서는 싱그럽고 향기로운 삼송냄새가 났다.

《소년을 업고가는 주인공녀성은 금주선생이고 등에 업힌 중학생은 일남이로구만.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

최창화의 입에서 마침내 탄성이 터졌다. 송금주는 쑥스러운 심정으로 목각품을 감상하다가 나직이 말했다.

《일남이, 내가 일남일 얼마나 업어주었다고 이런걸 다 만들었나.》

장일남은 흰자위가 유난히 도드라져보이는 눈에 열기를 담고 덤벼치며 그 말을 부정하였다.

《아닙니다. 난 지금도 비내리는 날 나를 업고 진창길을 걸어가던 선생님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있습니다.》

《그게 50m나 될가?》

《선생님, 나같은 제자에게 바친 그 사랑을 어찌 m수로 계산할수 있습니까. 선생님은 그때도 나를 업어주었지만 지금도 나를 업고다니십니다. 앞으로도 선생님은…》

장일남은 격해서 말을 잇지 못하고 눈만 슴뻑거리였다. 송금주도 눈시울을 떨었다. 눈확속에 뜨거운것이 그들먹이 차올랐다. 김동주와 아버지의 편지를 보면서도 흘리지 않던 눈물이 장일남의 목각품앞에서는 동을 넘어 두볼로 방울방울 흘러내리였다. 그 눈물은 하루사이에 겹쳐든 그 모든 경사의 응결체, 그 모든 환희와 열광의 반사인지도 모른다.

《금주선생은 정말 행복한 교육자요!》

최창화가 입안의 소리로 엄숙하게 뇌이는 말이였다. 그는 자리에서 뉭큼 일어나 목각품을 들고 책상앞으로 다가갔다. 세해전에 자기가 선물한 대패밥꽃을 이윽히 굽어보다가 송금주에게 물었다.

《이걸 어디다 놓으면 좋을가?》

《그 꽃옆에 나란히 놓지요 뭐.》

송금주는 별로 생각해보지도 않고 씨원스레 대답했다.

《그게 좋겠군.》

책상우에 목각품이 놓이자 방안의 면모와 품격이 대번에 달라지는것같았다. 세사람은 나란히 서서 제나름의 감정과 정서를 가지고 몇초동안 그 목각품을 진지하게 감상하였다.

잠시후 최창화와 장일남은 녀교원합숙을 떠났다. 그 못난 작대기비가 다행이도 가랑비로 변하였다. 최창화는 돌아가는 길에도 강짜로 장일남을 업고 씨엉씨엉 걸어갔다.

손님들을 바래주고 합숙으로 돌아온 송금주는 목각품의 짝지발손잡이에서 피대처럼 감겨있는 난데없는 쪽지를 발견하였다. 아까는 이런 쪽지가 없었는데 무슨 조화일가. 장일남의 소행은 아닌것 같았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요술을 부렸을가.

혐의는 최창화한테로 간다. 목각품을 책상우에 올려놓은 사람도 최창화이고 내가 빨래줄에서 비옷을 벗기느라고 시간을 지체할 때 책상앞에서 어물거린 사람도 최창화이다. 그래, 최창화만이 나에게 쪽지를 남길수 있다.

이런 결론을 도출해내자 송금주의 마음속으로는 까닭을 알수 없는 저녁어스름같은 불안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아니, 그것은 불안이라기보다 그 어떤 이름할수 없는 기대와 호기심이 엇섞인 그런 부산스런 심정이였다. 송금주는 시한탄의 뢰관이라도 다루는듯 한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천천히 쪽지를 풀었다.


금주선생! 결혼합시다!

최창화


그는 쪽지를 펼쳐든채 왕골방석에 풍덩 주저앉아 울고웃으며 대패밥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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