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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3 회


제 7 장

2

전국학생소년예술축전에 참가하기 위한 《삼천리려행단》의 훈련은 마지막고비에 이르고있었다. 한주일후에는 도에서 심사위원들이 내려와 영천군안의 세개 학교에서 준비한 종목들에 대한 시연을 조직하고 중앙축전에 참가할 작품을 선발한다고 한다.

토요소년단원의 날 일정을 마치고 음악실에 모여온 《삼천리려행단》출연자들은 발성훈련과 대사훈련을 마치고 지금은 률동훈련에 들어갔다.

《삼천리려행단》성원들의 자질에서 제일 걸리고있는 약한 고리가 바로 이 률동이였다. 그것은 지도교원인 송금주자신의 약점이기도 하였다. 송금주는 이 약점을 메꾸기 위하여 이웃학교의 무용교원과도 여러번 의논을 하였다. 롱구선수인 그는 춤가락을 배우고 률동을 창조하는데서도 민감하였다.

《양수기가 돌아가는 모양을 그려보이며 무대를 돌아갈 때의 잦은걸음이 조잡합니다. 얼굴표정들도 통일되지 못하고있습니다.》

송금주는 이런 지적을 하고나서 호남벌장면을 다시한번 반복시키였다. 훈련이 심화될수록 소조원들은 작품의 세계에 열중하였다. 남해의 어로공들이 고기그물을 끌어올리는 모습을 형상한 대목에서는 다들 신바람이 나서 어깨를 으쓱거리며 건드러지게 노래도 부르고 률동도 펼치였는데 좀처럼 흠을 잡을수 없을 정도였다.

후반훈련이 고조에 이르렀을 때 꼬마도서보급원 한영옥이 나들문짬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약간 응석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소년단지도원실로 오시랍니다.》

《네, 알겠어요.》

송금주는 소조원들에게 휴식구령을 주고 음악실을 나섰다. 김영찬 교무주임 다음가는 음악광인 최일섭소년단지도원은 하루에 네다섯번씩 음악실에 뻔질나게 드나든다. 어떤 날은 음악실 한쪽구석에 떡 버티고앉아 훈련전과정을 지켜보기도 하고 어떤 날은 소년단지도원실에 송금주를 불러다놓고 이웃학교들의 축전참가준비정형에 대한 정보도 알려주면서 그의 경쟁욕을 부채질해주기도 하였다.

오늘은 또 무슨 정보를 입수했을가. 어제 룡산중학교에 갔다오겠다고 하더니 새 소식을 물고온게지. 새 소식이건 낡은 소식이건 다 좋다. 이웃학교들에서 날아온 축전준비정보는 우리의 분발심에 불을 달아준다.

교사중앙에 있는 계단을 내려 아래층 서쪽중간에 있는 소년단실로 향하였다. 가슴을 내밀고 량어깨를 번갈아 앞뒤로 약간씩 흔들며 씩씩하게 돌진하는 걸음걸이가 자못 률동적이다. 그렇다, 그는 그저 발을 옮기는것이 아니라 먹이를 쫓아가는 맹어처럼 돌진하듯이 걷는다.

소년단실앞에 이르자 자기 눈높이보다 더 높은 곳에 손을 올리고 나들문을 두드렸다. 그다음 《네, 들어오시오.》하는 소년단지도원의 목소리가 들리기 바쁘게 방안에 성큼 들어섰다. 소년단지도원의 방은 량수책상을 향해 책걸상들이 《ㄷ》자형으로 전개되여있는 정방형의 방이다.

《아, 송금주선생이지요?》

창문쪽책상앞에서 두눈이 부리부리하고 눈섭이 시꺼먼 반외투차림의 사나이가 균형이 잡힌 다부진 몸을 움쭉 일으키며 송금주를 구면처럼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런즉 나를 찾은건 이 사람이였구나. 어디서 온 손님일가. 영천땅에 서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 초면인물이다. 혹시 도에서 축전작품들을 료해하려고 내려온다는 그 심사조의 선견대가 아닐가. 고속화면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추리를 멈춰세우고 시원스레 절을 하였다.

《송금주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중앙청년동맹 부장 한성범입니다. 자, 여기 와 앉으십시오.》

한성범은 책상 맞은켠 의자를 들어 뒤로 밀어놓았다. 송금주는 별로 사양하지 않고 구두징소리를 내며 의자앞으로 뚜걱뚜걱 걸어갔다. 그다음 거침없는 동작으로 의자에 몸을 실었다.

《만나게 되여 반갑습니다.》

한성범이 깍듯이 례의를 차려 하는 인사였다. 그의 거무스름한 눈동자가 송금주의 턱밑으로부터 이마우로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과시 듣던바 그대로군.》

부장의 입에서 튕겨나온 내면독백과도 같은 말이였다. 그러니 이 사람은 나에 대한 사전료해를 하고 학교에 찾아온 모양이다. 누구한테서 무슨 말을 들었길래 듣던바 그대로라고 말하는가. 그 말은 분명 나의 외형에 대한 평가일것이다. 인상이 좋다는건지 어떻다는건지 아직은 알수 없었다. 방금전에 내뱉은 말처럼 부장은 눈길도 아리숭했다.

《금주선생에 대한 소문은 내 평양서 많이 들었소.》

이 말에는 어떻게 응대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소문을 많이 들었다는데 감사하다는 말도 할수 없고 《저같은게 뭐라구》하는 식으로 겸손을 차릴수도 없었다. 청년동맹기관지에 크게 소개되고 사진까지 났으니 그가 나를 알아보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청년동맹중앙의 간부가 무엇때문에 이 한적한 산골군에 행차했고 무슨 목적으로 자기를 소년단실로 호출하였는가 하는것이다.

《그럼 이야기를 나누십시오.》

아까부터 먼발치에 엉거주춤 서있던 최일섭소년단지도원이 한성범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문밖으로 나간다. 그가 자리를 피하는것으로 보아 제3자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 어떤 심각한 화제가 기다리고있는 모양이다. 이 사람은 무엇때문에 나를 찾았을가. 무슨 절박한 문제가 있기에 부장이 직접 이 영천땅에까지 행차하였을가.

《지금 금주선생 나이가 스물일곱이라고 했던가?》

한성범이 의자가름대에 한팔을 얹으며 넌지시 묻는 말이다. 아니, 물음이라기보다 이미 알고있던것을 확인하는 형식적인 질문이다. 어디서 내 나이까지 알아냈을가. 혹시 최일섭선생한테서? 십분 그럴수도 있다.

《그렇습니다. 스물일곱살입니다.》

한박자가 아니라 두박자나 동안을 둔 대답이다. 그렇게 대답하는것이 적합한지 아닌지를 타산하다가 마지못해 하는 대답같기도 하였다.

《최종학교는 도교육간부학교이고?》

《네.》

한성범은 송금주의 학력까지도 환히 꿰들고있었다. 그러고보면 이 담화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사이에 흔히 오가는 그런 인사치레가 아니라 한사람은 묻고 다른 한사람은 대답만 해야 하는 일방적인 료해였다. 송금주는 이 담화가 심상치 않은 담화라는것을 인차 간파하였다. 우선 상대방에게 호출목적을 빠개지 않고 슬슬 변죽부터 긁으면서 대답을 유출해내는 화법부터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혼처라도 생겨서 나를 그 대상자로 마주세우자고 그러는것은 아닐가. 그러면 그 남자는 평양사람이라는걸가. 아니면 이 근방 어디에 부장의 동생이나 조카라도 있는걸가. 영천에서도 청혼자들은 경쟁적으로 밀려들고있다.

《금주선생, 나를 음악실로 안내해주지 않겠소.》

한성범은 자리에서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네.》

그런즉 혼사문제는 아니다. 하마트면 주제넘는 억측에 머리를 휘둘리울번 했다. 송금주는 보통때보다 보폭을 좀 줄여서 구두징소리도 내지 않고 한성범을 음악실로 데리고갔다. 소조원들은 화성훈련을 하느라고 손님이 들어서는것도 모르고있었다.

《학생동무들, 청년동맹중앙에서 부장선생님이 오셨어요.》

소조원들은 일제히 일어나 소년단경례를 하였다.

《안녕하십니까!》

《그 소리 참 청청하다.…》

한성범은 첫걸음부터 탄복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구석쪽에 놓인 걸그림들과 한쪽벽면을 다 차지하고있는 음악상식도해들을 깐깐히 훑어보고나서 물었다.

《금주선생, 이 학생들이 〈삼천리려행단〉에 출연하는 소조원들입니까?》

《그렇습니다.》

《금년축전에 참가하는 작품이라지요?》

《네.》

《좋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금주선생, 수고스러운대로 내앞에서 시연을 당하는셈치고 한번 공연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소조책임자인 리명숙이 케스에서 손풍금을 꺼내여 송금주에게 얼른 메워주었다. 소조원들중 누군가가 한성범의 앞에 의자를 가져다놓았다. 그러는 사이에 다른 소조원들은 의상을 차려입고 공연대형을 지었다.

한성범은 공연준비가 다 된것을 알면서도 의자에 앉지 않고 팔짱을 지른 자세로 의자뒤에 그냥 서있었다.

《어서 시작하시오.》

그는 손풍금단추도 벗기지 않고 자기를 빤히 지켜보는 송금주에게 턱짓을 해보이였다. 그러나 송금주도 요지부동이였다.

《부장동지, 의자에 앉지 않으면 공연을 시작하지 않겠습니다.》

《아, 그래. 내가 그만 실례했구만.》

한성범은 팔짱을 풀고 황황히 의자를 끌어당기였다. 그때에야 팔에 《렬차원》이라고 쓴 완장을 두른 소조원이 공연시작을 알리는 소개를 하였다. 송금주는 소개자가 대렬속에 들어서기 바쁘게 다섯손가락으로 손풍금건반을 눌러 기적소리를 냈다. 그다음 불이 번쩍나게 전주 음악을 연주하였다.

삼천리를 편답하는 꼬마들의 려행이 눈깜짝할 사이에 끝났다. 한성범은 팔목시계를 얼른 내려다보고나서 흥정이라도 붙이듯이 물었다.

《금주선생, 공연시간을 한 2분쯤 앞당길수 없을가?》

《단축해보겠습니다.》

《작품은 만점짜리인데 좀 긴감이 나는구만. 종합공연프로에 들어가자면 시간을 9분내지 10분정도로 해야 하오. 자, 소조원동무들, 신심을 가지고 훈련을 더 잘하시오.》

한성범은 인사의 표시로 한손을 들었다 내리고나서 음악실을 나섰다.

그러니 저 사람은 《삼천리려행단》의 금새를 저울에 달아보려고 왔단 말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송금주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였다. 만점짜리라는 평가에 기분은 떴지만 한성범이 자기를 찾은 리유에 대해서는 도무지 무엇이라고 가늠할수가 없었다. 명망이 뜨르르한 중앙기관의 간부가 군청년동맹일군들의 수행도 없이 홀몸으로 학교에 나타났다는것도 이상하다면 이상하고 파격이라면 파격이였다.

한성범과 송금주는 소년단지도원실에서 아까처럼 또다시 마주앉았다. 책상도 그 책상이고 의자도 그 의자였다. 다만 달라진것이 있다면 한성범의 근엄한 얼굴에 웃음기가 넘실거리는것이였다.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그는 송금주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금주선생은 평양에 올라가서 후대들의 예능교육을 위해 일할 생각이 없소?》

송금주는 평양이라는 말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것은 봄날의 우뢰와도 같은 천만뜻밖의 제안이였다. 그는 발밑이 흔들리는것 같은 마음속의 진동을 느끼며 얼떠름한 표정으로 한성범을 쳐다보았다.

《평양이라니요? 그건 왜요?》

《그건 왜라니, 이런 변도 있나. 아직 내 말뜻을 깨닫지 못한 모양이군. 청년동맹 중앙위원회에서는 지금 새로 설립된 평양학생소년궁전지도교원들과 창작가들을 선발하느라고 고심하고있소. 간부사업을 마무리하고있다지만 아직도 예능부문에서는 필요한 인원들을 다 확보하지 못하고있는 형편이요. 우리는 인사사업을 하는 과정에 송금주란 인물을 발견하고 료해도 해보았소. 금주선생, 중앙위원회 과외교양지도국에서는 선생을 평양학생소년궁전 창작가로 소환하려고 하는데 선생의 의향은 어떻소?》

물론 료해도 해보았을것이다. 나를 료해할수 있는 통로는 한두개가 아닐것이다. 군청년동맹을 통해 할수도 있고 군당과 군인민위원회를 통해서도 나를 료해할수 있다. 청년동맹 중앙위원회에서는 나를 궁전창작가로 천거할만 한 인맥이 없다. 그렇다면 누가, 누가…

《부장동지, 고맙습니다. 저같은걸… 사실 이건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행운입니다. 학생소년궁전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막 울렁거립니다.》

한성범은 상반신을 뒤로 제끼며 만족스러운듯이 두손을 마주 비비였다.

《왜 그렇지 않겠소. 온 나라가 장대재언덕을 바라보는데 그런데서 일한다는게 어디 간단한 행운이요. 그럼 금주선생이 우리의 제의를 받아들인걸로 생각해도 되겠소?》

송금주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의 심중에서는 무서운 지진이 그냥 요동치고있었다. 그것은 가느냐마느냐 하는 범속한 동요가 아니였다.

촌구석에서 천덕꾸러기로 자라난 내가 어느새 중앙의 학생소년궁전 창작가 후보로 물망에 오르게 되였을가 하는 놀라움과 자기를 키워준 당에 대한 고마움, 자기자신의 존재와 능력에 대한 새삼스러운 자부심이였다. 그 틈바구니속에서 부장의 제의에 순종할수 없는 송구스러운 거부감이 오연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중앙에서 저를 관심해주는데 대해서는 그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부장동지, 저는 영천땅을 떠날수가 없습니다.》

송금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송구스러운 눈길로 한성범을 일별하였다.

그는 부장의 쏘는듯 한 눈길에 포로될가봐 두려웠고 이 흥정이 장기전으로 넘어갈것 같아 은근히 겁을 냈다.

《왜 영천땅을 떠날수 없다는거요?》

한성범은 두손을 깍지끼고 아연해진 눈길로 상대를 치떠보았다. 우로 쳐들린 시꺼먼 눈섭끝이 노여움으로 쭝긋거리는것 같았다.

《부장동지, 저도 물론 수령님께서 계시는 평양에 가서 천리마동상을 바라보며 살고싶습니다. 그러나…》

《참 답답도 하구만. 이런 행운을 놓고 그러나라니. 한번 놓치면 두번다시 돌아올수 없는 기회인데.》

《미안합니다. 전 이 고장에 너무도 깊은 정을 붙이였습니다.》

《이를테면 향토애때문이겠소?》

《사람들에 대한 정이지요. 제자들과 학부형들, 탄부들, 우리 마을 도서실의 독자들… 이제는 뿌리가 너무 깊어서 그 정을 뽑아던지기가 힘들게 되였습니다.》

《스물일곱살이라니 애인도 있을거구.》

《아직은 없습니다. 이제 생기게 되겠지요.》

한성범은 의자를 뒤로 제끼고 방안을 빙글빙글 돌아갔다. 돌아가다가는 우뚝 서서 송금주를 바라보고 또다시 돌아가다가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군 하였다. 그의 눈에서는 말이나 글로써는 도저히 표현할수 없는 어떤 불길같은것이 이글거리고있었다. 그는 송금주의 곁에 다가와 귀속말이라도 나누듯이 조용히 엄숙하게 물었다.

《금주선생, 후회하게 되지 않을가?》

《안심하십시오. 후회는 없을것입니다.》

한성범은 좀 기가 질린듯 한 표정으로 멍청히 천정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송금주에게 손을 불쑥 내밀었다.

《금주선생, 선생은 보기 드문 녀성이요. 난 영천땅에 와서 금주선생과같은 진실한 교육자를 알게 된데 대하여 참으로 기쁘게 생각하오.》

《부장동지, 리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송금주는 무거운 속박속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숨을 길게 내그었다.

그는 나들문쪽으로 걸어가다가 뒤로 돌아서서 한성범에게 물었다.

《부장동지, 비밀이 아니라면 말씀해주십시오. 중앙청년동맹에 추천한분이 누구인지.》

《추천자는 정애경동무요. 그가 나를 찾아와서 금주선생을 소개하더구만. 문학과 음악에 다같이 밝은 송금주야말로 학생소년궁전에 와서 일할만 한 적격자라고 한시간동안이나 열변을 토하는것이 아니겠소. 금주선생의 사진까지 들고와서 말이요. 어쨌든 그의 우정에 놀랍더구만. 그때는 이미 우리 과외교양지도국 일군들이 금주선생을 점찍고있을 때였소. 정애경동무의 소개를 받고는 우리가 선발을 잘했다는것을 확신하게 되였소.》

한성범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혀끝으로 입술을 추기고나서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애경동무의 말까지 듣고나서 우리는 소환을 결심하고 본격적인 료해에 달라붙었드랬소. 내가 청진에 출장을 왔다가 영천에 들린것도 사실은 그 료해를 위해서요. 선생을 소환하는 문제는 군당과도 합의를 보았소. 그런데… 일이 참 아쉽게 되였거던.》

그래, 정애경의 우정이 놀라운건 사실이야. 한달이 멀게 날아오는 편지와 소포꾸레미, 인편을 통해 보내오는 따뜻한 인사, 이 모든것은 식지도 않고 변색도 하지 않는 정애경의 우정을 말해준다. 그는 늘 내 생각만 한다고 한다. 오늘은 나를 학생소년궁전 창작가로까지 추천했다지. 고맙다, 애경이.

한성범과 헤여져 음악실로 올라간 후에도 송금주는 그와의 담화에서 받은 충격에서 헤여나오지 못하였다. 마음이 산란해서 일손을 도저히 잡을수가 없었다.

요망스러운것,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도 들쑤셔놓을수가 있나. 제가 평양가서 살면 됐지, 나까지 끌어올리려고 중앙청년동맹일군들을 든장질할건 뭐람. 나도 인간인데 왜 평양가서 살고픈 생각이 없겠어. 그렇다고 여기서 창조해가는 생활을 버릴수야 없지 않아. 고약한 친구,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지고 자기는 대동문동에 앉아서 호수에 던져넣은 파문을 부감하고있을테지. 오만해졌거던. 이 송금주한테서 좀 폭격을 받아봐야 정신을 차리지 않을가.

다음날 송금주는 정애경에게 이런 편지를 써보냈다.


이것 봐, 애경이! 사직을 하고 가정에 들어박혔으면 가정일이나 착실히 할게지, 간부사업에는 왜 손을 뻗쳐? 물론 필요에 따라 사람을 소개야 할수 있겠지. 그렇지만 송금주란 인간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는 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나를 감히 영천땅에서 뽑아가지 못해 몸살을 앓는단 말이냐. 덜된 녀석!

네가 처녀시절의 언약과 달리 총각을 따라 평양으로 간데 대해서는 널 나무랄 생각이 없어. 인간생활이란 언약대로 되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까.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어 그와 가정을 이루고 딴고장에서 사는거야 누가 나무라겠니. 너야 시골이 싫어져 평양으로 간것도 아닌데.

그렇지만 이 영천땅에 뿌리를 깊숙이 박고 제나름의 구상을 실현해가는 나까지 자기곁에 데려다놓지 못해 바스락대는 너의 좀상스러운 행위에 대해서는 용납할수가 없어. 이 송금주는 량심의 이름으로 너에게 엄중히 항의하는바이다. 나까지 평양으로 가면 이 영천은 어떻게 한다는거야?

두번다시 이런 요술을 부리지 말았으면 한다.

제발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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