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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2 회


제 7 장

1

온 도시가 명절기분으로 흥성거리는 정월초하루였다. 정애경은 아침부터 손님맞이준비로 바삐 보냈다. 시어머니, 시누이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음식차비였지만 그래도 일손이 모자랐다.

구이를 담당한 시어머니와 회를 담당한 시누이도 손가락마디에서 자개바람이 일게 뱅글뱅글 돌아갔지만 고사리채와 도라지채, 콩나물채, 배추생채와 드릅나물채를 만들어내느라고 땀을 빨빨 흘리는 정애경의 신역도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강석민은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이방저방 자리를 옮겨가며 부산스레 거닐다가는 이따금씩 부엌에 고개를 들이밀고 준비를 다그어대라고 독촉이다. 성미가 침착하고 듬직한 강석민이였으나 그 누긋하고 태평스런 성미가 자반뒤집기라도 하면 쟁개비이상으로 바글바글 끓는 보살이 되고만다. 오늘은 그 쟁개비가 유난히도 성칼지게 끓는다.

더군다나 오늘의 주빈은 박남일부주필과 청년동맹중앙에서 부장사업을 하는 한성범이다. 박남일과 한성범은 강석민의 아버지의 중학시절 제자들이였다. 두사람은 해마다 설이 오면 옛스승을 찾아와 세배를 드리군 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어길수 없는 관례처럼 되여버렸다.

그 두사람은 다 청년사업계의 명물들이다.

부뚜막에서 음식준비가 마감고비에 이르렀을 때 바지주머니에 두손을 찌르고 서성거리던 강석민이 아빠트마당으로 부리나케 곤두박질해 내려갔다. 5분도 못되여 그는 박남일과 한성범을 데리고 방안에 들어섰다.

《안녕들 하십니까?》

두툼한 솜저고리에 솜바지를 입고 목도리까지 두른 얼굴이 갱핏하고 눈매가 예리하게 생긴 사람이 성량이 풍만하고 음색이 맑은 남성고음을 앞세우고 주방칸으로 다가갔다.

《새해를 축하합니다!》

그는 식료상점의 가공반 아낙네들처럼 하나같이 행주치마를 두른 세 녀인을 향해 두루거리로 인사하였다.

살집이 좋고 풍채가 환한 한성범은 머리에 썼던 털모자를 벗어 한손에 받쳐들고 정중히 고개를 숙이였다.

《이렇게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애경은 행주치마에 두손을 모아잡고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였다.

박남일은 어느새 솜저고리와 털목도리를 벗어 옷걸개에 걸고 아래방 한가운데 놓인 두리상앞에 올방자를 틀고앉았다.

턱밑에까지 바투 올라간 검정색뜨개옷의 고가 높은 목깃이 울대뼈가 툭 불거진 부주필의 가느다란 목을 포근히 감싸고있다. 한성범도 외투와 모자를 벗어 옷걸개에 건 다음 두리상을 가운데 두고 그와 마주앉았다.

《강재사 부인의 그 미모는 여전하구만.》

한성범은 입귀에 《사슴》표 담배를 한대 꼬나물고 삼단같은 연기를 내뿜은 다음 그 연기사이로 두리상에 행주질을 하는 정애경을 바라보며 뇌이였다. 그는 강석민이라는 이름대신 《강재사》라는 대명사를 곧잘 사용하였다.

《오래간만에 그런 말을 들으니 비행기라도 타는것 같습니다. 신혼생활 4년에 주근깨밖에 남은게 없는데 미모라니요.》

정애경은 행주를 거두고나서 한성범의 말에 응수하였다.

《그 목소리 또한 은경소리처럼 아름답도다.》

한성범은 말상대를 보지도 않고 무슨 시의 결구라도 읊듯이 장엄한 표정으로 뇌이였다. 공연한 말치레를 하다가 본전도 못 찾고 혹을 하나 더 달게 된 정애경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황황히 주방칸으로 사라졌고 부장은 방금 읊조린 시의 여운이라도 음미하듯이 미간을 쪼프리고 명상에 잠긴듯 한 표정으로 머리우에 떠도는 몽몽한 담배연기에 눈길을 박아두고있었다.

《부장동무야말로 곬을 탈줄 아는 사람이거던.》

박남일이 처녀들처럼 하얀 이몸을 드러내며 시까스르는 말이였다.

《곬을 타다니? 그건 또 무슨…》

한성범이 그 철학자연한 표정을 허물지 않고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대사집에 오면 먼저 안주인한테부터 아첨해야 한다는 리치를 알고있다 그거야. 얼마나 약삭바른 처신인가.》

《그거야 초보의 초보지. 문제는 그 무기를 누가 먼저 사용하는가하는게 아니겠나. 거기에 따라 주인측의 대우도 결정되는거구. 오늘의 술잔중에서 제일 큰 술잔은 벌써 내것이 된거나 다름없다는걸 알아두라구.》

박남일은 그 말을 듣자 코웃음을 쳤다.

《자넨 한수만 보고 두수는 못 보는 사람이야. 아첨이라는것도 수가 높아야지 그렇게 해발딱하게 해서야 통하나. 금애야, 이리 온. 이 큰아버지하고 뽀뽀를 해야지.》

그는 웃방에서 늦잠을 자다가 깨여나 아래방으로 아장아장 걸어내려 오는 이 가문의 귀염둥이이며 유일한 손녀인 금애를 끌어당겨 무릎에 앉히고 볼에 입을 맞추어주었다. 아이는 박남일의 수염터가 와닿았던 볼편을 손으로 쑥쓱 문대고나서 물장구라도 치듯이 두다리를 연방 들었다내렸다 하며 쪼꼬만 발뒤꿈치로 장판바닥을 굴러댔다.

《금애야, 큰아버지 보고싶었지?》

박남일이 금애의 머리에 턱을 얹고 물었다. 금애는 고개를 까딱까딱 해보이며 《응, 보고싶었어.》하고 대답하였다.

《금년 설에는 큰아버지가 뭘 사다준다고 약속했더라?》

《사탕!》

아이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기대에 찬 눈길로 박남일의 얼굴을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박남일이 주머니에서 빨간줄과 파란줄이 경도선처럼 지나간 사탕알을 꺼내여 코앞에 가져다대자 그 애는 제비처럼 입을 벌리고 그것을 닁큼 받아물었다. 그리고는 량볼이 불룩해지게 사탕알을 이볼저볼로 분주스럽게 굴리며 맛나게 빨아먹었다.

《이 사람, 이제는 알만 한가? 한수 더 높은 아첨이라는게 어떤건지?》

박남일은 두리상 맞은켠에 앉아있는 한성범을 승리자연한 눈길로 건너다보며 금애를 품에 꼭 껴안고 그네라도 태우듯이 무르팍을 량쪽으로 연거퍼 흔들어댔다. 한성범은 두손을 어깨우로 쳐들고 항복하는 시늉을 해보이였다.

《알겠네, 알겠네. 아이에 대한 아첨이 곧 그 집안사람들에 대한 최고의 아첨으로 된다는 사실에 내가 왜 미처 주의를 돌리지 못했을가. 헛참!》

《그런즉 오늘의 첫 축배잔이 누구한테 돌아가겠는가 하는거야 명백하지 않은가.》

《금애 어머니, 첫 축배잔은 아무래도 박부주필동무에게 드려야 할것 같수다.》

한성범은 방금 강석민이 가져다놓은 술병을 박남일의 앞으로 밀어놓고 주방칸에서 탈피명태와 초간장을 들고 들어서는 정애경을 향해 눈을 끔쩍해보이였다. 두사람이 주고받는 롱질과 너스레에 기분이 어지간히 들뜬 정애경은 한성범이 시키는대로 박남일의 잔에 선참으로 술을 붓고 《부주필동지, 새해에도 우리 금애를 계속 고와해주십시오.》하고 말했다. 그러자 박남일은 잔에 입을 댔다놓으며 한성범에게 《여보게 부장, 모성들의 첫째가는 기쁨이 뭔지 인젠 알겠지?》하고 물었다. 그리고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사탕 두봉지를 꺼내 금애의 손에 보란듯이 쥐여주었다. 금애는 그 봉지들을 량손에 하나씩 갈라들고 주방칸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박남일의 요청에 따라 세 사나이는 첫 축배잔을 강석민의 어머니 오봉선에게 드리였다. 그다음에야 그들은 잔을 찧었다.

10분후에 강석민네 부서 기자 3명이 들어섰다. 바깥날씨가 얼마나 추웠던지 세사람 다 얼굴이 능금처럼 빨갛게 익었다. 주인들과 손님들사이에 새해를 축하하는 간단한 인사들이 오간 후 강석민은 그 3명을 한성범에게 소개하였다.

그 순간부터 좌석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정애경과 강미영은 음식그릇들을 날라들였다.

무슨 일에서나 격식을 중시하는 강석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손을 모아잡고 전에없이 엄숙하면서도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설인사말의 딱지를 뗐다.

《나는 우선 우리 조국의 력사에서 자랑스런 한페지를 또다시 수놓게 될 새해 첫날을 여러분들과 함께 쇠게 된데 대하여 대단히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새해에 수도시민들은 어버이수령님께서 평양시에 제시하신 과업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게 될것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앞날에 지하철도로 출퇴근을 하고 중앙난방의 덕으로 구들을 덥히고 목욕도 하게 될것입니다. 이것은 먼 장래의 일이 아니라 가까운 목전의 일입니다. 나는 우리 조국의 력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대로 되는 천리마시대를 이 땅에 펼쳐주시고 우리 인민에게 날에 날마다 새라새로운 복을 안겨주시는 어버이수령님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이 잔을 들것을 제의합니다.》

강석민의 제의에 따라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한 기분으로 잔을 들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안주들을 집었다.

술이 두순배째 돌아가자 한성범이 입을 열었다.

《이 두번째 잔은 천리마시대를 위해서 듭시다!》

세번째 잔은 방안에 모인 모두의 건강과 새해의 사업성과를 위해 들었다.

그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열심히 마시고 열심히 먹었다.

그다음부터는 모두가 말문을 열고 열변을 토하였다. 열기띤 대화에 방안공기가 급작스레 달아오르고 그 공기로 하여 여섯사람도 흥분하였다. 처음에는 평양화력발전소의 공사정형이 화제에 올랐고 다음에는 작곡가 김옥성과 리면상에 대한 평가가 좌중을 오락가락하였다. 새로 나온 가금총국이 어떤 경이적인 성과를 달성하고있는가 하는것도 음식상 한쪽구석의 화제거리로 되였다. 사회주의농촌문제에 관한 테제, 원양어로선단, 강하종외과과장, 길확실, 리신자… 화제는 실꾸리처럼 줄줄이 쏟아져나왔다.

방안에서는 미구에 직업의 차이, 직급의 차이, 나이의 차이가 없어졌다. 한성범과 허기자가 서로 어깨를 툭툭 치며 열변을 토하는가 하면 윤기자와 박남일이 저가락으로 안주를 집어 상대방의 접시에 옮겨놓기도 하고 강석민과 안기자가 재일동포들의 귀국문제를 두고 기염을 내뿜기도 하였다. 잠시후부터는 집안에서 노래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맨처음으로 운을 뗀 사람은 한성범이였다. 그는 세 기자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허기자의 어깨를 그러안고 그 풍만한 저음으로 예술영화 《〈갈매기〉호청년들》의 주제가를 불렀다.


잔잔한 물결우에 별빛은 반짝이고

돌아가는 배길에 꽃보라 뿌리네

달리는 배전에 출렁이는 물결은

자랑찬 하루일을 이야기하네

아 날리는 만선기 바라보며

포구로 돌아가는 배길은 좋다네


2절부터는 허기자가 한성범의 노래에 합류하였다.

《이건 명곡이야, 천리마시대 근로자들의 생활에 대한 송가! 가사는 얼마나 생활적이고 곡조는 또 얼마나 은은하면서도 랑만적이고 서정적인가. 〈《갈매기》 호청년들〉은 이 주제가때문에 더 유명해졌다고 볼수 있거던. 아, 〈갈매기〉호, 우리 조국은 통털어 해와 별이 빛나고 행복의 물결이 출렁이는 〈갈매기〉호 라고 볼수 있지.》

한성범은 두주먹으로 턱을 고이고 자기자신을 납득시키려고 애쓰기나하는듯이 조용조용 말했다. 그 말에 허기자가 얼른 맞장구를 쳤다.

《아주 적절한 비유입니다. 우리 나라 전체가 〈갈매기〉호라는 말은… 머리우에서는 해와 별이 빛나고 발밑에서는 행복의 물결이 출렁거리는 나라! 이게 바로 우리가 사는 조국이지요. 정말 멋들어집니다. 조국도 사람도 노래도… 가만, 부장동문 혹시 학창시절에 문학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까?》

한성범은 《문학》이라는 말을 듣자 턱에서 주먹을 떼고 열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랬지요. 시인이 되려고 습작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성공을 못했습니다. 얼핏 보면 문학의 세계란 아주 화려해보이지요. 과일들로 주렁진 울긋불긋한 과수원같다고나 할가. 하지만 들어서고보면 온통 지뢰밭이지요. 여기서도 꽝, 저기서도 꽝… 에- 엑!》

그는 머리를 털며 진저리를 치는 시늉을 해보이였다.

《꽝이란 또 뭡니까?》

《문학의 세계에 부나비처럼 뛰여든 우연분자들과 둔재들을 쓰러뜨리는 폭발물이지요. 거기엔 형상이라는 지뢰도 있고 구성이라는 지뢰도 있고 주제나 서정이나 운률이라는 지뢰도 있습니다. 가령 내가 쓴 시에 서정이 부족하면 또 꽝하는 폭발이 일어날게 아닙니까. 어떤 경우에는 어휘 하나때문에 법석 끓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고보면 문학이라는것도 간단치 않은 학문인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처녀작 하나는 무난히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두번째 시가 말썽을 일으켰지요. 서정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운률의 라렬이라나요. 그 바람에 그만 제꺽 꽁무니를 빼고말았습니다. 정말 학질을 뗐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이 한성범이라는 둔재에게는 보는 눈은 있으나 쓰는 손이 없지요.》

《거 참 아쉽게 됐군요.》

허기자는 고개를 한쪽옆으로 비틀며 못내 애처로와하는듯 한 표정을 그리였다.

방열기에서는 잠든 아기들의 숨결과도 같은 쌔근쌔근 증기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창유리에서는 성에가 녹아내리였다. 방안온도는 봄날처럼 훈훈해났다.

정애경은 이 평화롭고 즐거운 정경앞에서 시종 웃음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는 명절놀이가 기대했던바 이상으로 멋지게 흘러가는데 대해 만족스럽게 생각하였다. 여기에 모인 한명한명은 다 존경할만 한 지성인들이였고 귀중한 인재들이였다.

수도생활 4년사이 정애경이 거둔 소득가운데서 첫손가락에 꼽을만 한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많이 사귄것이리라. 교단에서 사귄 사람들, 병원침상에서 사귄 사람들, 탁아소에서 사귄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백화점과 식당, 아침저녁매대에서 친교를 맺은 사람들도 있었다. 평양은 수많은 시민들이 사는 인간의 바다였다. 이 바다에서 자유로이 헤염치느라면 많은 사람들과 지내지 않을수 없게 된다. 사람을 많이 알수록 생활은 흥겹고 보람도 크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친교를 통해 얻은 가장 큰 덕은 인간으로서 갖추고있어야 할 지성의 탑을 높인것이였다. 정애경은 영천에서 교원을 할때와는 비교도 할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지식과 상식을 섭취하면서 송금주가 왜 상식학습에 그토록 열을 올렸는지 늦게나마 깨달았다. 사람들과의 친교는 가정살림을 꾸리는데서도 큰 도움을 주었다.

정애경은 1백화점 천매대에 다니는 옆집 며느리를 벗으로 삼은 때로부터 가정생활에 필요한 여러가지 천들과 신발들, 집기류들, 놀이감들을 더 사들이였다. 그가 단골손님으로 드나드는 고서점 책임자는 그에게 새로 들어오는 인기도서들을 정상적으로 알선해주었다.

정애경은 자기 집에 자주 드나드는 마실군들과 남편의 친지들을 통하여 생활에 필요한 정보들도 무더기로 입수하였다. 대도시의 생활에서는 튼튼한 인맥을 가지고있는 사람들이 더 편리하고 기름지게 살아가기마련이였다.

그렇다면 오늘 초청한 손님들은 강석민과 정애경에게 장차 무엇을 약속해주며 그들의 운명개척에 어떤 도움을 줄수 있는가 하는것이다. 그것은 아직 누구도 모르며 또 짐작조차 할수 없다. 그러나 한마디로 단언할수 있는것은 그 다섯사람이 그들에게 앞으로 어느때든지 필요한 생활상방조를 꼭 주게 된다는것이다.

한성범을 놓고보자. 그는 청년동맹중앙에서 청소년들의 과외교양사업분야를 담당한 부장으로 사업하고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애경에게 당장이라도 눈에 뜨이는 실질적인 방조를 줄수 있고 또 과외교양기관들에서 일하는 일군들의 선발에서도 발언권을 가진다. 정애경은 어제 밤 남편한테서 설날 자기 집으로 오게 되여있는 사람들가운데 청소년들의 과외교양을 담당한 한성범부장도 포함되여있다는 말을 듣고 작년 설에도 인사하러 찾아왔던 그에게 왜 송금주문제를 꺼내지 못했던가 하는 아쉬운 생각을 하면서 후회도 없지 않았으나 이번에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 사람만 잘 삶아놓으면 송금주를 평양학생소년궁전 지도교원으로 끌어올릴수 있지 않느냐 하는 타산을 줄곧 하였다.

외형상으로는 엄청난 꿈같이 보였지만 리치를 따지고보면 가장 단순하면서도 현실적인것이 바로 한성범의 힘을 빌어 송금주를 평양에 소환하려는 착상이였다. 가능한가, 가능하였다. 한성범의 마음만 움직이면 단숨에 성사시킬수 있는 소망이였다.

문제는 송금주에게 중앙과외교양기관에서 지도교원이나 창작가로 사업할수 있는 자질이 있는가 하는것이다.

정애경은 첫새벽에 잠에서 깨여나 남편에게 송금주의 소환과 관련한 자기의 행동계획을 솔직하게 터놓았다. 뜻밖에도 강석민은 그 계획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불밑의 송사란 십중팔구가 성공하는것이 상례라는데 남편은 오히려 설날에 사람을 청해다놓고 인사문제를 부탁하는것은 원칙에도 맞지 않고 례절에도 어그러지는 치사한짓이라고 안해를 면박하였다. 부부는 이 문제로 하여 한시간나마 옥신각신하였는데 거기서 생긴 불쾌감으로 하여 정애경은 《막대기》라는 별명까지 붙여가며 처음으로 남편을 호되게 비난하였다.

정애경은 남편의 조언을 무시하고 적당한 기회만 생기면 한성범에게 송금주의 소환문제를 상정시키려고 결심하였다.

남편이란 사람은 《당신 머리에 어느새 그런 쉬가 쓸었소?》하고 쉬파리나 소똥굴레를 보는것 같은 눈으로 이 정애경을 보았지만 가정에 들어박힌 녀자가 그만하면 청렴한 편이지 쉬는 무슨 쉬인가.

정애경이 한성범의 가까이에 갈 때마다 강석민은 눈에 날을 세우든가 남들이 보지 않게 쓸데없는 흥정을 붙이지 말라는 뜻으로 주먹을 흔들어보이군 하였다. 기회는 좀처럼 차례지지 않았다. 비상수단을 쓰기로 결심한 정애경은 웃방 경대앞에 쭈그리고앉아 쪽지를 썼다.


한성범부장동지!

1월 4일 저를 사무실로 찾아주십시오. 의논할 일이 있습니다.

강석민의 안해 정애경


손님들이 돌아갈 시각이 되자 정애경은 한성범의 양복저고리를 벗겨주면서 그 저고리 안주머니에 쪽지를 슬쩍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강석민이 박남일부주필과 작별인사를 하는 짬을 타서 한성범에게 빠른 말씨로 속삭였다.

《집에 돌아가면 안주머니를 보십시오. 쪽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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