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 회


제 5 장

3

전장원은 김중권이 몹시 기다려졌다. 농민협회와 학교일로 분주히 뛰여다니는 그에게는 주영백이네 운송점문제를 비롯하여 유익한 조언과 실질적인 도움을 받고싶은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그리고 읍주재소와 풍인동경찰관출장소 경관놈들의 통행단속과 수색만행은 날마다 심해졌다. 하루에 두번만 같은 길로 다녀도 뺨을 맞으며 문초를 당해야 하였다.

공작조건은 나날이 어려워져갔으나 김중권이로부터는 소식이 감감하였다.

그날밤도 야학을 필한 장원은 지친 걸음을 옮겨 집으로 돌아오며 김중권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근거지로 들어가자마자 장군님을 만나 여기 형편을 다 보고했겠는데 왜 소식이 이토록 감감할가? 혹시 장군님께서 어디로 원정 나가시였을가?… 아니면 근거지에 무슨 일이 생겼을가? 자기가 못 나올 형편이면 다른 사람이라도 내보낼텐데?…)

휘영청 밝은 달빛아래에서 이슬을 머금은 당콩잎들이 번들거리고있었다.

그가 자기 집 마당에 들어서니 불빛이 환한 방문에 웬 사람의 그림자가 비껴있었다. 방안에서는 말소리가 융융 흘러나왔다. 아마 자기 생활을 돌봐주고있는 보금의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이다.

(왔구나, 드디여 왔구나!)

장원은 기쁨에 넘쳐 달려들어가서 문을 벌컥 열었다.

방안에는 김중권이나 근거지에서 나온 사람이 아니라 사촌형 전수원이 앉아있었다.

장원은 그에게 건성으로 눈인사를 하고는 화김에 책보를 구석쪽의 책상에 던졌다.

전면장은 그의 거치른 행동에는 아랑곳없이 절충과 타협, 합심까지를 구걸하는 눈으로 동생을 쳐다보며 좀 앉으라고 하였다.

형제는 오래간만에 마주앉았다.

보금의 어머니는 구정물을 버리고 들어와서 가마목을 대충 거둬놓고는 간다는 말없이 조용히 사라졌다.

면장은 마른기침을 몇번 톺아올리다가 동생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몰라보게 깎이웠으며 턱에 수염이 꺼칠했다. 움푹 패여들어간 푸릿한 눈확언저리에는 심각한 번뇌의 그늘이 비꼈다.

그는 비감에 젖은 목소리로 말을 떼였다.

《너 선친들의 분묘에는 언제 갔다왔느냐?》

《가본지 오래 되오.》

《내 일전에 올라가보니 조부님 묘는 말이 아니더라. 풀이 무성하구 메돼지가 제돌밑을 뚜져놔서 자손들이 있는 묘같지 않더라. 별게 후레자식이냐? 우리같은것들이지.》

《형님은 그 일때문에 왔소?》

《그 일도 그 일이고…》 그는 긴숨을 내쉬였다.

《윤치석댁에서 네 생활을 돌봐주는 모양인데 형구실을 못하는 나로서는 할말이 없구나. 홀아비로 남의 신세를 너무 오래지면 소문도 좋지 못하게 나는 법이라더라.》

《어떤 자식이 뭐라고 합디까?》

《됐다, 됐어. 내가 그저 걱정이 돼서 하는 소리다. 그건 그렇구, 내 처지가 요새 떳떳치 못하다. 나는 형제지간에 마주앉아 신중하게 의논할 일이 있어 왔다. 일본사람들은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용공분자로… 나를 감시한다던 네 말이 옳은것 같다. 나는 아마 무사치 못할게다.》

장원은 머리를 수굿하고 듣기만 하였다.

전수원은 도에서 경무부장이 내려왔던 이야기부터 자기가 요새 겪고있는 심적고통을 죄다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내 면장자리를 노려온 서완오놈의 작간때문에 저 사람들이 나를 더 의심하는것 같다. 그들은 너를 공산분자로 가정해놓고 내가 너와의 친척관계에 말려들어 용공을 하게 되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면에서 어느 누구가 왕재산사건을 책임지고 목이 잘려야 이 소동이 가라앉는다. 서로 살아나기 위해 책임을 남에게 들씌우자고 으르렁거리는 판인데 이 면에서 제일 문문한게 아마 이 전면장인 모양이다.》

그리고는 이런 때에 형제지간의 의리가 필요하다고 하며 네가 좀 억울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내 립장을 생각하여 야학을 그만두어달라고 하였다.

《나는 네가 거기서 무엇을 가르치고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서숙을 열고 야학까지 굳이 한다는것자체가… 아무 보수도 없이 사람들을 가르친다는게 벌써 수상쩍은 일이란 말이다. 의심을 받을 근거다. 너에 대한 의심은 곧 나를… 나를 위협한다.

아, 나한테는, 내 주변에는 맨 혐의를 받을것들뿐이구나! 그만두어다구. 너한테 형제지간의 정이나 의리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나를 생각해서 그만두어라. 이제는 누구나 잡아서 제물로 바쳐야 안정이 온다. 모두 승냥이처럼 으르렁댄다. 느침을 흘리면서. 아- 죽일 놈들, 너때문에 나를 노려보고있다.》

《형님, 내 말을 듣소.》

전장원은 부르쥔 주먹을 무릎에 얹고는 몸을 약간 뒤로 젖히며 쓰거운 웃음을 입가에 그리였다.

《나는 형님의 그 꼴을 차마 못보겠소. 떨기는 무얼 떠우? 세상사람들의 태반이 제 뼈를 놀려 벌어먹으면서 얼씨구 좋다 하고 사는 판인데 그까짓 면장자리 내팡가치오.》

이 말에 모욕을 느낀 전수원은 분통이 터져 주먹으로 방바닥을 내리쳤다.

《야, 장원이 ! 나는… 나는…》

그는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서 무릎을 부들부들 떨뿐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나는… 네가 어려울 때 흰소리 한마디 치지 않았다! 동흥중학에 시험을 치고 입학금이 없다구 손을 내밀 때도 외투를 팔아 푼푼히 줴줬다. 이십리나 되는 소학교를 다닐 때 대소한추위에 발이 얼구 귀가 얼가봐 귀걸개, 목도리 다 벗어주구 업구 다닌게 누구냐. 그런데… 네가… 오늘은 내 가슴에 수모를 들씌우느냐? 대못을 치느냐?》

장원은 형이 자기의 가긍했던 어린시절의 일들을 린색한 빚군처럼 모조리 들추어내자 입안에 열물이 돌아 얼굴을 험하게 이그러뜨렸다.

《그만두시오! 나는 형님같은 사람의 신세를 진 일이 지금은 부끄럽소. 수치스럽단 말이요!》

전수원은 흰자위가 드러나도록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빤히 건너다보았다.

그리고는 무엇인가 툭 꺾어지는것 같은 소리를 내며 머리를 떨구면서 두팔을 맥없이 늘어뜨렸다.

《아하, 의절이구나! 피줄이 이렇게 끊어지는구나!》

전면장은 소리없이 흐느꼈다.

장원은 자기가 너무 지나쳤다는 가책에 형을 빤히 건너다보다가 숙어지는 이마에 손을 고이였다.

침묵이 흘렀다. 그것은 둘사이에 심연을 깊이 파놓은듯 한 오랜 침묵이였다.

장원은 문득 이마를 스치는 선뜩한 기운에 얼굴을 들었다.

형이 영악한 짐승처럼 독기를 내뿜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있었다. 그는 두손을 앞으로 내밀며 기진한듯 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너 나를 뭘로 아느냐?》

이런 무서운 자존심의 발작에 장원은 가슴이 움츠러들었으나 속에 있는 말을 다 내뿜었다.

《살아보자고 순사놈들까지 끌어들여 술대접을 하는 형이 나는 정말 루추하게 여겨지오. 그런다구 놈들이 은총을 베풀것 같소? 서완오놈이 이 면에서만도 몇몇 가정을 짓밟아버렸소? 왜놈이나 지주놈이나 순사나부랭이들이나 다 같은 배속들이란 말이요. 조선사람은 누구나 형처럼 살아서는 안되우. 그건 사는 길이 아니라 죽는 길이요. 작두밑에 목을 들이미는 격이란 말이요.》

《이 마당에 와서 나를 가르치려들지 말라!》

《형, 왜 그렇게 눈이 어두워졌소? 왜 세상이 움직여가는걸 보지 못하우? 이놈 세상이 오래 갈것 같소? 여기서 유격근거지가 륙칠십리길이요. 언제 유격대가 쳐나올지 모르오! 그때에 가서 저놈들과 가지런히 서서 개죽음을 당하고싶소?》

《네가 눈이 멀었다. 라남에만 가봐라! 그 강한 일본군을 무슨 수로 당해낸다더냐?》

《형은 왜놈만 무섭구 날로 강세를 취하는 저 항일유격대는 무섭지 않소? 여기서 라남이 더 가깝소, 유격근거지가 더 가깝소? 김일성장군님은 조선인민이 하나로 뭉쳐 유격대를 도와나선다면 왜놈들을 때려엎을수 있다고 언명하시였소.

멀지 않았소! 김일성장군님은 저 왕재산에 나와서 앞으로 무장투쟁을 국내에로 확대한다고 선포하셨소!》

《네가 그걸 어떻게 아니? 무지한것들이 퍼뜨린 미신같은 풍설에 떠서… 어리석게 굴지 말아!》

《풍설이 아니요! 미신이 아니요!》

전장원은 다음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근기있고 겸손하고 무던하지만 일단 화가 동하면 성난 황소처럼 분별이 없어지는 그였다.

《내가 왕재산에서 직접 들었소! 장군님을 모시고 하는 회의에 참가해서 내 눈으로 장군님을 뵙고 내 귀로 그이의 음성을 직접 들었단 말이요!》

순식간에 방안공기가 얼어붙은듯 했다. 얼굴에서 피기가 가시여진 전수원은 몸을 뒤로 젖히며 벽에 등을 맥없이 기대였다. 그의 크게 뜬 눈에서 새까만 동자가 바르르 떠는듯 하였다. 이그러지며 푸들거리는 입술에서는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새여나왔다.

《아- 너였구나.…》

그는 넋이 빠진듯 천정을 쳐다보며 헛소리를 쳤다.

《네가… 네가… 너였단 말이지. 면장 동생이…》

그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번들거리고 눈에서는 흰자위만 보였다. 전장원은 그의 팔을 잡아흔들었다.

《형! 형! 왜 이러시우?》

이때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아래우에 검은 제복을 입은자가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방안에 들어섰다. 눌러쓴 제모채양밑에서 살기를 뿜는 눈, 코밑수염에 어리는 차거운 미소… 밖에서도 다급한 발자욱소리들이 울리고 독같은것이 와지끈 깨지는 소리가 났다. 최순사를 알아본 장원은 소스라쳐 놀라 뛰여일어났다.

《면장 동생이 왕재산사건관계자라니 참 유감스러운 일인데?》

장원은 자기에게로 매달리는 형을 밀어던지고 등불을 훅 불어 껐다… 전수원이 정신을 차렸을 때 문짝이 떨어져나간 방문으로는 푸른 달빛이 쏟아져들어오고 어딘가 먼곳에서 개짖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방바닥에는 엎어진 책상이며 종이장들, 옷가지들이 널렸고 그우에 흩어진 유리쪼각들이 달빛을 차겁게 반사하였다.

장원은 격투끝에 잡혀가고 자기만이 란장판이 된 방바닥에 쓰러져있다는 이 엄혹한 현실이 악몽속의 일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유리쪼각들이며 옷가지들을 쓸어만져보았다. 동생이 잡혀가고 모든것이 끝장이 난것은 부정할수 없는 현실이였다.

최순사일당이 밖에 잠복해있다가 왕재산에서 김일성장군을 만났다는 장원의 말을 듣자 달려든것이 분명하였다.

이제는 자기 운명도 다 되였다고 생각하니 몸을 움직일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그는 가까스로 벽에 기대여앉아 이마에서 끈적거리는것을 손바닥으로 씻으며 신음소리를 내였다.

전수원은 동생을 설복하여 돌려세움으로써 그도 자기도 위기에서 벗어나자고 찾아왔었다. 그런데 이런 벼락이 내려질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무서운 절망감때문에 자기의 충고를 외면하고 고집을 부리다가 끝내 이런 재난을 가져온 장원에 대한 원망이나 미행한 순사놈들에 대한 저주도 생기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벽에 붙이고 허망한 눈으로 차거운 달빛이 쏟아져내리는 바깥하늘을 멍하니 내다보았다. 그의 눈에서 푸른 물기가 번들거렸다. 이제는 틀림없이 악형을 당하게 되고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질지도 모를 동생에 대한 련민의 정이 가슴에 젖어들었다. 자신이 면장직에서 파면당하고 어느 고등계형사앞으로 불리워가 고초를 겪게 될 일따위는 동생의 죽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것이다.

문득 날카로운 의혹이 그의 가슴을 선뜩 찔렀다.

(장원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가? 내가 순사들을 밖에 매복시켜놓고 들어왔다고 생각하지 않을가?)

최순사가 방에 들어설 때 자기를 밀쳐버리던 장원의 눈, 혐오스럽게 쏘아보던 그 눈이 앞에서 황황 불타오르는듯 하였다.

그는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며 몸서리를 쳤다.

(아, 나는 그런 비렬한짓은 안했다. 이것만은… 이것만은… 장원이한테 말하여야 한다!)

전수원은 자기가 어떻게 허둥거리며 밖으로 달려나갔는지 몰랐다. 찬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그는 칠흑같은 어둠속으로 끝없이, 끝없이 달려갔다. 지진이 이는 대지우를 달려가는듯 비칠거리기도 하고 쓰러져 딩굴기도 하였다.

(장원아!… 장원아!… 나는 그런 비렬한짓은 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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