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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8 회


제 6 장

4

정애경은 묵직한 사물알약꾸레미를 들고 시고려병원정문을 나섰다.

8월의 폭양이 사정없이 내려쪼이는 한낮이였다. 음달에서 반시간가량 지체하다가 뙤약볕속에 나서니 빈혈이 일고 눈앞이 새까매졌다. 산후탈을 만난 후부터 그의 육체에 군림하고있는 습관성빈혈이였다. 고중시절은 말할것도 없고 교육간부학교시절에도 고뿔 한번 앓지 않던 건강체가 지금은 삼복철에도 걸핏하면 오한에 짓눌려 솜옷을 입고다니는 약골로 되였다.

이런 몸을 가지고 교단을 떠나지 않겠다고 앙탈을 부리였으니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짓이였던가. 휴직을 권고하던 시어머니나 교장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다. 내가 지금도 이 모양, 이 꼴로 교육에 종사한다면 동료교원들에게 얼마나 많은 부담을 주며 학생들에게는 또 얼마나 큰 실망을 주겠는가. 나 하나때문에 시간표가 자주 달라지고 논판에 보식을 하듯이 다른 교원들이 나를 대신하여 보충수업을 뻔질나게 할것이다. 학급은 엉망이 되여 말밥에 오를것이다. 총점 1위로 달리던 영천시절의 영예에 대한 애틋한 추억은 망각의 이끼속에 묻혀 형체도 찾지 못할것이다. 휴직을 하고나서 용단을 잘 내렸지. 지금껏 사직을 하지 않고 교단의 의자 한끝에 엉치를 붙이고앉아 빠벨 꼬르챠낀과 같은 강자의 흉내를 낸다면 사람들은 나를 얼마나 역겹고 치사스러운 인간으로 보겠는가. 사람이 자기를 아는것만큼 힘든 일은 없다.

사직한지 일곱달, 인제는 무직자의 고리타분한 생활에도 어지간히 인이 박히였다. 이따금씩 교단에 대한 미련이 아프게 가슴을 파고들 때도 있었지만 얼마전부터는 그것도 체념해버리였다.

하지만 정애경은 자기에게 차례진 불행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자기의 전도를 운명이라는 폭군에게 맡겨두지도 않았다. 그는 그 불행을 일시적인것으로 여기였고 자기의 전도에도 칠색무지개가 비낄 때가 오리라고 믿었다. 문제는 몸을 얼마나 빨리 추세우는가 하는데 있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건강이였다. 그는 가슴속에서 고통이 뒤채일 때마다 그 고통을 영천의 송금주와 함께 나누었다


영천의 벗 금주에게

금주, 전번편지에서 넌 사진을 보내달라구 했지.

안됐다만 지금의 나로서는 그 부탁을 도저히 들어줄수 없구나. 내가 이런 몰골로 어떻게 감히 사진을 찍는단 말이냐. 설사 사진을 찍어 너에게 보낸다고 하자. 그러면 그 사진앞에서 너는 변모된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랄것이다. 내 몰골이 이 지경이 된것만도 가슴아픈 일인데 너한테까지야 어떻게 상처를 주겠니. 너는 틀림없이 내 몰골앞에서 실망할것이고 무직자가 된 내 처지를 두고 몹시 락심할것이다. 이 애경이는 그걸 바라지 않는다. 너는 평양의 《조카딸》이 보고싶다면서 금애의 사진도 요구하였는데 우리는 그 애의 백날사진도 찍어주지 못했어. 무우말랭이같은 그 얼굴을 어떻게 사진에 담는단 말이냐. 그렇지만 금주, 이 애경은 곤난앞에서 절대로 주저앉지 않는다. 그걸 믿어다오. 넌 5년안으로 건강을 회복하라고 편지에 썼지만 난 3년안으로 무위도식을 끝장내고 교단에 다시 돌아가련다.

나도 교육자의 대오에서 이전날처럼 너와 보조를 맞추며 천리마의 행진곡을 부르고싶구나.

너의 애경



애경에게

애경이, 요 귀염둥이야.

네 몸무게가 46키로까지 내려갔다니 나도 가슴아프다. 그래도 이전날의 미야 좀 남아있겠지. 혹시 네가 사태를 너무 과장해서 묘사하는게 아니냐. 하기야 오죽하면 사직을 했겠니. 네 강기를 가지고서도 버티지 못했으니 운명도 너의 편은 아니였던것 같구나. 어쩌면 영천의 미녀로 뭇사내들의 애간장을 녹이던 네가 그 꼴이 되였단 말이냐.

3년안으로 건강을 되찾고 대오로 돌아가겠다니 그 기개가 장하다. 언제인가는 행운이 미소를 함뿍 담고 돌아가리라는걸 확신한다. 아무쪼록 금애를 잘 키워라. 인생의 제2악장을 그려가는 너의 악보에 명랑하고 유쾌한 리듬이 한시바삐 울리기를!

너의 둘도 없는 벗 금주


금주에게

오늘은 좀 기분나쁜 소식을 전하려고 한다.

어제 밤 나는 금애의 아버지와 한바탕 격전을 치르었다. 우리 부부사이에서는 처음으로 되는 말다툼이였지. 그러니 《1차대전》이라고 명명해야겠구나.

언쟁의 동기는 강동지의 부탁을 내가 한달동안이나 깔아뭉갠데 있었어. 아동가사 3편에 곡을 붙여달라는 신청이였어. 모란봉중학교 소년단지도원이 아마 애아버지한테 곡을 부탁했던 모양이지.

금주, 생각해보럼. 내가 지금 가사에다가 곡을 붙일 경황이 됐나 말이야. 그런데 글쎄 그인 대뜸 인상을 쓰면서 남편이 어쩌다한 부탁인데 그럴수가 있는가, 무심해도 분수가 있지, 애정이 식어졌다고 푸념질을 하지 않겠어.

그래서 나도 고함을 치면서 막 대들었지. 그래 몸이 온전치 못해서 사직까지 한 안해에게 작곡을 의뢰하는것도 애정인가고 따지고들었지. 그랬더니 그인 내가 일거리도 없이 너무 무료하게 보내는것 같아 일부러 그런 청탁을 했다는게 아니겠어. 리해되더구나. 남편의 웅심깊은 사랑에 감동도 되구. 그런데 때가 늦었지 뭐. 이 못난 녀자의 나팔통에서는 리치에도 맞지 않는 망언들이 마구 튀여나오지 않았겠니. 그따위 위선을 걷어치우라, 안해의 노력을 그렇게 헐값으로 팔아넘길 궁리를 하는 남편이 무슨 온전한 남편인가고 했어. 남편은 아연해서 아무말도 못하더구나.

그때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마디들을 돌이켜보면 지금도 자기자신에 대한 환멸과 수치감을 금할수 없어. 세상에 그런 어거지가 어디 있니. 내가 무료해할가봐 작곡이라도 하면서 고독을 풀라는데 그게 뭐가 잘못됐게 삿대질을 해대며 악악거린단 말이냐.

난 고함을 치고난 그 순간부터 잘못을 뉘우치며 후회하기 시작했어. 자신의 행실을 생각하면 김치독에라도 빠져죽고싶은 심정이였어. 유치한년! 천박한년! 악마같은년! 하고 나는 자기자신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어. 그처럼 너그럽고 인자하고 호방한 남편에게 행악질을 하다니 그게 어디 상상이나 할 일이냐. 그런 훌륭한 남편을 모독하다니.

금주, 난 도저히 리해할수 없구나. 어떻게 되여 내가 이런 불망종이 되였는지. 이거야 살인행위보다 더 포악하고 야만적인거지 뭐야. 아마도 내 정신에 병이 든것 같애.

그런데 그 악마같은년은 아직 남편에게 사과 한마디 못했구나. 그이의 가슴에 그렇게 어망처망한 상처를 내고도 아닌보살을 하고있으니 이게 인간의 탈을 쓴 요물이지 사람이냐. 이 죄만으로도 나는 제명에 살지 못할것 같애. 너라도 곁에 있으면 좋으련만.

금주, 난 지금 극심한 정신적방황을 체험하고있어. 산후탈을 만났을 때보다 몇십배 더 우울하고 고독스런 상태야. 이 상태에서 인차 해방되지 못하면 난 머리가 돌것 같애. 이 가련한 녀인을 멀리서라도 실컷 꾸짖고 위로해다오.

대동강건너편 동대원하늘에 걸린 상현달을 바라보며 너를 그린다. 한점의 그늘도 없던 녀교원합숙시절을 추억하면서 그 시절에 꽃보라를 뿌리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안녕히!

불우한 운명의 녀인 애경


행복한 운명의 녀인 애경에게

야, 다사스럽고 요망스러운년아!

나는 우선 나를 감히 상현달에 비긴 너의 그 무엄한 표현방식에 엄중히 항의하는바이다. 그래 내가 낫가락처럼 채 여물지 못한 인물짝이라는거야? 이 송언니는 상현달도 아니고 하현달도 아니다. 송금주는 공산명월이다. 이걸 명심하고 함부로 나불거리지 말어라.

상현달과 공산명월도 가려볼줄 모르는 그런 눈으로 남편을 보면 얼마나 온전히 보겠니. 네가 그런 청맹과니고 불망나니인줄은 정말 몰랐구나.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데는 그래도 싸라예보의 황태자암살이라는 그럴듯한 동기가 있어. 그런데 너희네 《1차대전》에는 도대체 무슨 동기가 있니? 남편의 지청구에 발끈한것이 동기로 되였다는거겠지. 남편에게 고함을 지르며 막 대들어? 급작스레 맞다든 사랑이 너무 벅차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할딱거리던게 언젠데 벌써 그 지랄이야. 그게 어디 정애경이란 미인이 할짓이냐. 인물값을 그런 식으로 하면야 안되지. 우울이니, 고독이니, 방황이니 하는따위의 요설은 듣기도 싫다. 그런 요설로 자기를 변호하면 안돼. 악발이 정애경은 어디로 가고 그런 허깨비가 정애경배역을 하니. 아무튼 이 정치위원이 잘못했지. 채 영글지도 못한 생둥이를 부인동맹으로 떠밀어보냈으니 할말이 없구나.

이것 봐, 애경이.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오너라. 그런 정신상태로는 설사 건강한 몸이라고 해도 신성한 교단에 다시 발을 들여놓을수 없다.

부탁이다. 한시라도 빨리 남편에게 사죄하여라. 제발 빈다. 네가 강석민동지와의 대결상태를 풀지 않고 랭전의 길로 계속 나간다면 나는 너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할것이라는것을 엄숙히 선포한다.

똑똑히 알아두어라, 너는 불우한 녀인이 아니라 행복한 녀인이라는걸. 너의 악보가 망태기야. 우린 명곡을 그리자고 약속했지.

너의 정치위원 금주


그것은 10여일전에 오고간 편지들이였다. 그동안 정애경은 남편과도 화해를 하였고 얼굴의 표정도 밝은색으로 다듬었다. 허나 남편을 까닭없이 노엽히고 실망케 한 죄의식만은 좀처럼 털어버리지 못하였다.

내가 저런 사람을 노엽히다니, 이제 죄가 돌거야. 그는 밥상에 마주앉을 때나 퇴근한 남편의 손에서 들가방을 넘겨받을 때나 늘 이런 생각에서 헤여나오지 못하였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이런 강심을 먹군하였다. 3년, 3년동안 무슨 수를 쓰든지 건강을 회복하자. 그다음 병을 털고 일어나 교단에 다시 서자. 이것이 남편의 노여움을 풀어주는 길이고 우리 가정에 영원한 평온과 행복이 깃들게 하는 길이다. 내가 교단에 되돌아가 후대들을 위해 복무하면 남편도 만족해할것이다.

정애경은 이전날의 건강하고 아름답던 모습을 되찾기 위해 체면을 무릅쓰고 욕심을 부리였으며 남들이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섭생에 열을 올리였다. 한주일에 한번씩 병원에 찾아가 첩약을 지어왔고 사흘에 한번씩 식당에 찾아가 입에 맞는 기름진 음식을 골라 매식도 했다. 청진에서는 친정어머니가 산꿀과 간유를 마련해가지고 찾아왔으며 개성의 시삼촌은 고려인삼과 고려인삼탕을 한보따리 보내왔다.

무직자의 일상생활에도 나름대로의 박자와 률동은 있었다. 정애경은 건설건재대학옆의 골목길로 접어들려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대동교려관쪽으로 걸음을 옮기였다. 오늘은 기분이 떠서인지 대통로로만 걷고싶었다. 해방산려관모퉁이를 돌아 경림동쪽으로 가는 거리는 온통 잎새가 큼직큼직한 가로수들이 줄지어있어 그늘도 풍성하였다. 려관옆의 서늘한 그늘속에서 잠시 땀을 들이고난 그는 건늠길을 건너 대동문동의 집으로 직행하려다가 방향을 돌려 외성동쪽으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남편네 직장에 가보고싶은 생각이 불쑥 들었던것이다.

오늘 《민주청년》신문사에서는 다음주편집계획에 물린 강석민의 반면짜리 긍정교양기사에 대한 합평회가 열린다고 하였다.

정애경은 그 기사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자못 궁금하였다. 강석민은 그 기사를 옹근 한달동안이나 준비하였다. 그것은 명예를 걸고 쓴 야심작이였다. 농촌에서 활동하는 한 인간개조의 선구자를 취급한 이 기사는 내용도 풍부하고 필치도 능란하였다. 교양기사이지만 아주 생활적이면서도 시대정신이 번쩍거리고 정론성이 강했다. 간밤 정애경은 첫 독자가 되여 강석민의 자필로 원고지에 옮긴 그 기사를 읽고 몇마디 조언도 주었다.

정애경의 눈에 비낀 그 기사 《이런 청년들을 사랑하라》는 걸작이였다. 그 걸작을 편집부집단이 어떻게 보고 평가하게 되겠는지 그것은 두고보아야 할 일이였다. 왜 그런지 까닭모를 불안도 서서히 꿈틀거리였다. 기대되는 창조물일수록 긴장도는 더 높은가보다. 남편의 발전과 명망이 그 기사에 있다고 생각하니 앉아서 결과를 기다릴수 없었다.

《민주청년》신문사는 평양역사 맞은켠, 버드나무거리가 시작되는 곳에 있었다. 여러 신문사들과 출판사들이 한데 모여있는 종합청사형의 건물 3층에 강석민네 부서가 있다고 하였다. 낮 1시부터 2시까지는 점심시간이다. 그래서인지 경비실 접수구앞에는 외래자들이 한명도 없었다. 신문사로 드나들 때 몇번 낯을 익힌 근무성원이 정애경을 보자 알은체를 하였다.

《허허, 보아하니 금슬이 보통 아니우다. 강석민선생을 만나러 오셨겠지?》

《네, 수고스러운대로 찾아주시겠습니까?》

《찾지요. 그런데 얼굴이 영 몰라보게 축갔수다.》

근무성원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송수화기를 들고 강석민을 찾았다. 수화기의 진동판을 두드리는 목소리가 근무실밖에까지 들려왔다.

《댁의 춘향이가 왔수다.》

근무성원이 히물히물 웃으면서 송화기에 대고 하는 말이였다. 그는 외래자들의 단련도 받지 않는 점심시간의 클클하고 무료한 정서에 활기를 몰아온 정애경의 출현과 그들부처의 상봉을 손수 마련해줄수 있게 된 때아닌 봉사에 퍼그나도 흡족해하는것 같았다.

잠시후 강석민이 3층에서 함박웃음을 짓고 내려와 정애경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약간 불안스런 기색으로 안해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요? 무슨 일이 생겼소?》

《일은 무슨 일,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어요. 내가 무슨 꽁무니에 사건을 묻혀가지고 다니는 사람인가요.》

강석민은 그제서야 얼굴의 긴장을 풀고 함박같은 웃음을 되살리였다.

《그렇다면 됐소. 그런데 무슨 일로?…》

《합평회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알고파 왔어요.》

《합평회라니? 무슨 합평회?》

《오늘 〈이런 청년들을 사랑하라〉를 재판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 그것 말이지. 그 합평회는 오후 첫시간부터 하게 되오.》

강석민은 왼팔을 구부려 얼핏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런, 10분밖에 남지 않았군. 그래 그 합평회때문에 일부러 왔단말이요?》

《그러문요. 병원에 갔다오던 길에 들렸어요. 어쩐지 그 원고의 운명에 자꾸 왼심을 쓰게 돼요.》

《당신은 어느 모로 보든지 참 개성적인 녀성이요. 아마 공화국력사에 남편이 쓴 원고의 합평회결과를 알아보려고 신문사에까지 찾아온 그런 안해는 한명도 없었을거요. 합평회결과야 저녁에 알려주지 않으리.》

《저녁까지 참지 못하고 바질바질 끓는 쟁개비가 바로 이 정애경이지요.》

《됐소, 고맙지만 몸도 불편할텐데 어서 돌아가오. 보나마나 식전이겠지?》

강석민은 정애경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어서 가보오.》

《싫어요. 결과를 알기 전에는 여기서 떠나지 않을래요.》

《그럼 좋을대로 하오. 하긴 내가 당신의 고집을 어떻게 당해내겠소. 자, 그럼…》

강석민은 씽긋 웃으며 한쪽팔을 쳐들어보이고나서 청사안으로 사라졌다. 정애경은 갑자기 무인도에 홀로 남은것 같은 적막감을 느끼며 사위를 두리번거리였다. 평양역사앞에서 붐비는 사람들의 물결이 눈에 실려오고 역전공원에 앉아 차시간을 기다리는 손님들의 평화로운 모습이 버드나무들사이로 바라보이였다. 역사앞에서부터 평양대극장쪽으로 곧추 뻗은 대통로로는 평양역과 련못동사이를 오가는 무궤도전차들이 꼬리를 물고 다니였다. 창조와 건설, 새생활로 들끓는 대도시의 맥박이 시시각각으로 심장을 툭툭 건드릴 때마다 정애경은 수도시민으로 사는 보람과 긍지로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불현듯 송금주가 이 시각에 무엇을 하고있을가 하는 맥락없는 생각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상념이 송금주라는 곬으로 들어설 때면 이상하게도 가슴이 알알해지고 그와의 순결한 우정앞에서 어떤 용서 못할 죄라도 지은듯 한 자책감으로 얼굴이 달아오르군 하였다.

교단을 떠나 첩약꾸레미를 들고다니며 남편이 쓴 신문글에 대한 합평회결과가 궁금해서 신문사정문에 찾아와 기웃거리는 내 꼬락서니를 송금주가 본다면 무어라 할가. 시정배나 속물이 다됐다고 침을 뱉지 않을가. 아니, 그러진 않을거야. 그도 3년안으로 건강을 되찾고 대오로 돌아가겠다는 내 결심을 읽고 그 기개가 장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히려 교단이라는 전투장에 서지 못하는 내 처지를 두고 가슴아파할것이다.

금주, 3년만 눈 꾹 감고 참아주려마. 그다음엔 내 다시 너와 한전호에 설테다. 그동안 밀린 봉창을 단단히 해야지. 이전날처럼 변함없이 나를 믿어다구. 그리고 나를 잊지 말아다오. 네가 나를 잊지 않고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사는 보람을 느끼게 되고 거기서 힘을 얻는거야.

정애경은 가로수그늘속을 이리저리 거닐며 두서없는 상념의 세계에 빠져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몰랐다. 그의 귀에는 거리의 소음도 들려오지 않고 자기곁을 스쳐지나가는 행인들의 끊임없는 물결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뇌리에서는 오직 무한대한 사색의 바다만이 출렁거리고있었다.

정애경은 갑자기 길 건너쪽에서 누구인가 자기를 줄곧 지켜보고있는듯 한 느낌에 고개를 쳐들고 재빠르게 시선을 날리였다. 시선과 시선이 맞부딪치려는 순간 길건너편 사람은 황황히 이쪽을 견주던 눈길을 거두고 역사쪽으로 바삐 걸어갔다. 뒤모습도 앞모습도 다 눈에 익었다.

20대도 아닌 10대 말기쯤 되는 청년이였다.

그가 아무리 옛 담임교원의 시야에서 뺑소니를 치려고 줄행랑을 놓아도 정애경은 첫눈에 알아보았다. 김책제철소축구팀과 고덕탄광축구팀이 대항경기를 하는 날 수업에도 참가하지 않고 탄광운동장에서 경기를 몰래 구경하고는 그 벌로 정애경이한테서 닥달질을 당하던 강영호, 헤여져 4년세월이 흘렀다고 그가 어찌 옛 제자를 알아보지 못하랴. 부모는 눈을 감고서도 자식의 숨결을 알아맞춘다.

그런데 저 강영호는 왜 나를 보자 저렇게 인사도 하지 않고 빳빳이 꽁무니를 뺄가. 나야 저 강영호를 특별히 못살게 군것도 없지 않는가. 수업에 참가하지 않고 축구경기구경을 한 잘못으로 비판을 받았다고 앵돌아졌을가. 아니다. 강영호는 그런 시시한 졸부가 아니다. 그는 통이 크고 시원시원한 사내이다. 그렇다면 강영호는 나를 외면할 건덕지가 없지 않은가. 나를 미워하거나 원망할 리유도 없고 경계할 근거도 없다.

정말 이거야말로 수수께끼같은 일이다. 혹시 내가 자기네를 버리고 일찍 시집을 갔다고 그리고 평양에 와서도 교원을 그만두었다는 소문을 듣고 《우리는 선생님 같은분들을 존경하지 않습니다.》하는 감정의 표시로 눈앞에서 일부러 달아난게 아닐가.

명백한건 그가 나를 알아보고도 인사는커녕 알은체를 하지 않고 달아나버렸다는데 있다. 사람이 타향에서 동향인을 만나면 풋낯이나 아는 사이라 해도 단박에 친구가 되고 벗이 된다는데 이건 정말 천고에 없는 일이 아닌가. 아, 정애경, 내가 이렇게도 가련하고 버림받는 존재로 되였단 말인가. 사람이 무직자가 되면 이런 수모도 당해야 하는가. 아니, 그건 아니야. 자기 스승이 무직자가 됐다고 해도 외면할 제자는 없다. 도대체 무슨 쪼간일가.

정애경은 손수건으로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씻었다. 삼복철의 땀을 씻으려고 매일같이 들고다니는 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씻게 될줄이야 어떻게 알았으랴. 세상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다니, 이건 《비창》이다, 챠이꼽스끼의 《비창》이 아니라 정애경, 바로 내 가슴에서 울리는 《비창》이다.

언젠가 송금주는 인생을 통털어 교향곡에 비길수 있다고 하면서 우리가 그리게 될 인생의 악보는 명곡이 되여야 한다고 했지. 물론 그동안 금주는 줄곧 명곡만을 창조해왔어. 그런데 이 정애경은 뭔가, 락오자가 되여 오래간만에 우연히 만난 제자한테서 인사도 받지 못하고 그 서러움을 이기지 못해 어느 나무그늘밑에서 눈물을 지으며 《비창》을 연주하고있지 않는가.

정애경의 귀에는 역사쪽에서 이따금씩 울리는 기적소리도, 무궤도전차의 동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청각이 마비된듯 귀가 멍멍할뿐이였다. 주위의 모든것, 집도 사람도 나무도 구름도 다 단매사진이나 정지된 화면의 물체들처럼 느껴질뿐이였다.

두시간이 지나자 오금이 쑤시기 시작했다. 또다시 빈혈이 일고 기갈이 들었다. 목안이 말라들고 입술이 조갈로 터갈라지였다. 나무껍질처럼 터슬터슬해진 입술을 혀바닥으로 줄곧 추기였으나 그리고나면 5분도 못되여 또 말라들었다. 길건너편에 랭차매대가 있었지만 어떻게 된 셈판인지 몸을 꼼짝할수가 없었다.

정애경은 온몸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였으나 집으로 돌아갈 궁리를 하지 않고 가로수그늘속에 그냥 서있었다. 자리만 뜨면 가슴속에 고였던 서러움이 울음으로 폭발할것 같은 구토감 비슷한 상태가 그를 그 그늘속에 그냥 비끄러매두고있었다. 머리속에서는 강영호에 대한 생각만이 지꿎게 갈마들었다.

그게 정말 강영호는 강영호일가, 내가 혹시 잘못 볼수도 있지 않는가, 아니다, 그는 틀림없는 강영호이다, 내가 잘못 본게 아니라 그가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을수도 있다, 그런 경우 내가 고민할 근거는 없지 않는가, 이제라도 그를 찾아보아야 한다, 아까 역사쪽으로 갔으니…정애경은 이런 추리를 실꾸리를 풀듯이 이어가다가 무작정 역사를 향해 발걸음을 뗐다. 역전광장공원을 샅샅이 훑은 다음 기다림칸에 들어가 이방저방 참빗질을 하다가 지하도에까지 내려가 강영호를 찾았다.

허나 문제의 강영호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지금 어데서 무슨 일을 하고있을가. 지방에서 살가, 평양에서 살가. 지방에서 산다면 평양엔 왜 올라왔을가. 그리고 좀전에는 어데로 그렇게 총총히 걸어갔는지.

정애경은 오만가지 생각을 이리저리 굴리며 다시금 신문사청사앞에 돌아와 가로수그늘을 찾았다. 그동안 두시간이라는 아까운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지치다못해 번민에 시달릴 기력조차 없었다.

5시 17분경에 강석민이 신문사에서 나왔다. 그는 가로수밑에 무릎을 짚고 앉아있는 안해를 보자 아연해서 말했다.

《아니 여보, 지금이 몇시인데 상기도 여기에 있소?》

정애경은 귀에 익은 남편의 목소리에 발딱 몸을 일으켰다. 무릎밑으로 다 잦아든줄만 알았던 기력이 그 한마디의 말에 재생되여 온몸으로 번져가는상싶었다. 그 순간에야 그는 강석민이야말로 자기를 절망에서 일으켜세울수 있는 유일한 존재, 가장 믿음직한 존재라는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어떻게 됐어요? 합격인가요?》

《그렇소, 절찬이요!》

강석민의 말에는 이전날 한번도 볼수 없었던 폭약같은 흥분이 실리였다. 정애경은 남편의 몸가까이에 다가가 그의 손을 두손으로 감싸쥐고 울먹거리는 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여보, 축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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